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 (103/106)
  • #103

    한 달 가까이 테 데움에 갇혀 있으면서 미카엘에게서 당했던 고초에다, 물에 빠졌던 여파까지 더 해 체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진 탓이었다. 게다가 의사와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전신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에 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도련님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어난 시점부터 그를 봐 왔던 제롬만은 그가 얼마나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고 통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앤지의 침실에 들어가 해가 뜰 때까지 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곁에 머물며 몸소 간호하고 극진히 돌보다가 침대에서 함께 잠드는, 똑같은 밤이 반복되었다.

    주중에는 여러 가지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작가는 트리에스테에 남은 모든 실제적인 정리를 마무리하고 빈터가르로 완전히 넘어가는 준비의 막바지 단계에 있었다.

    현재 황제와 황제 대리까지 잃은 트리에스테의 왕실은 혼란의 불바다에 빠진 빈 수레나 다름없었다. 실세나 다름없던 공작가의 부재까지 더해서 추밀원과 귀족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는 눈치였다.

    도련님이 빈터가르에 망명하는 행정적인 절차는 사실상 이미 끝나 있었다. 앤지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며칠만 더 머물자는 것이, 어느덧 보름째 지체되어 있었다.

    -카이…… 노아! 노아! 카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앤지는 낮에도 몇 번이나 악몽을 꿨다가 깨어나길 반복했었다. 그러다 혼비백산 발작하듯 도련님을 찾으면, 그는 건너편 서재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달래 주었다.

    -쉿. 앤지. 이제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아무도 우릴 해치지 못해.

    그리고 아직 정신이 혼미한 앤지를 꼭 끌어안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노아도 괜찮아. 노아는 무사해. 마르틴과 브린이 잘 돌봐 주고 있어.

    -노아…….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아무 일 없어. 곧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더 자자. 응?

    그러면 앤지는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안심한 듯 얌전해졌다. 도련님은 그런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잠이 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앤지의 팔 위를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흐느끼기도 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흉터는 유리가 깊숙이 박혀 있던 자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의사는 혀를 차며 제롬에게만 넌지시 말해 주었다.

    -단순히 박혀 있던 게 아니라 일부러 더 깊이 쑤셔 넣은 흔적입니다. 필시 그 미친 서자의 짓이었겠지요.

    끔찍했다. 그가 일꾼으로 일할 때부터 어딘가 불길한 느낌은 늘 가슴 속 깊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런 괴물이었을 줄이야. 그 정도로 비틀린 자였음을 알았다면 절대, 도련님의 그림자 친위대에 영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미카엘은 앤지에게 다른 의미로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것 같았다. 레머디가 아닌 다른 용도로 데려온 소녀들의 존재에, 앤지의 침실이 아닌 다른 처소가 있었다는 아네트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예전에 공작가의 주치의가 귀띔했던 말은 사실이었던 듯했다.

    -후사들 간 생길 문제나 알력 다툼은 없을 걸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네만, 미카엘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어. 그리고 의사로서의 내 예상이 맞다면 남성의 기능 자체가 소실되었을 거야.

    가위나 칼, 작은 바늘까지, 날붙이란 날붙이는 죄다 치우고 일절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앤지는 본인이 당한 것보다, 미카엘을 제 손으로 찌른 것에 더 큰 충격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니다. 타인의 털끝 하나 건드린 적 없던 사람이 한때나마 친구였던 이의 심장에 칼을 꽂아 숨을 끊어 놓다니. 정신적인 후유증이 꽤 클 것이다. 부디 극복하기까지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만을 바랐다.

    “비서관님, 그래도 말이지요.”

    아네트의 목소리가 상념에 빠져 있던 그의 의식을 일깨웠다.

    “하지만 앤지 님에게 이것만은 확실히 다짐을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도 시타델로 데려가 달라는 것 말이지?”

    “네! 저,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저 정말 일 잘하거든요. 그 무섭고 흉흉했던 테 데움에서도 일 못 한다고 구박받는 일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시타델에도 유능한 메이드가 많겠지만 그래도…….”

    “걱정 말아라, 아네트. 두 분은 널 반드시 데려가 주실 테니까.”

    “정말요? 저 비서관님 말씀만 믿…… 아야…….”

    “저런. 흥분하니까 그렇지 않니. 수다는 이제 이만하고 푹 쉬어라.”

