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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9)화 (69/110)
  • 69화

    “호프웰은 추격 중입니다. 이미 마이어는 물론이고 중부에서도 벗어났다는군요. 아마 남부로 향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거.”

    페터가 설명하며 지도 몇 장을 내밀었다. 알렉시스가 그것을 살펴보는 동안 페터는 이복형의 뒤에 정렬한 기사들에 시선을 두었다. 대부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후를 호위하던 자들이었다.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이리 본격적으로 황궁을 장악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르시고 어머님은.’

    애초에 형님의 군사로 형님을 죽이려는 생각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북부 성곽의 구조와 군사 배치도군. 어디서 났지?”

    “이사벨라 윈스턴 양이 호프웰과 함께 황후궁에 방문했다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아마 협력자라고 생각됩니다.”

    “북부 군사를 마이어로 진군하게 만들 예정이었군.”

    마이어의 군사는 발텐 공작 휘하에서 종군한 이들이 많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을 예상하고 준비한 대책인 듯했다. 그러나 북부에 소식이 닿기도 전에 진압될 줄은 미처 예상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윈스턴 양은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습니다. 폐하의 시해 건에 어느 정도로 가담했는지를 확인한 후 적절한 처벌을 내릴 예정입니다.”

    “내란이자 반역에 가담하였으니 처형해야지. 군사를 사사로이 움직이려 했으니 극형이어야 할 테고.”

    “……네. 그래야겠죠.”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판단에 페터는 터진 입술을 깨물었다. 비린 피 맛이 나서 오히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반역의 명분인 저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페터는 옆에 두었던 황태자의 인장이 담긴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뭐 하자는 거지?”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형님께서 오르십시오.”

    결심에 찬 페터의 말에도 알렉시스는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침묵이 이어지자 오히려 초조해진 것은 뒤에 선 셴베르크 백작과 라일런트 자작이었다.

    알렉시스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여전히 상자는 받지 않은 채였다.

    “그럴 생각 없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폐하께서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겁니다. 뒤늦게나마 바로잡아 보려 함이니, 형님께서.”

    “쓸데없이 감상에 젖어 허우적거릴 시간에 지진 대비나 하는 게 어떠냐.”

    그는 무감하게 이복동생을 내려다보았다.

    “해결 순서는 그리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더구나 국상도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형님.”

    “명색이 황태자이면 회피하려 들지 마라.”

    울컥해서 말문이 막힌 페터가 대꾸하지 못하는 사이에 알렉시스가 이어 말했다.

    “반역 사건의 주동자는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한시바삐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

    미련 없이 일어선 알렉시스는 부관과 황실 기사를 거느리고 떠났다. 마음만 먹으면 황태자 따위는 구금한 뒤 옥좌에 앉을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정말 황위에는 관심이 조금도 없나 봅니다.”

    셴베르크 백작이 페터의 손에서 떨어져 카펫 위를 구르고 있는 인장 상자를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페터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정말 그러신 것 같군.”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고 호위 기사를 이용해 저를 죽이고 스스로 황태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반면 저는 형제와 아버지를 죽이려는 어머니의 계획을 알지도 못한 주제에 속죄라는 명목으로 자리를 넘기고 물러날 생각만 했다.

    페터는 인장을 상자에서 꺼내어 쥐고 일어섰다. 그의 말처럼 여태까지 저는 도피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러면 안 됐다.

    발텐 공작은 반역의 의도가 아닌 이상 황후를 죽일 수 없다. 그러니 자식인 제가 벌하는 수밖에 없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궁정 회의에서 올라온 이번 반역 사건에 대한 처결안과 국상에 대한 진행안을 바쁘게 살피는 페터를 향해 셴베르크 백작이 물어왔다.

    “의사 말로는 좀 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쯤으로 죽지 않아.”

    “그래도.”

    “자꾸 떠들 셈이면 나가. 부관으로서 날 도울 생각이면 가만있고.”

    “제가 뭘 도우면 됩니까?”

    페터는 말없이 국상 준비에 관한 서류를 던져 주었다. 셴베르크 백작은 깃펜을 챙겨 자리에 앉으면서 일에 몰두한 황태자를 흘깃 쳐다봤다.

    막 성인식을 치른 또래 남자들과 달리 유독 희고 가녀린 손가락과 마른 어깨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는 노쇠한 황제 부부가 늦게 본 자식인 데다 너무 곱게 자라 그런 것이라 여겨 별 신경 쓰지 않았던 외형이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황태자가 여자라는 사실은 오히려 제가 쥐고 흔들어야 하는 약점이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시선을 돌려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 *

    알렉시스는 서둘러 공작저로 돌아갔다. 금방 돌아온다고 약속했는데 벌써 며칠이나 귀환이 늦어져 버렸다.

