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74/106)
  • #74

    프란츠는 캐서린 베케트의 농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입에서 소리 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역시. 레티샤 마님의 말씀이 맞았군. 미카엘 그놈이 계집을 찾아내면 숨기려 들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식중독으로 방에서 쉬겠다고 할 때부터 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었다. 그래서 뒤를 밟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친히 목표물 앞까지 안내해 줄은.

    그는 공작 부인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녀는 사파이어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주겠노라 기약했다. 프란츠는 나무에서 내려오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계집의 목을 얻는 건 식은 죽 먹기였지만 미카엘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는 꽤 버거운 상대였다. 가능한 뒤에서 일격을 가해야…….

    끼익, 문이 열렸다. 프란츠는 생각을 중단하고 정면을 주시했다. 목표물이 집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프란츠는 바지춤에 꽂아 두었던 단도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여자는 광장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레바퀴와 아이들이 한바탕 골목을 지나간 터라 인적이 없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단번에 달려들어 포옹하듯 안으며 심장에 찔러 넣고, 그 상태로 이 화단까지 끌고 와야 한다. 호수 주변과 달리 골목에는 아직 가스등이 없었다. 나무 사이의 이 어둠이 그의 범행을 완벽히 가려 줄 것이다.

    미카엘은 꺾어진 골목 안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포착해 냈다. 그의 눈은 야행성 동물처럼 어둠 속에서도 움직임을 식별할 수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동시에 두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커먼 물체가 나무 아래 착지하자마자 앤지의 집 쪽에서 문이 열렸다. 그녀가 포치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앤지는 곧바로 그가 있는 골목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카엘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 그리고 번쩍이는 날 끝을 보았다.

    프란츠였다. 레티샤가 붙여 준 데르반 가의 기병.

    역시 레티샤는 처음부터 앤지를 제거하고자 했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는 앤지가 죽는 걸 바랄 것이다. 카일렉의 미련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제 위치를 견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앤지 리즈델이란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게 최선일 테니.

    “앤지!”

    미카엘은 그녀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동시에 품에 한 손을 넣었다 빼서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큭, 단말마의 비명이 짧게 흘렀다가 밤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마을 개들이 일제히 크게 짖어 댔다. 

    앤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클로크를 뒤집어쓴 남자가 목 한가운데 작은 단검이 꽂힌 채 두 무릎을 꿇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터질 듯 흰자위를 드러낸 두 눈, 격렬한 안면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는 얼굴이 괴물 같았다.

    앤지는 비명을 지르려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본능이 거센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운신을 제압해 끌고 가려고 했든, 아예 숨통을 끊어 놓으려 했든 자신을 등 뒤에서 노리고 있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앤지! 괜찮…… 괜찮아?”

    미카엘이 뛰어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여기저기 살폈다. 사력을 다해 달려온 듯 숨결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잔뜩 격앙되어 있던 보랏빛 눈동자가 안도감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들 등 뒤에서 몸뚱이가 툭 쓰러져 널브러졌다.

    “미카엘, 이 사람은…….”

    “잠깐만.”

    미카엘은 주위를 훑고 신속히 움직였다. 누가 보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는 시신의 두 다리를 잡고는 건너편 화단으로 끌고 가 나무 사이에 숨겼다. 그리고 다시 앤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그를 뒤따라 와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한눈에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앤지.”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사람은 대체 누구…….”

    앤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쓰러지기 직전 사내가 떨어뜨린 단검이 시야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미카엘이 아니었다면 그 칼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레티샤……. 레티샤 블랙웰 공작 부인의 심복이야.”

    “뭐라고……?”

    “미안해, 앤지. 어쩌다 보니 내가 암살자를 여기까지 유인하게 된 것 같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버렸어.”

    앤지는 충격에 젖은 눈을 깜빡거렸다. 레티샤? 그녀가 어째서? 카일과 3년째 결혼 생활을 해 오며 블랙웰 가의 안주인으로서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니었나?

    “안 되겠어, 앤지. 이젠 얘기할 시간도 없으니 어서 집에 가서 짐을 챙겨 와. 넌 이곳을 떠나야 돼. 레티샤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카일렉 역시. 

