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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2화 (92/100)

92화

카시스는 마도구의 반응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마도구의 반응이 제일 강한 곳에서 멈춰 선 카시스는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안에서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것도 아주 위험한 느낌의 힘. 이런 힘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그렇게마도구의 반응이 제일 강한 곳에서 멈춰 선 카시스는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대체 뭔가, 마르피네스!”

“뭐기는 뭐겠습니까? 폐하. 이 왕성 자체가 어비스 마왕을 불러들일 마법진이지요. 어비스의 마왕님이 이 세계에 군림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쾅! 쾅!! 콰아앙-!!

“누가 그렇게 놔둔다고 했나?”

카시스가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마르피네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칼리스토 대공!”

저를 소리쳐 부르는 파르미온 왕국의 국왕을 무시하고 카시스는 그의 뒤에 있는 마르피네스를 바라봤다.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다녔군. 네가 마지막 남은 환영족인가?”

“무슨 말이오? 환영족이라니? 여기 환영족이 어디 있다고?”

“너, 우리 앞에 나타났던 녀석 맞지? 속이려 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네 녀석들이 일전에 플루투스 제국 황성을 휘저어 놓은 덕분에 이 마도구를 만들 수 있었거든. 역시 한 놈이 더 있었군.”

“데르키오스 님!”

콰앙-!!

눈을 감았다 뜨며 말하는 카시스가 한쪽 귀퉁이를 힐끗 보더니 검에 오러를 실어 검기를 날렸다. 그러자 마르피네스가 소리쳤다.

“괴물 같은 녀석.”

“데르키오스 님, 괜찮으십니까?”

“이, 이게 무슨?”

카시스가 날린 검기에 한쪽 팔을 다친, 파란 피부에 흰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파르미온 국왕이 심히 당황했다.

“낯이 익구나.”

“예, 저도 본 적이 있는 녀석입니다, 폐하.”

“네 녀석이 살아 있을 줄이야. 잘도 숨어 있었군. 이름이 데르키오스였던가? 내 어머니의 배후, 어비스의 마왕을 제국에 불러들이려 했던 페르세우스의 수하.”

모습을 드러낸 팔의 부상을 당한 남자를 보며 킬리언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칼립스를 살려낸 것도 에류시온 공국에 보냈던 것도 네 녀석이었나? 그때는 조금 상대하기 힘들기는 했지. 최고의 성기사인 앨피어스 대공이 없었다면 말이야.”

“그래서 동생을 두 번이나 죽였나?”

데오키오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킬리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런 정체를 모르는 것을 동생으로 둔 적이 없는데. 그 녀석에게는 나하고는 다르게 선황폐하의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내 어머니께서도 참, 대단한 분이시지. 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그런 것을 네녀석들 손을 빌려서 만들어 내고 말이야.”

“잡담은 그만하고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내가 아우께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해 줘야지.”

“대체 이게 다 무슨 일.”

“일부러가 아니라 정말 몰랐던 건가?”

카시스가 파르미온 국왕의 말을 자르며 무심히 바라봤다.

한심하다고 욕할 수도 없군. 우리도 황후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황궁 내 저 녀석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몰랐으니까.

‘왜 그렇게 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지?’

‘피부색이 특이해서요.’

‘피부색이 특이해?’

‘왜 당신은 피부가 파란가요?’

그때 당시 스펜서 후작 영애였던 황후 폐하께서는 페르세우스를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황궁 연회에서 한 사람을 계속 쳐다보자 형님이 물었을 때 피부색이 특이하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는 형님을 뒤로하고 그 남자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은 왜 피부색이 파란가요?’

그때 사위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해졌었다.

“이번엔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아, 묻는 게 멍청한 건가? 문밖에서 들으니 어비스의 마왕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다 했나? 역시 네 녀석들은 살려 두면 안 돼.”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고 왕족까지 이용하는 건 여전하군. 하지만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칼립스도 없는데 무슨 수로 불러들이려고 한 거지?”

칼립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 몸을 이용했겠지만, 이제 이 세상에 칼립스는 없다.

“네 녀석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를 어쩌지? 우리는 알아야겠는데.”

“폐하.”

카시스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내가 왕궁을 둘러보다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는데, 네 녀석 짓인가?”

“······.”

“아, 왕궁에 들어오기 전 수도 여기저기에도 이런 것이 있던데. 아주 기분 나쁜 기운이라 눈에 띄는 것들은 내가 전부 없앴다. 그리고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찾아내는 대로 없애라고 지시를 내리고 오는 길이지.”

“그건.”

카시스가 킬리언이 내보인 검은 수정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카시스, 흑마석이다.”

“네 녀석들이 압바듐님의 재림을 또 방해하는구나.”

데르키오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당연히 방해해야지. 위험한 것을 불러들이려는데, 우리는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았나? 이런 게 굴러다니는 것을 보다 알게 됐지. 왕궁과 수도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라는 것을.”

“설마, 저 자식이.”

“네가 생각한 그 설마가 맞는 것 같구나. 카시스.”

“쓸모없는 목숨들 유용하게 사용하면 감사해야지.”

“여전히 인간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하는군. 네 녀석들은.”

카시스는 검을 힘주어 잡았다.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건가? 파르미온의 왕. 저 녀석들이 파르미온 국민들을 제물로 바치고 위험한 녀석을 불러들이려 했다는 거다. 거기에 네 목숨도 포함되어 있지.”

