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순자네 주막]이라는 허름한 표지판에 불빛이 들어왔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주택 골목에 위치한 가게는 오늘따라 유난히 높은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자~ 건배~~”
가게 구석 쪽에 놓인 테이블에서 다정과 언니들이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다정의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술자리를 갖게 된 세 자매였다.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지~!”
애정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하며 단박에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다정은 평소 술을 적당히 마실 줄 아는 스타일이라면, 그녀의 언니들은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그 덕에 언니들과 술을 마시고 나면 늘 정신을 잃는 다정이었다.
오랜만에 셋이 뭉친 술자리가 즐거운지, 그녀들은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들 곁으로 순자가 다가오며 안주를 놓았다. 탁자 위에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곱창 볶음과 모락모락 김이 나는 홍합탕이 놓였다. 안주가 나온 기념으로 애정은 다시 한번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 막둥이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하여!”
“위하여!”
투명한 소주잔이 탁,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이어 세 자매의 입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은 후, 눈을 찡그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크~~~~”
쓰디쓴 알코올향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누가 자매 아니랄까 봐, 그녀들 모두 술이 들어가자마자 잘 익은 감처럼 두 볼이 주홍빛을 띠었다.
취기가 기분 좋게 오른 애정이 다정에게 말했다.
“우리 쪼그맸던 막둥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결혼을 하다니. 세월 참 빠르다.”
그녀의 말에 소정도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게.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보면서 자기도 절대 결혼 안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말이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결혼식 전날 결혼을 파투 낸 애정에 이어, 둘째 언니인 소정마저 결혼생활 1년 만에 이혼도장을 찍자, 다정도 결혼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다정이 너만큼은…… 우리와 달리 오래오래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뭐, 도훈 씨가 어련히 잘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잔에 가득 찬 술을 또 한 번 들이켠 애정은 다정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맏언니로서 모범은 되지 못할망정, 늘 너한테 좋지 않은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그렇게 말한 애정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살면서 준 거라곤 구박밖에 없고, 좋은 말도 제대로 못 해준 것 같은데…… 이렇게 착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다정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언니들이 왜 해준 게 없어. 언니들이 없었더라면 난 외롭고 쓸쓸해서 하루도 못 견뎠을 거야.”
언니들은 어릴 때부터 다정에게 짓궂은 장난을 많이 쳤다. 대신 자신들을 제외한 누군가가 다정을 괴롭히는 꼴은 절대 못 봤다.
그리고 힘든 일이 닥칠 때면, 다정을 가장 먼저 챙기는 그녀들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바쁜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정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늘 곁을 지켰다.
“언니들은 줄곧 내 편이었잖아.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엔 내 편이 되어줄 거잖아.”
다정이 애틋한 눈망울로 언니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언니들을 내가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
동생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애정과 소정이 훌쩍였다.
“네가 집에서 나가고 나면, 네가 너무 보고 싶을 거야…….”
“나도 언니들이 그리울 거야.”
어릴 때부터 여태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언니들이다. 한때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둥지를 떠나는 아기 새처럼 애틋한 표정을 짓자, 소정이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에이, 참. 좋은 날 앞두고 왜 질질 짜고 난리야.”
그녀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보면 너 어디 멀리로 시집가는 줄 알겠다.”
“쿡, 그러게.”
셋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잔을 부딪쳤다. 좋은 날을 앞두고 마신 술이어서인지 평소보다 달게 느껴졌다. 잔을 비우기 바쁘게, 다시 술이 채워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취해 셋은 몇 병째 마시는지도 모르고 술을 들이켰다.
어느덧 테이블 위에 술병이 여러 개 쌓일 즈음, 애정의 눈치를 살짝 보던 다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언니는 그분이랑 다시 만나는 거야?”
그분이라니?
애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차성욱 씨 말이야.”
다정의 말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반박했다.
“만나기는. 내가 그 남자를 왜 만나니?”
“에이~ 저번에 집 앞에 데려다 주는 거 봤는데, 뭘.”
소정까지 목격담을 더하자, 애정은 살짝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냥…… 하도 밥 먹을 사람이 없다고 하길래, 몇 번 같이 밥 먹은 것뿐이야.”
“어머나~ 언제부터 언니가 혼밥 먹는 사람 챙겼다고 그래?”
소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언니도 솔직히 형부한테 아직 마음이 남은 거 아니야?”
“야. 형부라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 번 형부였으면 계속 형부지, 뭐.”
