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8)화 (88/123)
  • 88.

    “황궁에 남아 있는 흑마법 잔당들은 전부 정리했다.”

    그들은 대부분 흑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저 매수되어 정보를 넘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티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말한 대로 생각지도 못한 곳들까지 심어 놓았더구나.”

    라테른 후작을 통해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제대로 된 축출 작업은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일로 부족해진 인원을 재충원하기 위해 다시 매수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인리시온이 앞으로 있을 위험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렇겠지. 그러니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여야지.”

    황제는 이미 그를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업무를 세밀하게 분업화해서 각자가 하는 일 외에는 다른 정보를 알기 어렵게 하고, 서로 다른 일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할 때마다 절차를 통해 흔적이 남도록 했다.

    물론,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거래에 대비하기 위해 곳곳에 감시할 인원을 배치해 두었다.

    “한동안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전에 정리를 할 생각이야.”

    황제는 되도록 에리스텔라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에리스텔라는 사실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제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연회를 열 생각이야.”

    황제가 건재함을 보여 주는 쇼는 비록 거짓이라 해도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한 번은 필요한 일이니까. 빨리하는 게 좋겠지.”

    한데 묘하게도 대화를 이어가는 내내 황제의 시선은 하인리시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델라시아 대공. 요즘 대공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어쩐지 황제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제의 말뜻을 알아차린 하인리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을 때였다.

    “최근에 청혼을 받았다고?”

    황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근질거렸다는 듯이.

    하지만 황제의 물음에 먼저 반응한 건 에리스텔라였다.

    “그걸 오빠도 알아?”

    에리스텔라가 신기하다는 듯이 놀라며 물었다. 황제가 신경 쓸 정도로 화제였구나 싶었다.

    “모를 리가. 최근 아델라시아 대공가로 향하는 청혼서가 가장 큰 화제인데. 게다가 나에게 청혼서에 대해 슬쩍 물어본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아델라시아 대공가는 황녀와 관련되어 있으니 황제의 의중을 떠보려 한 모양이었다.

    “맞아. 청혼서가 한 번 오더니 다들 짠 것처럼 연달아 오더라고. 지금 시온 책상 위에 엄청나게 쌓였다니까?”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최근 하인리시온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감탄했다.

    “아델라시아 대공이야 모두가 원하던 결혼 상대니까. 게다가 최근 흑마법 사태 때문에 눈에 띄기도 했고. 모두가 탐내는 건 당연한 일이지.”

    황제가 하인리시온을 치켜세우며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아델라시아 대공. 이번에 황실에서 연회를 주최할 예정인데 그때 그대에게 청혼한 이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떤가.”

    연회에서 만나면 서로가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자연스럽게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가 아니라면 하인리시온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기에 황제가 생각해 낸 묘수였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하인리시온이 정중하게 사양했다.

    “내가 나서서 지지하는 티를 내 줘야 황실의 눈치를 보지 않을 거네.”

    그러니 거절하지 말고 이번 연회에서 상대를 잘 만나 보라는 의미였다.

    황제가 사려 깊은 태도를 고수하며 하인리시온을 은근히 압박해 왔다.

    하인리시온과 황제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흐를 때였다.

    굳어 있던 하인리시온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토록 신경 써 주시니 고려해 보겠습니다.”

    ‘……어?’

    에리스텔라는 황궁에서 나와 아델라시아 대공가로 돌아가는 내내 얼빠진 얼굴로 하인리시온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황제의 제안에 크게 거부감을 보일 줄 알았다.

    그래서 상황을 지켜보다 자신이 나서서 중재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하인리시온은 앞서 한 거절은 예의상 했던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설마 기대하고 있었나……?’

    쿵쿵쿵—

    지금까지 수많은 청혼서를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보던 에리스텔라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하인리시온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뭐라고 물어보기가 애매했다.

    황제의 호의를 마냥 거절할 수 없어 일단 알겠다고 한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지만 에리스텔라가 아는 하인리시온은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공가에 도착한 하인리시온은 황제에게 한 말이 진심이었다는 듯 로웬과 세리안을 불러 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진심인 건가?’

