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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Epilogue 01] (105/106)
  • #105 [Epilogue 01]

    해가 바뀌고 3월로 막 넘어간 빈터가르는 희미한 봄 내음 속에서 활기가 넘쳤다. 시타델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세버린의 드넓은 저택 역시 그랬다. 

    어린아이의 발랄한 목소리와 웃음 덕분에 늘 그랬지만 오늘은 오전부터 한층 더 시끌벅적했다. 주인 부부가 오랜만에 수도의 손님들을 맞이해 만찬을 가질 예정이었다. 마을에서 새로 온 하우스 메이드 몇 명이 창마다 커튼을 새로 달고 꽃병의 꽃을 새로 간 다음 잠시 휴식을 가질 때였다.

    “저것 좀 봐,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

    메이드가 창 너머, 그네로 달려가는 한 아이를 가리켰다. 세컨드 시터인 아네트가 아직 아기인 패트리샤를 안고 그네에 앉자 노아가 그넷줄을 잡고 뒤에서 살짝 밀어 보였다. 패티가 까르르 웃자 네 살짜리 사내아이도 덩달아 소리 내 웃는다. 

    “정말 예쁜 아이들이지 뭐야. 알다시피 내가 웬만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다 일해 봤지만 저렇게 천사 같은 애들은 본 적이 없다니까.”

    “어디 애들만 그래? 우리 주인 나리와 마님도 처음 뵈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내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렇게 그림 같은 분들은 처음 봤어.”

    “하긴 저도 그랬어요. 주인님이 말로만 들었던 그 트리에스테의 블랙웰 공작이셨다니. 너무 젊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물론 외모도…….”

    젊은 메이드도 한마디 끼어들었다. 창 너머로 비쳐 드는 햇살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남아 있는 잔설도 내일이면 다 녹을 것 같았다. 

    그네와 멀지 않은 온실 정원 쪽, 정자 아래에는 일찌감치 도착한 루벤빌가(街)의 아미티지 일가와 마님이 다 같이 모여 앉아 차를 들고 있었다. 마님은 탐스러운 금발을 하나로 묶어 한쪽 어깨에 내려뜨린 채 사람들의 얘기에 경청하는 모양새였다. 

    마님 역시 무척이나 젊고 아름다웠다. 아직도 소녀티가 역력해, 수도에 새로 생긴 사립 여학교 교복을 입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게.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은 분들이지. 심성도 얼마나 고우신지 몰라. 공작님은 아직 좀 무섭지만 얼마나 애처가신지, 마님과 계실 때는 완전히 다른 분 같다니까!”

    “아직도 공작님이라 부르면 어떡해, 세실. 주인님은 이제 정식으로 빈터가르 시민이 되셨는데. 물론 트리에스테와 정식으로 합병이 되기 전까지는 트리에스테 영사 자격도 있으시지만.”

    “그러게. 나도 모르게 자꾸 공작님이라 부르게 되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지 않니?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냐. 수도에서는 아직도 블랙웰 공작님이라 많이들 부르는 것 같던데.”

    “그건 그래. 아무리 귀족이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져 간다지만, 왠지 우리 주인님만은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 계실 귀족이실 것 같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품 그 자체잖아.”

    메이드는 제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실소를 터뜨렸다. 그들이 아는 바와 같이,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이제 더 이상 공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망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옮겨 온 덕에, 현재 빈터가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산업화에 따라 생겨난, 소위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아미티지가(家)나 트빌로쉬가의 재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시대는 날로 빠르게 변했다. 종전 후 가장 선두에 서서 변화를 이끌어 왔던 빈터가르는 더더욱 급속한 흐름을 타고 있었다. 신분제가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자본주의의 초석이 다져지는 시대인 만큼, 그가 더 이상 공작이 아니라는 것은 기실 의미가 없었다.

    “그나저나 트리에스테 왕실은 정말 없어지는 거야? 앞으로 반년 안에 빈터가르와 합병이 된다니 영 실감이 안 나네.”