소정은 시원한 홍합탕을 꿀꺽 들이켠 후, 말했다.
“그리고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차성욱 씨가 우리 형부라면 적극 찬성이야.”
“왜?”
그녀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이게 많잖아.”
“어휴. 이 속물.”
“이왕이면 돈 없는 사람보단 돈 많은 사람이 좋지, 뭐.”
당당한 어투로 말하던 소정은 애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기억 안 나? 형부가 연애시절에 언니한테 지극정성이었잖아.”
“…….”
“솔직히 잘했던 걸로 따지면, 팀장님보다 형부가 더 대단했지.”
가만히 듣고 있던 다정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팀장님이 훨씬 더 자상하지. 우리 팀장님은 기본적인 성품부터 타고난 사람이거든?”
그녀의 말에 소정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얘 좀 보소. 벌써부터 지 신랑 편드는 거 봐. 남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다정을 보며 혀를 내두르던 그녀는 다시 애정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죽고 못 살던 둘 사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서로가 아직 미련이 남은 거라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
“내가 봤을 때 언니 짝으로 차성욱보다 더 나은 사람 만나기는 어렵거든.”
그 말에 애정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말했잖아. 내 인생에 결혼은 두 번 다시 없다고.”
그녀는 투명한 술잔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난 성욱 씨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미래를 꿈꿀 생각이 없어.”
단호한 음성에 소정과 다정은 더 이상 어떤 말도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두워진 애정의 낯빛을 살피던 소정은 큰 목소리로 우울해진 분위기를 덮었다.
“알겠어. 그 이야긴 그만하자. 어차피 결혼이란 게 남이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왜 도훈과 연애할 때는 그토록 결혼을 강요했는지 다정은 궁금했다.
소정은 앞에 놓인 잔을 시원스럽게 원샷한 후,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 그까짓 결혼 안 하고 사는 게 낫지. 내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결혼은 무덤이야.”
회한이 서린 그녀의 눈빛엔 지나간 나날 속 힘들었던 장면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지만, 후회의 크기를 따지면 전자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게 함정이지.”
소정의 말에 다정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결혼정보회사 다니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않아?”
더군다나 결혼을 앞둔 동생을 두고 할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고.
동생의 날이 선 눈빛에 아차 싶었던 소정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 물론 예외는 있지. 예를 들면 도훈 씨같이 완벽한 남자를 남편으로 둔 경우에는 말이야.”
그러면서 방금 한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했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소정이 각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밝은 톤으로 말했다.
“자, 자. 우리가 매너 없이 술을 너무 오래 방치했다. 삐지기 전에 얼른 마셔주자~”
그녀는 술이 가득 담긴 잔을 올려 보이며 다정에게 말했다.
“너 결혼하고 나면, 이렇게 셋이 뭉치기도 쉽지 않아. 오늘 하루는 코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고!”
소정의 기운 찬 목소리에 다정과 애정도 웃으며 잔을 들었다. 쨍, 소리를 내며 가볍게 서로의 잔이 부딪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들뜬 분위기 속에 순자가 그녀들 곁으로 다가왔다. 순자가 푸근한 미소와 함께 다정에게 물었다.
“우리 다정이 결혼 준비는 잘 돼가?”
“네, 이모.”
“허구한 날 셋이 몰려다녀서 평생 저렇게 다니면 어떡하나 했더니, 이 이모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순자는 호호호, 웃으며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평소 다정이 즐겨 먹던 닭똥집과 해물파전이었다. 다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희 이거 안 시켰는데요 이모.”
“이건 서비스야! 아니, 술값도 오늘은 이모가 쏠 테니까 원 없이 마셔!”
“네?!”
“우리 다정이가 결혼을 한다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먹고 싶은 거 있음 뭐든지 말해, 알겠지?”
순자는 호쾌하게 말한 후, 다정이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그녀의 말에 소정과 애정이 만세를 외쳤다.
“꺄아, 역시 우리 이모밖에 없다니까! 순자 이모 최고!”
순자의 과감한 지원에 분위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맛있는 안주와 시원한 술과 화끈한 수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충족한 마당에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세 자매는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원 없이 수다를 떨며, 술을 들이켰다.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빠른 속도로 늘어갔고, 다정의 얼굴도 빠르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
“다정 씨.”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있었던 다정은 낯익은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다정은 좀처럼 뜨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음.”
