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다음날 아침. 하늘은 언제 비가 내렸냐는듯 거짓말처럼 화창했고, 처마 밑으로 똑똑 떨어진 물방울은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부르릉!
셋은 처음 벤시몽에 올 대처럼 트럭에 올라타 은준의 GPS앱에 표시된 마을을 향해 달렸다. 밤새 비가 내렸건만, 군데군데 물웅덩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약간 질척한 느낌을 제외하면 진창이 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차에서 내려 밀어야 할 일은 없을것 같은데요?"
퉁야는 전날 내린 비에 모처럼 시원한 공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이 들떠 보였다. 은준도 퉁야의 말에 공감했다. 오프로드의 진창에 트럭 바퀴가 빠진다면 뒤에서 차를 미는 사람은 분명 온통 진흙탕을 뒤집어써야 할 테니까 말이다.
마을로 향하는 길은 편하지 않았다. 차가 지나갈 만한 길은 보이지 안았고, 대체로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들로 가려진 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거나, 갑자기 튀어나오는 작은 나무들 때문에 좌우로 방향을 틀 때에는 서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살갗이 닿았다 떨어졌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은준은 은근히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팔 피부가 참 부드럽네... 역시 애들 피부란.'
게다가 가운데 있는 자리는 붙잡을 손잡이도 없어서, 이리 튀고 저리 튈 때마다 머리카락이 날리며 비누 냄새를 훅! 하고 풍겨왔다. 야는 도시에서 자라온 여자 아이였고, 주로 학교와 성당에서의 일을 하며 자라왔다. 땡볕에서 노동을 하며 자라는 도시 밖의 아이들과 달리 피부도 그네들에 비해 비교적 하얗고 거칠지 않아 부드럽고, 오늘은 날씨마저 시원하니 닿는 느낌도 보송보송했다.
'윽, 이런!'
은준은 갑자기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딱딱함에 힐끔힐끔 옆을 살폈다. 혹시나 야가 그것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비록 한동안 여자 친구 없이 본의 아니게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이제 17살인 여자 아이 팔과 닿았다고 흥분하는 남자로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가 숫기가 없고 내게 고용된 상황이라 대놓고 뭐라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날 볼때마다 속으로 변태라고 생각하면 안되지!'
오히려 그게 더 문제다. 차라리 대놓고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대화로 오해를 풀기라도 할텐데, 꾹 속으로 참고 겉으론 내색을 안하면 그런줄도 모르고 계속 오해가 쌓일 터였다. 물론 정말 오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한번 생각 하니까 생각 안하려고 해도 점점 더 생각나네. 여자품이 그립네... 다음에 뉴-카파에 가게 되면 한번 알아볼까? 아냐, 그러다 병이라도 옮으면 어떡해. 일일이 검사시키고 할 수도 없고. 어휴, 애인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은준이 엉뚱한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퉁야가 운전하는 트럭은 마을 가까이 도착했다.
이미 마을 주민들은 자동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몰려나와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집은 흙벽을 둥글게 쌓아올려 짚 같은걸 엮어 만든 것을 원뿔 형으로 올린 형태였다. 그런 크고 작은 집들이 마을 중앙을 바라보며 둥글게 열을 선 모습이었다. 물론 어느 집은 앞으로 나와있고, 또 어느 집은 뒤로 물러나 있어 정확한 원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경계하는 모습.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붙잡아 품 안으로 잡아 끌었다. 밝은 태양을 마주보고있기 때문인지 눈매가 찌푸러져있어 그들의 표정이 은준들을 반기는 것 처럼 보이진 않았다.
퉁야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뒤따라 내린 은준은 야가 내린 뒤에 가져온 사냥용 총을 꺼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괜히 경계심만 주는게 아닐까? 저들도 총을 알겠지?'
마을 주민들의 옷은 천을 두른것 같은 복장도 있었지만, 여느 현대인처럼 티셔츠를 입고 반바지를 입은 이들도 제법 많았다. 아이들이야 거의 벌거벗었으니 그들을 제외하면 반반쯤 섞여있다고 볼 수 있었다.
'차호중씨가 여길 알고 있다는 것은 의료 봉사를 왔었다고 보면 되겠지? 그럼 저들도 알만한건 다 알거야.'
은준은 괜히 의자를 팡팡 치며 차 안을 슥 살펴보고는 그대로 총을 놔둔체 돌아나왔다.
"O mang?"
마을에서 기다란 남성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말 그대로 키가 크고 말라서 길어보였다.
은준은 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도 은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에게 말했다.
"누구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흠흠, Na ke 김은준. Lebitso la hau u mang?"
