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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68)화 (68/110)
  • 68화

    다친 건 아닐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조여왔다. 그럴 순 없었다. 아무 걱정 없이 안전하게 제 옆에 있어야 할 여자였다. 다시 그녀를 놓칠 순 없었다.

    이윽고 수풀 너머에 가려진 은발이 보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이 부었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그는 안도하며 두 팔을 벌렸다. 그녀가 다시금 제게 와 안길 거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위태롭게 흔들리던 연청색 눈이 저와 마주치더니 약간 떨렸다.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저처럼 안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마치…….

    그러나 캐슬린은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왔다. 알렉시스는 제가 잘못 본 것이라 여기며 으스러지게 힘을 주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라고 수백 번 다짐하며.

    * * *

    캐슬린은 알렉시스에게 안겨 말에 올랐다. 그는 캐슬린이 얇은 옷을 입은 채 밖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이슬을 맞아 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착하면 바로 욕실로 가. 뜨거운 물에 씻으면 좀 나아질 거다.”

    등 뒤에서 따뜻하게 안아 오며 건네는 말에 걱정이 가득한 데다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몰랐다면 위험에 빠진 저를 구하러 온 구세주라고 여겼을 법했다.

    캐슬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공작저에 도착했다. 알렉시스는 그녀를 말에서 내려 준 후, 제 망토를 끌러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고 부축해 본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엉망이 된 차림새로 돌아온 공작 부부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 마님. 이게 무슨…….”

    “마님을 모셔라. 충격이 컸을 테니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두툼한 옷과 담요를 가지고 와.”

    “네, 주인님!”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캐슬린은 달려 나온 에밀리의 부축을 받아 안쪽으로 향하며 알렉시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캐슬린.”

    간절한 목소리에 우뚝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윽고 그가 다가와 두 손을 잡았다.

    “옆에 있어 주고 싶지만, 아직 황궁 상황이 정리되지 않아서 나는 옷만 갈아입고 바로 다시 나가 봐야 해.”

    “……네. 알았어요.”

    “곧 다시 올게.”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캐슬린은 에밀리와 함께 반대쪽 계단으로 향했다.

    “마님, 귀가 왜 이러세요?”

    물이 데워지는 동안 흙과 피가 묻은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주던 에밀리가 놀라 물었다.

    “귀걸이가 빠지면서 찢어졌나 봐.”

    “아프셨을 텐데, 덧나기 전에 얼른 카벨 선생님을 부를게요.”

    “그보다 에밀리, 이거.”

    캐슬린은 챙겼던 귀걸이 한쪽을 내밀었다. 이음새가 부서지긴 했지만 아직 장식은 멀쩡했다.

    “공작님께서 주신 귀걸이야. 혹시 어느 디자이너 작품인지 알고 있니?”

    “글쎄요. 저도 주인님이 마님께 전달하라셔서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래.”

    아니기를 바라는 부정과 아닐 수 없다는 확신이 번갈아서 엎치락뒤치락했다. 일단 귀걸이를 천에 싸서 보석함에 넣은 후, 상념을 지워 내고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는데도 소용없었다. 몸이 계속해서 떨리고 어지러웠다.

    목욕을 마치고 카벨 선생에게 찢어진 귓불을 치료받은 캐슬린은 에밀리를 포함해 사용인들을 모두 물렸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 침실을 벗어났다.

    ‘힘이 다시 사라졌어.’

    사라지는 기색도 없었는데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작은 얼음 결정마저 만들 수가 없었다. 캐슬린은 이전에 정원에서는 조금이나마 냉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 그쪽으로 향했다.

    고요한 정원을 거닐며 얼음 결정을 불러내려 시도했으나 몇 번이나 실패했다. 그러나 캐슬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막 미로 정원에 다다랐을 때였다. 미약하게 손에 냉기가 어렸는데, 온실 쪽으로 몇 발짝 걸음을 떼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다시 미로 정원으로 들어가자 손바닥 위로 아주 얇은 살얼음이 끼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 온실 쪽으로 향하자마자 다시 녹았다.

    ‘온실에 실마리가 있어.’

    커다란 유리로 만들어진 반구형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면에서 은은한 불빛이 났다. 이전에 알렉시스가 루치를 데리고 이곳에 왔던 기억이 났다. 야광주라도 구해서 붙여 놓은 건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 본 캐슬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캐슬린은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광물을 매만졌다. 벽면에 박혀 있는 것은 크기와 색, 무늬가 모두 달랐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가 선물해 준 이후로 내내 착용했던 귀걸이 장식과 비슷한 무늬도 있었고, 마차에 박혀 있던 마정석과 같은 색도 있었다.

    ‘모두 마정석이었어.’

    제 주변을 마정석으로 둘러싸 놓았다.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이 확신으로 바뀌어 자신을 덮쳐 왔다.

    알렉시스 발텐은 저를 무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가진 단 한 가지 능력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 사용할 수 없도록 묶어 두었다.

