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마켓에서 돌아온 이후로 둘의 일상은 평화로워 보였다. 주원이 제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를 기다리느라 무명이 마켓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가 언급되지 않자 전처럼 얼굴을 붉힐 일이 없었다.
“형, 바빠요?”
“형이 일할 땐 서재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해요….”
주원의 허락이 떨어졌는지, 언제 돌아오라고 했는지 물으려 서재로 갔던 무명은 서인이 냉랭하게 반응하자 시무룩해졌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넓은 집을 돌아다니다가 소파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서인과 무려 연애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 전보다 더 멀어졌다.
“언제 끝나지….”
최근 서인이 다시 약 개발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그는 무명과 대화도 하지 않고 오전에는 회사에, 집에 돌아와서는 서재에만 처박혀 있었다.
가끔 담배를 피우러 나와 무명의 가슴을 주무르고 마음껏 성욕을 푼 뒤 씻겨주지도 않고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 덕에 무명의 우울감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
그는 지금처럼 소파에 앉아 서인을 생각하며 멍하니 하루를 보내곤 했다. 언제 다시 마켓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는지, 언제 서인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줄지 몰라 슬프고 무료했다.
“서인이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
무명은 홀로 중얼거리며 문 닫힌 서재만 바라보고 있었다.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서인이 몸을 대주길 원할 때마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표현해도 같은 말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연인은 서로를 아껴주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무명은 단 한 번도 서인이 저를 아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많이 슬프긴 해도 그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서인이 일하느라 바쁘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애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운한 와중에도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며 이미 깨끗한 집을 청소하고 제 몸을 가꾸며 줄곧 기다렸다.
“명아.”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물을 마시러 나온 서인이 무명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가 원하는 것을 잘 아는 무명은 소파에 누워 다리를 벌렸다. 오늘은 좋아한다고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먼저 입술을 내밀기도 했다.
“말고.”
“…네?”
서인은 그런 무명을 단칼에 거절하고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받아들자 서인은 별장에 가서 오늘부터 일하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사라져버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돌아오지 않아도 서로의 몸이 닿고 키스하며 호흡을 나눠 받을 때 외로운 마음이 채워진다고 느꼈던 무명은 불안했다.
“이게 뭐야….”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무명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고기의 등급과 가격을 매긴 명단이었다. 왜 갑자기 아무 말 없다가 일하러 가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으니 더 혼란스러웠다.
무명은 서류를 살피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피가 나고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계속 뜯었다.
“하아, 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저를 향한 서인의 관심이 식어가기 시작한 시점부터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는 과호흡 증세였다. 무명은 단순 숨을 쉬기 힘든 것뿐만 아니라 손발이 저리고 가슴이 답답해 어지럼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흐, 흐아, 아….”
서인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던 무명은 이러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서재 문을 열고 서인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에 놀랐던 그도 이제는 이런 상황이 익숙해 무명을 대충 토닥여주었다.
“또 왜.”
무명을 향한 서인의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무명은 여전히 예뻤고 또 귀여웠다. 최근에는 마켓으로 함께 가자고 고집을 피우지도 않았고 공일이 보고 싶다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아서 만족스러웠다.
단지 일에 몰두하느라 예전보다 관심이 줄어든 것뿐인데 무명은 그 변화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형, 흐…. 좋아해요, 좋아해요.”
“알고 있으니까 천천히 숨 쉬어.”
그 증거가 이러한 과호흡 증세로 나타났다. 무명은 서인에게 매달려 좋아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애정을 갈구했다. 어찌나 절박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서인은 속된 말로 이 지랄이 막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를 향한 관심이 줄어든 것에 일이 바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제 무명이 마켓으로 떠나버릴 일이 없으니 집착이 좀 덜해진 것도 있었다.
“말했잖아, 너 안 버린다고.”
때리지 않고 협박하지 않으니 무명에게도 정서적으로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서인은 단호한 말투로 그를 달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몸을 기대는 그 행동마저도 귀찮아 보여서 무명은 서인의 허벅지 위에 앉아 목을 껴안고 최대한 온기를 느끼려 했다.
“흐으, 일 언제 끝나요, 언제 약 나와요….”
“무명이가 방해 안 해야지 빨리 나오지.”
장난스러운 농담에도 무명은 웃지 못했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제가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어 더 불안하고 또 숨이 막혔다. 무명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음을 눈치챈 서인은 짧게 한숨 쉬며 그를 안아주었다.
“뭐가 불안했는데.”
그나마 오늘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서인은 무명을 안고 등을 문질러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무명은 날 서지 않은 말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인의 가슴팍에 눈물을 비벼 닦으며 입을 열었다.
“형이 나 안 좋아할까 봐 무서웠어요, 흑….”
“그게 다야? 형 명이 좋아하는데.”
좋을 수밖에 없다. 예쁘고 귀엽고 몸도 잘 대주고 만지는 족족 잘 느끼는 데다가 순종적이니 말이다. 집에 놓고 사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인데, 무명은 자꾸 확인을 바랐다. 서인은 뭘 더 얼마만큼 해줘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갑자기 왜 가라 그래요, 왜 일하라고 해요.”
“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자꾸 서재에 들어와 말을 걸어오기에 병이 재발할 거 같아 일거리를 구해다 줬던 서인은 그가 원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자 조금 놀랐다. 짧은 대화로 오해를 풀게 된 무명은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걱정했다며 앙탈을 부렸다.
“낮에는 별장에 가서 일하게 해줄게.”
“정말요?”
“그래, 요즘 형도 바쁘니까 너도 일하면서 시간 보내.”
서류도 주원이 준 일거리라는 소식에 무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행사 이후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주원이 저를 때리거나 사랑을 다시 가르치리라 생각했었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니.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그럼 우리 오후에 만나요?”
“그래. 너도 일하고 싶었지?”
“…네.”
굳이 마켓에 가지 않고 별장에서 서류를 처리해도 된다고 하니 무명도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서인이 이대로 저를 떼어내 버리려는 게 아닐까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버려지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긴 무명은 그냥 집에서 일하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듯 물었다.
“뭐?”
“…네?”
그에 서인은 당황했다. 작업장, 작업장 노래를 불러대던 놈이 갑자기 아무 데도 안 가고 일에 욕심도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가 집에 붙어 있으면 좋은 일이었지만, 막상 포기해버리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 집에서 고기 썰고 핏물 빼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 매일 출근해서 보고해.”
서인은 서랍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내어 무명의 손에 쥐여주었다. 전화만 되는 마켓 표 싸구려 기기가 아닌 검색도 되고 영상도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이었다. 한두 번 사용해본 적이 있는 무명은 액정을 만지작거리다가 서인을 곁눈질했다.