    미카엘은 뒷말은 안으로 삼키고 앤지를 재빨리 일으켜 세웠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였다. 그녀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었다. 다행히 앤지 역시 충격과 혼란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가운데서도 두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고? 하지만 캐서린 할머니를 저대로 두고 갈 순 없어. 나 때문에 혹시 변고라도 당하시면……. 리네 아주머니도.”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사체를 처리하고 어르신의 신변이 보호되게끔 조치를 취할 테니까. 어서 짐을 챙겨서 집을 나와. 어르신을 위험에서 최대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야만 해.”

    “아……. 알았어.”

    “앤지, 날 믿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만은 믿어야 돼.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를…….”

    미카엘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끝을 흐렸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공작가에 남는 조건으로 샬럿과 결혼할 때도, 그녀와 첫 밤을 보낼 때도, 그 후로도 많은 밤을 보내는 동안에도 아내의 얼굴 위로 늘 앤지를 겹쳐 왔다.

    쓴웃음이 흘렀다. 죽어도 바랠 줄을 모르는 이 집착과 연정의 마음은 카일렉도 같겠지. 배다른 형제간 유일하게 닮은 것은 이것 하나뿐일까.

    하지만 그와는 달리 카일렉은 레티샤와 단 한 번도 동침하지 않았다. 같은 침대에 든 적조차 없다. 그가 알기로는 그랬다. 다른 여자의 위로 겹쳐 보는 것조차 용인하지 않고 철저히 금욕적으로 3년을 지내 온 것이다.

    “널 믿어, 미카엘. 넌 내 소중한 친구고……. 너도 역시 날 그렇게 생각해 줄 거라 믿어.”

    앤지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렇게 선을 그었다. 방금 목숨을 빚졌고 앞으로도 한 번 더 빚질 거란 사실과는 별개로, 그녀는 어느 쪽의 감정도 기만하려 들지 않았다. 미카엘은 헛웃음을 누르며 그녀를 골목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귀중품만 챙겨서 바로 와.”

    앤지는 몸을 돌려 집을 향해 뛰었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노아를 생각하니 절로 힘이 났다.

    레티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노아의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 아기까지 해하려 들 것이다. 이터니티 의식과 관계없이, 카일과 저 사이의 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드시 죽이려 할 터였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밝게 뜬 달 아래, 주위의 경쾌한 소음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개들이 짖는 소리는 잦아 들었지만 사람들의 유쾌한 말소리, 웃음은 조금씩 더 커졌다. 다들 야시장에 몰려가는 분위기였다. 앤지가 아담한 농가 앞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뭔가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리네 아주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도 모두 닫혀 있었다. 한 점의 온기도, 한 가닥의 등유 램프나 촛불의 빛도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캐서린은 큰 전쟁을 두 번 겪는 동안 트라우마가 생겨서 어두운 걸 싫어했다. 취침 직전까지 최소 초 여럿은 반드시 켜 두는 습관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앤지는 지체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싸늘한 어둠과 냉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손을 더듬어 촛불 등을 하나 밝혔다.

    집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주방에는 썰다 만 빵과 치즈 덩어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막 화덕에서 내려놓은 듯한 수프 냄비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다.

    “리네 아주머니? 아주머니, 어디 계세요? ……할머니!”

    앤지는 캐서린의 침실 문을 부서져라 열었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배 속이 싸늘해지며 전신에 오한이 일었다. 혹시나. 설마. 가장 두려워했지만 실제로 일어날 리 없다고 믿었던 상황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흐트러진 이불 시트 위에 종이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앤지는 등유를 협탁에 내려놓고 종이를 덥석 집어 들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가지런히 쓴 필체가 눈에 익었다. 건조하고 간결 명료한 품위, 날카로운 우아함, 동시에 흘러넘칠 듯 따스한 온기가 하나로 얽힌 글씨체였다.

    「후문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어. 캐서린 할머니가 무사한 걸 보고 싶으면 그걸 타고 이리로 와. 도움을 청하면 그 사람에게 해가 갈 거야. 너 하기에 따라 마을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앤지의 손에서 편지가 펄럭이며 떨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사랑하는 앤지. 너의 카이가.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카일의 필체를 흉내 낸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 진실을 강렬히 감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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