    캐슬린은 아름답게 빛나는 불빛 사이에서 그만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 * *

    며칠 후, 황후가 황제 시해 혐의로 서쪽 탑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일에 가담한 황궁의와 호위 기사들 또한 모두 처형되었다고 했다.

    수도 마이어 한복판, 그것도 황궁 안에서 일어난 황제 시해 사건에 모두가 숨죽이고 몸을 낮추는 분위기였다. 방계 황족인 발텐 공작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마님, 제가 어제 잠깐 외출했다가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요.”

    뛰어다니던 루치를 다른 시녀에게 안겨 주고 돌아온 에밀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호프웰 백작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대요. 영지에 내려가신 것도 아니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더라고요. 혹시나 시해 사건에 그분이 가담한 건 아닐까요?”

    “글쎄. 아직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캐슬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생에도 호프웰은 발텐을 죽이고 공작위를 차지했던 적이 있었고, 이번 생에서는 황후와 분명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군사를 지원했을 확률이 높았다.

    “마님,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시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침실로 뛰어 들어와 말했다.

    “주인님께서 보내셨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다치셔서 황궁에 더 머무르신대요.”

    “전하께서?”

    “네. 황궁의가 모두 처형당해서 치료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나 봐요. 다행히 크게 다치신 건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셨어요.”

    그날 알렉시스의 검과 옷이 온통 피로 젖어 있던 일이 떠올랐다. 황태자는 황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을 테고, 알렉시스는 페터를 도왔을 테니 황궁에서 치열하게 각축전이 벌어졌을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신관을 부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요제프라도 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툼을 좋아하지 않는 페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큰 충격을 받았을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게요. 저희 쪽에서 신관을 보내 전하를 치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에밀리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장난감을 정리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치유력을 지닌 신관은 보기 드문 편이었다. 마이어에서 제일 가까운 신전인 델라포스에서도 치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신관은 요제프와 대신관뿐이었다. 그런데 발텐 공작가에서 신관을 보낸다니?

    “저번에 어떤 시골에서 찾아왔던 사람 말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관 같더라고요. 그렇지, 베스? 그 사람이 널 치료해 줬다고 했잖아.”

    “맞아요. 그때 제가 정원에서 모종 심는 걸 돕다가 손을 벤 적이 있었거든요. 그분이 본관 후문에서 나오다가 절 보고 치료해 주셨어요.”

    캐슬린은 에밀리와 시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골에서 찾아왔던 사람이라니, 그게 누구지? 공작저에 손님이 왔던 적이 있었어?”

    공작저에 찾아온 손님을 안주인인 그녀가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캐슬린은 누구를 초대한 적은 없었지만 찾아온 사람을 몰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자가 치유력을 지닌 신관이라니, 발텐 공작이 함구하라 명하지 않은 이상 그녀가 모를 수는 없었다.

    알렉시스가 마정석에 이어 제게 숨긴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걸까.

    제발, 아니기만을 바라는 캐슬린에게 에밀리의 말이 냉혹하게 가슴을 찔러 왔다.

    “이름은 밝히지 않아 모르겠어요. 주인님께서 불러 한참 이야기하신 후에 그대로 내보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난도질당한 듯 가슴이 아파 와 겨우 그렇게만 물었다.

    “어디서 왔는지 말한 건 없니?”

    “글쎄요. 저는 마주친 적이 없어서요. 베스, 기억나는 거 있어?”

    다른 시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로브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지 못했지만 갈색 머리였어요. 눈은 녹색이었고요. 신전에서 오셨는지를 여쭸는데 아니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오, 뭐라고 하는 마을에서 왔다고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요제프였다. 캐슬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가 돌아오면 그의 말을 먼저 들어야겠다고 억지로 달래고 있었던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다. 쥐고 있던 찻잔이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아서 겨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람이, 공작님과 이야기한 후 그대로 돌아갔다고? 공작님을 보러 온 게 맞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방랑하는 견습 신관 같았는데, 주인님께서 후원금을 많이 내시니 개인 후원을 부탁하러 와서 거절당했나 봐요. 그분이 나가고 나서도 다시 돌아와서 본관 후문을 한참 두들겼는데 주인님께서 열어 주지 말라 하셨거든요.”

    알렉시스 발텐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예전과 같이 냉정하고 오만한 이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제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잔인하게 거짓말을 숨길 뿐.

    - 이젠 너를 믿으니까. 그자를 해하려 하지도 않고 널 만나려는 것도 막지 않겠다.

    이미 요제프를 저와 마주칠 수 없도록 멀리 내쫓았으면서 그리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달콤한 말을 속삭인 것이다.

    ‘그를 믿지 말았어야 했어.’

    처음부터 저를 사랑했던 여자를 상대로 승리하기는 얼마나 쉬웠을까…….

    캐슬린은 밀려오는 비참함에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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