    제롬은 아네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주곤 방을 나섰다. 도련님에게 한시라도 빨리 약을 처방하고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았다.

    회랑의 창 너머로 비쳐드는 늦은 오후 햇살이 그의 발끝에 긴 그림자를 자아 내고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에 눈가가 시렸다.

    * * *

    평온한 며칠이 다시 흘렀다. 카일은 집무실로 쓰던 서재에 있다가 앤지가 낮잠에서 깨어났다는 말에 곧장 방을 나섰다.

    차갑고 냉담하던 얼굴에 온기가 어리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엷은 미소는 2층 침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만면에 가득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앤지.”

    “카이.”

    앤지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그를 보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비로소 생기가 감도는 얼굴은 더 이상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카일이 곧장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메이드가 나갈 때까지 기다릴 틈도 없었다. 간밤에도 봤건만 며칠 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처럼 짙은 애틋함이 감돌았다.

    “약은 어때요? 잘 듣는 것 같아요? 아직까진 한 번도…… 없었죠?”

    앤지는 포옹을 풀고 카일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조금은 활기를 되찾은 그녀처럼, 그 역시 병색이 완연히 지워져 있었다. 아직은 살짝 수척했지만 확실히 환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전혀 없어. 신약의 효과는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3주 전, 테 데움 호수 위에서 그녀가 제 피를 흘려 넣어 준 이후 한 번도 발작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그녀에게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또다시 이 가늘고 하얀 살결 어디든, 칼을 대게 할 바에는 차라리 절명을 택할 것이다.

    그는 말없이 앤지의 부러질 듯 가냘픈 팔을 잡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고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살결은 투명하다 못해 눈이 멀 것 같았다.

    카일은 왼쪽 팔 언저리를 손으로 몇 번이고 쓸었다. 그녀가 제 입에 피를 흘려 넣기 위해 만들었던 자상이었다. 칼이 긋고 지나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카이.”

    앤지가 그를 불렀다. 제 팔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른 쪽 팔로 향했다. 붕대를 감겨 있던 자리에는 세로 모양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의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은 희미해질 것이라 했었다. 몸 구석구석 남아 있던 멍 자국, 다른 자상의 흔적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카이, 난 괜찮아요.”

    길게 뻗은 속눈썹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자 앤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이젠 다 잊었어요. 아프지도 않고요.”

    앤지가 말갛게 젖은 눈으로 웃었다. 눈가는 촉촉했지만 미소는 꾸밈없는 진심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그 온기에, 카일이 제 입술을 흉터에 가져다 댔다. 나비 날갯짓처럼 시작한 입맞춤이 조금씩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육신의 욕망 아닌, 성스러운 열정과 지고한 숭앙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이 연약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가느다란 뼈마디가 어떻게 그 아픔을 이겨 냈는지.

    카일은 그녀의 팔뚝에 입술을 꾹 누른 채 잠시 숨을 멈췄다. 심장이 갈라질 것처럼 아팠다. 뜨겁게 치밀어 오른 불길에 몸이 안에서부터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그놈을 좀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 무해한 척 섬에서부터 네 주위를 떠돌 때부터. 왜 진작 그러지 않았을까.

    맹세할 수 있었다. 신이 아니면 악마에게라도. 지금이라도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다면, 아버지의 또 다른 아들을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해하고 무수히 조각 내 주겠다고.

    “카이.”

    따스한 손이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천사의 손길 같았다. 그 작고 소중한 부름에, 격렬한 살의와 자책감에 몸부림치던 심경이 조금은 치유되는 것 같았다.

    “자책하지 말아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는 그녀의 팔을 놓고 앤지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크고 아름다운 눈, 녹음을 가득 담은 그 온기에 빨려 들 것만 같았다. 그저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세상의 가장 따사롭고 포근한 사슬에 심장이 사로잡힌 듯했다.

    앤지는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죽을 만큼 힘들었던 만큼, 카일도 그랬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선대의 죗값을 치르느라 지독하게 시달려 왔던 심신의 고통, 그녀를 찾아 헤맸던 3년 전의 시간부터 황제 시해범으로 몰려 고초를 치렀던 최근까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이었을까.

    그가 레티샤와의 정략혼을 기어이 강행한 다른 이유 또한,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다. 제롬은 그 혼인이 정치적인 목적과는 별개로, 그녀를 레머디로 만들지 않기 위한 카일 나름대로의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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