그녀의 눈앞에는 말쑥한 슈트를 차려입은 한 남자가 서있었다. 바로 도훈이었다.
놀란 다정이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누가 전화를 계속 안 받길래 걱정이 돼서.”
“아…….”
이제 막 정신이 든 다정은 눈을 비비며, 한쪽에 둔 핸드폰을 집었다. 언니들과 술을 마시다가 취해, 핸드폰이 꺼진 줄도 몰랐던 그녀였다.
“아, 미안해요. 배터리가 나갔나 봐요.”
자신을 걱정해 이곳까지 온 그에게 미안했는지, 다정이 이어 말했다.
“오늘은 언니들이랑 술 마신다고 말했잖아요. 집은 언니들이랑 가면 되는데, 뭐 하러 왔어요?”
그러자 도훈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해 보이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럴 줄 알고요.”
그의 말에 맞은편 의자를 본 다정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함께 있어야 할 언니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라? 어, 언니들은요?”
“방금 나가셨어요. 2차로 노래방 간다면서.”
“…….”
다정이 기가 차는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술에 취해 잠든 동생은 애인한테 넘기고, 둘만 밤을 불태우러 노래방에 간 모양이었다.
“이 언니들이 정말……. 어떻게 동생을 혼자 두고 가냐.”
“날 불렀으니, 혼자 둔 건 아니죠.”
도훈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네. 물론이죠. 저 안 취했…….”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려던 다정의 눈앞이 순간 어질하며,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못 잡고 기울어진 그녀의 몸을 도훈이 붙잡았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도훈이 물었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겁니까?”
“얼마 안 마셨어요.”
“저게 얼마 안 마신 겁니까?”
도훈이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다정이 변명하듯 말했다.
“어, 언니들이 거의 다 마셨어요. 저는 한 병…… 아니, 두 병…… 아니 세 병밖에 안 마셨어요.”
“세 병……밖에?”
도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세 잔도 아니고, 세 병이라니.
도훈은 이렇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게 둔 두 언니들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자신은 혹여 그녀의 몸이 상할까 봐, 술 한 번 제대로 권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었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다정이 술에 취해 느릿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언니들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제가 결혼하고 나면, 술 마실 기회 많지 않을 거라면서……오늘만 특별히 달린 거예요. 나도 오늘은 좀 마시고 싶었고요.”
“왜 기회가 없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만나면 되죠. 누가 안 말립니다.”
웬일로 쿨하게 대답하는가 싶던 도훈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단, 마실 거면 집에서 마셔요.”
김샌 얼굴로 다정이 말했다.
“치, 집에서 마시면 무슨 재미예요.”
“밖에서 여자 셋이 마시면, 어떤 놈이 꼬일지 어떻게 압니까? 결혼해도 예쁜 건 똑같을 텐데.”
당당한 그의 말에 다정이 살짝 민망해하며 주위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사람들이 도훈의 말을 듣고 슬쩍 둘을 보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훈은 여전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며 말했다.
“그렇다고 나 유부녀라고 이마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 눈에만 그렇게 예뻐 보인다는 것을 언제 깨달을는지.
다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시원시원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가게 주인인 순자였다. 그녀는 푸근한 미소와 함께 도훈에게 말했다.
“우리 다정이 신랑이 왔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여전히 인물 훤칠한 것 좀 봐. 꼭 송송헌처럼 잘생겼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예뻐 죽겠는지, 순자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엄마 미소로 도훈을 바라보던 순자가 손을 뻗어 그의 엉덩이로 향했다.
“어쩜 이렇게 곱게 생겼을꼬~”
그렇게 말하며 순자는 어린 손자 대하듯이 엉덩이를 퉁, 퉁 가볍게 쳤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길에 도훈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 채, 뻣뻣하게 굳었다.
“…….”
“언제든 또 놀러 와요. 내가 아주 맛있는 음식 해줄라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당황한 마음을 뒤로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도훈이 다정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모든 현장을 목격한 다정은 가게를 나오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그녀의 웃음에 기분이 나쁘다는 듯, 도훈이 강하게 인상을 썼다.
“웃지 말아요.”
“크큭.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어요.”
회사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못 대하는 그 냉철한 남자가 흔히 말하는 궁디팡팡을 당하다니.
그때 도훈의 표정을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만큼 진귀한 광경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봤으면 아마 쓰러졌을 텐데. 아, 아쉬워. 크큭.”
“…….”
