38화. 이혼을 해 보자
“좋아.”
에드윈이 이혼을 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지.
르니예는 일단 이혼 서류를 작성했다. 르니예의 이름으로 신청하면 기각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에드윈이 신청한 것으로 꾸민다면?
그럼 아마 재판장에 가지 않고 서면만으로 이혼 승인을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내 소원도 자연히 이뤄지겠지.”
그런 후에는 벨데메르와 인연도 거기서 끝이었다. 괜히 입 안이 씁쓸했다.
내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 이혼을 더 미뤄도 되지 않을까?
“아니야.”
얼른 하나라도 소원을 없애는 게 좋지. 벨데메르를 이용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끝이 날 인연이다. 더 정이 들기 전에 이쯤 해서 그만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부르셨어요?”
프리야가 르니예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저를 불렀는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응, 네가 해 줘야 할 게 있어서.”
르니예는 프리야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프리야는 서류를 받아 들고 놀란 눈치였다.
“이혼 서류네요. 진짜 이혼하시게요?”
“응.”
“근데 이걸 왜 저한테 보여 주시는 거예요?”
르니예가 손가락으로 서류 아래의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가 에드윈 인장을 찍어야 하는 곳이야.”
“저보고 작은 주인님께 인장을 받아오란 말씀이세요?”
르니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르니예가 직접 갔다.
“아니, 네가 가서 찍어 와.”
르니예가 도장 찍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도장 찍을 줄 알지?”
“도장이야 찍을 줄 아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프리야의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저보고 몰래 인장을 찍어 오라고 시키시는 거예요, 지금?”
“그래. 에드윈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잖아.”
에드윈이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아도, 아무튼 서류에 도장만 찍혀 있으면 된다. 프리야가 찍었는지 어쨌는지 법원에서는 모를 테니 말이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기꺼이 누명을 써 준 일을 아직 잊지 않았겠지?”
오늘을 위해서 도둑질을 시켰단 누명을 쓴 것이다. 에드윈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딜과 프리야 단둘이다.
하지만 바딜은 에드윈의 사람이니 이런 일을 시킬 순 없었다. 그래서 프리야가 필요한 것이었다.
“저번처럼 들키지 마.”
프리야는 일단 서류를 접어서 품에 넣었다.
이쯤 되면 내가 금고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 어째서 아무 말 안 하지?
“시도는 해 볼게요.”
“성공도 해야 할걸.”
르니예가 프리야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걸로 우리가 조금 더 깔끔한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프리야와 할 이야기가 있음을 르니예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기에 프리야를 아직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중혼 상태는 벗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시간은 넉넉하게 줄 테니까, 급하게 하려다가 일 그르치지 말고.”
“……그런 걱정은 접어두시죠, 작은 마님.”
살아 숨 쉰다.
그 말은 그저 숨을 쉰다는 뜻은 아니다.
“이름 꼭 체이스여야 돼?”
“마음에 듭니다.”
자아가 생긴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엔, 자유의지가 깃든다.
조각상 체이스는 벌써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하필이면 이름이라는 점에서, 페롤라를 미치게 했지만.
“더 멋있는 이름을 줄 수도 있어.”
페롤라는 조각상 체이스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누가 조각했는지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아, 살아있지.
페롤라는 체이스의 숨결을 느끼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갑고 딱딱한 피부와 뜨거운 숨이라니.
“주인님, 얼굴 만지는 건 자제해 주십시오.”
“왜?”
“제가 닳는 느낌입니다.”
조각상 체이스의 말에 페롤라가 꺄르르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로 닳지 않으니까.”
누가 조각상 아니랄까 봐 닳을 걸 걱정하다니.
“나 혼자만 만질 테니까 쉽게 닳을 리 없어.”
페롤라는 연신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흐뭇해하는 페롤라와 달리, 체이스의 얼굴은 그의 흰 피부와 달리 어두워졌다.
“인장이 어디 있더라.”
에드윈의 서재. 프리야는 에드윈의 인장을 찾아 이혼 서류 위에 도장을 찍었다.
“확실히 뭐가 있긴 있어.”
감이 왔다. 르니예는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르니예 쪽으로 붙어야 하나.
“그래, 치정을 걷어내고 깔끔한 사이가 되어 보자고.”
프리야는 도장을 찍은 자리를 후 하고 불어 말린 다음, 품속에 서류를 숨겼다. 에드윈의 서재를 몰래 나온 프리야는 정원 뒷길을 통해 르니예의 방으로 향했다.
“자, 여기 주문하신 이혼 서류 나왔습니다.”
프리야가 르니예 앞에 이혼 서류를 떡하니 펼쳤다.
선명하게 찍힌 인장에 르니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이 서류가 접수되고 나면 라포어 부인은 네가 되는 거야, 프리야.”
프리야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라포어 부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에드윈에게 접근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가장 안쪽 금고에 들어가는 열쇠는 상단주와 그 딸만 가지고 있다는구나.’
프리야가 처음 상단에 들어갈 때 마코야데스는 그저 보석을 하나 훔쳐 오는 거라고만 했다.
