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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Epilogue 02] (106/106)
  • #106 [Epilogue 02]

    별이 하나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귀빈들이 서로에게 작별을 고한 다이닝 홀도 어느덧 북적거림 없이 평소의 고적함을 되찾고 있었다.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묵직한 버건디빛 커튼이 내려앉은 침실에도 안온한 온기가 가득했다. 나긋나긋 흐르며 하나로 얽히는 음색, 맑은 웃음소리가 한참을 이어지다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속삭임과 미소에 서서히 열기가 실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신음으로 가득 찼다. 

    부드러운 페플로스 질감의 잠옷이 침대 아래 툭 내려앉았다. 천과 살갗이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살결과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흐느낌에 가까운 비음이 좀 더 거센 소리로 바뀌어 갔다. 거친 호흡과 헐떡임이 젖은 마찰음과 얽히며, 형용할 수 없는 음으로 흘러넘쳤다.

    “앤지…… 괜찮아?”

    카일이 동작을 멈추고 허리를 좀 더 위로 세웠다. 임신 초기라 최대한 힘과 깊이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앤지의 반응이 그 전처럼 열렬해 걱정이 되었다. 감도와 열기, 터질 듯한 흥분감과 압박에 두 사람 다 호흡을 고르기 벅찼다.

    “응……. 괜찮으니까……. 좀 더 움직여도 돼요…….”

    카일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한쪽 눈썹이 일그러지며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이 여자는 과연 알까. 이렇게 독려하듯 말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폭주해 버리고 싶은 걸 통제하느라 얼마나 인내하고 자제하고 있는지.

    아내의 도톰한 입술 위로 제 입을 맞췄다. 그 바람에 그녀의 부드러운 살에 좀 더 밀착되며 지그시 누르게 되었다. 앤지가 순간적으로 앗, 소리를 높였지만 키스를 피하지는 않았다. 

    카일이 그녀의 입 안에서 작게 실소했다. 농밀한 혀의 감촉, 안으로 파고들수록 전신이 녹아내릴 것 같은 쾌감에 전율이 일어났다.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정신을 잃거나 넋이 나가거나, 혹은 심장이 고장 나거나. 그렇게 되기 전에 카일은 서둘러 움직임을 재개했다. 그녀가 제 아래서 더 예쁘게 울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결, 잔뜩 젖어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마지못해 떨어지는 살갗이 아프도록 저렸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파고들지 않게 자중하는 스스로가 기특할 지경이었다.

    극도의 무아지경과 강렬한 절정 끝에, 둘의 움직임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카일은 여전히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젖은 뺨과 목덜미, 쇄골 여기저기 입을 맞추며 여운을 음미했다. 가쁜 숨을 고르던 앤지가 간지러운 듯 소리 내서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듣기 좋은 소리였다.

    사랑해, 나의 앤지.

    그는 몇 번이나 사랑을 속삭이고 나서도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황홀한 살냄새와 여운에 취해서 영원히 그대로 한 몸이고 싶었다. 카일은 여신의 것처럼, 완벽하고 풍만한 앤지의 살결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열락 끝에는 또 다른 천국이 있었다.

    * * *

    앤지는 한참 잠에 취해 있다 설핏 눈을 떴다. 은은한 가스등 불빛 아래, 카일이 그녀 옆에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나이트가운을 걸친 품에는 잠든 노아가 폭 안겨 있었다. 밤톨처럼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애정이 담뿍 담겨 있다.

    “카이. 노아가……”

    “깼길래 데려와서 다시 재웠어.”

    어서 자, 그가 덧붙이며 다른 손으로 앤지의 이마를 나붓하게 쓸었다. 그녀는 아이를 만지려다 깨울까 싶어 다시 손을 거뒀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직 임신 초기인데도 한 번 수마가 들면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이 들었다.

