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104/106)
  • #104

    -헬퍼들은 루이스 던스트를 주축으로 공작저를 장악하고 있었어. 네가 공작 부인이 된다는 것은 너를 그 자들의 수중에 던져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거야. 그래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곁에 두고 지키고자 하셨던 거지. 헬퍼들의 뜻에 순응하는 척 힘을 키울 시간을 벌기 위해서…….

    지금은 그 의중이 납득되었다. 카일은 혼신의 힘을 다해 레머디 없이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끔 자력으로 회복했다. 그런데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더는 그녀에게 마수가 뻗치지 않게끔, 그녀가 헬퍼들의 눈에 레머디가 아닌 정부처럼 보이길 원했던 것이다.

    “이젠 당신도 편해져요, 카이.”

    앤지의 손이 험악한 빛을 띤 카일의 눈가를 쓸었다.

    “이제 나를…… 우릴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날이 섰던 벽안이 부서지며 무방비하게 허물어져 내렸다. 그가 그녀를 제게로 꼭 끌어당겨 안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네 말이 맞아. 이젠 다 끝났어. 앞으로는 내가 늘 네 곁에 있을 거니까.”

    목숨 그 이상의 것을 걸고 그녀를 지킬 터였다. 지금 이 순간은 물론, 드디어 시타델로 돌아가는 모레부터 영원히.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빨리 보여 주고 싶어요, 당신과 노아. 노아가 아빠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나도 보고 싶어. 네가 해 준 묘사만으로도 이미 눈앞에 그려지지만…….”

    “당신을 정말 많이 닮았어요. 아무리 말로 들었어도…… 직접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앤지는 들뜬 듯 목소리가 한층 더 밝아졌다. 부자간의 첫 대면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것 같았다. 막상 보면 엄마를 더 닮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에게는 그편이 더 좋았다.

    “노아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당신도 진심으로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라 믿어요.”

    “아니.”

    카일은 앤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금색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이미 사랑하고 있어. 네가 낳은 아이니까.”

    “당신의 아이기도 하고요.”

    그녀의 덧붙임에 동조하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이가 아니라도 사랑했을 것이다. 앤지의 몸에서 나온 것이니까. 설령 그녀가 사람이 아닌 기이한 존재를 낳았다고 해도 무조건 사랑하고 받아들였을 것 같았다.

    테 데움에서 루이스 던스트의 머리에 총구를 당기기 직전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순수한 놀라움과 기쁨, 환희, 어떤 알 수 없는 경외와 감탄이 루이스를 향한 살의와 뒤섞였다가 금세 온전히 분리되었다.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앤지가 아이를 낳았다니. 나와 앤지 사이에 아이가 존재한다니. 그리고…… 그 생명을, 감히 악마의 추종자인 너희가 산 제물로 노리다니.

    총구를 당기는 데 단 일 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루이스 던스트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블랙웰 가문의 충복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장성하기까지, 그를 망치는 동시에 조력하는 두 가지 상반된 역할에 충실해 왔다.

    조력자란 말 그대로, 그녀는 카일이 태어난 순간부터 이터니티에 중독되어 서서히 동화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몸을 회복시키겠다고 무고한 생명들을 레머디로 데려와 가차 없이 도구로 쓰고 버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서 그 역시 루이스 던스트를 단죄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부서질 듯 작고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열 달을 버티고, 아이를 낳았는지. 그리고 3년간 꿋꿋이 엄마로서 살아왔는지.

    생각할수록 기적 같았다. 그녀를 이렇게 품에 가둔 지금도 이렇게 조심스러운데. 혹시나 부러질까 봐. 조금만 힘을 줘도 아파할까 봐.

    “카이. 잠깐만. 이제 일어나서 산책이라도 나가야겠어요. 모레 시타델로 돌아가는데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

    “아직은 추워서 안 돼. 조금만 더 있자, 이렇게……. 응?”

    카일은 품 속에서 꼬물거리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더 꼭 끌어당겼다. 모레 시타델에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시민 등록을 하고, 혼인 신고를 할 거란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앤지 리즈델이 아닌, 앤지 블랙웰이라니.

    “앤지. 네 이름으로 먼저 되돌리지 않을 거야? 정말로?”

    “응. 나는 이대로가 좋아요. 물론 앰버 윈이라는 이름도 소중하지만……. 앤지로 살아온 기억이 더 많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지난 며칠간 혼수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잃었다 되찾은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컬리넌 섬에서의 9년을 껑충 뛰어넘어 혈육인 마르틴과 재회하고 브린, 빌렘 아저씨와 다 같이 빈터가르에 자리 잡게 되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무엇보다, 노아가 태어나 무럭무럭 자랐던 축복된 나날들까지 모두 들려주었다.

