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7)화 (87/123)
  • 87.

    스틸레토 가문의 브리아나 영애가 하인리시온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타국의 왕녀를 어머니로 둔 그녀는 비록 지난 몇 년 동안 수도 사교계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언제나 주목을 받은 존재였다.

    “브리아나 영애가 얼마 전에 수도로 왔다고 합니다.”

    그건 곧 수도에 돌아오자마자 하인리시온에게 청혼서를 보냈다는 의미였다.

    “브리아나 영애는 전하와도 일면식이 있지 않으십니까.”

    로웬이 은근슬쩍 떠보며 물었다.

    확실히 브리아나 영애는 나름 하인리시온과 접점이 있었다.

    어린 하인리시온에게 한눈에 반해서 매번 그를 괴롭히고는 했었다.

    그때마다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에게 와서 눈물을 펑펑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나중에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보기만 하면 도망치기 시작하니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가 눈물을 쏟은 적이 있었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흐으음. 게다가 이거 나름 작정하고 보낸 거 같은데?’

    에리스텔라가 의미심장하게 청혼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절하도록 해. 그럼 알아듣겠지.”

    갑자기 청혼서라니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 하인리시온은 흘려넘겼다.

    로웬이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마자 에리스텔라가 히죽거렸다.

    ‘브리아나가 아직도 너를 잊지 못했나 봐. 어릴 때도 엄청나기는 했었지.’

    에리스텔라는 은근하게…… 아니 대놓고 놀렸다. 이런 건 꼭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정확하게 전달이 되고는 했다.

    “브리아나는 그게 아니라.”

    하인리시온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며 낮게 중얼거리는데.

    ‘그게 아니면? 뭔데?’

    에리스텔라의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부담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냐. 그냥 잘 알아들을 거라고.”

    하인리시온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헤. 과연 그럴까.

    이게 시작일 텐데. 에리스텔라가 의미심장하게 청혼서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

    하인리시온에게 있어서 갑작스러운 청혼서는 약간의 변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로웬이 한눈에 보기에도 양이 꽤 되어 보이는 봉투 다발을 가지고 왔다.

    “전하께 온 청혼서입니다.”

    “그건 저번에 확인하지 않았나.”

    하인리시온의 성가신 물음에 로웬이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아뇨. 이건 로가드 가문에서 보낸 청혼서입니다.”

    “?”

    “그리고 이건 비에스 가문에서 보낸 거고, 또 이거는…….”

    로웬이 하인리시온 앞에 청혼서를 한 장씩 차례로 나열했다. 책상이 봉투로 가득 차는 건 금방이었다.

    “잠깐만. 갑자기 이게 다 뭐야?”

    하인리시온이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아직 지난번에 온 청혼서에 대해서도 정리를 하지 못했는데 연달아 이어지는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보시다시피 모두 전하와 결혼하고 싶다는 청혼서입니다.”

    “…….”

    “하나씩 확인해 보십시오.”

    로웬이 정갈하게 늘어놓은 청혼서 때문에 책상 위에는 서류 한 장 올려놓을 수 없게 되었다.

    허공에서 방황하던 하인리시온의 손이 청혼서를 쭉 밀어내었다.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도록 해.”

    청혼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질린다는 듯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로웬이 미적지근하게 청혼서 봉투를 정리하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하인리시온을 힐긋 쳐다보았다.

    “왜?”

    “전하. 한번 만나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인리시온이 묻자 로웬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그동안 황녀 전하와의 관계 때문에 결혼 상대에 대해 제대로 고려해 보실 기회가 없지 않았습니까.”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오래전부터 정략 약혼 관계였다. 이미 상대가 정해져 있는 하인리시온에게 감히 청혼서를 보낼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황녀와의 정략적인 관계가 끝이 난 이상 그 다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로웬이나 아델라시아 대공가에게 있어 이번 청혼은 나름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공 전하의 결혼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로웬은 이번 기회에 하인리시온이 황녀가 아닌 다른 상대들을 만나 보기를 바랐다.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힐긋 에리스텔라를 향했다.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

    한편, 에리스텔라는 청혼서 중 하나를 펼쳐서 내용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역시 인기 많네.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에게 온 청혼서들을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까지 하인리시온에게 청혼하는 가문이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서로 누가 먼저 행동으로 옮기나 눈치만 보다가 브리아나 영애를 필두로 서로 경쟁하듯 청혼서를 보내 오는 모양새였다.

