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 (76/106)
  • #76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로 옆자리에서 들려온 비명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마르틴이 깜짝 놀라 브린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브린의 두 눈도 번뜩 떠졌다.

    “헉, 앤지! 아, 꿈이었구나…… 하아…….”

    “왜 그래? 앤지가 나오는 꿈이라도 꾼 거야?”

    “응…….”

    창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아직 자정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르틴이 침대에서 일어나 중문 너머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패트리샤와 노아가 잘 자고 있는 걸 확인했는지 잠시 후 그가 침대로 돌아왔다. 브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지만 표정은 심란했다. 마르틴이 먼저 물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래.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앤지가 안개 속에 있었어. 당신은 내 옆에 서 있었고……. 우리 둘 다 앤지를 계속 부르면서 뒤쫓아 가는데 앤지가 멈추지를 않는 거야. 그러다 등 뒤에서 노아가 울기 시작했어. 패티는 당신이 안고 있었는데 노아는 어디 있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계속 울음소리만 들려서……. 그래서 앤지에게 힘껏 외쳤어. 노아를 두고 혼자 어딜 가냐고.”

    -앤지! 노아가 여기 있는데 어딜 가고 있는 거야! 노아가 엄마를 찾잖아……. 어서 돌아와 앤지!

    마르틴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처 브린과 패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노아의 울음을 듣지 못한 것만 제외한다면.

    “나도 비슷한 꿈을 꿨어. 그래서 갑자기 깨어났는데 당신까지 그랬을 줄이야.”

    “정말? 당신도 같은 꿈을 꿨어? 어쩐지 불안해. 앤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날이 밝는 대로 캐서린 할머니 댁에 편지를 보내 봐야겠어. 아, 당신이 경시청을 통해서 전문으로 보내면 더 빨리 가겠지?”

    “내가 보내 볼게. 별일 아닐 테니 미리 걱정하지 말자.”

    마르틴이 브린의 뺨을 매만지며 다시 침대에 눕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브린에겐 애써 아닌 척했지만 그 역시 나쁜 예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창 너머, 현관 쪽의 가스등이 환해지는 기미에 브린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누가 온 것 같아. 이 시간에 누구지?”

    “지금? 혹시 아버님이 오신 거 아냐? 내일이었던 훈장 수여식이 차주로 연기됐다고 하셨었는데…….”

    마르틴과 브린은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나이트가운을 걸쳤다. 문을 열기 무섭게, 복도에 선 집사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깨어 계셨군요. 아미티지 씨가 오셨습니다.”

    “역시 아빠였구나. 거실로 모셔 줘, 헬렌.”

    집사가 차 준비를 하는 동안 빌렘은 거실 창가를 서성이다 딸 부부를 보고 서재를 가리켜 보였다. 중요한 얘기라는 뜻이다. 그는 서재 문이 닫히자마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늦은 시간 미안하구나. 워낙 급한 사안이라 말이야.”

    “괜찮습니다, 아버님.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트리에스테의 황제, 레니에 8세가 서거했다.”

    “네? 어머나. 세상에……!”

    브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르틴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빌렘은 이어 말했다.

    “아직은 공표되지 않은 상태야. 자칫했다간 양국 간 큰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훈장 수여식이 연기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니 지금 궁성은 비상사태로 정신이 없고.”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뇨? 설마…….”

    마르틴의 의문에 빌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입을 여는 목소리가 무겁기 짝이 없었다.

    “황제는 살해당했어. 시신이 겐트 숲의 창고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현재 지명 수배가 내려진 유력한 용의자는…….”

    빌렘의 다음 말에 마르틴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 귀를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요. 어떻게 그 사람이?”

    “나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만 살인 현장의 정황이 그렇게 되어 있어. 현재 빈터가르 왕실 경찰과 근위대까지 적극 협력해 용의자의 행방을 수색 중이니 잡히는 건 시간 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구나.”

    세 사람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르틴의 머릿속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이 일이 앤지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건…….

    낭떠러지를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던 앤지, 그리고 공허한 눈동자가 뇌리에 불쑥 떠올랐다. 오늘 밤에는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을 듯했다. 싸늘한 불안감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섬뜩함에 한기가 일었다.

