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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9)화 (89/123)
  • 89.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로웬의 보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에리스텔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정말 싫다. 내가 왜 하인리시온의 연애를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데.

    이번 연회는 정말 내키지가 않는다.

    에리스텔라가 실수인 척 명단이 적힌 곳 위로 컵을 밀어 커피를 쏟아 버렸다.

    ***

    에리스텔라의 입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고기가 툭 떨어졌다. 동시에 고개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입맛이 없다.

    고기도 별로 안 당기고. 음식을 넘길 때마다 목이 까끌까끌하기도 하고.

    평소 식사의 반도 먹지 못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축 처지지.

    “벌써 다 드셨어요?”

    소니아의 물음에 에리스텔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만 먹을래.’

    오늘따라 얹힌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했다.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눈앞에 있는 음식을 봐도 입맛이 돌지 않았다.

    결국, 에리스텔라는 식탁에서 내려와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기운이 쭉 빠져서 발걸음이 점점 느려질 때였다.

    “여우님. 왜 그렇게 힘이 없으세요?”

    반대편에서 서류를 한 뭉치 들고 오던 아네사가 여우를 발견하자마자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여우님. 혹시 기분 안 좋으신 거예요? 어딘가 축 처진 것 같은데…….”

    아네사의 걱정에 에리스텔라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할 뻔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연회 준비에 몰두한다고 여우를 향한 고용인들의 관심이 줄어 있었다.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에리스텔라는 그만큼 쓸쓸했다.

    역시 이곳에서 나를 가장 위해 주는 사람은 아네사뿐이야……. 에리스텔라의 꼬리가 조금씩 살랑이며 아네사의 다리를 감싸려고 할 때였다.

    “제가 고기를 좀 가져올까요?”

    꽈당. 순간 에리스텔라의 네 발이 중심을 잃고 갸우뚱 기울어질 뻔했다.

    아네사의 걱정은 진심이지만 그녀는 의외로 눈치가 영 별로였다.

    “아네사. 여우님이 대답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사람에게 말하듯 묻는 거냐?”

    알고 보니 아네사는 혼자 오고 있던 게 아니었던 듯 그녀의 뒤에서 로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우님은 꼭 알아듣는 것처럼 반응하신다고요.”

    어라? 순간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그동안 아네사는 유별나게 여우를 향해 자주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녀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네사가 눈치가 빠른 건지 둔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에리스텔라에게 필요한 건 발뺌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것 봐라. 아네사 네가 멋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엉뚱한 짓 좀 그만하거라.”

    로웬이 아네사의 주책을 타박했다. 아네사는 굴하지 않고 여우를 향해 몇 번 더 말을 걸며 시도했지만 그럴수록 에리스텔라는 최선을 다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상하네. 원래는 엄청 잘 알아들으시는 거 같았는데.”

    하, 하하…….

    에리스텔라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

    역시나 작정하고 차려입은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마저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근사했다.

    흥. 잘났네.

    괜히 심술이 나는 이유는 몰랐다. 그리고 하인리시온에게 이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일부러 하인리시온에게 신경을 끄고 자신의 모습에 집중했다.

    세리안이 특별히 준비해 준 티파니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하인리시온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내가 제일 잘났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에리스텔라의 입가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

    하인리시온이 황궁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이곳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하인리시온을 둘러싼 청혼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장내에 하인리시온을 둘러싼 긴장감과 신경전이 감돌았다.

    누가 먼저 나설지 암묵적으로 순서를 정하고 있는 게 느껴질 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제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보아도 이전보다 혈색이 돌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폐하께서는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시네요.”

    “사실 그동안 불순한 세력을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병세가 있는 척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럼 그동안의 모습이 전부 가짜였다는 건가요?”

    “글쎄요. 진실이 무언지는 알 길이 없지요. 다만, 폐하께 어떤 모습이 잘 어울리는지 각자 판단할 문제지요.”