“이걸로 뭐 해요? 이걸로 일해요?”
“너 가져. 이걸로 보고하라고.”
“우와, 감사합니다!”
값이 나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무명은 내숭도 부리지 않고 넙죽 받아들었다. 서인은 출퇴근 알림과 작업량을 기록하여 매일 메시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사용에 익숙하지 않아 서인의 번호를 저장하는데 20분이 넘게 걸렸다.
“네!”
연인이 아닌 상사와 부하직원 같은 모양새였다. 무명은 이상하게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빡빡한 명령에 숨이 막힐 정도의 불안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서인 역시 무명의 대답을 듣고 나서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오늘부터 일해.”
“지금요?”
“그래, 형도 연구소 가봐야 해. 내 비서가 데려다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럼 같….”
그럼 같이 가서 일하면 안 되겠냐고 물으려던 무명이 입을 닫았다. 서인이 이 말을 싫어한다는 것쯤은 눈치껏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연구소에 갈 거면 같이 가서 일하고 돌아오면 되는데, 왜 저를 별장으로 보내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다시금 불안이 차올랐다.
“형.”
“왜, 또.”
무명은 버리려는 게 아니라는 확답을 한 번 더 들으려 했는데, 서인이 귀찮아하는 티를 내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 보였다. 이러다가 그가 제게 질려 정말로 버려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녀올게요.”
“그래, 보고 꼭 하고.”
“네에….”
무명은 서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일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마 안 지나 집에 서인의 비서라는 이진혁이 찾아왔다. 서인이 배웅해줄 줄 알고 기다리던 무명은 그가 서재에서 나오지 않자 곧 죽을 사람처럼 표정이 어두워졌다.
“별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무명의 반말에 이 비서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저 대욱을 대하듯 대했을 뿐인 무명은 조용히 욕을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평소였다면 네가 뭔데 나한테 욕을 하느냐고 바락바락 대들었겠지만, 서인의 배웅을 받지 못한 지금은 기운이 없었다.
“씨발….”
무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 비서는 일부러 더 들으라는 듯이 상스러운 말을 해댔다. 비서가 처리해야 마땅한 임무를 대욱에게 빼앗긴 것도 모자라 서인이 아닌 출신도 모를 무명의 운전기사를 자처해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
무명은 그러거나 말거나 서인과의 대화에서 제가 무언가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가 나와보지 않은 게 신경 쓰여서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고민하던 무명은 결국 서인이 준 휴대전화로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혀, 저 지금 차에 올라 탓어요]
답장을 받아 불안을 잠재우고 싶었던 무명의 손이 급했다. 덕분에 이상한 오탈자투성이였다. 아직 키패드 사용에 익숙하지 않고 불안하기까지 하자 모든 게 엉망이었다.
[잘했어, 우리 명이. 다녀와.]
답장은 빨랐다. 무명은 저와 달리 속도가 빠른데도 오류가 없는 서인의 메시지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기뻐했다. 이 짧은 메시지에 다시 안정을 되찾은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해했다.
[네, 조ㅎ아해요]
마음을 담아 한자씩 눌러 쓴 메시지임에도 완벽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명은 우리 명이라는 단어에 설레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도착했습니다.”
별장에 도착한 이 비서는 친히 차 문을 열어주며 무명을 대우해주었다. 내키지 않아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서인의 명령이 있어서 깍듯이 대하려 노력했다.
“안 내리십니까?”
“내릴 거야! 너한테 열라고 한 적 없거든!”
그런 이 비서의 노력에도 무명은 성내기 바빴다. 뻔히 문이 열렸는데 굳이 반대로 내리며 노려보기도 했다.
“가!”
하대에 치욕을 느낀 비서가 고개를 숙인 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 위치와 무명의 기질을 잘 아는 대욱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다혈질인 데다가 자존심이 센 그는 언젠간 갚아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가지가지 하네.”
당장 패주고 싶어도 무명이 서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를 가능성이 크니 차 문을 세게 닫고 한숨 쉬며 화를 풀었다.
“가라고 했잖아! 나중에 부를 테니까 가!”
작업복을 갈아입던 무명은 이 비서가 안까지 따라 들어오자 기겁하고 밀어냈다. 내키진 않아도 서인이 선물해준 장소인데, 외부인이 발 들이게 둘 순 없었다.
“대표님 명령이니 문 앞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무명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이 비서는 딱 버티고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도 무명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데, 도망갈 가능성이 우려되니 어쩔 수 없이 감시해야 했다.
“형은 그런 명령 안 해! 나가! 나가! 여긴 내 거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하겠습니다.”
퇴근까지 감시해야 하는 이 비서는 무명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눈 뗄 수 없는 제 처지도 알아줬으면 했다.
“나가! 나가! 아악!”
오랜만에 눈이 돈 무명은 물건을 집어 던지며 발을 쿵쿵 찧었다. 그동안 격분할 일이 없어서 조용했을 뿐이지 예민하고 더러운 그 성질머리가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윽!”
무명이 던진 두꺼운 서류 파일에 맞은 이 비서는 흉기를 들고 다가오는 그를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뛰쳐나갔다.
“하아, 하아….”
그는 이 비서가 아예 보이지 않자 서류를 정리하며 숨을 고르고 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그런 와중에도 서인이 그리웠다. 헤어진 지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곧 다시 만날 수 있어도 슬프고 외로웠다.
[형 집에서 살자. 너 하는 일 지원해줄게. 잘해준다니까?]
[귀찮으니까 가. 일할 땐 서재에 들어오지 마.]
그의 태도를 비교해본 무명은 확연한 차이에 다시금 울컥했다. 우선순위에서 대폭 밀려난 이 서러움을 서인이 알아줄 리 없어서 감히 말 꺼낼 엄두도 안 났다.
약 개발도 탐탁지 않은데 퇴근하고 나서까지 서재에 처박혀 있으니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버려 둘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는 지금도 그랬다.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연락도 안 주나 싶어서 무명은 절망했다. 먼저 연락해봐도 돌아오는 답장은 짧았다.
놀러도 가고 하루의 반을 함께하는 게 연인이라고 해놓고서는 일하라며 다른 곳에 보내기까지 했다. 서인을 다시 납치할 계획까지 꾸려봐도 아지트가 없어서 실행할 수 없었다.
“형은 나 안 좋아해…. 내 외모랑 가슴만 좋아하는 거야.”
사랑의 의미는 다르게 알고 있어도 좋아한다는 의미는 확실히 아는 무명은 서인이 제 껍데기만 원하는 게 틀림없다는 결론 내렸다. 또 가슴이 작아 서인의 취향에 벗어났다면 아예 관심 밖일 것이라는 생각에 더더욱 우울해졌다.