‘그런데 아마 그 둘은 열쇠를 계속 품에 가지고 있어서 훔치기 어려울 거다.’
‘그럼 납치를 하시죠.’
그러고서 빼앗으면 그만 아닌가. 열쇠만 있다면 금고에 몰래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도둑 길드에 깔리고 깔렸다.
‘아니, 이 일은 최대한 조용히 처리한다. 누구도 그 보석이 사라진 걸 알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럼 보석을 다시 가져다 놓을 거란 뜻인가? 어떤 잡음도 내기 싫어하는 걸 보며 프리야는 그 보석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내부자의 정보로는 상단주가 그 열쇠를 사위에게도 하나 넘긴다더군.’
‘그자는 열쇠를 품속에 지니고 다니지 않나 보죠?’
‘글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그 남자는 조만간 너한테 푹 빠지게 될 테니까.’
사람은 저와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 마코야데스는 프리야에게 최대한 에드윈의 가정사와 비슷한 사연을 꾸미라고 지시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가족을 지키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 온 여자. 예측은 적중했고, 에드윈은 프리야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했다.
덕분에 일은 쉬웠다. 프리야는 예상보다 일찍 금고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이런 쇼를 해서 훔쳐 올 만한 값어치는 없어 보였다. 혹시 보석함 안에 다른 보석이 또 있는 건 아닐까? 이건 귀중한 걸 가리기 위한 장치고?
그런 추측에 도달한 프리야는 보석함을 뒤적였다. 그러나 보석함에 숨겨져 있던 건, 보석이 아니라 낡고 얇은 수첩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그렇다면 이 보석을 훔치기 위해. 마코야데스가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프리야는 보석을 훔쳐 나왔다.
‘이걸 왜 가져다줘? 내가 소원 빌고 떠야지.’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금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르니예가 일을 잔뜩 안겨 주고, 에니가 감시하는 바람에 소원을 빌러 가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왔더니 숨겨 놓은 보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대장이 가만 안 있을 텐데.”
의뢰인이 잡음 없이 처리하길 의뢰해서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아니었다면 벌써 다른 사람을 보냈겠지.
“다행인가.”
어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 소원을 빌 사람은 나야.
프리야는 보석을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프리야.”
“악, 깜짝이야!”
프리야는 뒤에서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려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진심으로 발이 저린 것도 같았다.
“바딜, 놀랐잖아.”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바딜은 미안해하며 프리야를 구석진 곳으로 몰고 갔다.
“네가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서.”
“이 정도면 되겠지?”
“충분하죠.”
와인 상자 안에, 와인 대신 금괴가 들어 있었다. 에니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 금괴가 든 와인 상자가 마차에 여럿 실려 있었다.
“그런데 정말 될까요?”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르니예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이혼 서류는 바딜을 닮은 남자 하인을 써서 접수했다.
중요한 건 판사였다. 이혼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재판장에 나가야 한다.
“스키네 영애도 이렇게 이혼했대.”
스키네 가문의 영애 클라라는 평민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듣기로는 판사에게 얼마 찔러 주고, 서면으로 조용히 처리한 모양이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판사가 저도 귀족이란 이유로 귀족에게 후한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에드윈 이름으로 신청했으니, 잘하면 가능해.”
라포어 가문의 인장까지 찍혀 있으니, 판사는 에드윈이 신청한 줄로만 알 것이다.
“제발 잘됐으면 좋겠다.”
이 소식을 벨데메르에게 알려 주어야 할까?
“아니야. 시기상조야.”
르니예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혼 승인이 나면 알려 주자. 그때 알려 주어도 늦지 않아.
“괜히 헛된 기대 심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
맞아, 그런 거야.
르니예는 혼자서 말하고 수긍하며 벨데메르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벨데메르의 집으로 향하는 건 르니예만이 아니었다.
“헉, 헉.”
벨데메르처럼 기다란 로브를 쓴 인영이 긴 다리로 주택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폼이 영 어설펐다.
“여기인가? 어디지?”
심지어 길도 잘 모르는 듯 그는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또 달리기 시작했다.
“벨데메르 님, 벨데메르 님!”
필사적으로 달린 그가 향한 곳은 벨데메르의 집이었다. 막상 그가 도착한 곳은 벨데메르의 옆집이었지만.
아무튼 그의 목소리는 담장을 넘고 넘어 유능한 사역마의 귀까지 닿았다.
“주인님, 누군가 주인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샤피로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가늠했다.
“옆집에서 나는데, 집을 착각한 모양입니다.”
“느낌이 좋질 않군. 내가 나가보지.”
어차피 문 앞까지만 나갈 것이므로, 벨데메르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저거 체이스 아닌가?”
“맞습니다. 체이스네요. 이봐, 체이스!”
샤피로가 큰 목소리로 옆집에 잘못 가 있는 체이스를 불렀다. 그가 고개를 휙 돌리며 로브가 벗겨지고, 조각상 체이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체이스는 어쩐지 조급한 얼굴로 샤피로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동시에,
“샤피로 님, 살려…….”
그의 뒤에서 석궁이 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