도훈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는지도 모른 채, 다정은 그를 놀려대느라 바빴다. 그녀의 두 볼은 취기가 아직 남아있는 듯, 주홍빛으로 불그스레했다. 그녀가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훗, 아까 도훈 씨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죠? 정말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
“…….”
다정은 제 말에 인상 쓰는 그의 모습조차 재밌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술 때문에 없던 용기가 생긴 걸까. 다정은 방금 순자가 했던 행동을 흉내 내듯, 손을 뻗어 그의 엉덩이를 퉁, 퉁 두들겼다.
“우리 애인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장난삼아 그의 엉덩이를 두들기던 다정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다갈색 눈썹이 살짝 위로 솟구쳤다.
매끈한 피부 아래로 전해지는 이 단단한 근육과 탄력 있는 촉감…….
그의 탄탄한 둔부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토실토실한 제 엉덩이와는 전혀 달랐다.
다정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의 바지에서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귀 끝까지 빨개진 그녀를 보며 도훈이 물었다.
“당한 건 난데, 왜 당신 얼굴이 빨개져요?”
“팀장님 운동하고 왔어요?”
“아니요. 회사에서 바로 온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자면 저를 변태 보듯이 볼 것 같아서, 다정은 말을 아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도훈이 가늘게 눈을 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음…….”
이런 상황에 그에게 통하는 건 딱 하나뿐.
다정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애교 필살기를 선보였다.
“도훈 씨 생각이요~”
“…….”
“헤에-”
평소에는 애교에 인색한 다정이었지만, 오늘은 술에 취해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되레 입을 헤, 벌리고 도훈을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도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애교에 뜨겁게 솟구치는 욕망을 자제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두 뺨 끝이 불그스레해진 도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런 상태로 집에 들여보내면 내가 혼날 것 같은데.”
그는 다정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술 좀 깨고 들어갈래요?”
그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 홀린 듯 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입매를 올리며, 그녀를 자신의 차로 태웠다.
***
푸른빛을 머금은 달이 어두운 밤을 밝히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세워진 가로등 아래, 짙은 푸른색 세단이 멈춰 섰다.
날렵한 디자인의 차 안에는 성욱과 애정이 앉아있었다. 세련된 슈트 차림의 성욱이 핸드브레이크를 올리며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당신 집이 조금 더 멀었으면 좋았을걸.”
차창 밖으로 자신의 집을 본 애정이 무릎에 두었던 가방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조수석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애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성욱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왜 그래?”
“…….”
묵묵히 앉아있던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당신 만나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녀의 말에 성욱의 긴 눈매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뒤로한 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그래? 내가 오늘 뭐 실수한 거 있어?”
“실수는 내가 했지.”
다정의 일을 도와준 답례로 그와 함께 식사를 했던 날부터 잘못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함께한 식사는 곧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애정은 꽤 여러 번 그와 다시 만났다.
애정이 너무 안일하게 굴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을 때, 성욱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 없으면 난 누구랑 밥 먹으라고?”
“혼자서 밥 못 먹을 나이는 지났잖아.”
“아니, 못 먹겠어. 당신과 함께 먹을 땐 무슨 음식을 먹어도 행복했는데, 혼자서 먹을 때는 목이 턱 막힌 것처럼 힘들어.”
주저 없이 내뱉는 그의 당당한 말에 애정이 제 입술을 잠시 머금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혼자 밥 먹는 게 그렇게 힘들면, 좋은 사람 찾아서 얼른 결혼해.”
그녀는 살짝 시선을 내린 채, 이어 말했다.
“그러면 평생 혼자 안 먹고 살 수 있겠네.”
무뚝뚝하게 말을 전한 애정은 곧장 문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성욱의 강인한 음성이 그녀를 붙잡았다.
“내 인생에 신부는 한 명뿐이야.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내 옆자리에 머문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어.”
그의 말에 살짝 흔들리는 애정의 눈망울.
성욱의 강렬한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애정아. 나한테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
“너를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난 널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애틋함과 절실함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차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그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애정의 심장이 속절없이 뛰어왔다.
애정은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결혼식 전날,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고백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애정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만든 분위기에 절대 넘어가선 안 되었다.
누군가를 믿고, 그 믿음에 배반당하는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애정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처절했던 순간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애정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녀의 눈망울도 제자리를 찾았다.
“나 역시 내 인생에서 결혼을 꿈꾸었던 상대자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야.”