    그 방증으로 청혼서가 끊이지 않고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문턱을 넘어오는 중이었다.

    ‘이중에 있을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어떤 사람과 이루어지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은 그걸 알기 전에 끝났으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느 이야기도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데다가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죽고 난 후의 일들은 알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이 있어도 별로 쓸모가 없네.

    흐음. 하인리시온의 결혼 상대라.

    그러게.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에리스텔라는 궁금해졌다.

    하인리시런온의 약혼은 아델라시아 대공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사교계의 화제가 되었다.

    ***

    적막하고 싸늘한 공기와는 달리 방 안에는 복작하고 다양한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데클렌을 중심에 둔 흑마법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고 누군가는 흥분을 참지 못해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혼자 벽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중에서 생각이 많아 보이던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리엘의 시신은 수습했습니다.”

    “쓸모 있는 능력이었는데 아쉽게 되어 버렸습니다.”

    황제를 세뇌시켜 그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예리엘의 죽음보다는 쉽고 빠른 길을 잃어버린 아쉬움으로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일로 황궁에 심어 놓았던 저희 세력은 전부 잃었습니다.”

    “황제 역시 다시 건드리기는 힘들고요.”

    황제에 관한 통제권은 물론이고 황궁 전체에 퍼져 있었던 모든 영향력을 한순간에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데클렌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불안이 가득한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목소리가 주위를 압도했다.

    “원래 계획과는 어긋나 버리기는 했지만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진행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마치 이렇게 될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희가 원하는 건 고작 황제 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소한 변수에 일일이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한 가벼운 타박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압박이 되었다.

    “그건 그렇지만…….”

    한층 위축된 채로 그들이 말끝을 흐렸다.

    황제는 그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타격이 작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역시 이해한다는 듯 데클렌이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피해를 입은 게 있으니 당분간은 자중할 필요는 있겠죠.”

    “…….”

    “다시 움직여야 할 때가 되면 제가 신호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데클렌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이들이 전부 물러났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죽은 예리엘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 그곳에 죽은 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화려한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너는 실패하지 않았다. 내게 충분히 도움이 됐어.”

    예리엘은 일곱 살 때부터 그가 직접 키운 아이였다.

    예리엘이 죽기 전, 데클렌은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었는데, 예리엘은 죽는 순간에도 그가 내린 지시를 마무리하기 위해 흔적을 남겼다.

    데클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즐겁다는 듯이 웃는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역시 살아 계신가 봅니다. 에리스텔라 황녀 전하.”

    의심의 여지도 없이 확신하는 그가 낮게 읊조렸다.

    ***

    황제로부터 에리스텔라와 함께 만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에리스텔라가 황제를 만나러 가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하인리시온과 함께 여우의 모습으로 황궁에 갔다. 그리고 자정이 넘으면 사람의 모습으로 황제와 대면했다.

    얼마 전에 에리스텔라가 그레타에 관한 서신을 보냈었다.

    “비록 죄의 무게가 가볍지는 않지만 흑마법과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고 사실상 그레타 라테른 역시 이용당한 것이니까. 게다가 너희에게 협조한 일도 있으니 충분히 참작할 만했다.”

    에리스텔라는 황제에게, 황녀의 물건을 훔치고 흑마법과 연루된 그레타 영애를 선처해 달라는 뜻을 전달했었다.

    “라테른 후작 영애는 네 뜻대로 별다른 제재 없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거야.”

    “고마워.”

    그레타는 이제 수도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그저 원하는 곳으로 가기를 바란다는 뜻과 함께.

    사실상 처벌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내가 먼저 라테른 영애에 관한 처분은 네 뜻에 맡기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오롯이 에리스텔라의 뜻을 존중하고 그대로 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