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75/106)
  • #75

    카일……!

    어떻게 된 걸까. 미카엘에 이어 레티샤, 그리고 이번엔 카일까지. 레티샤뿐 아니라 카일의 심복까지 미카엘의 등 뒤에 붙어 있었던 걸까.

    앤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있는 사이 캐서린 할머니가 어떻게 되실지, 지금 어디서 어떤 상황에 놓여 계실지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미카엘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카일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고심 끝에 편지지의 공백을 뜯어냈다. 그리고는 펜으로 몇 마디를 휘갈겨 쓰곤 침대 위에 놓았다.

    바깥에서 말이 히잉, 울음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카일의 편지를 구겨서 품속에 넣고 부리나케 후문을 열었다. 과연 마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저 멀리, 호수와 광장에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수다와 불에 뭔가를 굽는 맛있는 냄새, 개들을 쫓아다니는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앤지가 가까이 다가가자 모자를 깊이 눌러쓴 마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차 안에 올랐다.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미카엘이 걱정되었다. 그에게 부디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랐다. 캐서린 할머니와 리네 아주머니에게도 역시.

    마르틴과 브린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믿었다. 아미티지가의 보안 경계는 매우 철저했고 다행히 빌렘 아저씨에게는 빈터가르 최고의 인력을 고용할 만한 재력이 있었다.

    그러니 노아도 괜찮을 것이다. 반드시 무사할 터였다. 그들은 지금도, 미래에도 노아에 대해 온전히 무지해야 했다.

    신이여, 제발……. 제 아기를 지켜 주세요. 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다 감내할 수 있으니 제발 노아와 가족만은 무사하게 해 주세요.

    앤지는 경련처럼 떨려 대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이보다 더 진심일 순 없었다. 그들이 잘못되면 어차피 그녀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노아는 더더욱.

    앤지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입구를 열어 마차에 달린 창 바깥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푸른색 가루가 파란 눈 알갱이처럼 바람결에 흩날렸다. 가루가 떨어지면 낭패니 드문드문 간격을 두고 가루를 뿌렸다.

    마차는 한참을 달리다 도로 앞에서 멈췄다. 마부가 그녀를 마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인근에 대기 중이던 자동차로 이끌었다. 브린과 빌렘 아저씨가 소유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승용차였다. 이번에는 가루를 뿌릴 수가 없었다. 마차와 달리 차는 운전사석과 뒷좌석이 막혀 있지 않았다.

    또 다른 정체 모를 운전수가 좀 더 달리다 들어선 곳은 레반과 수도로 가는 길목 한가운데 자리한 온천 마을, 그라츠였다. 최근 부유한 시민 계급의 인기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는 그라츠는 새로 지어진 호텔과 휴양 시설이 하나씩 들어서며 수도 못잖게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곳이었다.

    앤지는 운전사가 광장의 분수대 옆, 보행자들에게 신경을 쏟는 사이 가루가 남아 있는 주머니를 광장의 분수 옆 쓰레기통에 던져서 증거를 숨겼다. 그녀가 도착한 밤에도 마을은 시끌벅적했다. 건국 기념일의 축제 열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광장과 궁전 같은 호텔과 사교 클럽, 온천장, 연회장 사이를 누비며 밝게 떠들고 있었다.

    앤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화려한 휴양 마을에 카일이 기다리고 있다니 짙은 이질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카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남의 필체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차는 화려하게 북적이는 도심을 지나 커다란 공원으로 들어섰다. 고색창연한 저택이 멀리서 보였다. 그제야 그곳이 숲에 둘러싸인 사유지란 사실을 알아챘다. 차가 멈추고 얼떨떨한 가운데 운전수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앤지는 차에서 내려서서 거대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기시감에 심장이 쿵, 쿵, 뛰었다. 고딕 양식의 웅장한 저택은 과거, 컬리넌 섬에서의 블랙웰 하이츠를 연상케 했다.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묘한 유사함은 더 확연해졌다.

    저택 내부는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시타델은 물론, 새 건물들이 증축된 이 휴양 도시와도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다시 전쟁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잃었던 옛 기억 속, 앰버 윈이었던 작은 여자아이가 수도로 부모님을 따라가 처음으로 구경했던 시타델 옛 궁성 첨탑의 내부가 꼭 이랬던 것 같았다.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앤지는 침착한 얼굴로 운전수를 따라 걸었다. 막상 이렇게 되니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공포를 느끼는 감각마저 마비되어 뒤틀린 차분함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운전수가 마침내 복도 끝, 웅장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신화 속 군신이 검과 방패를 들고 거대한 괴수를 물리치는 광경이 문 양쪽에 새겨져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다. 검 끝을 괴물의 모가지에 꽂아 넣은 군신이 반으로 갈라지며 방 내부가 보였다.