“그, 그게 무슨!”

파리미온의 왕은 경악하며 마르피네스를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너희같이 쓸모없는 목숨, 그렇게라도 사용되는 걸 감사히 여겨야지? 안 그래?”

“뭐라고?”

“피하십시오. 데르키오스 님.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누구를 허수아비로 보는 거지?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가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은가 보지.”

킬리언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한 손을 뻗어 파르미온 왕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동어 없이 불의 마법을 시전했다.

“네 녀석, 페르세우스 그자의 부하였지.”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인간!”

“데르키오스 님!”

킬리언의 입에서 페르세우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얼굴이 와락 구겨진 데르키오스가 킬리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앞을 카시스가 가로막았다.

“잘도 그분의 일을 두 번이나 방해하다니!”

“얼마든지 방해해 주지. 인간으로서 말이야. 그리고 너 같은 녀석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죽은 페르세우스가 하려던 일을 네 녀석이 이어 받아 하려는데 당연히 막아야 하지 않겠나.”

카시스가 힘을 실어 데르키오스를 날려 보냈다. 그 막강한 힘에 못 이긴 데르키오스가 벽에 처박혔다.

“내가 저런 녀석에게 당할 실력은 아니잖아.”

“왜 오셨습니까?”

“저 녀석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러니 방해 못 하게 수하를 상대해 주십시오.”

“이봐, 카시스. 지금 내게 수하를 상대하라고 하는 건가? 내가 약해 보여?”

“부상당하지 말라고 제가 맡겠다는 겁니다. 폐하께서 다쳐서 돌아가시면 황후 폐하께서 속상해하십니다.”

‘언제는 내가 지켜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약하지 않다며.’하는 킬리언의 말이 뒤에서 들렸지만 카시스는 그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한발 앞으로 나섰다.

“하아, 그래 알았다. 그럼 이 지긋지긋한 추격전을 끝내 보도록 할까? 카시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건방진 인간들, 데르키오스 님께는 손 못 댄다.”

“네 상대는 나라니까.”

카시스에게 달려드는 마르피네스를 향해 불덩어리가 날아들었다. 마르피네스는 불덩이를 간신히 피한 뒤에 킬리언을 노려봤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마법진이 불안해졌어도 발동시키기엔 아직 늦지 않았어.”

“카시스, 막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허수아비로 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킬리언에게 대답한 카시스가 땅을 박차고 데르키오스에게 돌진했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인간들! 페르세우스 님을 비겁한 수로 죽인 주제에!”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우리를 너희와 똑같이 보지 마라. 그리고 누가 비겁한 수를 썼다는 거지? 비겁한 수를 쓰는 것은 네 녀석들이겠지.”

콰앙-!

데르키오스의 힘과 카시스의 힘이 부딪히자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파장이 일어났다.

“너희는 존재해서는 안 될 녀석들이다.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고 인간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너희는 보호해 줄 필요도 없고.”

아일라의 동족인 마린족처럼, 인간을 싫어하는 이종족들은 얼마든지 있다. 마린족, 인어족 엘프족, 수인족등 그들 중에 공격성을 드러내고 인간들을 공격하는 자들도 있다. 인간들이 그들에게 하는 짓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환영족 이자들은 다르다. 어둠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어둠의 종족들 중 하나였다. 어둠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어둠은 아니다. 플루투스 제국의 쌍둥이 수호룡이 담당하는 것이 바로 어둠이었으니까. 하지만 환영족은 에펜하르트의 어둠에 속하지 못한 사악한 존재들이다.

고대 문서에도 환영족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어비스 마왕을 소환한 적이 있었다. 소환된 어비스 마왕을 다시 돌려보내고 봉인한 것이 바로 플루투스 제국의 쌍둥이 수호룡이라는 사실을, 전에 환영족을 조사하다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환영족은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어비스 마왕에게 종속된 종족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이 세상에 놔뒀다가는 언제 어디서 저희 제국 내에서 일어났던 일이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실제로 환영족의 이번 무대는 파르미온 왕국이지 않은가.

“너희를 그냥 뒀다가는 세상은 멸망하고 말아.”

폐하께서 제국에서 칼립스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녀석 몸속에 있던 어비스 마왕의 영혼의 조각 일부와 그 힘이 채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몇 년 전 에류시온 공국에서 껍데기만 칼립스였던 어비스 마왕의 힘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 덧붙이기도 했었다.

에류시온 공국의 왕성은 그래도 어비스의 문이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니었다. 앨리어스 대공이 신성력이 그만큼 강했기에 반파로 끝났지만, 어비스의 문이 조금이라도 열렸던 제국의 황궁은 완전히 무너지고 수도 플란트도 삼분의 일 정도가 부서졌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어비스의 문이 완전히 열렸던 것이 아닌지라, 그 정도로 끝난 것이란 사실이다. 그 문이 온전히 열렸더라면 제국은 그날 멸망했을 거다. 아니, 제국뿐이 아니라 세상이 멸망했을 거다.

그때 제국의 피해는 막심했다. 그날 열린 어비스 문을 닫느라 선황 폐하께서 돌아가셨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윌리엄의 아버지 전 러셀 후작 또한 그날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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