그녀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결혼’이란 단어가 고통과 절망, 후회로밖에 연결이 되지 않아. 5년 전 일이 나에겐 그만큼 고통스러웠고, 잊기 힘든 과거가 된 거야.”
“…….”
“바보같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믿고, 미래를 꿈꾸는 일 따위는…… 이제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망울이 성욱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빛 속엔 미련 대신 원망과 후회만이 담겨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성욱은 가슴이 타는 듯이 아려왔다.
애정이 말했다.
“당신도 내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내 맘을 흔들지 말아줬으면 해.”
“…….”
“잘 살아. 더는 보지 말자, 우리.”
그 말을 끝으로 애정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와의 관계를 완벽하게 잘라내면 가슴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이며 가슴에 알알한 통증이 일었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어서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집 앞에 거의 다다른 순간이었다.
애정의 손목이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끌어당기는 그의 손힘에 애정의 몸이 저절로 홱 돌아섰다. 그녀의 앞에는 언제 쫓아왔는지 모를 성욱이 서있었다. 뛰어왔는지 그의 입술 사이론 거친 숨결이 흘러나와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애정은 그가 붙잡은 손목을 제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놔.”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은 그였다. 되레 더욱 꽈악 붙잡는 그의 손길에 애정이 외쳤다.
“놓으라고!”
“싫어.”
성욱의 강인한 눈빛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놔.”
그는 애정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말했다.
“이게 어떻게 잡은 손인데.”
“…….”
“내가 어떤 각오로 널 다시 만났는데.”
“…….”
“이대로 보내면, 얼마나 지독한 나날들을 겪어야 되는지 뻔히 아는데…….”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어떻게 놔.”
애정의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가 시선을 내려 성욱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행여 저를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꼭 붙잡은 그의 손이 안쓰럽고, 애틋했다.
애정은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말했다.
“놔줘. 나는 더 이상 당신과…….”
그 순간이었다. 애정의 손목을 홱 제 쪽으로 잡아당긴 성욱이 다른 한쪽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애정의 붉은 입술을 그대로 삼켰다.
“읍……!!”
성욱은 당황한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짙은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이 깊숙이 파고들고, 입 안 곳곳을 헤집어댔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밀려드는 입술과 혀에 애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애정이 그를 밀어냈다.
“하아, 성욱 씨, 그만……!”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감촉이 오고가며 애정의 몸을 달구었다. 마치 제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격렬한 키스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온몸이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이 어떤 관계였는지, 앞으로 그와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춰,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기 바빴다.
5년 만에 닿은 감촉과 온기였다. 둘은 너무도 오랜만에 느끼는 서로의 숨결을 정신없이 갈구했다.
애정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이미 이성의 끈은 놓은 지 오래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뜨거운 입맞춤이 밤새 이어졌다.
***
창문 사이로 야트막이 들어오는 햇볕이 애정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눈을 살짝 찌푸리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 안으로 베이지색 천장이 들어왔다.
애정은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지?’
낯선 천장과 낯선 침대. 그리고…….
‘헉?’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던 애정은 낯설지 않은 남자가 제 옆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경악했다.
그녀의 옆에 곤히 잠들어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성욱이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애정은 다급히 제 모습을 살폈다. 실오리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애정의 얼굴이 붉게 번졌다. 그녀는 가슴 부근까지 이불을 올렸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어젯밤 일을 떠올려보았다.
분명 어젯밤, 애정은 집 앞에서 성욱에게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거친 키스로 자신의 말문을 막았다.
그 키스가 모든 문제의 발단이었다. 온몸을 송두리째 앗아갈 것 같던 그 격렬한 키스는 애정의 가슴 깊이 묻어놓았던 감정을 화수분처럼 쏟아지게 했다.
서로의 혀와 입술을 진득하게 탐닉하던 둘은 자연스레 더 깊은 감각을 원하게 되었다. 둘의 몸이 밀착되고, 손길이 오고가면서 뜨거운 본능이 치솟았다. 열렬히 타오르는 시선 속에 둘은 원하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더는 지체할 필요 없이 다시 차로 올라탔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누워있는 호텔 방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
모든 회상을 마친 애정의 낯빛이 흑색으로 번졌다.
‘망했다.’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결심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말았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그저 단 한 번의 키스에 그 무거웠던 결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왜 하필이면 이 사람과…….’
그동안 연애를 너무 안 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 남자가 키스를 너무 잘한 탓이었을까.
