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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90화 (90/100)
  • 90화

    “친하지 않으면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공주한테 말을 막 하면서 말이죠.”

    분명 카시스는 웃고 있는데, 나는 왜 저 미소가 무섭지?

    “친하기 때문에 막 대할 수 있는 겁니다. 윌리엄도 가끔 제게 그러니까요. 친구로 편하게 대할 때 말입니다. 아일라, 그대는 너무 둔감합니다.”

    “저 하나도 둔감하지 않아요!”

    “본인만 모르는 둔감함이겠지. 멍청이.”

    “야, 너 지금 누구 보고 멍청이라는 거야? 너나 그 말버릇 없는 것 좀 고쳐.”

    제이드의 말에 아일라가 바로 반응해서 돌아보았다. 그러자 카시스가 아일라는 다시 저를 보도록 돌려세웠다.

    “누구기는 누굽니까? 공주님이지.”

    “하아-, 자꾸 이러면 보내기 싫어지는데.”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가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지금 뭐 한 겁니까?”

    “음, 당신이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요.”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습니까?”

    카시스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더니, 아일라의 허리를 끌어안아 입을 맞췄다.

    “내가 저 꼴을 왜 봐야 하냐?”

    “너는 왕비님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 왜 그러는 거야?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엄연히 공주님의 각인자야. 너, 혹시 질투해?”

    “미쳤냐?”

    멜로디의 말에 제이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무리 인간이 싫어도 사람을 봐 가면서 적당히 하라고. 더군다나 부상이 제일 심한 녀석이 왜 그렇게 날을 세워.”

    “은혼단 먹어서 괜찮아.”

    “그으래-?”

    싱긋 웃은 멜로디가 팔꿈치로 제이드의 복부를 쳤다.

    “악! 뭐 하는 거야, 멜로디.”

    그리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허리를 숙이며 고통을 호소하고 식은땀까지 흘리는 제이드를 보며 멜로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일라도 놀란 듯 제이드를 바라봤다.

    “그렇게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 너 은혼단 먹은 거 맞아?”

    “젠장, 상처 터졌잖아.”

    “뭐? 상처가 터져? 너 은혼단 안 먹었지? 그러면서 먹었다고 거짓말한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너 나한테 말을 예쁘게 하라면서 넌 말투가 그게 뭐야?”

    “지금 내 말투가 문제야!”

    “은혼단이 듣지 않는 것이냐?”

    고통을 호소하는 제이드의 옷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본 제랄드의 표정이 굳었다.

    “은혼단이 듣지 않았다면, 혹시 신의 힘에 당한 거야?”

    “······.”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정말 아니야? 그런데 은혼단을 먹었다면서 왜 안 들어? 솔직히 말해. 정말 아버지가 신의 힘으로 너를.”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이드가 아일라의 말을 막았다.

    “멜로디 말대로 은혼단을 먹지 않았을 뿐입니다. 금방 나을 것 같아서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만하고 가시죠. 돌아가서 쉬고 싶습니다.”

    제이드는 정말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일라는 뒤를 돌아봤다. 제이드의 상태도 상태였지만 어머니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카시스, 이제 그만 가 볼게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 지킬 테니 걱정 말아요. 그러니 당신도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 지켜요. 만일 다치게 되면 제가 준 은혼단을 꼭 먹고요.”

    “알겠습니다. 그대의 아버지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그대를 빨리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저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당신 옆에 설 거예요.”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을 잡아 제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가기 전에 말해 주십시오. 그대의 각인자와 반려는 저뿐이라고.”

    “내 영원한 각인자와 반려는 카시스 당신뿐이에요.”

    “더 기다려야 합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제이드의 목소리에, 아일라는 카시스를 향해 빙긋 웃으며 다녀오겠다 인사했다. 그리고 이내 세레스와 제이드 일행과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

    아일라가 보이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카시스는 그 자리에서 바다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은 카시스뿐만이 아니었다.

    “너도 가도 된다. 다니엘.”

    “아닙니다. 저는 이제 이곳이 더 편합니다.”

    “가족이지 않나. 그리고 동생을 걱정하는 것 같던데. 동생과의 관계도 회복해야 하고.”

    “······.”

    “그대 한 명 없다고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바뀌지는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돌아와도 된다는 겁니까?”

    “그대의 고향에 남든 내 곁으로 돌아오든, 그건 그대의 선택이고 자유야.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리고 지금은 그대가 돌아가 아일라의 힘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

    한 번 무너진 정권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러니 다니엘이 아일라의 힘이 되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다녀와.”

    카시스의 말에 마음을 다잡은 다니엘은 허리를 숙여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겨 두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다니엘을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다니엘 하나 없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그만 돌아가지. 할 일이 많아.”

    카시스가 뒤돌아 윌리엄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는 지나가며 말했다. 윌리엄은 바다를 한 번 힐끗 보곤 카시스의 뒤를 따랐다.