은준은 전날 야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관련된 말을 배워뒀었다. 사실 배웠다기 보다는 외웠다는게 맞을 것이다.
"잘 하셨어요."
야가 은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기특하단 표정으로 속삭였다. 은준도 자신의 반토막만한 아이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한 느낌이었지만, 한편으론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은준이 한 말은 '나는 김은준 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 소토어였다. 하지만 은준이 배운 것은 이것이 전부로 뒤에 이어진 상대의 말은 이해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중간에서 야가 통역을 하게 되었다. 퉁야는 그래도 은준보다는 알아듣는지 이따금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쉬사네 렝가우라고 합니다. 우리 마을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는 '내' 땅에 나의 허락 없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야는 은준이 하는 말을 듣고는 그 말 그대로 통역을 해야 하는지 머뭇거리다가 은준이 재촉하자 그대로 말음 옮겼다. 그러자 야의 말을 들은 주민들은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우리들이 살아온 터전입니다.]"
쉬사네 렝가우의 얼굴에서 걱정하는 기색을 은준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공격하려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고, 전부 이 뜻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호전적인 사람들은 아닌가보네.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길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리소테 왕으로부터 이 일대의 땅을 샀고, 여러분은 내 땅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은 제 소유입니다."
은준이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가는 이유는 결코 그들을 쫓아내려는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서는 저사람들이 다른데로 가버린다고 하면 그게 더 문제였다. 그는 다만 이렇게 함으로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은 것이었다.
' 처음 보는 사람이 처음부터 너무 공손하게 나가면 얕잡아볼 수 있지.'
야가 은준의 말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통역해 옮기자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좀 전보다 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쉬사네. 이게 무슨 이야기니. 네가 한번 말해보렴. 넌 도시에 나갔다 왔지 않니?]"
"[그래. 저 외지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이 땅이 저들 땅이라니? 너도 여기서 태어났고, 네 부모님도 여기서 태어난걸 너도 알잖느냐.]"
야는 은준의 눈치에 서둘러 그녀가 듣는대로 최대한 그에게 전했다. 하지만 워낙 동시에 중구난방으로 떠드는터라 그녀도 전부 전할 수는 없었고, 그나마 의미가 명확하고 중요해보이는 대화를 통역해주었다.
은준은 야의 말을 들으며 쉬사네 렝가우라는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현재 매우 곤옥스러워하고 있었다.
'저들의 대화에 따르면 저 멀대같은 쉬사네라는 남자가 유학파인가보지?'
"[조용히좀 해보세요! 제가 저들과 이야기를 한번 해 볼께요. 이러면 제가 말을 못하잖아요. 네, 네. 그들 말이 맞아요. 여기는 리소테 왕국의 땅이고 만약 왕이 저 남자에게 이 땅을 팔았다면 이 땅은 그의 것이 맞아요. 그가 우리더라 여길 떠나라고 하면.... 후...]"
쉬사네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성급한 사람은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은준은 그들의 모습에 뜨끔한 표정을 지었고, 퉁야나 야도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어쩔줄 몰라했다.
"[음, 당신이 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린 신중하고 싶습니다.]"
"[보시다시피 여긴 가난한 마을입니다. 우물도 없고, 여덟가구가 전부고, 저기 있는 옥수수밭과 소, 닭, 돼지 몇 마리가 저희들의 전부랍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이 작은 땅이 전부입니다. 부디, 부디 우리를 이대로 살게 해주세요. 흑흑.]"
쉬사네가 증명할 서류를 요구했다. 그때 옆에서 노파가 튀어나오며 글썽거리는 눈으로 마을을 가리키며 두 손을 벌려 자비를 구했다. 이정도면 은준으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는 결코 이런 상황을 원했던게 아니었었다.
일단 은준은 트럭으로 돌아가 준비해온 서류를 꺼내왔다. 혹시나 이런 상황을 대비해 가져오긴 했지만, 그들이 영어로 작성된 문서를 알아볼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었다. 하지만 은준이 내민 서류를 받아든 쉬사네는 유학파라 그런지 영어로된 서류를 살펴보고는 곧 은준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리곤 뒤에서 그만 쳐다보고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민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더 커졌다.
은준은 더 상황이 이상해지기 전에 이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도그드림님 안녕하세요
천지패황님 안녕하세요
진찰주님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장르는 몇화에선가도 말했지만, 현대물 분류가 없어서 퓨전으로 넣은거랍니다. 이계진입이라던가 마법 혹은 무공 같은 것이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라파엘대천사님 안녕하세요
전모삽님 안녕하세요
치야님 안녕하세요. 그래도 올린 날짜 보심 아시겠지만, 자주 올리고 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