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투항하는 자의 목숨만 살려 두고 이외에는 모두 죽여라. 단, 무고하고 힘없는 마을 주민들에겐 손대지 말아라.”
카시스가 제 기사단에게 소리치며 명령을 전했다. 그리고 텐슬롯 성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서는 킬리언이 불길에 휩싸인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빠르기도 하지. 열흘도 되지 않아서 함락시키다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제키엘 경.”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 전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도 가능한 일 아니십니까?”
“큭, 그런가? 한데, 경은 왜 후방에 있나?”
“폐하를 호위하라는 전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누구의 호위를 받을 실력이던가? 내가 경을 지켜 주면 모를까?”
킬리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폐하보다 강한 마법사는 없으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검술 실력도 뛰어나시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설 일이 없겠어. 카시스가 먼저 저렇게 전부 처리하니 말이야.”
“대신 기사들의 사기를 높여 주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기사들의 사기는 오릅니다.”
“그런가? 이대로라면 적어도 파르미온 왕국을 함락시키는 데 세 달 안에는 끝나겠군.”
이제키엘은 킬리언에게서 시선을 돌려 언덕 아래 텐슬롯 성을 바라봤다.
전쟁이 세 달 안에 끝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칼리스토 대공 같은 사람들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필적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에류시온 공국의 앨피어스 대공.
제국에서도 유일하게 에류시온 공국만은 건드리지 않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몇 년 전에 단신으로 에류시온 공국에 가셨던 적이 있으셨지. 전하께서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아시고 가셨지만. 잃어버린 자식들을 찾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전 대공비 전하의 죽음과 자식들을 잃어버린 것이 폐황후와 연관이 있어 미안함 때문에 폐하께서 에류시온 공국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폐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이지?”
“앨피어스 대공 전하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아, 경은 모르려나? 앨피어스 대공은 선황 폐하와 친한 사이였어. 그리고, 나와 카시스가 선황 폐하의 친자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준 것이 앨피어스 대공이네. 물론 마도구로 증명은 마친 상태였지만, 앨피어스 대공도 우리가 선황 폐하의 친자임을 증명해 줬지. 그는 신성력으로 친자 감별을 할 수 있다고 하더군.”
“폐하와 칼리스토 대공 전하는 틀림없이 선황 폐하의 피를 이으셨습니다. 두 분 다 선황 폐하를 닮으셨습니다.”
이제키엘의 말에 킬리언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외모는 닮았지.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나는 황족의 특성인 머리와 눈동자색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진짜 폐하의 자식이 맞나 늘 의심했다. 카시스는 그러한 황족의 특성이 없었기 때문에 늘 의심했지. 마도구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싶었어. 그때 선황 폐하께서 카시스와 나를 에류시온 공국에 앨피어스 대공에게 보내셨다. 앨피어스 대공이라면 우리가 자신의 친자식인지 아닌지 감별해 줄 거라면서 말이야.”
그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칼리스토의 임페리얼 숲에서 어머니께서 보내신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고 카시스는 또다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릴 적부터 아무리 검술에 재능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다수의 성인 암살자들을 상대하기는 저도 카시스도 힘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저는 내버려 두고 카시스만 집요하게 노렸었지.
“그러고 보면 내가 황후를 처음 만난 것도, 카시스가 마린족 공주를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나?”
“예?”
그날 카시스를 구해 줬던 것이 마린족의 공주였다고 했었지. 카시스는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바다의 신이 그날의 장면을 보여 줬다고 했으니, 맞겠군.
내가 그날 황후와 인연이 있었다면 카시스는 마린족의 공주와 인연이 있었다는 말이겠지. 그러니 그들의 사이를 계속해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이 편치 않아. 하지만 형으로서 카시스가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하, 왜 하필 이종족 공주에게 마음을 주어서는.”
차라리 저처럼 같은 인간과 약혼하고 혼인하면 마음 편할 것인데.
“왜 나와 계십니까?”
카시스의 목소리에 앞을 보니 언덕을 올라와 그의 앞에 있었다.
“뒷처리는 어떻게 하고?”
“윌리엄에게 맡겼습니다.”
“뭐, 윌이라면 잘 할 테니 맡겨도 되고. 시스, 파르미온 왕궁을 함락하고 국왕을 제압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지?”