이유가 무엇이었든 애정은 너무도 나약하게 무너져버린 제 모습을 후회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내가 미쳤지!!’
백번 자책을 해 봤자,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 애정은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는 성욱의 얼굴을 살폈다.
새까만 속눈썹을 내리깔고 잠이 든 그의 얼굴은 아침인데도 반짝반짝 광채가 흘렀다. 그 아래 보이는 남자다운 목젖과 쫙 뻗은 어깨, 그리고 탄탄한 가슴은 지나치도록 섹시했다.
그 넓고 탄탄한 가슴에 기대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성욱의 자태는 매혹적이었지만, 지금은 넋 놓고 그를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이곳을 뜨는 게 좋겠어.’
그가 깊게 잠든 사이에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애정은 두리번거리며 제 옷이 어디 있는지부터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의 옷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벗어던진 걸로 기억하는데…….’
애정이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훑으며 옷을 찾던 때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등 뒤에서 울리는 굵은 음성에 애정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녀가 새하얘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있는 성욱의 모습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성욱 몰래 빠져나가려다 들킨 것보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는 사실이었다. 애정은 두 손과 팔로 최대한 몸을 가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하하. 도망이라니.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그녀의 말에 성욱이 피식 웃었다. 도톰한 입술 끝을 올리는 모습이 이 와중에도 섹시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보며 애정은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성욱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뒤로 향했다.
어느새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성욱. 그가 뜨거운 눈빛으로 애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범죄자라고 불러도 마땅하지.”
“?”
“내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갔으니까.”
애정의 눈동자가 폭풍우의 습격을 받은 돛단배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오…… 오글거려.’
머릿속으로는 손발이 낙지처럼 오그라드는 말임을 인식하면서도, 가슴이 제멋대로 쿵쾅쿵쾅 뛰어댔다. 심장이든 뇌든 어디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성욱은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그녀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다. 이제 마음뿐만 아니라, 내 몸까지 훔쳐갔구나.”
그 한마디에 어젯밤 그와 함께한 뜨거운 순간들이 빠르게 애정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어젯밤 일은…….”
“기억 안 난다고 할 셈은 아니지?”
기억 안 난다고 할 참이었건만, 그가 빠르게 선수 쳤다. 눈치가 빠른 건 여전했다.
“어젯밤 우리가 몇 번이나 했는데, 그걸 기억 못 할 수가 없지.”
낯 뜨거운 말에 애정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성욱은 입매를 씩 올렸다.
애정이 난감한 얼굴로 어떻게 이 상황을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불쑥 제 얼굴 앞까지 다가온 그가 애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그러쥐어 자신을 보게 했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그의 뜨겁고 강렬한 눈빛이 애정에게로 향했다.
“두 번 다시 너 안 놓쳐.”
그렇게 말한 성욱은 양팔로 그녀의 몸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몸이 홱 떠오른 애정이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얼굴이 빨개진 그녀를 안고 성욱이 향한 곳은 침대였다.
그는 애정을 바로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곤 그녀의 위로 몸을 실으며 말했다.
“나 아침에 더 장난 아니었던 거 기억하고 있지?”
‘암. 알고 있지.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가 아니잖아! 애정이 어느새 짙은 욕망으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외쳤다.
“자, 잠깐 기다…….”
그녀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덮치는 성욱의 입술에 그대로 묻혔다.
어젯밤 못지않게 뜨거운 아침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
결혼식을 삼 일 앞둔 어느 날 오후.
도훈은 협력 회사 미팅에 다녀오면서 경기도에 위치한 납골당을 찾았다.
그곳은 다정의 아버지가 안치되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몇 달 전 다정과 함께 한 번 들렀지만, 오늘은 도훈 혼자 이곳에 걸음을 했다.
그는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납골당 실내로 들어갔다.
[한대영]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애틋해지는 이름이 도훈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정의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새하얀 유골함 옆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대영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다정이 늘 자신에게 짓던 환한 미소와 비슷하게 느껴져 가슴 한편이 아릿해졌다.
도훈은 그의 사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인사를 한 그는 다시 고개를 올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삼 일 후면 다정 씨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버님도 함께하면 무척 기뻐하실 텐데, 안타깝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대영의 사진을 바라보는 도훈의 눈동자에 서글픔이 번졌다.