잠깐이라도 보살펴준다면 행복할 텐데, 가장 큰 요소가 결핍되어 있으니 일상 자체가 흔들렸다. 무명은 버려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마켓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뇌하며 슬퍼했다.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
지독한 우울함에 빠진 무명은 빨리 끝내고 서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명단을 정리했다.
♦ ♢ ♦
무명이 슬퍼할 사이 서인은 경과를 보고 받았다. 같은 실험에 지쳐 분위기가 축 처졌고 그로 인해 능률이 떨어졌다. 그런 데다가 집중할 만하면 무명에게 연락이 몰려오니 내부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서인은 도배 수준으로 도착한 메시지에 바쁘니까 닥치라는 답장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던져놓았다.
“아직입니까.”
“아, 여기 검사 결과지 보시면 배합이나 약물 자체 문제는 아닌 거로 결론이 났고요, 어…. 현재로서는 원인 불명입니다.”
“원인 불명? 그럼 누가 몰래 주입하기라도 했다는 소린데요.”
성과없는 보고에 서인이 한숨 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노력도 보였고 능력 부족이 아님을 알아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날이 섰다.
“다시 하세요.”
“대표님, 이제는 다음 단계 진행을 고려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대로 재실험을 하다 보면 상용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연구원이 조심스레 제 의견을 전했다. 실험체도 슬슬 약물 투여가 어려운 상태였고 SI 바이오의 주가도 연일 하락하는 추세인데, 늦추는 건 서인에게도 좋지 않았다.
“일반인 대상 임상시험 허가해주셨으면 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시간 낭비 관두고 원인이나 찾아요.”
“재실험이 가장 큰 시간 낭빕니다.”
“…….”
웬만하면 끽소리 안 하는 연구원팀이 입 모아 불만을 토해내자 서인도 막무가내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규정만 지키면 괜찮습니다. 대표님과 쭉 함께해오던 기존 연구팀은 아니더라도 저희, 아마추어 아닙니다. 우려하시는 부작용도 식약청과 임상시험 수행 중인 모든 IRB에 거짓 없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서인은 연구소 여론을 파악하고 있으니 모두 다 아는 기본지식을 읊는 의의를 금방 알아챘다. 그런데도 완벽을 고집해야 하는 그도 속이 엉망이었다.
“임상시험 중 사망자가 나온다고 해도 비상은 안 걸립니다. 동의서라는 게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인과성 판명도 매우 어렵습니다.”
“…….”
연구팀의 의견이 흠잡을 곳이 없어서 서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해보자며 은근히 압박했다.
“마지막으로 진행해보죠. 딱 3개월만.”
“대표님!”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일반인 대상 임상시험 허가하겠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연구팀은 임상시험을 허가하겠다는 소식에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서인은 묵직한 책임감을 뒤로하고 연구실 밖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보면 모르나? 괜찮아 보여?”
마지막 연구 결과를 대충 예상한 그는 대욱에게 괜히 퉁명스럽게 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문제가 없는 게 문제야.”
“노력하겠습니다.”
연구원팀이야 서인이 결과물에 왜 집착하는지 몰라도 모든 걸 다 아는 대욱은 집착을 못 놓는 그가 안쓰러웠다. 더군다나 요즈음 기존 팀이 지쳐 떨어져 나갈 만했다는 험담도 종종 들렸으니 편치 않았다.
“네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었으면 벌써 맡겼겠다. 먼저 퇴근해.”
대욱의 심리를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도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서인은 대놓고 비아냥대며 비웃었다. 그는 뚱한 기색으로 곁을 지키는 대욱을 퇴근시키고 다시 빈 연구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 가 봐.”
연구팀의 실험 결과를 예상한 서인은 잠을 포기해서라도 직접 문제 성분을 검출해내고자 했다. 혼자서라도 알아보기로 한 그는 소파 구석에 처박힌 휴대전화의 존재를 잊고 실험에 집중했다.
“언제 답장해주시지? 닥치라니, 너무해….”
서인에게 욕설이 섞인 메시지를 받은 무명은 일하는 동안 참고 있다가 작업을 끝내자마자 바로 답을 보냈다. 서인이 예민한 상태이니 재촉하지 않고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기다렸다.
“날 버린 거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무명은 운전석을 발로 차고 내리치며 떠들어댔다. 너무하다고 했던 욕설이라도 왔으면 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서인에게 연락했다. 오타를 내면 칠칠치 해 보이니 속도는 느려도 또박또박 입력했다.
[형 저 집에 갈 건데요, 형은요?]
[이미 집이에요?]
답이 30분 동안 오지 않자 처음과 달리 손이 급해졌다. 연락 수단을 손에 쥐자 서인이 제 연락을 무시하고 버렸다는 망상이 따라붙었다.
[형 만ㅎ이 바쁘셰요]
[언제 오]
[셔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뒷좌석에 앉아 발 구르며 불안해하던 무명은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뭘 해도 서인의 소식이 들리지 않으니 숨이 막혔다.
“형, 저 집에 가는….”
당연히 받은 줄 알고 내뱉은 그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냉랭한 기계음에 딱딱히 굳어버렸다. 보고하라고 휴대전화를 준 건 서인이었는데, 이렇게 단절해버리니 막막했다.
“전화해, 네가 서인이 형한테 전화해!”
“전화기가 꺼졌는데, 어떻게 전화합니까. 바쁘실 테니 집에서 기다리세요.”
“형이 날 버릴 리 없어! 아니야 아니야! 연구소로 가, 연구소로 가라고!”
이 비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선은 직진했다. 연구소로 가면 서인의 명령을 어긴 게 되는데, 가지 않으면 무명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컸다.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을 달래야 하는 상황이 끔찍했다.
“기다려보시면 금방 연락이 올….”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이 비서는 저를 찢어 죽일 듯한 무명의 눈빛에 기가 죽었다. 모르는 척 버티던 그는 무명이 문을 내리고 뛰어내리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하아…. 흑, 싫어! 아니야! 아악!”
무명은 연구소로 가는 내내 울고 발악했다. 상처입힐만한 물건이 없으니 손등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신을 못살게 굴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며 제 실수를 되짚어보던 그는 홧김에 했던 말을 기억해내고는 경악했다.
[그럼 그냥 아기 할게요, 그럼 그냥 명이가 아기 한다고요! 아기 안 낳아요. 형이 나 키우면 되겠네요!]
[그래요, 그러니 아가 한다고요! 아가! 아가! 아가! 아가!]
“아니야, 안 돼! 안 돼! 야! 형 아가 좋아해? 좋아하냐고!”
“예?”