“앞으로 세 달 안에 끝내겠습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 나는 여섯 달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키엘은 옆에서 ‘왕궁을 함락시키고 전쟁을 끝내는 데 세 달 안에 끝내느니 반 년 안에 끝내느니 하는 대화를 하는 건 폐하와 대공 전하뿐이 안 계실 겁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전쟁을 세 달 내지는 반 년 안에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것도 아군의 피해를 극소수로 끝내기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된 것이 이번 전쟁에서는 아군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폐하께서도 가능한 일 아니십니까. 그리고 전쟁을 길게 끄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힘들기야 하지. 그런데 우리가 힘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파르미온 왕국은 재정적인 면에서 많이 힘들 테지만. 우리 제국이 반년에서 일 년 동안 전쟁을 해도 휘청일 정도는 아니지. 내 아우는 적국의 재정까지 신경 써 주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재정적으로 큰 타격이 없더라도 아예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 기사들도 지치기 마련이고 부상자 혹은 무고하게 목숨을 잃는 이들이 늘어날 뿐입니다.”
부상자나 사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급하게 전쟁을 끝내려고 성급하게 판단해 무리하게 적군을 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카시스라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킬리언은 잘 알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줄이기 위해서 카시스는 맨 앞에서 최대한 적군을 많이 베며 제 기사들을 지키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이냐?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것을.”
“돌아온다고 약속했으니 돌아올 겁니다. 저는 그녀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마중을 나고 싶다.
“못 말리겠군. 너에게 제일 큰 난관은 내가 아니라 마린족의 왕이겠지. 너는 내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 말한 녀석이니.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크레타 공주에게 뭔가를 했다고 들었는데.”
“크레타, 그게 누굽니까?”
킬리언의 입에서 나온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카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반응에 킬리언은 황당해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 네 전 약혼녀 이름이다. 기억 정도는 해 줘야지.”
“기억해야 하는 거였습니까?”
킬리언은 멍하니 카시스를 바라보다 피식 바람 빠지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기억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파르미온의 공주의 이름 같은 건 관심 없었다. 어차피 파혼할 테니 이름을 알아봐야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언제나 파르미온 공주라고 불렀었다.
“공주가 파르미온 왕국으로 돌아오던 중 마차 사고 당했다고 들었는데. 너도 참 잔인하구나. 공주는 그 사고로 절름발이가 되었다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아닐 리가 있나?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네 연인인 그녀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네가 그냥 보내 줬을 리가 없지. 게다가 전 약혼자가 직접 파르미온 왕국 멸망에 앞장서고.”
“동정하십니까?”
“너는 동정하는 척이라도 해 주지 그러느냐?”
“동정하고 싶지도 않고 할 마음도 없습니다. 제 연인에게 지독한 독을 쓰려고 했습니다.”
“진짜로 사용하지는 못했지. 레안드로가 해독제로 바꿔치기해서 줬다 들었는데.”
“그 해독제가 제 연인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하아, 네가 공주를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카시스는 그 독하다는 카르마의 독을 제 연인에게 먹여 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는 보고를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아일라에게 크레타가 하려 한 짓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있었다.
킬리언은 그런 카시스를 보며 카시스가 적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했다.
카시스는 제가 한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세 달 안에 파르미온 왕국의 중심지인 왕궁까지 밀고 들어갔다. 파르미온 왕국의 기사들도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 봤지만 대마법사를 뛰어넘는 실력을 지닌 황제와 마검사와 소드마스터가 있는 플루투스 제국군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파르미온 왕궁과 수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왕과 공주를 찾아. 난 환영족을 찾겠다. 레안, 내놔.”
윌리엄과 기사들에게 지시한 카시스는 대뜸 레안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레안드로는 자수정 빛의 수정같이 생긴 마도구를 카시스에게 건넸다.
“직접 찾게?”
“찾으라고 보낸 놈은 계속 놓치니 내가 직접 나서야지. 넌 윌리엄 경하고 왕과 공주를 찾아.”
“찾아서 살려 놓을까? 죽일까?”
“살려 놔. 그들을 처벌하는 건 폐하의 몫이다. 나는 거기까지는 관여 안 해.”
파르미온 왕국을 무너트리는 것을 보여 줬으니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공주는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하고. 그녀가 아일라에게 하려던 하던 짓을 제가 대신 돌려주었을 뿐이다. 제가 즉결 처분할 수 있으나 아직 폐하의 명이 없는 이상은 살려 두는 것이 맞았다.
카시스는 환영으로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환영족을 찾아낼 수 있는 마도구를 가지고 환영족을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