    에리스텔라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반면에, 아델라시아 대공가 사람들은 하인리시온의 결정을 반겼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일단 알아가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특히 로웬이 싱글벙글이었다.

    얄밉다는 듯 에리스텔라는 반사적으로 로웬을 샐쭉하게 노려보았다.

    “이번 연회는 나도 신경을 써야겠지.”

    “그럼 연미복도 특별 맞춤하는 게 좋겠네요?”

    세리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언제나 기본적인 연미복만을 고수하는 하인리시온 때문에 빛나는 작품을 만들어도 써 보지도 못한다고 아쉬워하던 세리안으로서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는 게 좋겠지.”

    “저한테 찾아온 오랜만의 기회네요. 후후훗.”

    세리안은 하인리시온의 연미복에 솜씨를 발휘할 생각에 신난 모습이었다.

    “전하의 연미복을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저는 좀 아쉽네요.”

    세리안이 즐겁게 흥얼거리다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뭐가 아쉽다는 거지?”

    “다른 영애들이 모자라다는 건 아니지만 황녀 전하만큼 멋진 그림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요.”

    에리스텔라가 대공가에서 지내면서 고용인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의외였던 인물이 바로 세리안이었다.

    의상사인 그녀는 심미안이 뛰어났는데 그게 너무 과하다 보니 그녀의 모든 기준은 아름다움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런 그녀는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몹시 눈이 부셨다는 이유로 황녀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 계시니 어쩔 수 없죠…….”

    세리안이 아쉬움을 흘리며 의상을 작업하기 위해 움직였다.

    스케치를 위해 종이를 꺼내고 그동안 만들었던 하인리시온의 연미복 스케치를 모아놓은 것들을 전부 꺼냈다.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고용인들은 이번 기회를 허투루 날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한마음이 되어 곧 다가올 황궁 연회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연회를 위해 이전과는 다르게 공들여 준비했다.

    이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청혼서를 모두 확인하고 영애들에 대해서도 따로 알아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리스텔라의 심장이 술렁이는데.

    만약 이번에 하인리시온이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을 결심하게 되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하인리시온. 나는 찬성이야. 네가 좋은 사람 만나는 거. 그러니까 이번에 잘 고민해 봐.”

    그렇게 말해야 하나…….

    에리스텔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왠지 내키지 않았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점점 더 심술궂어질 때였다.

    로웬이 하인리시온에게 연회에 관한 보고를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이번 연회 참석자 명단을 보내 주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미리 알고 참고하라는 뜻 같습니다.”

    황제는 이번에 하인리시온에게 제대로 배려를 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오빠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에리스텔라가 속으로 툴툴거리며 하인리시온이 펼친 명단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은 물론이고 외국의 왕족까지 다양한 가문이 참석했다.

    국가적 행사도 아닌 간단한 연회에 이렇게 많은 인사들이 참석한다는 것은 역시 그들의 목적은 하인리시온이라는 뜻이었다.

    공식적으로 청혼서를 보낸 가문은 물론이고 아직 보내지 않은 가문들까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에리스텔라가 가늘게 눈을 뜬 채로 명단을 아주 찬찬히 하나하나 전부 머릿속에 새겨 둘 기세로 보고 있을 때였다.

    “이건 청혼서를 보낸 가문은 아닙니다만, 이번 연회 참석자 중에 눈에 띄는 인물을 정리한 겁니다. 그중에서도 디아클렌 자작이 최근 주목도가 높은 편입니다.”

    “디아클렌 자작이라. 지난번 기부회 때도 그렇고 요즘 행보가 눈길이 가기는 하지.”

    로웬이 디아클렌 자작에 관한 보고서를 하나 더 내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최근 신진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출신은 별 볼 일 없지만 빠른 속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고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긴 기부회 때를 떠올리면 이해가 갔다. 나름 명망 있는 가문에서도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는 했었지.

    “아마 조금만 지나면 지금과는 다른 가문이 되어 있을 거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괄목한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아무 문제만 없다면.”

    하인리시온이 디아클렌 자작에 관한 보고서를 확인하면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건? 내가 더 참고해야 할 곳이 있나?”

    연회에 관해선 보고가 끝났다고 생각한 하인리시온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하지만 로웬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청혼서를 보낸 가문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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