    그는 아기를 건너편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준 뒤 다시 앤지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베개 아래 금색 실타래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옆으로 넘기고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카일의 따뜻한 손길에 앤지의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의 허리에 머리를 기대고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잠들 때까지 아무 얘기나 해 줘요……. 목소리 듣고 싶어.”

    그의 속삭임이 듣고 싶었다. 오직 카이만이 지닌 음색,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저음은 제일 듣기 좋은 자장가이기도 했다. 노아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무슨 얘기해 줄까.”

    “아무거나…….”

    “사랑해.”

    “…….”

    “늘 듣는 얘기라 이젠 감흥이 없어?”

    “응? 아니……?”

    앤지가 눈을 반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 목 깊은 곳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늘 듣기 좋아요. 언제나…… 엄청난 감흥을 느껴요.”

    그러니 안심하라는 듯,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고 고양이처럼 그의 허리에 더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앤지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가끔 널 볼 때마다 멍해질 때가 있어.”

    “응……?”

    “인간의 감정이란 이렇게 신기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어떻게 사람이 타인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이렇게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 있을까……. 그런 생각에 압도될 때가 있거든.”

    앤지는 눈을 뜨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 가만히 이 순간을 만끽했다. 너무도 행복하고 아늑해서 현실 같지 않았다. 그의 음색은 꿈결처럼 감미롭고 온기는 너무 따스했다.

    “응……. 카이. 나도 당신을…….”

    “네가 곧 내 삶이야, 앤지. 네가……”

    눈꺼풀의 떨림이 완전히 멈추며 색색, 고른 숨이 새어 나왔다. 카일은 그녀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마저 말을 맺었다.

    “네가 없으면 난 죽을 거야.”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앤지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도 살아 있는 것이다. 가문의 업보를 완전히 끊어 내고 선대 대신 평생 속죄하며 살겠노라 맹세했던 것도, 지금의 안온한 삶을 유지할 만큼의 부귀영화를 손안에 꼭 틀어쥐고 있는 것도, 모두가 앤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 손이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 주다 살며시 허리께로 내려갔다. 아직은 티가 나지 않는 복부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이 작고 가녀린 몸속에 하나의 생명이 움트고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부디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랐다. 앰버 윈 블랙웰- 그녀를 꼭 닮은 딸이 태어나 그녀의 아명인 앰버라고 부르는 것도 기대되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앤지 때문이었다. 아무리 극진히 신경 쓰고 보살펴도 산모는 산모인 바,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달이 쏜살같이 지나가기를, 하루라도 빨리 태아를 품은 굴레를 벗을 수 있기만을 고대했다.

    “흐응……. 엄마…… 아…….”

    그때 아이가 잠꼬대하며 바스락거리는 기척을 냈다. 신음은 곧 칭얼거림으로, 요란한 울음으로 변할 것이다. 

    그는 그 변화가 시작되기 직전, 노아에게 다가가 살며시 안아 들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가 아빠가 등을 다독여 주자 다시 조용해졌다. 

    카일은 아들을 보듬어 안은 채 앤지가 깨지 않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뺨은 확실히 제 얼굴을 많이 닮아 있었다. 점점 제 것처럼 변해 가는 보드라운 흑발 역시.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이야, 노아.

    노아를 사랑했다. 앤지가 낳은 그의 아이다. 앤지와 그, 두 사람이 이룬 사랑의 결실이었다. 노아의 존재는 곧 신의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눈에 담기에도 벅찰 만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이였다.

    하지만…….

    새삼 안도감이 밀려왔다. 만약 네 엄마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가문의 죄악과 데르반 가와의 정략혼 때문에 끝까지 내게 돌아오길 거부했다면.

    그럼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앤지의 혈육인 마르틴 실바와 브린 실바, 그들의 딸인 패트리샤, 빌렘 반 아미티지, 그리고…….

