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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사내연애-25화 (25/32)

Chapter. 25

최악의 폭염이 끝났나 싶었더니, 여름의 끝자락에서 늦더위가 찾아왔다.

뜨거운 햇볕이 오전부터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한신 건설 로비에 있는 카페테리아는 더위를 피하러 온 직원들로 붐볐다. 모두 얼음이 가득 담긴 음료를 손에 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기획팀 팀원들도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정과 그녀의 동기들이었다.

동기 한 명이 다정에게 물었다.

“결혼 준비는 잘 돼가?”

하얀 블라우스에 단정한 회색 스커트를 입은 다정은 생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응.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아서 요즘 머리가 아프긴 해.”

도훈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후로부터 세 달이 지났다.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정의 가족들에게 결혼을 허락 받는 일은 프리패스나 다름없었고, 호주에 있는 도훈의 아버지는 상견례를 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떠났다.

무뚝뚝하다는 도훈의 말과는 달리, 그의 아버지는 섬세하고 자상한 성품을 지닌 남자였다. 물론 생김새는 도훈보다 훨씬 무뚝뚝한 인상이긴 했다.

다정의 가족들은 결혼 날짜를 최대한 빨리 잡았으면 좋겠다며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고, 그는 깔끔하게 자식과 다정의 의견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원시원한 결정과 무서운 추진력이 만나, 둘의 결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결혼식이 10월이라고 했지?”

다정은 동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10월 15일.”

그 날짜도 8월에 당장 식을 올리자는 가족들을 겨우 진정시켜 받은 날짜였다. 다정과 비슷한 나이인 동기들은 결혼에 관심이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웨딩드레스는 어디서 골랐어? 메이크업은?”

“친언니가 결혼회사에서 근무하거든. 굳이 다른 데 알아볼 시간도 없어서, 언니가 추천해준 샵에서 골랐어. 그래도 스드메는 언니 덕분에 수월했어.”

“스드메가 뭐야?”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이야. 예비 신부들의 필수 관문이지.”

“결혼 준비하다 보면 많이 다툰다던데, 팀장님은 어때?”

“우린 그런 걸로는 안 싸워. 다른 이유로 싸우지.”

“그게 뭔데?”

다정은 그 이유가 밤일에 관련된 일이라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던 때였다. 그녀들이 앉은 테이블 가까이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같이 좀 앉아도 될까요?”

근사한 중저음에 다정의 동기들이 솔깃하며 고개를 올렸다. 그녀들의 앞에는 젊은 남직원 세 명이 서있었다. 세 명 모두 키가 크고, 스타일도 세련되어 보였다. 사원증에는 기술지원팀 직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훈훈한 외모를 가진 사원의 등장에, 솔로인 동기들의 얼굴색이 금세 환해졌다. 그녀들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 물론이죠.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남자 사원들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가장 남자다운 외모를 가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모두 기술지원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들이 근무하는 팀은 대체 어디인가요?”

“기획팀이에요.”

“그렇군요. 기획팀은 외모만 보고 뽑나 보네요. 하하하.”

“어머, 호호호.”

동기들이 까르르 웃는 동안 다정은 홀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만 해도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었던 동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줍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남자 사원들은 역시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네.’

멋진 이성에게 호감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여자들 인원수도 많겠다, 다정은 그들이 대화를 더 깊게 나눌 수 있도록 자신은 눈치껏 빠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이 슬며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는 그 순간이었다.

“그쪽 분은 계속 아무 말씀도 안 하시네요.”

다정이 자신을 향해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피부가 하얗고, 입술이 도톰한 남자였다. 그가 다정에게 물었다.

“저희가 불편하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이름이…….”

그는 다정의 사원증을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

“한다정 씨군요.”

“네.”

“예전에 어디선가 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정을 빤히 응시했다. 다정은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그에 대한 기억은 눈곱만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자가 박수를 크게 치며 말했다.

“아! 예전에 구내식당에서 봤던 분이구나!”

“구내식당이요?”

“네. 제 재킷에서 지갑이 떨어졌는데, 다정 씨가 주워줬잖아요. 기억 안 나요?”

“아…….”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되짚던 다정은 기억이 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이제 기억나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꽤 오래전 일 같은데…….”

“다정 씨가 워낙 미인이라서 저절로 머릿속에 저장이 되었나 봐요. 하하하.”

그가 다정을 향해 호쾌하게 웃어 보이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남자의 표정이 굳었고, 다정은 이 한여름에 알 수 없는 오한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설마…….’

다정은 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뒤에는 굳은 표정의 도훈이 서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지독히도 서늘한 음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다정을 물론 나머지 직원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식겁한 표정이었다. 다정이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냥…… 다른 팀에서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 중이었어요.”

“그래요? 나도 합석해도 됩니까?”