    * * *

    그라츠의 개인 저택은 변방 지역의 휴양 도시 중 가장 고풍스럽고 값비싼 공간이었다. 지체 높은 신분, 이를테면 타국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묵기에 적합했으며 밀회나 담합에 최적인 곳이기도 했다.

    미카엘 랜들에게 붙여 둔 알렌 하디, 그의 수하는 미카엘이 프란츠란 이름의 기병과 함께 에벤호프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 왔었다. 프란츠는 레티샤의 친정인 데르반 남작 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살수였다.

    레티샤의 밀정일 게 뻔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그날, 퍼레이드를 이탈하기 직전 제 입에서는 앤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옆에 있던 레티샤가 그걸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는 솜씨 좋은 심복 둘을 골라잡아 앤지를 처리하라 명했을 터였다. 그중 하나가 미카엘 랜들일 줄은 미처 몰랐지만.

    카일은 알렌의 보고를 접하자마자 곧바로 출발했다. 왕의 수색을 핑계 삼아 비밀리에 에벤호프와 레반 사이, 그라츠에 도착한 게 이틀 전이었다. 그리고 제롬이 비밀리에 심어 둔 밀정을 통해 제때 앤지의 거처를 확인하고, 이렇게 눈앞까지 데려오게 만들 수 있었다.

    “앤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황록색 프록코트에 검은 베스트를 받쳐 입고, 역시 칠흑같이 검은 크라바트를 맨 그는 3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강파른 턱과 한일자로 다물린 입, 명징하게 빛나는 눈매가 조금 더 날카로운 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녀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지금도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 고귀한 용모와 위압적인 존재감 앞에서, 사람들은 그의 선대가 돈으로 작위를 샀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곤 했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열렸다. 무감하고 무정해 보였던 입매에 감정이 실리며, 전체적인 인상이 놀랍도록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창백한 아랫입술에 희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감격에 겨운 것 같았다. 하지만 앤지는 다른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캐서린 할머니…… 어디 계세요? 리네 아주머니는…….”

    앤지의 혀가 저절로 움직였다. 물러서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입술만 간신히 움직였다.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지금 당장.”

    “그렇게 할게.”

    카일이 이를 악물고 나직하게 대꾸했다. 격앙된 감정, 달뜬 호흡을 고르고 자제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다음 순간 앤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잊었던 과거의 향이 단번에 그녀를 파도처럼 뒤덮고 함락해 갔다.

    “앤지…….”

    보고 싶었어. 미칠 듯이 그리웠어.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억눌린 속삭임이 연신 흘러나왔다. 앤지는 돌처럼 굳은 채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3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달이 축복처럼 저마다의 꽃이며 머리 위로 내려앉았던 헤네랄리페 정원, 파란 반딧불이 반짝이며 수를 놓던 해변가 절벽, 그리고 들어서기 전부터 설렘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던 그의 침실.

    아늑했던 둘만의 시간. 달콤한 밀어와 수줍은 호응이 바삐 오갔던 공간. 세상 모든 음란함과 음탕한 것을 초월한 행위,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손짓과 움직임만을 나눴던 모든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과거를 등지고 그를 잊기 위해 애썼던, 지난했던 나날 역시.

    “믿을 수 없어. 네가 이렇게 살아 있었다니……. 앤지. 사랑해. 지난 3년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내 유일한 한 사람이야.”

    그의 부적절한 고백에 앤지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녀는 있는 힘껏 블랙웰 공작을 밀어내고 물리적인 간격을 넓히고자 애썼다. 그 강경한 몸부림에 카일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거리는 더 넓혀 주지 않았다. 앤지의 등에 딱딱한 벽이 와 닿았다.

    “캐서린 할머니와 리네 아주머니, 그분들을 먼저 뵈어야겠어요.”

    “그들은 처음부터 레반에 있었어. 집으로 되돌려 보내라는 전갈을 지금 보내지.”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을 치자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카일은 뭔가 짧게 지시했고 남자는 고개를 조아린 후 방을 나갔다. 앤지는 그제야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연로한 두 어르신을 인질로 잡아 두긴 할지언정 굳이 여기까지 데려올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하등 번거로운 과정일 터였다. 그가 원하는 건 두 어르신이 아닌, 앤지 리즈델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노아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