그냥 일이 바쁘겠거니 하면 될 텐데 정신이 온전치 않은 무명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튀었다. 그는 운전 중인 이 비서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고 대답을 강요했다.
“서인이 형이 아가 좋아하냐고!”
“좋아하시겠죠!”
이 비서는 이러다 사고가 나겠다 싶어 거짓말했다. 그가 아는 서인은 아기를 좋아하기는커녕 동물조차 손이 많이 간다고 귀찮아하는 인간이었는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유를 덧붙여야 하니 그냥 편한 쪽으로 대답했다.
“왜? 왜 좋아해!”
“안 좋아하시는 분이 약물에 목매겠어요? 당연히 좋아하시겠죠!”
“안 돼, 안 돼….”
서인이 원하면 다섯 명도 낳을 건데, 억울함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었다. 임신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출산하지 않겠다고 떠들어 댄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아가 낳아요, 아가, 낳을게요.]
무명은 어차피 서인이 보지 않는 걸 알면서도 메시지를 보내며 애원했다.
서인의 관심이 식음과 동시에 생겨났던 분리불안이 이렇게 심해졌다. 이대로 사고가 나서 죽는다면 만나지도 못하는데, 무명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점 하나로 판단력이 흐려져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아가 낳을게요! 낳을게요, 형, 흐….”
무명은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목놓아 울며 아무 문이나 벌컥벌컥 열어댔다. 이 비서가 꽉 붙잡고 말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제발, 진정하세요! 이러면 대표님께서 화내십니다!”
소독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들쑤시고 다니니 연구소는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인이 화를 원치 않는 무명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찾아도 서인이 보이지 않자 그는 엉엉 울었다.
“하아….”
이 비서는 모든 책임이 무명을 관리하지 못한 제 몫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는 무명을 앉혀두고 서인을 찾아다녔다. 직접 목격하게 할 바에야 먼저 가서 보고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대표님!”
한겨울에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닌 이 비서는 연구실에서 표본을 추출 중인 서인을 발견했다. 애타는 부름에 돌아본 서인은 엉망이 된 이 비서와 어수선한 연구소의 분위기를 살피곤 사고의 중점에 무명이 있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일을 방해받은 서인은 이를 악물고 무명을 향해 다가갔다. 저 멀리에서 주저앉아 우는 걸 보자 짜증이 솟구쳤다. 무명을 한심하게 보던 시선이 죄인처럼 선 이 비서에게로 꽂혔다.
“스무 살짜리 애새끼 하나 통제 못 해서 이 사태를 만드나?”
서인은 무명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님을 잘 알았지만, 이곳까지 끌려온 건 이 비서의 능력 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행히 연구원들은 제 일을 하느라 바빠 크게 관심 없는 분위기여도 서인은 아니었다.
“일어나.”
서럽게 우느라 서인이 제 옆에 선지도 모르고 있던 무명이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서인의 존재를 확인하기 무섭게 허리를 껴안고 뺨을 비벼댔다.
“아가 낳을게요. 다섯 명도 낳을게요….”
“일단 이리 와.”
뺨을 후려치며 온갖 모진 단어를 모아 쏟아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삭인 서인은 무명을 빈 연구실로 끌고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집어 던지듯 벽에 밀치자 무명이 쓰라리게 신음했다.
“으, 윽…. 저, 형! 제가 아가 안 낳는다고 해서 버리는 거예요?”
“뭐?”
“전화 안 받으셨잖아요, 꺼버리셨잖아요.”
허락도 없이 서인의 가운 주머니를 뒤지던 무명은 휴대전화가 손에 잡히지 않자 울상을 지었다.
“아.”
서인은 그제야 휴대전화를 아무 곳에나 던져놓았음을 알고 혀를 찼다. 기다리고 있을 무명을 잊어버렸다는 뜻이었다.
“일하는 데 방해되니까 치워뒀지.”
“…네? 저는요, 그럼 형만 기다릴 저는요?”
무명은 제가 목 빼고 기다리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유일한 연락 수단을 다른 곳에 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와닿았다.
“바쁜데 너까지 살펴야 하나?”
사과는 기대하지 않았어도 포옹은 해줄 줄 알았던 무명은 도리어 탓하는 서인에게 항의했다.
“너무해요! 이번에는 형이 잘못한 거잖아요!”
“어련히 알아서 가겠거니 하고 기다렸어야지.”
“형이 연락하라고 했잖아요, 나는 그래서….”
“건방지게 어디서 소릴 질러?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매섭게 고함치는 서인의 태도에 무명은 크게 상처받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졌고 서인이 미워서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나 좋아한다면서요….”
“그래, 좋아해. 네가 가만히 앉아서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얌전히 입 다물고 있으면 싫을 수 없지.”
결론은 지금은 싫다는 이야기다. 무명도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속뜻을 이해했다. 그러나 애초에 곁에만 있어 주면 입 다물고 있을 텐데 바라는 건 해주지도 않으면서 무리하게 요구하니 무명도 서운했다.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가져다 버리려고 하고! 귀찮은 애 취급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하라는 대로 해야 좋아해 준다고.”
서인은 뻔뻔했다. 하라는 대로 해야 좋아해 준다는 건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뜻이 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는 잘못한 거 없…. 아!”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서인은 울먹이는 그의 가슴팍을 세게 밀어냈다. 몸이 휘청일 힘에 무명이 가슴을 움켜쥐고 울먹였다.
“가슴, 가슴을….”
습관처럼 뺨을 후려댔던 서인은 의식적으로 보이는 곳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얼굴이 퉁퉁 부은 걸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무엇 보다 만지면 아파해서 번거로웠다.
“너무해, 너무해요!”
서인에게 맞을 각오는 했어도 가슴을 맞을 줄은 몰랐던 무명은 격렬하게 앙탈을 부렸다. 성교할 때 한두 번 맞은 적은 있어도 멀쩡한 상태로 맞는 건 처음이라 수치심이 밀려왔다.
“입 닥쳐. 좆 같으니까.”
“나는 형만 기다렸는데, 단지 전화가 안 돼서…. 형은 저 귀찮은 거죠? 절 좋아하지 않으시는 거죠? 흑, 흐….”
“네가 예쁜 짓을 해야 사랑을 해주지. 이따위로 굴래?”
서인의 호통에 무명이 입을 다물었다. 억울하고 속상한데도 그가 없으면 숨도 못 쉬는 을의 처지였으니 말이다.
“집에 가.”
“형은요….”
“일한다고 했잖아. 기억력이 나쁘나? 머리에 든 게 없어?”
“집에 가 있으면 좋아해 주실 거예요?”
“어. 가서 씻고 기다려. 그럼 사랑해줄게.”