“언젠가 꼭 만나 뵙고 드리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이제야 하게 되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도훈은 지난 21년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다정의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깜깜한 고속도로 위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던 열 살 꼬마 앞에 나타났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때…… 제 어머니를 구하려고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갈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어린 저를 지나치지 않고 달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훈은 사진 속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다정의 가족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도훈은 그렇지 못했다. 늘 가슴 한편에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간직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동자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감사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훈은 맺힌 눈물을 닦고, 다시 그를 응시했다.
“다정 씨랑 잘 살겠습니다. 슬픈 일도, 모진 일도 더는 겪지 않도록 제가 잘 살피겠습니다.”
그는 굳건하고 강인한 눈빛으로 대영을 보며 말했다.
“아버님이 보고 싶어 하셨던 모습들…… 제가 대신해서 지켜보겠습니다.”
이어 진심 어린 다짐을 남겼다.
“다정 씨가 축복받으면서 결혼하는 모습도, 예쁜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키우는 모습도, 그 아이가 자라 행복을 주는 모습도, 가족들과 남편에게 평생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모습도…… 모두 다 제가 곁에서 눈에 담아놓았다가, 먼 훗날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나직한 음성이 납골당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그때까지…… 꼭 평안하십시오.”
도훈은 다시 고개를 반듯하게 숙였다.
***
거리 풍경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든 가을의 오후.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온 한신 그룹 기획팀 직원들은 들뜬 얼굴로 신부 대기실을 찾았다.
그들은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입이 쩍 벌어지며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너무 예쁘다~~~”
요란한 환호성의 중심에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다정이 서있었다.
빛나는 티아라를 머리에 쓰고, 아래로 갈수록 풍성하게 퍼진 벨라인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우아함이 넘쳐흘렀다.
여직원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
“다정 씨, 정말 여신 같다~”
“이렇게 예쁜 드레스는 처음 봐요! 결혼 축하해요~!”
“딴 사람 보는 것 같아.”
너도 나도 칭찬과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가운데, 춘희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팀장님이 다정 씨를 보는 눈빛을 보면서 이날이 올 거라고 믿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그녀는 따스한 미소와 함께 이어 말했다.
“다정 씨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대단한 것 같아. 그 냉철하고 완벽했던 팀장님을 품절남으로 만들었으니 말이야. 앞으로 팀장님과 다정 씨 앞에 행복한 미래만 가득하길 바랄게.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다정 씨.”
진심 어린 축하에 다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마워요. 춘희 씨.”
“자자,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같이 사진 찍자고.”
의자에 앉은 다정 옆에 동기와 선배들이 와르르 다가가 섰다.
“자, 찍습니다.”
사진기사의 말에 모두가 방긋 웃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여태껏 이런 식으로 수많은 하객들을 맞이하다 보니 입가에 경련이 날 정도로 많이 웃은 날이 되었다.
사진을 찍은 여직원들이 다시 한 번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반가운 얼굴이 대기실을 찾았다.
“우와. 정말 몰라보겠군요.”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현우였다.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현우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정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정말 눈부시게 예쁘네요.”
“하하. 화장발, 드레스발인걸요.”
“아니에요. 이렇게 예쁜 신부는 진심으로 처음이에요.”
그의 말에 다정이 쑥스러운 듯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우는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결국엔 이런 날이 오는군요. 결혼 축하해요, 다정 씨.”
“고마워요, 현우 씨.”
그들이 따스한 말을 주고받는 사이, 갑자기 냉랭한 기운이 대기실 문 앞에서 느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에 현우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기실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도훈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넘기고,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리만큼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현우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현우를 보며 말했다.
“신부 대기실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잊으셨나 본데, 저도 다정 씨랑 같은 기획팀 사원이라고요. 축하인사 하려고 왔죠.”
맹수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동자를 본 현우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팀장님도 참. 이 좋은 날까지 그렇게 무서운 눈빛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있죠.”
그들의 대화를 듣던 다정은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어휴. 축하해주러 온 손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현우도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거 원, 무서워서 신부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겠네요.”
그는 신부 대기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꺼진 불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두 분이서 오붓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그렇게 현우가 나가고 나자, 다정은 도훈을 나무라듯이 말했다.
“정말 결혼식 날까지 이러기예요? 현우 씨가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서현우 씨는 블랙리스트에서 가장 첫 번째 목록에 있는 사람이에요. 끝까지 방심하면 안 될 인물이라고요.”
“이제 곧 결혼하는 여자한테 마음 두는 남자가 어딨겠어요? 똑똑한 분이 왜 이런 쪽에서만 융통성이 제로인 거예요.”
