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은준은 결코 이런 상황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래 피도 눈물도 없는 악독한 냉혈한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평범하게 나쁜 사람에겐 화를 내고 불쌍한 사람에겐 측은지심을 느끼며 슬플땐 눈물도 찔끔 흘리는 사람이었다. 매일 요리하는건 귀찮지만, 가끔은 먹고싶은걸 직접 해먹어보고 싶어하고,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해도 작은 종이위에 낙서하듯 끄적거리며 즐거워하는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 주민들이 엉엉 울며 그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봐요! 저기요! 잠시만요!"
은준은 당황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벼락이라도 내던질까 더 엉겨붙어왔다. 쉬사네는 마치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아다는듯 체념한 표정이었다.
"사세요. 아, 살라구요! 누가 쫓아낸다고했어요? 왜 자기들끼리 지지고볶고 하다가 세상 망한것처럼 우는건데요!"
"뭐, 뭐라고요? [여러분, 잠시만! 잠시만 진정하고 멈춰보세요! 아주머니, 잠시만요!]"
쉬사네는 은준의 말을 알아듣고는 깜짝 놀라 주민들을 뜯어말렸다. 은준도 쉬사네가 그의 말을 알아듣고 영어로 외친것을 보곤 그에게 물었다.
"영어 할 줄 알아요?"
"아, 예. 도시에 나가 살았을때 배웠습니다."
"아, 거참.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에 얘길 하시지..."
물론 은준도 그에게 그럴 시간이 있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자기 소개를 할 때에만 주민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고, 그 외에는 전부 옆에 있던 야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이야기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알지만 너무 당황했던터라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저, 그런데 좀 전에 하신 말씀이 정말입니까?"
"예, 전 여러분을 어디로 쫓아낼 생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 저 분이 우리보고 여기서 그냥 살아도 된답니다!]"
""[와!]"
"
쉬사네는 은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기쁜 소실을 알리고 싶었던지 주민들에게 외쳤다. 은준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자신을 쳐다보는 쉬사네에게 말했다.
"전 다만 이곳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상호 협력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 찾아왔던 겁니다."
"상호... 협력적인 관계라면?"
은준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쉬사네는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전 옥수수농사를 짓습니다. 제 땅에 말이죠."
쉬사네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은준이 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두려운 것이었다.
"원래는 이곳도 전부 옥수수 농장을 세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마을이 있더군요.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그들 즉, 여러분이 되겠죠. 여러분과 어떻게 하면 둘 다 '윈윈'할 수 있을지."
은준은 잠시 말을 쉬었다. 옆에선 쉬사네를 제외한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주민들을 위해 야가 통역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을 제 농장에 고용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제 땅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면 되는 것이고, 전 여러분께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죠.
"...만약 우리가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솔직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잘 생각해보세요. 당신들이 제가 필요로하는 것을 주면, 저도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겠습니다. 그게 무엇인가는 서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요."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봐야할겁니다. 지금은 남자들이 소를 몰고 나가있으니 그들이 돌아와봐야 결론이 날겁니다."
"그들은 언제 오지요?"
은준과 퉁야 그리고 야는 다시 벤시몽으로 돌아갔다.
"...저는 조금 놀랐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이야기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놀랐어요. 조금은 언성이 높아지지는 않을까 생각은 했었지만, 이런식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총도 가져갔던 거였고. 생각보다 순한 사람들이었어요."
"맞습니다. 그래서 다행이었습니다."
셋은 공감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준들은 벤시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땅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야도 피곤해한다기 보다는,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지 활기차 보였고, 은준도 확실히 그의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몰랐기 때문에 멀리 나온김에 돌아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쉬사네는 남자들이 소를 먹이고 돌아와 의견을 취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은준과 쉬사네는 다음날까지 의견을 종합해 그의 농장에서 일하는 대가로 은준에게 요구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은준은 GPS앱에 정부로부터 받은 서류에 나와있는 좌표를 입력했다. 네 개의 좌표는 점을 연결하면 위아래로 길죽한 직사각형 모양을 그렸는데, 그것이 전부 은준의 땅이었다. 그렇게 셋은 처음으로 은준의 땅을 전부 돌아볼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10시쯤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마당에 나가있던 퉁야가 발견했다. 은준은 총에 달린 망원경으로 그들을 살폈고, 그들이 쉬사네를 비롯한 세 명의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무로 만든 창이랑 활을 들고 있는데? 싸우려는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을겁니다. 트럭 바퀴자국을 따라 온다고 했지만, 혹시 야생동물이 나타날지 모르니 가져온거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총을 준비해놔야겟군."
잠시후, 퉁야가 정문에 나가 그들을 맞이하는 사이, 은준은 장전된 총을 들고 창문 뒤에 숨어 혹시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온것은 아닌지 순순히 퉁야를 따라 들어왔다.
"쉬사네가 농장에서 일 하다고 하면 굳이 소토어를 배울 필요가 없으려나?"
"그래도 배워두시면 편할거에요. 의외로 영어를 못쓰는 사람이 많거든요."
은준의 혼잣말을 들은 야가 지나가는 말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외출을 하고 와서인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은준은 생각했다.
은준은 가까이 다가오는 쉬사네들을 보고 밖으로 나갔다.
"Kenang ka khotso![오신것을 환영합니다!] Mmoro[좋은 아침입니다.]"
은준은 방문자들을 이끌고 마당 그늘에 미리 준비해놓은 협상 테이블로 안내했다. 거창하게 협상 테이블이라고 했지만, 접이식 플라스틱 원형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야가 접대용으로 준비한 과일을 내왔다. 은준이 좋아하는 포도였다. 아프리카에서 나는 포도라 산지 직송으로 값이 싸 은준이 이곳에 와서 시장을 보다 발견하고는 무척 좋아한 것중 하나였다.