“근데 왜 자꾸 사랑이라고 해요? 왜, 무섭게 왜 그러세요….”
무명은 겁먹고 쭈그려 앉아 몸을 떨었다. 매번 같은 패턴에 진력난 서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흐으, 흐, 하아….”
“하, 돌아버리겠다….”
무명은 귀찮아하는 서인을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다른 사랑의 의미를 접하고 난 뒤로 줄곧 머릿속을 괴롭혔던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하…. 형….”
“그래.”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도 서인이 재촉하지 않아서 그나마 안정적인 편이었다. 무명은 그의 손을 구명줄처럼 붙잡고 놓질 않았다.
“사랑이, 하아…. 사랑이 뭐예요?”
평생을 외쳐댔던 사랑의 뜻을 묻는 무명의 눈엔 좋지 못한 감정이 가득했다. 짧게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사랑?”
“하아, 하…. 네, 네…. 아, 아! 잠깐만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용기 내 물어보긴 했으나 무명은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서인을 멈춰 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숨을 내쉬었다.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 불편한 건 변치 않으니 준비해야 했다.
“아니, 그딴 건 왜 묻는데?”
“네, 네? 아…. 그냥 알고 싶어서요….”
서인은 그런 무명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쏘아붙였다. 집에서 해결해도 되는 일을 질질 짜며 물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고작 그거야?”
뭐가 어찌 됐든 그는 일을 방해받았다는 게 불편할 뿐이었다. 도움을 요청한 무명은 저를 걱정하지 않는 서인을 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상대방을 위해 뭐든 다 해주고 소중히 여기는 감정. 대충 그런 거야. 됐어?”
“…….”
무명이 자세하고 다정하게 설명해주길 바라도, 사실 서인도 애정을 받아보지 못했다. 제게 다가오던 이들은 모두 배경에만 관심을 두었으니 이론만 아는 격이었다.
“이해됐으면 가. 사랑이니, 뭐니 그만 떠들어대고.”
물론 순수하게 다가온 놈도 있었지만, 그때의 서인은 누구도 상대하지 않게 된 후였다. 특별한 경험이 없으니 달갑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는 하나의 감정일 뿐이었다.
“가라니까?”
“…….”
사랑의 본 의미를 듣게 된 무명은 침묵했다. 사람이 아연실색하면 비명은커녕 숨도 못 쉰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그는 서인이 잡아당기는 대로 질질 끌려가 이 비서에게로 던져졌다.
“일 똑바로 해. 두 번은 없어.”
“예, 대표님.”
“데려가.”
서인은 무명이 언제 집에 오느냐고 묻지도 않고 반항도 하지 않는 게 의아했지만, 불러 세우지 않고 다시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괜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기보다는 빨리 끝내놓고 가는 게 몇 배는 나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 비서를 따라나서는 무명은 공황상태였다. 단어의 뜻을 확인하고 마켓에서 가르침 받은 사랑이 거짓일 가능성을 염두에 뒀어도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서인의 입에서 같은 의미가 들린 순간에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흐으, 윽….”
무명은 그간 받아 왔던 사랑이 가학행위임을 부정했다. 그런다고 의미가 변하지도 않는데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고위관계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바보 같았고 마켓에서 배운 모든 단어가 전부 잘못됐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하겠다며 자책했다.
“내 잘못이야….”
무명을 태운 이 비서는 그가 얌전한 틈을 타 넥타이로 손목을 칭칭 감아 결박했다. 날뛰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큰 충격에 기운이 없는 무명은 손목이 묶여도 반항하지 않았다.
♦ ♢ ♦
“일어났어?”
“…….”
울다 지쳐 잠든 무명이 눈을 뜬 건 오전 5시였다. 그는 서재에서 업무를 보다가 잠시 부엌으로 나온 서인을 마주쳤다. 당연히 오늘은 집에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무명은 반가움에 달려가 안기려다가 망설였다.
“이리 와.”
서인은 금붕어 입술처럼 퉁퉁 부은 눈으로 멍하니 선 무명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바로 달려왔어야 정상인데,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으니 분명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안 갈래요….”
[말 잘 들으면 사랑해줄게.]
[사랑은 상대를 소중하게 대하는 거. 대충 그런 뜻이야.]
[잘 빨아 봐. 그래야 사랑받지.]
강제로 성기를 애무하며 들은 폭언이 뇌리를 스치자 무명은 제가 달려오기만을 기다리는 서인을 거부했다. 분위기가 서늘해져도 번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혼란스러워서 그러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랑은 행복하고 좋은 거라면서, 형도 수장님처럼 성기를 핥게 했잖아? 그건 나쁜 건데, 뭐가 맞는 거야?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거지? 누가? 누구야? 누가!’
“으으으….”
“안 들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명이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았다. 옆에서 도와줘도 모자랄 판국인데, 서인은 거만한 자세로 서서 그를 닦달했다.
“싫어요! 나중에 이야기할래요….”
이렇게 대놓고 밀어내는 건 처음이라 긴장한 무명의 어깨와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혼자 있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보던 무명은 순간 서늘한 분위기를 느끼고 뒷걸음질 쳤다.
“악!”
“오라면 오는 거지 어디서 토 달고 지랄이야?”
무명이 방 안으로 도망치려 하자 서인이 멱살을 붙들었다. 벽에 머리를 찧은 무명이 괴로워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 아파요….”
“이번엔 뭐가 문제야.”
이대로 무시하고 내버려 두면 또다시 귀찮게 굴 테니, 서인은 오늘 시간을 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으나 무명은 고개만 저었다. 곁을 지켜달라는 애원도 무시하고 애정 표현도 전혀 해주지 않았는데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니 믿을 수 없었다.
“…대화하기 싫어요.”
“지랄 그만해.”
무명이 손톱을 뜯으며 다시 한번 딱 잘랐다. 어차피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싫다고 했잖아요…. 안 들어주실 거예요?”
무명은 서인 한정으로 유순한 편이었으나, 몰아붙이기만 하는 태도에 지쳐버려서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서인도 서인대로 무명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열이 뻗쳤다. 게다가 연구소로 찾아와 훼방 놓을 땐 언제고 대화도 하기 싫다고 하니 황당했다.
“닥치고 말해.”
“닥치는데 어떻게 말해요?”
“나랑 장난해?”
불필요한 다툼을 꺼리던 서인이 장난 같은 대답에 폭발했다. 일도 잘 안 되는데 무명까지 대드니 돌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게 아니라…. 악!”
“내가 대체 어디까지 봐줘야 하는데!”
서인은 그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손에 든 물컵을 내던졌다. 놀란 무명이 비명을 질렀다.