    “그렇겠지. 국민 투표 결과가 압도적이었으니. 원래 몇 세기 전까지는 한 나라였다며. 우리 집 양반은 엄밀히는 통일이라 하더라고. 언어도 같고 문화도 같고……. 저 귀여운 아이들이 장성할 때는 처음부터 한 나라였던 것처럼 되어 있겠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빈터가르의 시류에 편승해 하나로 융화될 터였다. 빈터가르도 작년 말, 의회가 한차례 정비되었고 보름 전에는 시민 계급 출신인 발터 위르겐이 첫 수상으로 내정되기도 했다. 여성의 투표권 및 참정권에 대한 법안도 최근 가결되었고 아동 인권에 대한 법안도 상정 중에 있었다. 

    “어머. 저기 공작님, 아니, 주인님이 오시네. 그만 쉬고 어서 마무리하자!”

    메이드가 창밖을 가리켜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동차가 장미 화단과 자갈길을 돌아 분수대 앞에 멈춰 섰다. 이내 차 문이 열리며, 키 크고 건장한 남자가 평지에 내려섰다. 진회색 프록코트 라펠이 그 안에 받쳐 입은 재킷의 깃, 황록색 머플러와 겹쳐 멋들어져 보였다.

    “아빠! 아아아빠-”

    “노아.”

    패티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노아가 그를 보자마자 힘껏 달려가 안겼다. 남자는 한 아이의 아버지라기엔 너무 젊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를 보기 직전의 얼굴은 수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이라 지금의 미소와 괴리가 무척 컸다. 

    “조심해. 그러다 넘어진다 그랬지.”

    카일은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한쪽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달려오느라 색색대는 숨결이 기분 좋게 턱 아래 와 닿았다. 그는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 올리곤 동그란 이마에 입을 쪽 맞췄다. 

    노아는 앙증맞은 두 팔로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배시시 웃었다. 이럴 때는 영락없이 제 엄마의 해맑은 미소와 똑 닮아 있었다. 

    사용인들은 일손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카일은 아이를 안은 상태로 정자 아래 둘러앉은 손님들에게 향했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출 때의 얼굴, 좌중을 둘러보고 인사할 때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이내 빌렘 반 아미티지, 마르틴과 브린을 선두로, 정각에 도착한 시타델의 시 의원, 새 내각을 수립할 핵심 인사 몇 명이 나란히 연회 홀로 향했다. 손님들이 어찌나 활기가 넘쳤는지, 이십 명이 앉아도 넉넉한 테이블은 열 명 남짓의 손님들만으로도 꽉 찬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여섯 가지의 코스 요리가 나올 동안, 카일렉 로던 블랙웰 영사는 차분하게 대화에 응하면서도 곁에 앉은 부인을 틈틈이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아내의 잔이 빌 때마다 메이드를 돌아보거나,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미리 알아채 집사장을 가까이 불러 지시한다든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챙기는 모습에 다들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건만, 볼 때마다 그 기묘한 간극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비첸틴 의약청의 신약은 좀 어떻습니까, 영사님? 조만간 빈터가르의 제약사도 인수해 그쪽과 제휴를 맺을 계획이시라고요.”

    시 의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 카일이 빈혈과 심장 증세 등 지병이 있어, 망명 이후로 비첸틴 병원으로부터 간간이 수혈과 약 처방을 받고 있음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행히 잘 듣는 것 같습니다. 부작용도 없고요.”

    덤덤한 대답에, 모두 잘 되었다는 듯 안도감을 보였다. 다행히 트리에스테를 떠난 이후 발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앤지는 식탁보 아래로 손을 뻗어 남편의 허벅지를 살짝 짚었다. 작은 온기나마 전하여 그를 격려해 주고 싶었다. 

    카일이 포도주 잔을 내려놓고 팔을 아래로 내려뜨려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하나로 뒤섞인 체온이 손바닥을 관통해 손가락 마디마디를 넘어 각자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서로를 눈에 담는 동공에도 녹아내릴 듯 애틋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는 아내의 것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가 살며시 놓았다. 더 붙잡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열정을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음험한 열기가 피어올랐고, 이렇게 살갗이 맞닿아 있을 땐 몸이 즉각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아 참, 블랙웰 부인께서 정식으로 부티크를 오픈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외곽에 방직 공장 설비도 곧 들어온다고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이번에 새로 신설되는 국공립 학교들과 연계하여 출판사도 설립하게 될 거랍니다.” 

    브린이 당사자를 대신해 불쑥 끼어들었다. 제 사촌 올케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술술 말을 이었다. 앤지는 당혹감에 입술을 벙긋거리다 결국 수줍게 시선을 내려뜨렸다. 카일의 한쪽 팔이 의자 등받이를 넘어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와 책까지 쓸 줄은 몰랐어요. 어릴 때부터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게 취미였다는군요.” 