    그는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찾았다. 무사히 돌아간 걸 알면서도 사라졌을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

    “캐슬린.”

    침실 문을 열어젖히자 차를 마시고 있던 캐슬린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공작님?”

    “미안해. 빨리 돌아오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있어서 늦었…….”

    서둘러 상황을 설명하던 알렉시스는 갑자기 다가와 안기는 캐슬린에 놀라 말을 멈추었다.

    “괜찮아요.”

    부드럽게 대답하는 그녀는 현실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정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차향과 제게 안긴 따뜻한 몸은 단번에 피로를 없애 주었다. 알렉시스는 작은 몸을 으스러질 정도로 꼭 끌어안았다.

    “다친 곳은 없나요?”

    “응.”

    “그럼 됐어요.”

    꿈일까.

    저를 올려다보며 큰 눈을 예쁘게 휘어 웃는 웃음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하지만 짜릿할 정도로 황홀했다. 그는 캐슬린의 뺨을 매만지다 말고 상처 입은 귀를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여긴 왜 이렇지?”

    “살짝 다쳤는데 별거 아니에요. 이미 치료도 받았고요.”

    아프니 만지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그의 손을 막아 낸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돌아오셨으니 쉬셔야죠.”

    “널 보는 게 쉬는 거야.”

    “옷이나 갈아입으시고 씻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곁에 못 오게 할 테니까.”

    그녀에게 못 이기는 척 이끌려 제 침실로 돌아와 욕실로 들어섰다.

    “씻고 나오세요. 전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게요.”

    손수 욕실 문을 닫고 사라지는 캐슬린에게서 예전의 모습이 엿보였다. 제게 사랑을 고백하며 안기던 그때의 얼굴이었다.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기대하기에는 이르다 스스로 타일렀으나 저를 향해 웃고, 먼저 안기는 캐슬린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았다. 욕실에 준비된 세정제와 갈아입을 옷에도 모두 그녀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감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황제 자리와 지금을 선택하라면 그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하고 말 정도였다.

    씻는 동안에도 저를 담고 웃었던 연청색 눈이 자꾸만 아른거려 시간을 지체했다. 알렉시스가 옷을 갈아입고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캐슬린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제대로 드시지 못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방금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미소로 그를 맞았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올라가 쉬지 않고.”

    “드시는 거 보고 올라갈게요.”

    사실 허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 같아서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저를 보고 있었다.

    “페터는 무사해.”

    그 말에 캐슬린의 눈이 커졌다.

    “궁금해할 것 같아서.”

    “아…… 다행이네요. 국상도 치러야 하고 다른 일도 많을 테니 무리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황태자로 자랐으니 이쯤은 알아서 할 수 있을 거야.”

    “네. 전하는 책임감 있는 분이니까요.”

    “더 궁금한 건 없어?”

    캐슬린이 차분히 대답했다.

    “없어요.”

    마차가 부서진 것을 보면 마정석이 폭발했을 텐데. 설마 못 봤나?

    “정말인가?”

    “제가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나요?”

    알렉시스는 식기를 내려놓고 고백했다.

    “널 지키려고 마차에 마정석을 박아 뒀어. 위협이 있을 때 폭발하도록.”

    “……….”

    “그래서 마차가 스스로 불탄 거야.”

    “그랬군요.”

    말간 얼굴은 별로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놀라거나 의아해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을 줄 몰랐어요.”

    오히려 감사의 말을 전하기까지 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 캐슬린이 말했다.

    “스스로 나서는 것보다 당신의 보호 아래 있는 게 더 안전하니까요. 그렇죠, 알렉시스?”

    그렇지 않다고 답하려는데 이어지는 호칭에 말문이 막혔다.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 행동은, 카르미네 산맥에서 조난되었을 때 들었던 것이 환청이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이렇게 부르면 안 되나요?”

    되묻는 그녀는 알렉시스가 그토록 바랐던 용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기쁨이 전신에 차올랐다. 그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작은 몸을 품에 안자, 화답하듯 그녀가 팔을 제 허리에 둘렀다. 미칠 정도로 좋았다. 그렇게 평생토록 저를 얽어매 놓아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알렉이라고 불러.”

    “……알렉.”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

    생모 외에는 아무도 불러 주지 않았던 그의 진짜 이름.

    사랑하는 여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그의 이름은 다시 생을 갈망하게 할 만큼 황홀했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미처 보지 못했다.

    품에 안긴 아내의 미소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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