    수정처럼 푸른 눈이 제 품에 안긴 아기를 굽어보았다. 앤지를 제외한 모두가,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4년 전, 컬리넌 섬의 리즈델 부부가 그녀에게 가하려 했던 짓을 제 손으로 했을 것이다. 섬에서의 아름다웠던 기억마저 송두리째 사라진다 해도, 결국은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기억이 리셋되고 새로운 삶을 부여받아 사는 것.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곁에서 행복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이끌었을 터였다.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스스로를 향한 쓴웃음이었다. 앤지의 양부모가 하려던 짓을 막고자 그토록 이성을 잃었었는데. 눈이 뒤집혀 그들에게 총구를 들이댔고 앤지의 눈앞에서 잔혹하게 죽였다. 만약 앤지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결국 그들이 하려던 만행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 손으로 직접 저질러서라도 그녀를 곁에 두려 했겠지. 

    그러나 앤지는 결국 그에게 돌아왔다. 3년 만의 해후를 나눴던 그라츠에서 분명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데르반과의 혼인 상태를 완전히 끝내고, 트리에스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들도 다 마무리 짓고, 그리고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새삼 기적 같았다. 그녀 역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니. 물론, 그 마음은 그의 것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알고 있어. 앤지.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한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의 절반도 되지 못한다는 걸. 

    그 간극은 결코 좁혀지지 않을 터였다. 평생토록. 아니, 둘 다 생을 끝낸 후에도 영원히. 

    카일은 침대 옆 설렁줄을 당긴 후 곤히 잠든 노아를 안아 든 채 침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주인의 부름을 받고 회랑 끝에 대기 중인 유모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돌아서서 침실로 향하려던 그는 회랑 복도의 발코니 앞에서 발을 멈췄다. 

    발코니와 연결된 유리문 너머, 인조 포도 덩굴로 둘러싸인 정자 뒤에는 손님들이 머무는 별채가 있었다. 그는 문 앞에 기대어 서서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벽돌색 외관을 바라보았다. 정자 옆 호반의 수면도 시간이 멈춘 듯 고적한 운치를 발했다.

    마르틴과 브린, 패트리샤, 실바 일가의 단란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행복한 가족은 지금쯤 게스트용 체임버에서 평온히 잠들어 있을 터였다. 안도감이 다시금 심장 한가운데서 꿈틀거렸다.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그의 본능에 내재된 무정(無情), 그 날것의 야만성은 어떤 면에서는 맹수의 것과 같았다. 배가 부르면 굳이 사냥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포식자처럼,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멸할 의도가 없는 것이다. 

    그는 앤지가 저 외의 존재에게 보이는 감정, 모든 호의와 애정을 늘 수용하고 납득하려 애썼다. 스스로의 독점욕과 소유욕을 나름대로 잘 통제하고 제어했기에, 아직까지 크게 불만을 드러내 보인 적도 없었고 그 문제로 다툰 적도 전무했다.

    앤지가 그에게 돌아와 주었으니까. 그녀는 누구보다 그와 아이를 우선시했고 남편을 향해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봄날의 햇살처럼 밝고 찬란한 눈동자, 그 완벽한 녹빛 보석이 그를 따스하게 돌아볼 때마다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온몸이 햇살 아래 눈처럼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공기의 형태로라도 곁에 남아 그녀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는 발길을 돌려 침실로 돌아왔다. 앤지는 처음 그 자세로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빈자리를 향해 모로 누워 두 손을 모은 자세가 아기 같았다. 심장이 뻐근하니 목이 메어 왔다. 

    카일은 그녀 옆에 누웠다. 깨지 않게 조심조심, 조그만 몸에 양팔을 두르는 제 몸짓이 가련할 지경이었다.

    나의 구원자, 앤젤라. 내 아내. 내 여자. 내 유일한 사랑. 

    그는 금색 머리칼을 살짝 젖히고 동그란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오늘 밤도 너에게 신의 축복을. 늘 그랬듯, 앞으로도 영원히.

    -Epilogue,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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