“하…. 날 방해한 건, 응? 너야. 내가 별 지적 안 하고 넘어가 줬잖아. 그만 조르고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지를….”
“제가 언제 형한테 사랑해달라고 했는데요? 듣기만 해도 거북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무명은 사랑을 조르지 말라는 말에 불덩이를 토해내듯 악을 질렀다. 헷갈리게 해놓고서는 사랑을 들먹이며 상처를 후벼 파니 울컥 차올랐다.
대화가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하는데, 둘은 대화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졌다. 마켓의 사랑을 모르는 서인과 사랑을 좋게 평가해놓고서 고위관계자처럼 구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명의 견해차인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게 미쳤나!”
“아!”
꾹 참다가 한 번 대들었을 뿐인데, 서인은 바로 손찌검하며 난폭하게 굴었다. 손바닥도 아니고 주먹으로 얻어맞은 무명이 뺨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입술을 깨물었다.
“으으….”
“뭐? 거북해? 다시 지껄여 봐.”
“전, 저는! 사랑 싫어요.”
무명을 헤아리기는커녕 제게 언성을 높여서 화가 난 서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하아…. 머리 검은 짐승은 은혜도 모른다더니.”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명은 내 머리는 갈색이라고 하려다가 살벌한 표정을 보고선 눈치껏 입을 닫았다.
“뭐가 문제냐고.”
“언제 좋았는데요? 난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어요! 형이 성기 빨게 했잖아요! 아팠어요, 싫었어요! 형만 좋았잖아요! 형만 만족했잖아요!”
“하하! 만족? 만족이라고….”
비열한 일을 하는 게 아니면 크게 웃지 않는 서인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무명이 질질 싸며 허벅지를 경련하던 게 아직도 선연한데 제 만족을 운운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저는 한 번도 안 좋았… 아, 앗!”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무명에게 다가간 서인이 그의 성기를 발로 짓뭉갰다. 힘을 실어 짓밟은 채로 발가락을 움직이며 애무하자 무명이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아, 으…. 응….”
“걸레처럼 벌리고 헐떡대면서. 아니긴 뭘 아냐.”
서인은 다리를 벌리라고 교육한 장본인인 주제에 모든 책임을 무명에게 뒤집어씌웠다. 오므리면 허벅지를 내리치고 목을 졸랐던 건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니야, 아니….”
“아, 형, 이상해요, 아, 좋아, 아….”
끝까지 부정하자 서인은 침대 위의 무명을 흉내 내며 조롱했다. 그가 실실 웃으며 야한 신음을 내는 탓에 귓가가 터질 만큼 달아올랐다.
“어, 아…. 그, 그게, 그게….”
당혹스러운 무명은 말을 더듬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성기가 꼿꼿한 채라 느끼지 않았다고 우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죄인같이 땅만 보던 그는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잘 빨지도 못하면서 주둥이 함부로 놀리면 못 쓰지.”
“으, 윽! 싫어요! 싫어요!”
“아예 못 떠들게 물려놔야겠네.”
서인의 성욕을 충족하게 하려거든 삽입이 빠질 순 없다. 아직 손가락도 안 넣었는데, 혼자 즐긴 놈 취급받으니 억울했다. 몸을 짓누르고 삽입하려던 그는 풀리지 않은 구멍에 넣어봤자 재미도 없으니 입에 쑤시는 쪽을 택했다.
“시, 싫어요! 싫어요, 우, 욱!”
서인은 언제나 그랬듯 무명의 머리통을 붙잡고 입술에 귀두를 문질렀다. 마치 자위 기구를 다루듯 거칠게 밀어 넣었다.
“아….”
성기를 감싸는 따뜻한 혀와 입안의 점막을 느끼려던 차에 무명이 발버둥 치며 고의로 이를 세웠다. 순식간에 흥이 식자 서인이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며 뺨을 여러 차례 내리쳤다.
“아, 명아…. 네가 형 만족하게 해준다며?”
입술과 뺨이 부어오른 무명은 서인의 눈이 욕망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절망했다. 역시나 마켓과 같은 방식의 사랑이었다. 서인은 저를 괴롭히기 위해 거짓말했고 인터넷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정보가 가득하다며 속으로 원망했다.
“싫어요….”
두 가지 뜻을 가진 사랑에 혼란스러워할 바에야 차라리 확실히 알게 된 편이 나아도 서인이 밉고 사랑이 다정한 감정이었으면 했다.
“벌려.”
“안 해요! 싫어!”
사랑받길 원하지 않는 무명이 밀어내고 발악하기 무섭게 손이 날아들었다.
“으윽!”
“형이 하라면 하는 거지. 버릇없게 굴지 마.”
무명은 커다란 성기를 콧대에 가져다 대고 명령하는 서인이 무섭기보단 미웠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할진 몰라도 어떻게든 사랑받는 걸 모면하려 했다.
“싫어요, 싫다고요!”
“하….”
무명은 들이대는 서인의 성기를 툭 쳐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로 저를 상처 준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운을 띄우지조차 못했다.
“사랑해달라고 한 적 없다고 네 입으로 말한 거다.”
“네.”
단호한 물음에도 무명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서인은 네 사랑 따윈 원치 않는다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자리를 피했다. 더는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아 바람을 쐬며 분을 가라앉히던 서인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씨발!”
그는 정신없이 몰아붙였던 걸 되돌아보며 후회했다. 어쩐지 제가 사랑을 갈구하는 꼴로 보여서 이가 갈렸다.
“흑, 흐윽….”
안에서 무명이 징징거리기까지 하니 반쯤 미칠 지경이었다. 저는 진정하려고 애쓰는데 불을 지펴대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였다. 어찌나 크게 울어대는지 테라스에 있어도 울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우는 그에게로 다가간 서인은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을 경고했다.
“조용히 해.”
“흐…. 흑….”
대화도 안 하고 사랑도 바라지 않는다면서 무명의 눈빛은 달램을 애원하고 있었다. 서인은 그의 비위를 맞춰 줄 의무가 없으니 달래주지 않았다.
“흐윽, 흐, 흐아….”
“입 다물라고 했어.”
하라는 대로 해야 맞지 않는 걸 알아도 무명은 멈추지 못했다. 사랑 당할뻔한 게 서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나 가치관이 다른 데다가 대화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결과는 언제나 나빴다.
“넌 내 말이 말 같지 않지?”
“아!”
성큼성큼 다가온 서인은 거듭 손을 들었고 무명은 반항할 틈도 없이 얻어맞았다. 손찌검 한 번에 입술에 피가 터지고 설상가상으로 시계에 긁혀 생채기까지 났다. 아예 머리채를 붙잡은 채로 마구 후려쳤다.
