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쟈스민 부인은 메이아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족히 3일이 걸릴지도 모르는 서류들을 단 하루 만에 마무리했다.
“저는 오늘 할 일은 다 했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따가 저녁에 뵙겠습니다.”
“네.”
저녁 때까지 메이아를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에 메이아는 미소를 지으며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대공님, 이따가 저녁에 방으로 에스코트하러 와 주시겠어요?”
그 말에 테오도르는 환하게 피어나는 해바라기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목소리로 메이아에게 말했다.
“저녁에 방 앞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면 전 방에서 책을 보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이렇게나 일을 정확하고 빠르게 할 줄은 상상을 못 했다.
그녀가 나간 뒤 쟈스민 부인은 입을 열었다.
“공녀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쟈스민 부인은 속마음을 애써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렇죠?”
쟈스민 부인의 말을 듣고 맞장구를 치며 다가온 베나블이 말했다.
“무엇보다 온화한 성품과 귀족다운 몸가짐도 훌륭하십니다.”
테오도르가 메이아를 좋아하니 대공비로서 맞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베나블이었다. 그런데 일도 잘하니 더욱더 대공비감으로서 마음에 들었다.
베나블의 말에 쟈스민 부인 또한 메이아에게서 느낀 점을 말했다.
“빈틈도 없고, 머리도 좋으시고……. 무엇보다 카리스마가 있으십니다. 아직 열아홉 살밖에 안 되셨는데 어떤 가문에서 저분을 모시고 갈지…….”
쟈스민 부인과 베나블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말하지 않아도 메이아를 대공비로 맞이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느꼈다.
“제 생각과 비슷하다고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쟈스민 부인.”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빨리 말씀해 주세요. 마침 딸아이가 곧 출산이라 휴가를 쓰려고 합니다.”
베나블은 집무실에서 온종일 같이 있을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메이아가 일을 너무 잘해 버린 덕분에 계획이 약간 어긋나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따가 저녁에 사용인들 모임이 있는데 오시겠습니까?”
“어떤 모임이죠?”
“주인님도 곧 성인이 되실 텐데…… 대공비를 맞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머,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몇 시쯤 갈까요?”
저녁 8시 늦은 시각. 헤만과 시녀장 한나를 비롯해 쟈스민 부인까지 애튼이 쉬고 있는 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베나블의 지휘 아래 ‘사용인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워스트 의원님은?”
“퀴니 님과 술 한잔하러 가셨습니다. 아무래도 퀴니 님은 메이아 공녀님 사람이니…… 우리의 계획을 들키면 안 되기에 워스트 의원님이 일부러 데리고 나가셨지요.”
“하츠벨루아 공작 가문의 공녀님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올해 전 하츠벨루아 공작 부부가 돌아가신 뒤에…… 황태자 전하와 10년 동안의 약혼이 파기된 이후 마탑으로 가시는 길에 주인님을 만나…….”
모두 베나블 말을 들으며 집중했다.
베나블의 설명이 끝나고 난 뒤 쟈스민 부인은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서류 보는 게 빈틈이 없으셨군요. 10년 동안 황궁의 대소사를 살펴보셨으니……. 무엇보다 결격 사유가 전혀 없는 파혼이셨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약혼녀를 두고 파혼이라니. 하지만 덕분에 저희는 좋은 대공비를 맞이할 수 있게 되겠지만요.”
“무엇보다 공녀님이 안 계신다면 각하의 상사병이 심해지므로 우리는 필사적으로 두 분을 이어 드려야 합니다.”
서류를 내려놓지 않고 계속 읽고 있던 헤만은 중얼거렸다.
“공녀님께서 좋아하시는 건 책 그리고 승마.”
헤만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선 계획 A로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실내에서 한 번, 그리고 실외에서 한 번.”
“쥬안이란 자가 오기 전에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베나블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전 좋습니다. 다른 분들도 계속 의견을 내어 주십시오.”
“두 분이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마음 같아선 외딴 섬으로 단둘이 여행을 보냈으면 합니다.”
“저도 베나블 님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어떻게 외딴 섬으로 보내죠?”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울이며 과자를 먹던 애튼도 한마디 했다.
“외딴 섬에 보낸 다음 배가 고장 났다 하면…… 될까요?”
“그렇다면 어느 섬으로 갈지 결정하고 단둘이 지내실…….”
베나블은 상상만 했는데도 행복했다.
짝짝짝.
쟈스민 부인이 박수를 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외딴 섬 계획 반대합니다.”
“네?”
“제가 겪어 본 공녀님은 빈틈이 없으십니다. 여행 가자고 바로 가실 분도 아니시고요. 그러니…….”
“그러니?”
“대공저 안을 외딴 섬으로 만들면 됩니다.”
“무슨 좋은 계획이 있으십니까? 쟈스민 부인.”
“호호, 다들 모여 보세요.”
*
테오도르는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이렇게 세상 좋을 수 없었다!