    최근 황제의 행보를 지켜보던 귀족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었다.

    귀를 쫑긋 열고 귀족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리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나쁘지 않은 착각이네. 좋아. 좋아.’

    그런 오해는 황제를 경외하고 혹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황제는 일부러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역시 우리 오빠라니까. 에리스텔라가 뿌듯해하며 황제의 연설을 지켜보았다.

    이번 연회의 목적은 황제의 건재함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그게 결코 노골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이번 연회는 표면적으로, 그동안 이어져 오던 흑마법과의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니 다 함께 긴장을 풀고 즐기자는 자리였다.

    황제 역시 무겁거나 진중한 말 대신 가볍게 즐기기 바란다는 간단한 연설을 하며 축제 분위기를 조성했다.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왔기 때문인지 하인리시온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당장 누군가 달려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전하. 로가드 백작가의 비어트리스라고 합니다.”

    한 영애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다가왔다.

    “사실 저는 전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눠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답니다. 워낙 다가가기 힘드신 분이니까요.”

    하인리시온 역시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그는 정중하게 다가오는 영애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중에 몇몇과는 좀 더 대화를 이어 나가기도 했다.

    영애들의 적극적인 공세는 물론이고 가문의 다른 일원들까지 하인리시온에게 와서 은근히 떠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연회에 참석한 로웬과 아네사에게 접근하는 이들 역시 못지않았다.

    바로 하인리시온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들이 두 사람에게 접근해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대공 전하께선 어떤 걸 좋아하시나요.”

    “글쎄요. 전하께서는 그다지 호불호가 없으셔서요.”

    “아주 사소한 것도 괜찮아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영애들의 간절한 부탁에 아네사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로웬을 쳐다보자 그가 무심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네사, 네가 편한 대로 해라. 그다지 상관없다.”

    원한다면 말해 줘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으음. 전하께서는 아델라시아 가문을 무척이나 아끼시죠.”

    “그건 당연하죠.”

    영애들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그건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뻔하디뻔한 내용이었다.

    로웬이 그것 봐라 하며 피식 웃었다.

    “으음. 전하께서는 원래 뭐든 관심을…… 아, 있어요!”

    “뭔데요?”

    “여우님이요! 최근 대공 전하께서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아끼는 것은 여우님이에요.”

    아네사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자신 있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어딜 가든 데리고 다니고 지금도 함께 있는 그 여우요?”

    “네. 맞아요. 저희 여우님이죠! 특히, 전하께서는 여우님이 있는 곳을 단번에 알아차리세요! 그건 무척 큰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그 정도인가요?”

    “그럼요! 무려 저희 대공가를 빛내 주시는 보물이랍니다.”

    아네사가 눈을 빛내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이미 그녀는 하인리시온이 아닌 철저히 자기 기준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건 로웬뿐이었다.

    하지만 아네사의 주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

    따끔따끔.

    에리스텔라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느 쪽을 봐도 똑같아.’

    어느 순간부터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세기도 힘들 만큼 많았다.

    게다가 영애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 보니 자꾸만 여우라는 단어가 들렸다.

    뭐라는 거야. 여우가…… 대공 전하한테…… 잘 먹힌다고? 뭐가?

    에잇, 잘 안 들려! 지금 다들 뭐라는 거야?

    에리스텔라는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열심히 엿들었다.

    ‘여우를 꼬셔야…… 기회가 생겨? 잠깐만 이거 설마……?’

    하인리시온에게 호감을 얻는 기준이 이상한 것 같은데?

    왜 내가 기준이 된 거지.

    설마 지금 다들 나를 하인리시온이랑 이어 주는 징검다리로 생각하는 거야?

    이건 마치 그 흔하디흔한 나와 결혼하려면 내 이성 친구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해?

    아닌가. 내 애완동물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건가.

    에리스텔라는 복잡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게다가 하인리시온도 그걸 아는 건지 묘하게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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