골이 울리고 귀가 아픔을 인지하기 무섭게 서인이 배를 걷어차고 머리를 붙잡아 벽에 내리찧는 등 무명을 죽일 기세로 매타작했다.
“윽! 큭! 허…. 헉! 시, 싫어요!”
“그래, 나한테 사랑받기 싫다고. 알아들었으니 그만 말해도 돼.”
사과할 기회도 주지 않는 폭력에 무명은 덜컥 겁이 났다. 살인에 익숙해진 지난 몇 년간 크게 느껴 본 적 없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윽, 으! 자, 잠….”
무명의 몸이 어디 할 거 없이 엉망이 되어도 이성을 잃은 서인은 멈추지 않았다. 무명은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기만 했다.
“하아, 아, 아파…. 아파아…”
그는 벌벌 떨며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싹싹 빌었다. 막무가내로 폭행하던 서인은 눈물과 피범벅 된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무명을 보고선 눈을 질끈 감고 신음했다.
“윽….”
“흐, 으…. 형?”
무언가를 참는 듯 보이자 무명은 눈도 뜨지 못하면서 서인을 걱정했다. 뼈라도 부러졌을까 봐 이곳저곳 살펴보던 그는 불룩한 허벅지 부근을 발견하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발기할 만한 요소가 없어서 무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처럼 고기를 손질하기 전도 아니고 그냥 손 가는 대로 후렸으면서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달아오른 서인이 무섭기까지 했다.
“씹….”
당황한 건 서인도 마찬가지였다. 발기한 것도 모자라 사정 욕구까지 몰려들었다. 다소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고 다시 손을 들자 무명이 무릎으로 기어 도망쳤다. 걱정이 되긴 해도 맞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흐으, 흐….”
뺨이 퉁퉁 부어올라 앞이 보이지 않아도 열심히 기었다. 배와 가슴팍을 밟혀서 그런지 숨을 내쉬면 온몸이 아팠다. 절로 앓는 신음이 나왔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
잠시 자신의 상태 변화에 당황하던 서인은 눈앞에 움직이는 하얀 엉덩이를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힘겹게 도망치는 무명을 놀리기라도 하듯 느리게 뒤따라가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며 웃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힘없이 엎어진 무명은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함에 바닥에 고개를 박고 울었다.
“일어나.”
“흐, 후으, 으….”
“어디까지 도망가려고 했어, 응?”
언뜻 들으면 다정하다고 착각할 법했다. 그는 엎어져 있는 무명의 머리를 잡아당겨 눈을 마주 보게 했다. 전과는 달리 헐떡대며 흥분해 있었다.
“너, 이럴래?”
무명뿐만 아니라 서인의 손등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깨진 손목시계에 긁혀 피가 배어 나왔고 손목도 뻐근한 상태였다. 학대 수준으로 폭행당한 무명은 그 와중에도 서인이 걱정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흐, 죄송해요….”
손톱에 거스러미 하나 없이 단정하게 정리된 손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명은 서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연신 사과만 해댔다.
“죄송할 게 아니라!”
“흐으, 흐….”
어쩌면 맞지 않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무명은 그 사실을 알아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울뿐더러 서인의 비웃음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서인은 대답 대신 흐느낌을 들려주는 무명을 보며 소파 위에 널브러진 벨트를 쥐었다. 한쪽을 말아 손에 두르고 끝을 짧게 쥔 그는 망설임 없이 무명을 향해 휘둘렀다.
“…!”
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통증에 무명은 입을 벌리고 몸을 파드득 떠는 게 전부였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통증에 다시 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막아봐도 매서운 채찍질이 수없이 떨어졌다.
“하아, 하….”
그러나 신음하며 거친 숨을 내쉰 쪽은 얻어맞은 무명이 아닌 서인이었다. 그는 분노가 아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서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혀, 형….”
벨트를 손에 쥔 채로 숨만 몰아쉬자 무명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남 걱정할 새가 아니라는 걸 금방 또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든 서인은 제가 상태가 어떤지 똑바로 자각하지도 못한 채 도 넘는 학대를 이었다.
“으, 흐으, 아파, 아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이제는 빌어도 소용없었다. 서인은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기어 도망치는 무명을 억지로 눕혀 배 위에 올라탔다. 그전까지는 단순 분노와 오기였다면 지금은 머릿속에 좆을 물리고 마구 박아넣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야, 빨아.”
“흐, 하아, 하, 헉….”
그러지 않아도 배를 맞아서 숨쉬기 힘든데 짓눌리기까지 하자 얼굴에 피가 몰렸다. 서인은 몸을 뒤흔들며 밀어내려 하는 무명의 두 손목을 머리 위로 잡아 누르고 발정 난 짐승처럼 성기를 비벼대며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시, 싫어요…. 하지 마세요, 윽!”
무명이 거부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기 무섭게 서인이 인정사정없이 목을 졸랐다. 그가 아무리 이런 SM 플레이에 지식이 있다고 한들 감정이 이성을 앞선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즐기기 위함이 아닌, 살의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으, 컥! 아….”
끅끅대며 괴로워하는 반응을 눈에 담는 서인에겐 살기 위한 몸부림이 보이지 않았다. 무명은 몸을 배배 꼬아봐도 목을 죄는 손에 힘이 풀리지 않자 무릎을 세워 서인의 등을 내리쳐보기도 했다.
“흐….”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서인은 굳건했다. 식은땀과 생리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정신이 몽롱하고 귀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다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조르던 서인은 무명이 축 늘어뜨리며 눈꺼풀을 경련하자 천천히 힘을 풀었다. 새하얀 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에 가슴이 요동쳤다. 그는 마른기침해대며 목을 쥐고 바닥을 구르는 무명을 보며 자위했다.
“하….”
사정은 평소보다 빨랐다. 얼굴에 서인의 정액을 뒤집어쓴 무명은 죽을힘을 다해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서인의 움직임을 살피며 더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우, 흐…. 윽, 으….”
눈두덩에서 흐른 정액이 턱을 타고 뚝 떨어졌다. 무명의 옷이 젖은 걸 발견한 서인은, 이내 그가 구토했음을 알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거슬리게 하면 맞는 줄 알아.”
“…….”
“대답 안 해?”
서인은 우느라 대답하지 못하는 무명에게 윽박지르며 식탁 다리를 걷어찼다. 위에 있던 컵과 접시가 떨어지자 무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히 대답했다.
“네, 네, 흐….”
대답 끝에 흐느낌이 따라붙었다. 서인은 실핏줄이 터져 새빨간 눈과 군데군데 꽃 핀 얼굴을 봤음에도 그를 내버려 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하….”