그 말에 다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렵게 성사된 사내미팅에 이 질투 많은 남자가 끼어들어 깽판을 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서둘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다들 즐겁게 대화 나누세요. 그럼.”

그렇게 말한 다정은 그 즉시, 도훈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다정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남자분은 누구시기에…….”

그러자 기획팀 여직원이 말했다.

“아. 저희 팀장님이세요.”

“팀장님이요? 팀장님이 대체 왜…….”

그 말에 남자의 옆에 있던 동료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잘못했어. 저 여자는 건들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왜?”

“너 설마 그 유명한 사내 커플을 아직까지 몰랐던 거야?

남자는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저만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그 팀장이라는 사람과 다정이 사내에서 꽤 유명한 커플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왜 저 커플이 유명한데?”

“일단 남자 쪽이 워낙 유명인사였고, 그 대단한 남자가 사귀는 여자는 누구일지 궁금해서 초반부터 사원들의 관심이 쏠렸지.”

남자의 동료는 마치 기획팀 직원인 듯 상세하게 설명했다.

“회사에서만큼은 연인 티 안 내려고 노력한다는데,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눈꼴시어 못 봐줄 정도라더군. 서로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나 뭐라나.”

“…….”

“아까도 봐봐. 난 그 남자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다고.”

동료의 이야기에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 그렇게 유명한 커플인지 몰랐어, 난.”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기획팀 여직원이 씩, 웃어 보였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되었죠.”

그녀는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까 보셨다시피 우리 팀장님이 질투심이 장난 아니거든요.”

이어 그녀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충고를 해주었다.

“한동안은 안 마주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기획팀 팀장실 안.

다정은 눈앞에 서있는 남자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앞엔 팔을 마주 낀 채,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는 도훈이 서있었다.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게 분명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다정이 생각하던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성한 회사에서 대놓고 미팅을 해도 되는 겁니까?”

다정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미팅이라니요. 그냥 자리가 부족해서 합석한 것뿐이에요.”

“주위에 빈자리가 넘치던데.”

“그……그랬어요?”

도훈의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물었다.

“앞에서 푼수같이 웃고 있던 남자는 누굽니까?”

다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몰라요. 저도 잘.”

“모르는 사람 입에서 한다정 씨가 워낙 미인이라서 저절로 머릿속에 저장이 되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겁니까?”

어휴. 그건 또 언제 들었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하는 그의 예리함에 다정이 혀를 내둘렀다.

“그냥 하는 말이죠. 그럼 사람 앞에 두고 못생겼다 하겠어요?”

“당연히 하기 힘들죠. 하지만 아름답단 말 역시 아무에게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설마 그 남자랑 제 사이에 뭐가 있다고 오해하시는 건 아니죠?”

다정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팀장님. 사내에서 우리가 커플인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저번에는 이사님이 팀장님 애인 아니냐며 저에게 아는 척을 했다고요. 이런 판국에 저한테 작업 거는 바보가 어디 있겠어요?”

“남자 마음은 내가 더 잘 압니다. 그놈은 분명 당신한테 마음이 있는 눈빛이었다고요.”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좀처럼 풀리지 않자, 다정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녀는 도훈에게로 다가가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달래듯 말했다.

“걱정할 만한 일을 좀 걱정하세요. 제가 이렇게 멋진 사람을 두고 딴 남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그리고 팀장님이 제 애인인데, 어느 누가 도전을 하겠느냐고요.”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 아래, 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다정은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누군가 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제가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고요.”

그녀의 말에 날이 서있던 도훈의 눈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다정의 허리를 감쌌다. 시폰 소재의 얇은 블라우스 위에 그의 뜨거운 손길이 닿자, 야릇한 감촉에 몸이 바짝 긴장했다. 도훈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도훈은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로 천천히 다가갔다. 도훈의 매혹적인 입술이 겹쳐지려는 그 순간, 다정이 황급히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아……안 돼요!”

도훈이 미간을 좁혔다. 다정은 그의 뒤쪽 천장에 있는 CCTV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CCTV 한 대 더 생긴 거 잊었어요?”

일주일 전 보안팀에서는 보안을 목적으로 팀장실에 CCTV를 추가로 한 대 더 설치하고 갔다. 덕분에 CCTV를 피할 만한 안전지대는 사라졌고, 그건 팀장실에서 다정과 도훈이 이렇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일은 앞으로 불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정이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도저히 못 참겠는데.”

도훈이 손끝에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강인하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다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안 된다니까요…….”

“키스 정도는 괜찮아.”

그가 귀가 녹아들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했다. 그 유혹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다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요.”

“다른 곳?”

“여기는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봐놓은 곳이 한 군데 있긴 한데…….”

대체 그곳이 어디냐는 듯 도훈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다정은 발끝을 올려 그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는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5분 후에 비품실에서 봐요.”

[대놓고 사내연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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