메이아와 함께 집무실에서 일을 한 뒤에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와 함께 서재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이건 모두 쟈스민 부인의 말 한마디 덕분이다.
<공녀님은 책을 좋아하시죠?>
쟈스민 부인의 말에 메이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좋아합니다.>
<혹시 대공가 서재에 가 보신 적 있으시나요?>
<아니요. 안 가 봤습니다.>
<저희 대공가 서재에는 황궁 도서관과 맞먹을 정도로 많은 양의 책들이 있습니다.>
쟈스민 부인은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살짝 원망하는 말투로 말했다.
<메이아 공녀님이 아직도 대공가의 자랑스러운 서재에 안 가 보셨다니…….>
쟈스민 부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테오도르는 바로 메이아에게 서재를 안내해 주겠다 말했다.
<마침 저도 읽을 책이 필요했는데. 그럼 서재를 안내해 주시겠어요?>
워낙 평소에 책을 좋아하던 메이아는 마침 가지고 있던 책들도 한 번씩 다 읽었기에 테오도르와 함께 서재에 가서 읽을 만한 책을 함께 찾기로 했다.
웅장한 서재의 황금빛 문에는 넘실거리는 파도 위의 배가 항해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입니다.”
테오도르가 서재 문 앞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손잡이라는 걸 찾아볼 수 없었다.
“문이라기보다는 벽화 느낌이네요.”
“마법 시동어로만 열리는 문입니다.”
“그렇군요.”
테오도르는 문에 새겨진 항해하는 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플로렌스가의 테오도르.”
“가문과 이름이 시동어군요.”
“예.”
테오도르의 시동어로 서재의 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멋진 조각이 새겨진 문이 반으로 갈라지며 열리는 모습은 마치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문이 열리는 모습이 멋지네요.”
“예, 저도 항상 열 때마다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서재 문이 열리자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이아는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려놓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서재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굳게 닫혔다.
서재 복도 끝자락에서 메이아와 테오도르를 지켜보고 있었던 베나블은 문이 닫힌 걸 확인하자 조용히 서재 문에 다가가 조각으로 새겨진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시동어 변경.”
-시동어를 말씀해 주십시오.
입꼬리를 쓱 올린 베나블은 서재 문이 안에서 열리는 시동어를 바꾸었다.
이젠 서재 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두 분이 오붓하게 계시겠군.”
안에 있는 테오도르는 시동어가 바뀐 걸 모를 거다. 사실 베나블은 테오도르에게도 말해 주려고 했지만 애튼이 결사반대했다.
<대공 각하는 메이아 공녀님 앞에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베나블은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이것이 쟈스민 부인이 생각해 놓은 ‘대공저 안 외딴 섬 만들기 작전’이었다.
‘계획 A. 한 공간에 가두기’ 성공이었다.
베나블은 서재 문을 향해 주먹을 꽉 쥐며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주인님, 파이팅입니다.’
베나블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서재 문에서 멀어져 갔다.
서재 안으로 들어간 메이아는 엄청난 규모와 수많은 책의 양을 보고 놀랐다.
하츠벨루아 공작저 안의 서재도 매우 큰 편이지만 이곳은 거기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컸다. 당연히 방대한 책의 수도 마음에 들었다.
황궁 도서관과 맞먹는다는 쟈스민 부인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음이 느껴졌다.
“엄청나네요…….”
메이아는 빠른 걸음으로 바로 앞쪽 책장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옆을 둘러봤다.
분류는 물론이요, 책 관리 또한 매우 잘되어 있었다.
“저쪽에 소파와 테이블이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따라 움직이자 테이블 위에는 맛있어 보이는 쿠키와 차 그리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놓여 있었다.
원래 저렇게 간단한 다과를 매일 올려놓는 건가? 메이아는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메이아는 책 한 권을 집어 테오도르가 가리킨 소파 쪽에 자리에 잡고 앉았다. 테오도르 또한 옆자리에 바로 앉았다.
“대공가 서재는 마음에 드십니까?”
“매우 마음에 들어요. 책들 관리도 잘 되어 있고요. 여기서 살고 싶어지는걸요.”
“살아도 괜찮습니다.”
‘평생.’
“나중에 정 갈 데 없으면 대공가에서 살 테니 받아 주세요.”
대공가에서 살겠다는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평생 사셔도 괜찮습니다.”
그의 평생이란 말은 농담 삼아 한 말일 텐데…… 메이아는 뭔가 기대감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자꾸 커졌다 작아지는 게 느껴지고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도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말에 딱히 답하지 않고 미소 짓다 이내 책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같은 줄의 글을 계속 읽고 또 읽었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의 말에 동요했다는 걸 느꼈다.
“진심입니다, 공녀님.”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만을 향해 바라본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테오도르는 집중해서 책을 읽는 메이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테오도르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보내는 달콤한 시선에 메이아는 살짝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메이아의 가슴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