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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70)화 (70/110)

70화

황제의 장례는 페터의 주관하에 검소하게 치러졌다. 대외적으로는 어려운 민생을 굽어살핀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라 알렸으나, 실제로는 황제가 시해당했으며 그 주동자가 황후라는 사실을 웬만한 귀족들은 대부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장례식에 황후가 불참한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황태자가 황제의 후계자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며 발텐 공작이 이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는 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나요, 부인? 아무리 서자라 해도 황족은 황족이고, 명분도 있는데요.”

“맞아요. 듣자 하니 폐하께서 서거하시던 날 발텐 공작 각하께서 상당히 고생하셨다고요. 각하가 아니었으면 정말 마이어가 어찌 되었을지 두렵네요.”

장례식에 참석한 귀부인들이 캐슬린이 들어 주기를 바라며 은근히 알렉시스를 두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캐슬린이 정면만 응시한 채 대꾸하지 않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 자리로 하나둘씩 돌아갔다.

예식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후계자인 페터가 관 속에 누인 황제의 몸을 금빛 천으로 덮고, 알렉시스가 반쯤 열려 있던 검은색 대리석 관을 마저 덮었다.

대신관의 축문과 함께 장엄하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귀족들은 모두 일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제의 죽음을 기렸다.

이윽고 예식이 모두 끝났다.

참석한 이들이 순서대로 퇴장하는 동안 알렉시스와 페터가 가까이 다가왔다.

“캐슬린.”

애써 웃으며 페터가 손을 내밀었다.

“습격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캐슬린은 부드럽게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이 무척 수척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더 바빠지실 텐데 몸 잘 챙기세요. 제국은 전하께 달려 있으니까요.”

“그럼요. 죄를 갚으려면 이 한 몸 불살라도 모자란 것을요.”

페터가 장난처럼 말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캐슬린이 잡은 손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작은 쪽지가 전해졌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즉위식도 그렇고, 준비해야 할 일이 꽤 많아요.”

“네. 얼른 가 보세요.”

“다음에 볼 때는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즉위식과 작위 수여식을 함께 할 테니 시간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페터가 눈을 찡긋하고는 퇴장했다. 캐슬린은 알렉시스가 보지 못하도록 쪽지를 소맷자락 속으로 넣어 숨기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작위 수여식이라니, 이번에 공을 세운 귀족이 있나요?”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 공신의 작위를 높여 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 공신의 범위란 대개 외가거나 처가였다. 젊은 황제의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페터의 경우에는 둘 다 해당하지 않으니 아마 작위 수여가 없을 거라고 다들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내게 대공 작위를 주겠다더군.”

알렉시스는 감흥 없는 투로 말하며 캐슬린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해 밖으로 나갔다.

“내 손을 잡겠다는 뜻이지. 황후를 탑에 가두고 다시 내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럼 대공 전하가 되시는 거네요. 축하해요.”

캐슬린이 미소를 지었다. 알렉시스는 그녀의 미소는 아름답다고 느꼈으나 왠지 뜻밖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원래라면 모친을 처벌해야 하는 페터를 먼저 걱정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황후가 평소에 캐슬린을 어떻게 대했는지 떠올리니 납득이 되었다. 오랫동안 핍박당하고 힘들어했으니 황후의 말로가 통쾌할 수도 있었다. 알렉시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말했다.

“영지도 더 내려올 거야. 세금 징수권을 다 네게 줄 테니 원하는 영지가 있다면 말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면 루치를 위해 가지고 있든지.”

예상하지 못한 말인 듯 캐슬린은 잠깐 멈칫하는 듯하더니 우선 마차에 올랐다.

“어차피 발텐의 이름으로 받은 영지라면 당신의 것이기도 하고 저희의 것이기도 하잖아요. 다를 건 없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알렉시스는 세금 징수권을 루치에게 양도하여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못 박아 놓고자 했지만, 굳이 캐슬린이 그러고 싶지 않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과 캐슬린, 루치가 같은 이름 아래 묶여 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듣기 좋았다.

그녀와 제가 비로소 가족이 된 것 같아서였다.

“그럼 작위 수여식이 끝난 후 지방 영지 순회 일정을 잡지.”

지진이 어느 규모로 어떻게 날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자신과 페터가 있으니 하루아침에 큰 규모로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만, 마이어의 저택은 지진에 조금도 대비되어 있지 않으니까 떠나 있는 편이 나았다. 반면 지방 영지에 새로 축조한 성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대규모 지진과 해일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했으니 말이다.

“이런 시국에 우리가 마이어를 떠난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거예요.”