    하지만 섬을 떠나던 날, 그 비극적인 전환점과 가문의 죄업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양부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에일 듯 아팠다. 리즈델 부부는 그녀를 비록 친딸처럼 아끼고 사랑했지만 리셋을 통해 은밀히 기억을 지우고자 했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카일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더는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양부모가 차례대로 총탄에 쓰러졌던 순간은 아직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슴에 고이 묻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섬에서의 모든 기억을 잊고 싶진 않아요. 분명 행복했던 시간들도 있었으니까. 설령 모든 게 짜여진 각본처럼…… 세팅된 무대 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도……. 나를 비롯한, 레머디 아이들이 일상에서 느꼈던 소소한 감정만은 진짜였을 테니까요.”

    게다가 당신과 나 사이의 시간 역시도.

    한 쌍의 초록빛 눈이, 여러 뒤섞인 감정이 어린 하늘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잔잔한 파도의 일렁임,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을 품은 바다처럼 아름다웠다. 카일은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앤지는 상대방도 저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른 채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저 겉모습이 다가 아니었다. 그 미색 저편에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된 보다 진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이자 둘이며, 둘이자 곧 하나였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과도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고요한 기적 속에 있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것을 떠올리는지, 상대방의 내면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만나게 되었을 것 같아요, 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런 건 모르지만 어떤 계기로든 반드시.”

    “앤지.”

    그의 목소리가 감격에 떨리고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순 없었지만, 그는 가문의 끔찍한 악행 속에서도 단 하나만은 감사하게 여겼다. 앤지를 레머디로 데려와 6년 전 그날, 제 침실에 들어오게 했던 그 순간만큼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고마울 터였다. 앤지와의 만남, 그 한 가지만은 신의 축복이었다.

    “나 역시 그래, 앤지. 당연하잖아. 우린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었던걸…….”

    또 다른 손자의 도끼날에 비참하게 사라진 할아버지. 살아 있으되 죽은 자였던 블랙웰 공작. 그의 영원한 파멸에 가장 큰 축복을 바치고 싶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럼 앤지. 앰버라는 이름은 딸에게 지어 주면 어떨까?”

    앤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부서지는 햇살 같았다.

    “딸……. 우리 딸 말이죠?”

    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녹빛 햇살 같은 눈에서 한 시도 시선이 어긋나지 않았다.

    “노아도 동생이 생기면 좋아할 거야. 물론…… 딸이 아니라도 돼.”

    뭐든 좋아, 앤지. 네가 열 달간 품었다가 낳은 것이라면. 우리가 사랑을 해서 그 결실로 나온 것이라면.

    “노아를 낳을 때 힘들지 않았어……? 다시 정정할게, 앤지.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아. 노아 하나로 충분해.”

    그가 앤지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홀로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다시 그런 아픔을 겪게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아니. 내가 더 바라요, 카이. 딸이면 정말 앰버라고 지을래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카이와 자신을 닮은 여자아이를 떠올리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벌써부터 환희와 기대감에 심장이 부풀었다. 노아가 앞에 있으면 그 앙증맞은 손가락을 잡고는 소리 내어 웃었을 것 같았다.

    노아, 여동생이 생기면 좋겠니? 패티처럼 귀엽고 예쁜 동생이 한 명 더 생기는 거야!

    앤지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있다, 상체를 뒤로 젖혀 카일이 그녀에게 더 편히 기대게끔 해 주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는데 그의 온기가 너무 기분 좋아 조금만 더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다.

    “잠깐만…… 아주 잠시만 더 이대로 있어요. 그리고 온실 정원에 데려다줘요. 거긴 덜 추울 테니까.”

    응, 카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꾸하곤 그녀의 가슴에 제 머리를 살짝 얹었다. 흘러넘치는 행복감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까 못다 한 기도를 소리 없이 읊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앤지를 만나게 해 주셔서…….

    아버지 에드워드 대까지 이어져 온 수하들, 그 헬퍼들이 앤지를 레머디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예정대로 고아원 시설에서 다시 로르샤나 레반 마을로 돌려보내져 그녀만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용하고 평탄한 인생을 살았겠지.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른 채. 먼 타국, 트리에스타령 외딴 섬인 컬리넌에 처박혀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던, 저주받은 공작가의 후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 하나만 생각하면 선대 공작이 이렇듯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부디 지옥에서 편히 잠드시길…….

    카일은 앤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마지막으로 되뇌었다.

    당신의 파멸에 신의 축복을.

    -Fi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