다정은 더 퍼붓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날이 날인 만큼 그의 모난 질투심 때문에 언성을 높이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정은 분위기를 바꾸고자, 드레스로 주제를 넘겼다.
“이 웨딩드레스 한 시간 넘게 고민해서 고른 보람이 있었어요. 현우 씨 오기 전에 다른 팀원들도 들렀는데, 다들 드레스 예쁘다고 난리였거든요.”
“내 눈에는 드레스는 안 들어오고, 당신만 들어오던데.”
“그거야 당신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쓰였으니까 그렇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
“콩깍지 아니야. 당신은 정말로 예뻐.”
그의 나긋한 목소리가 싫지 않은 듯, 다정의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얼마만큼 예쁜데요?”
“결혼식이고 뭐고, 당장 침대로 데려가고 싶을 만큼?”
그의 말에 다정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결혼식을 앞두고 긴장했던 몸이 자연스레 풀렸다.
그녀는 도훈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신혼여행은 길어요. 조금만 참아요.”
마주 본 서로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
하객들의 환호와 축복 속에서 식은 진행되었다.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다정은 아버지를 대신해 작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에 비친 신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크나 큰 박수 소리가 식장 가득히 울렸다.
다정이 식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할머니와 언니들은 벌써부터 눈물이 범벅이었다.
길순은 애틋한 눈빛으로 도훈과 함께 나란히 선 다정을 바라보았다.
“어멈아. 내가 이 모습을 보려고 여태까지 살았나보다.”
그녀는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이어 말했다.
“우리 대영이도 이 모습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봉해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러 보냈다. 봉해는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나는 이제 이대로 눈 감아도 원이 없다. 저렇게 듬직한 손주 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 나는 이제 바랄 것이 없어.”
그녀의 말에 소정이 끼어들었다.
“아휴, 할머니.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우리 다정이가 예쁜 아이 낳고 그 아이가 또 예쁜 아이 낳을 때까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하며 소정이 훌쩍거리자, 애정이 야단치듯 말했다.
“넌 이 좋은 날에 왜 자꾸 울어? 분위기 망치게.”
“그러는 언니는 왜 우는데?”
“…….”
사실 다정이 식장에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울었던 건 애정이었다. 애정은 잠시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우리 막둥이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난다. 이상하게…….”
“우리 이제 그만 울자. 이러면 다정이까지도 울겠어.”
둘은 서로를 다독여 진정시킨 후, 애써 다정을 향해 웃어보였다.
하지만 다정은 가족들의 모습을 본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맺혔다.
언니들의 벌겋게 부은 눈가는 누가 봐도 펑펑 울었던 것이 티가 났고, 엄마와 할머니의 얼굴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그녀를 보며 도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다정이 애써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그녀의 한 쪽 손을 꼭 잡았다.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감각에 다정의 마음이 저절로 진정이 되었다.
경건한 분위기 속 예식은 이어졌다. 주례가 끝나고, 혼인 서약을 마친 둘은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다정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도훈의 모습을 응시했다.
짙고 그윽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평생토록 당신 곁에 머물며 지켜주겠다고.
다정은 입가에 애틋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저 역시 그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예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사회자는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대로 우리 신랑 신부를 보내기엔 아쉽죠. 안 그렇습니까?”
사회자의 활기찬 음성이 예식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자. 끝으로 신랑 신부의 뜨거운 입맞춤이 있겠습니다!”
키스해! 키스해! 하객들이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가장 신이 나 보이는 사람은 춘희였다.
하객들의 열띤 성원에 도훈과 다정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도훈이 먼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다정의 입술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다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맞물린 서로의 입술에 달콤함이 흘러넘쳤다.
그 광경을 보던 사회자가 장난기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어이쿠. 키스를 이렇게 오래하는 신랑 신부는 처음 봅니다.”
그의 말에 도훈과 다정의 입술이 떨어졌다. 도훈은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가 가득했고, 다정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춘희 못지않게 짓궂음을 가진 사회자는 씩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신랑분이 신부가 너무 예뻐서 애가 타는 모양인 것 같은데 말이죠. 어서 빨리 두 분을 신혼여행지로 보내줘야 되겠군요.”
그 말에 하객들이 웃었다.
눈이 마주친 도훈과 다정도 함께 웃었다.
뜨거웠던 연애처럼 달콤하고 행복한 나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