    안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현기증이 밀려왔다. 옛 기억을 최면처럼 이끌어 내는 향이 방 안 가득 잔잔히 퍼져 있었다. 6년 전, 도련님의 침실에 들어갈 때부터 늘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던 냄새였다.

    숲의 향기였다. 막 피어난 꽃과 비에 젖은 풀 같기도 하고 사향 같기도 한 냄새. 그 감미로운 내음은 그녀의 기억 한구석을 장악한 채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이 각인된 심상의 한 부분이었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방은 어두웠지만 깜깜하진 않았다. 여덟 개의 초가 꽂힌 황금 촛대가 양쪽 벽에 걸려 춤추듯 너울거리고 있었다.

    촛불 아래로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상과 벽 거울, 성화와 태피스트리, 환한 꽃무늬 사라사 천을 휘감은 가구가 보였다. 그리고 소파 한가운데 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서 와, 앤지.”

    3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던 목소리,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 앤지의 눈앞에 있었다.

    * * *

    미카엘은 신속히 땅을 파서 시체를 그 안에 밀어 넣던 손을 멈췄다. 프란츠의 목덜미 뒤쪽에 침이 꽂혀 있었다. 바늘처럼 가늘고 작은 침이지만 가공할 무기였다.

    컬리넌 섬에서 재배하던 독이 선단에 묻어 있었다. 제대로 명중만 하면, 척추가 단번에 마비되고 심장에 피가 돌지 않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되는 치명적인 흉기였다. 카일렉의 오른팔인 제롬, 그리고 그림자 친위대 중 알렌 하디가 노련하게 쓰는 암살 수법이었다.

    “이건……!”

    그제야 깨달음이 밀려왔다. 앤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때, 프란츠를 해치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단도를 앞에서 던지는 순간, 알렌 하디는 등 뒤에서 프란츠에게 독침을 쏜 것이다. 게다가 기척도 귀신처럼 숨기다니 등줄기가 섬찟했다.

    “카일렉이 붙여 둔 건가…….”

    레티샤만 첩자를 붙여 둔 게 아니었다. 카일렉까지 그에게 감시꾼을 달아 뒀을 줄은. 그 순간,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고 있을 앤지에게 생각이 미쳤다. 알렌 하디가 그녀의 위치를 안 이상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젠장……!”

    그는 사체 위에 흙을 덮는 둥 마는 둥 처리하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시체를 수습하는 중에도 앤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미카엘은 재빨리 나무 사이를 헤치고 골목으로 내달렸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널을 뛰었다.

    미카엘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뒤늦게 제 불찰을 깨닫고 헐레벌떡 캐서린 베케트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신이 늦었음을 알았다. 집 안팎은 깜깜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앤지! 어디 있어? 앤지! 앤지!”

    현관을 부술 듯 밀고 들어간 그는 어둠 속에서 동공을 바삐 움직였다. 개미 새끼도 보이지 않았다. 미카엘은 램프를 집어 들고 활짝 열어젖혀진 문 안으로 들어서서 불을 이리저리 비췄다. 침대 위에 너덜너덜 찢긴 편지가 남아 있었다.

    「캐서린 할머니가 위험해요. 도로 위 파란색 분필 가루를 뿌려 둘 테니 누구든 저를 도와줄 수 있으면 그걸 따라와 주세요. 비가 와서 씻겨 내려가지 않는 한 푸른색이 길에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

    “이런…… 앤지!”

    미카엘의 손에서 종이가 무참히 구겨졌다. 어째서 그를 바로 부르지 않은 걸까, 의아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카일렉이든 레티샤든, 그녀의 할머니를 인질로 잡아 두고 있는 자가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고 협박했을 건 뻔하다. 앤지의 성격상 홀로 감당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곧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야시장이 열린 마을은 여전히 화기애애, 즐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외부에서 온 장사꾼들이 대거 유입되어 말과 마차가 충분히 남아돌 것이란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 *

    앤지가 꿈에 나타난 것은 그녀를 컬리넌 섬 해역에서 발견한 뒤 처음이었다.

    앤지. 앤지, 어디 가고 있는 거야. 앤지, 이쪽을 좀 돌아봐 줘!

    마르틴은 목청을 높이며 두 손을 힘껏 내저었다. 앤지가 얇은 로브를 걸친 채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벌꿀색 머리카락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밝은 빛을 흩뿌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앤지를 재차 불렀다.

    앤지! 멈춰! 이쪽으로 돌아와. 거긴 위험해.

    막연한 불안감이 심장을 바짝 조여 왔다. 앤지가 향하는 발걸음 끝에 낭떠러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마르틴을 돌아보았다. 공허한 눈동자였다. 예전에 꿈속에서 서로 교류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정말로 꿈 자체였다. 현실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불안한 이 마음은 뭘까. 앤지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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