“내겐 무엇보다 널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이야.”

무슨 뜻이냐는 듯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시스는 여태껏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던 황실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트리벨리언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지진은 황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제국이 처음 세워질 때부터 내려온 신탁이지.”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간략하게 설명을 듣는 동안 캐슬린은 처음에는 놀란 듯했으나 점차 차분해졌다.

“그 비밀을 황실의 일원은 모두 알고 있었겠군요.”

“……그래.”

무겁게 긍정하면서 알렉시스는 다시금 깨달았다. 과거에 그녀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저 역시 그녀를 의심하고 경계했기에 알리지 않았고, 페터 역시 그녀와 가까웠지만 황실이 더 우선이었기에 침묵했을 것이다.

비겁하지만 알렉시스는 이제 그녀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생겨 고백할 수 있었다.

자신이 남부 전갈의 독을 끝까지 해독하지 못해 페터가 자식을 낳기 전에 죽거나, 혹은 예정대로 반란을 일으켜 황제와 제가 죽게 된다면 일어날 대규모 지진에 대비해 지방 영지의 성을 보수한 거라는 중간 과정은 생략했다.

캐슬린은 이제 제 아내가 되어 옆에 있을 테니까.

“당분간 루치를 데리고 떠나 있자.”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초조한 마음을 숨긴 채 물었는데 예상보다 수월한 답이 돌아왔다.

“그래요.”

선선히 대답한 그녀는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함께 가요.”

“정말인가?”

“네. 상관없어요.”

가슴이 벅차올랐다. 울며 원망한다면 몇 날 며칠 동안 사과하고 설명할 각오마저도 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쉽사리 저를 이해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죄책감이 덮쳐왔다.

“더 빨리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래요. 행선지가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미리 짐을 챙겨 둘게요.”

곧 공작저에 도착했다. 캐슬린은 마차에서 내린 후, 침실로 함께 가려는 알렉시스를 부드럽게 거절했다.

“오랜만에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렸더니 좀 피곤하네요. 쉬고 싶어요.”

“그럼 식사 시간에 보지.”

그가 부드럽게 오른쪽 뺨에 키스했다. 캐슬린은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떨어지며 본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알렉시스의 침실과는 반대편에 떨어진 계단을 밟았을 때, 캐슬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말해 줘 보았자 무슨 소용일까.’

그제야 황후가 왜 알렉시스를 그리 싫어하는데도 죽이지 않고, 공작의 후계자에 대한 집착이 지나칠 정도로 컸는지 이해가 갔다. 페터가 여자이니 그녀로서는 발텐 공작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페터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신탁이 예견한 재앙까지 막지는 못할 테니까.

뜻밖이기는 했으나 황실의 비밀은 그녀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제 욕심 때문에 캐슬린이 가진 단 하나의 능력을 무력화했고, 질투심 때문에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를 멀리 내쫓았다.

그가 한 짓을 몰랐다면, 황실의 비밀을 늦게나마 알려 준 것에 대해 기뻐하고 감동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늦게 알려 주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루치가 정말로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며 안심하라고 위로라도 했겠지.

그러나 그가 저를 잡아 두기 위해 숨긴 비밀은 황실의 비밀보다 더 끔찍한 배신으로 느껴졌다.

루치가 누구의 아들인지 그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시녀들도 거절하고 홀로 들어가 문을 잠근 후 페터가 건네주었던 쪽지를 살폈다.

[북쪽에 사람을 보냈지만 요제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신전에서도 그가 나타나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는군요. 카르미네로 진입한 것은 확인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다시 정보가 전해지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캐슬린은 쪽지를 몇 번 반복해 읽은 후 잘게 찢어 화병에 넣었다. 물에 젖은 종이의 잉크가 번져 곧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종이의 글씨가 흐릿해질수록 캐슬린의 결심은 뚜렷해졌다.

‘다시 북쪽으로 가야겠어.’

요제프는 이곳에서 발텐 공작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저와 약속했듯이 겨울 요정의 근거지를 찾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카르미네로 진입 후 돌아오지 않았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그 사람들을 찾아 설득 중이거나, 아니면 아직 근거지를 찾아 헤매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저를 돕기 위해 힘쓰고 있을 테니 그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작위 수여식 이후에 떠나자.’

마이어를 떠나 있자고 제안한 것은 그가 먼저니 떠날 준비를 해도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 발텐이 그러했듯 캐슬린도 그를 거짓말로 속이고 배신할 수 있었다.

그가 저를 의심할 여지 없이 믿고 안심하는 지금 캐슬린은 떠날 생각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그가 저를 전부로 생각하고 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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