    “브린도 함께 공동 저작하고 있어요.” 

    앤지가 거들자 브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이 공동 저작이에요. 사실 옆에서 의견을 나눠 주는 것 정도거든요.”

    시 의원이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다 재능이 대단하십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는 지금, 두 분이 아주 좋은 모범 사례가 되어 주시겠군요.”

    화기애애한 만찬이 끝나고 남자들은 끽연실로 향했다. 어린 자녀가 있는 카일과 마르틴은 체임버 앞 라운지에 서서 잠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눴다. 끽연실로 들어가는 건 의원들이 한차례 파이프를 뿜은 후가 될 터였다. 

    앤지는 두 남자가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기뻤다. 카일이 그녀와 노아 외엔 워낙 곁을 주지 않는 성정이라 아직은 친하다고 하긴 무리였다. 

    마르틴도 몇 살 연상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마냥 편하게 대하지만은 않았다. 컬리넌 섬에서의 과거나 가문의 역사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일 자체가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는 성격과는 거리가 먼 까닭이다.

    그래도 지난주 캐서린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는 나름대로 많이 애썼지…….

    그는 어르신에게 최선을 다해 공손하게 대했다. 게다가 그녀가 좀 더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지내실 수 있도록 제롬을 통해 근처의 땅을 매입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새집은 한창 공사 중에 있었다. 

    “마님!”

    아네트가 아직 테이블에 남아 있는 두 여자에게 다가와서 명랑하게 말했다.

    “이만 에밀리와 함께 아이들을 데려가서 씻길게요. 두 분도 오늘 주무시고 가시는 거죠? 웨스트 윙 게스트 룸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고마워, 아네트. 건강해 보여서 좋구나.” 

    브린이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앤지가 트리에스테에서 데려온 아네트는 무척 붙임성이 좋고 아직 어린데도 육아에도 노련함을 보였다. 앤지가 테 데움에 있을 때 그녀의 탈출을 돕다가 등에 칼을 맞았다던데, 이제는 흉터도 거의 없이 말끔히 나았다고 들었다.

    아네트가 아이들과 사라지고 나서야 브린이 앤지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도 무척 밝고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초록빛 망망대해를 연상케 하는 깊은 눈은 생기가 넘쳤고 뺨도 발그레했다. 아직은 황량한 바깥 정원으로부터 눈을 돌려 그녀를 보기만 해도 봄이 목전에 다가온 것 같았다. 

    “앤지. 공작…… 영사님이 이젠 많이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야.”

    “응. 신약이 잘 듣는 것 같아.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라고 해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어.”

    “앤지가 이렇게 무사한 걸 보니까 갑자기 감개무량한 것이……. 신이 정말로 계신다는 게 새삼 느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모두 브린과 마르틴, 빌렘 아저씨 덕분이야. 세 사람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헤쳐 갈 수 있었을지……. 절대 지금의 평안은 없었을 거야.”

    브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앤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나란히 앉았다. 잠시 편안한 정적이 흘렀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이 느껴지는 사이였기에, 더 이상 말은 필요치 않았다.

    브린은 앤지의 한쪽 어깨에 제 머리를 얹었다가 펄쩍 떼어 냈다. 깜빡 잊고 있었던 걸 생각해 낸 얼굴이다.

    “어머, 홑몸도 아닌 사람한테 무겁게……! 미안, 앤지.”

    “아냐, 전혀 안 무거워! 아직 배도 안 나왔는걸.”

    “딸일까, 아들일까? 이번엔 앤지를 꼭 닮은 여자아이면 좋겠다. 영사님도 딸을 바란다며. 물론 딸이든 아들이든 무척 예쁘겠지만. 우리도 어서 패티 동생이 생겨야 할 텐데…….”

    “브린도 곧 생길 거야. 그렇지 않아도 어제도 카일이 왜 자꾸 혼자 웃냐고 뭐라고 했었어. 노아와 패티, 그리고 차례대로 생길 우리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있는 걸 상상만 해도 자꾸 웃음이 나서…….”

    “정말! 토끼처럼 꼬물거리는 게 얼마나 귀여울까?”

    두 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머릿속에 그려 보기만 해도 벅차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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