    파르미온 왕궁, 크레타의 방 안에서는 그녀가 소리치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플루투스 제국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파르미온으로 돌아오던 중 마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다쳤다. 의원은 왕과 그녀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평생 다리를 절뚝이는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악-! 이게 뭐야? 뭐냐고?”

    “공주님, 진정하세요.”

    “닥쳐,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것 때문에 나는 파티에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당장 의원을, 제대로 된 의원을 부르란 말이야!! 내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제대로 된 의원을 데려와! 이전보다 다리도 잘 안 움직인단 말이야!!”

    “크레타.”

    성질을 부리던 크레타는 문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봤다.

    “아바마마.”

    “다리가 더 아픈 게냐?”

    “아바마마, 저희 왕국에는 그렇게도 뛰어난 의원이 없나요? 어째서 제 다리 하나 치료하지 못하는 거죠?”

    “진정하거라. 내 사랑스러운 아가 크레타.”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대체 이 검은 반점들은 뭐고? 왜 걷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다리가 잘 안 움직이는 거야. 처음보다 절뚝거리는 것이 심해졌어.

    “이대로는 칼리스토 대공비가 될 수 없다고요!”

    “오, 아가. 칼리스토 대공비가 되는 것은 포기한 것이 아니더냐?”

    “제가 미쳤다고 그 자리를 포기하겠어요? 저는 절대로 포기 못 해요. 반드시 돌아가서 그 계집애를 짓밟아 버릴 거예요. 그 계집이 어떤 나라의 공주인지, 아직 못 찾으신 거예요?”

    내 자리를 빼앗는 것들은 용서 못 해.

    “휴우-, 그게 말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아틀란이라는 나라는 없었단다.”

    “없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아틀란의 공주라고 했다. 설마 거짓말을 한 거야. 그냥, 평민 계집이었던 거야. 대공도 그 계집한테 속은 것이 분명해. 내가 돌아가서 그 계집을 자근자근 밟아 쫓아내 주겠어.

    평민 따위가 칼리스토 대공의 아내가 되려고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대공비에 어울리는 건 바로 나라고.

    “가만두지 않겠어. 감히 대공 전하를 홀리다니, 마녀가 분명해.”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폐하! 허억! 허억! 여기 계셨군요, 폐하! 큰일 났습니다!”

    그때 다급하게 파르미온의 왕을 부르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소란인 게냐? 지금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거늘.”

    “프, 플루투스 제국에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지금 칼리스토 대공이 이끄는 기사단이 파르미온 왕국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무어라?!”

    “지금 뭐라고 했어?”

    파르미온 국왕의 표정과 크레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가 뭐라더냐?”

    “화, 환영족을 찾는 데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그들을 숨겨 준 죄를 묻겠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는 협조를 했거늘. 파혼 통보를 하고 내 딸을 멋대로 돌려보낸 것은 플루투스 제국이 아니냐? 그리고, 환영족을 숨겨 줬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더냐!”

    “그것이······, 환영족의 반응이 최종적으로 저의 왕궁에서 사라졌다고······.”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제, 제게 그리 말씀하셔도 소신은 알지 못하옵니다, 폐하.”

    “대체 이유가 무엇이야? 갑작스런 파혼에 내 딸을 돌려보낸 것도 이해가 가지 않거늘.”

    파르미온의 왕은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딸을 돌려보낸 일에 대해 항의를 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대답뿐이었다.

    협조를 하는 척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플루투스 제국의 새까맣게 어린 황제가 어찌 알았다는 말인가.

    “어린 황제놈이 우리 왕국을 칠 구실을 만들었던 게로군.”

    파르미온 왕, 데이먼이 으득 이를 갈았다.

    “우리가 환영족을 숨겨 줬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왕궁에서 환영족 반응이 사라졌다고? 헛소리. 우리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마르피네스에게 가야겠어.”

    데이먼은 인상을 찌푸린 채 크레타의 방을 나갔다.

    그 시각, 파르미온 왕국의 국경 마을 텐슬롯 성문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시스는 타인의 피를 뒤집어쓴 채 제게 달려드는 적군을 베어 내고 있었다. 거의 도륙 수준이었다.

    “으아악-!! 칼리스토 대공이다. 도망쳐!”

    “어디를 가시려고.”

    도망치는 기사와 병사들을 레안드로와 윌리엄과 팔콘 기사단이 뒤를 쫓으며 베었다.

    “정말이지 봐주는 게 없어. 우리 대공 전하는.”

    “잔말 말고 움직여라. 레안드로. 연락책들 전부 처리해.”

    “예, 예. 그러지요. 누구의 명인데 거스르겠습니까? 국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최대한 늦게 도착하게 하라는 말이지.”

    “알아들었으면 움직여. 조용히 움직여 처리하는 게 네 일이잖아.”

    카시스의 일갈에 레안드로가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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