"어제 하신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좋은 판단입니다!"
"그래서 먼저 저희들이 제안을 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저흴 고용할 생각인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게 먼저 이야기되야 할 내용이 분명했다. 은준은 그간 생각한 것을 정리해 쉬사네에게 말했다.
"제 농장에선 1년에 두 번 옥수수씨를 뿌리고 거둘겁니다. 이모작이죠. 조금 일찍 뿌리고, 조금 늦게 거두겠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은준이 준비한 옥수수 종자는 슈퍼옥수수였다. 한국의 김순권 박사가 개발한 이 아프리카 슈퍼옥수수는, 아프리카에선 악마의 풀이라 불리는 스트라이가라는 기생 잡초와 공생할 수 있는 강한 옥수수였다. 이전에는 뽑거나 제초제를 뿌리면 돌연변이를 일으켜 더욱 번성하는 스트라이가 때문에 곡물 재배에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이 슈퍼옥수수 종자는 스트라이가에 강하면서도 수확량이 3배 더 많기 때문에 매우 유명했다. 이것이라면 남아공에서도 북쪽에 속한 이곳에선 은준이 생각하는 이모작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사람이 필요한 일은 간단합니다. 씨를 뿌리고 옥수수를 수확하기만 하면 됩니다. 땅은 기계로 다스릴 겁니다. 내가 필요할때, 그 시기에만 와서 일을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너무 간단한 설명 탓에 쉬사네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은준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너무 간출여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설명했다.
"여러분도 옥수수 농사를 짓지만, 1년에 한 번 짓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1년에 두 번 지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보다 빨리 씨를 뿌리고, 중간에 수확하여 다시 씨를 뿌리고 조금 늦게 수확을 하는 것이죠."
은준의 계획은 그랬다. 보통 1년에 한번 옥수수를 심을 경우에는 겨울이 지나고 조금 지난 뒤가 되는데, 은준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심게 된다. 그리고 은준의 농장에 옥수수를 다 심고나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땅에 옥수수를 심는다. 물론 거기도 실제론 은준의 땅이지만, 소유는 마을의 것으로 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한창 마을의 옥수수가 자라나지만 손 갈 일이 없을때 은준의 농장은 다 자란 옥수수를 거두도 다시 씨를 뿌리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을의 옥수수를 수확한 뒤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 은준의 농장에 와서 옥수수를 수확하면 된다. 기렇게 하면 마을 옥수수는 그것대로, 은준은 그의 농장대로 날짜가 겹치지 않고 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일하는 댓가는 당연히 드릴겁니다."
쉬사네들은 쉬사네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작이 성공할지는 그들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어차피 그건 은준이 생각할 일이고 그들로서는 은준이 말한대로 일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게다가 그들 농사에 방해되지 않을것 같으니 더 좋았다.
"일 한 댓가는 한 명당 하루에 10랜드를 지불하겠습니다."
은준이 가장 고민한 것은 이었이었다. 이들을 얼마나 고용하느냐!
퉁야나 야가 하는 일은 어차피 항상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고용을 유지시켜야 한다. 하지만 은준이 생각하기로, 옥수수 농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손이 가장 필요한 시기만 지나면 크게 손이 갈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상시고용을 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자기 일을 못하게 되면서 은준의 농장에선 할 일이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은준은 이들을 일용직으로 고용하여 일손이 바쁠때만 저렴한 가격에 고용하려 한 것이었다. 다른 종목이 아닌 옥수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특히 잡초인 스트라이가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비가 안올때 물주기만 잘 해준다면 중간엔 크게 손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은준이 생각한 것은 도 있었다.
"성인들이 모두 여기 와있으면 생활이 불편할 겁니다. 소를 먹이는 일도 있고, 아이들도 돌봐야죠. 또 우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른 걸음으로 두시간을 걸어가면 나오는 큰 웅덩이에서 길어마시고 있죠."
"농장에 오는 날에는 돌아갈때 지하수를 드리죠. 그리고 농장에 오는 날에는 우리가 트럭으로 아침에 태워왔다가 다시 저녁엔 태워다드리겠습니다. 깨끗한 지하수는 그때 트럭에 싣고 가면 될겁니다."
은준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것은 부업이란 단어에서였다. 저들의 본업은 농사와 소. 하지만 농한기때 꼭 필요한 몇 명을 제외한 노는 손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댓가를 지불한다. 매일 데려다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을 주민에게도 은준에게도 서로 부담이 크지 않다. 중간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일주일에 하루정도씩 몇 명만 데려다 일을 시켜도 될 터였다.
"좋습니다. 저희도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물론 생각보다 대우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우리가 돈을 지불한다면 도시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사다줄 수도 있습니까?"
쉬사네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마을서부터 가까운 도시인 뉴-카파까지 걸어서 가려면 몇날며칠이 걸리는 일이다. 그만큼 위험하고 시간도 필요하다. 주로 소를 팔아 생필품을 사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은준이 대신 해준다면? 그에겐 트럭이 있으니 하루면 다녀올 수 있는 일이다.
"저도 제안을 하나 더 하죠. 소를 키운다고 했는데, 제 소를 몇 마리 같이 키워준다면 저도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소가 낳는 새끼를 제 소유로 해준다면 제가 중간에 들어가는 수수료는 없는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은준과 쉬사네는 협상을 체결했다. 이제 쟁기가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은준의 농장이 바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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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찰주님, 안녀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