무명의 숨통이 트인 건 서인이 집을 나가고 난 후였다. 그는 배를 부여잡고 끙끙대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주변을 정리했다. 유리 조각을 치우다가 손이 베였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수준으로 몸이 온전치 못했다.
“으!”
울고 싶어도 목이 아파서 찍소리 못했다.
그는 연신 침을 뱉어내며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우선 피를 닦아내야 대충 수습할 수 있을 텐데, 무명은 얼굴이 함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거울을 바로 앞에 두고도 고개 들지 못했다.
봐줄 게 외모와 가슴뿐이라고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망가지면 버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무명은 가엾게 쭈그려 앉아 숨죽여 울었다. 무엇하나 정상인 게 없었다.
♦ ♢ ♦
한바탕 소란을 겪은 뒤 무명에게 작은 변화가 있다면 서인의 움직임에 질겁하고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하고 싶어도 못 했다.
“작업 다 하셨습니까?”
“응…. 집에 갈래.”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 하는 서인 때문에 무명은 전보다 더 방치되었다. 우울한 감정이 짙어져 이 비서가 별장에 발을 들여도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별장에서 의미 없는 명단을 정리하며 지루한 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하아….”
두들겨 맞은 후 서인이 최 박사라는 주치의를 보내 치료를 해주어도 내면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무명은 얹혔을 때처럼 답답한 가슴을 쿵쿵 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집에 가나 별장에 머무나 혼자인 건 같아도 서인의 향이 밴 베개라도 껴안을 수 있는 집이 나았다.
“있잖아, 형은 뭐 해?”
뒷좌석에 앉아 얌전히 창밖을 보던 무명이 입을 열었다. 아예 연락도 안 하고 만난 지도 오래되었으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일하십니다. 찾아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비서는 무명이 또다시 연구소에 찾아가자고 고집을 피울까 봐 잔뜩 긴장했다. 눈치를 보긴 봐도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가 툴툴댔다.
“누가 간다고 했어? 안 가!”
사실은 찾아가고 싶었던 무명은 괜히 골을 냈다. 그마저도 기운이 없고 우울해서 금방 축 처졌다.
이 비서는 그가 화내자마자 급히 차를 몰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니 언제 다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칠지 모를 일이었다. 이 비서는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집에 처박아 두기로 했다.
서인은 거의 한 달 내도록 무명과 대화하지 않았다. 마주쳐도 그가 겁먹는 탓에 뭘 해볼 새도 없었다. 그 탓에 쌓인 성욕도 성욕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대표님?”
[사랑받고 싶지 않아요! 사랑이 뭔데요? 그런 끔찍한 걸 저한테 하려고요?]
서류를 훑으며 그날을 되돌아본 서인은 그 속에서 모순을 찾았다. 예전에도 그가 사랑을 부정적으로 느낀다는 걸 알았지만, 크게 관심 없어 물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온몸으로 갈구하면서 정작 원하지는 않는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따로 없었다. 사랑이 뭔지 묻는 거로 보아 뜻을 잘못 알았다는 게 되는데, 설명해준 후에도 이상하게 구니, 화가 나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
서인은 더 고통을 줘서 불게 하는 게 어떨까 고민하다가 픽 웃었다. 그렇게 맞아도 굳건했던 놈인데, 더 해봐야 손만 아플 뿐이다.
“대표님!”
“…뭡니까.”
“보고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두고 가보세요.”
서인은 제가 연구원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정신이 빠져있었음을 불쾌하게 여겼다. 주제가 무명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되는 일이 없네….”
정작 무명은 연락 한 통 없는데 혼자 이러고 있는 게 자존심이 더럽게 상했다. 확 갖다버려도 속이 안 편하니 머리만 아팠다.
결국,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려는데 저 멀리서 정신없이 뛰어오던 누군가가 서인과 부딪혀 나뒹굴었다.
“으악!”
“하아…. 깨지면 안 되는 물건투성이니 조심 좀 하지 그래요.”
대충 연구원이겠거니 하고 엎어진 상자를 정리해주며 잘 보고 다니라고 주의했다.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아 언짢아지려던 차에 연구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무명이 하던 짓을 똑같이 해댔다.
“죄송합, 아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뭐?”
서인은 귀를 의심했다. 난데없는 급한 사랑 고백에 그의 복장을 확인한 서인은 연구원이 아닌 실험체 중 한 놈인 것을 알아챔과 동시에, 그동안 무명이 보인 소행들을 모두 이해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서인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실험체를 뒤로하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마켓 노예들을 다루기 쉽게 만들어놓은 규칙이 무명에게 적용되었다는 당연한 점이 이상하게 묘했다. 마켓 놈들을 다루는 건 주원의 몫인 데다가 세세한 규칙에는 관심이 없었던지라 사랑이 이런 식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스치듯 더 신경을 기울일 걸 그랬다고 생각한 그가 흠칫 놀랐다.
“아, 좆 같네….”
무명을 집에 들인 후 서인은 종종 자신을 낯설게 느끼곤 했다. 임상시험과 상용화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무명과의 관계를 정의해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남을 배려하려는 쓸모없는 시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
무명이 입 다물고 시위했던 원인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보통 연인 사이에서 오해 푸는 방법은 몸의 대화를 나누거나 사과하는 법인데, 서인은 사과할 위인도 못 되는 데다가 몸의 대화는커녕 무명이 그를 등지기까지 하니 화해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서인은 모든 사실을 알았음에도 자존심과 일이 더 중요하니 무명에게 당장 가보거나 연락하지 않았다.
“불을 다 켜놓고 있네.”
무명의 문제를 파악한 서인은 오랜만에 귀가했다. 새벽녘에 퇴근한 그는 불을 온통 환하게 밝힌 채로 소파에 웅크리고 잠든 무명을 발견했다. 소파가 아무리 넓어도 침대만큼 편하지 않은데 편한 침대를 두고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는 악몽에 시달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윽….”
혼자 청승 떠는 무명을 침대로 옮기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음식물로 엉망이 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 식탁 할 거 없이 음식이 묻어있고 반찬통도 아무 곳에나 널브러진 채였다. 잇자국이 난 당근이나 오이 따위도 몇 개 떨어져 있었다.
구석구석 샅샅이 살핀 서인은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마구 요동침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당연히 집에 오지 않으리라 판단한 무명이 저질러 놓은 만행이었다. 씻고 와서 치우려고 했는데, 목욕하자마자 그만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하아, 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서인은 손을 수십 번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대욱에게 연락을 남겨 놓았다. 재차 손대면 무명의 상태가 악화할 테니 이를 악물었다.
“으응….”
참는다고 한들 더러워진 제 영역을 지켜보고 있는 건 곤욕이었다. 서인은 세상모르고 자는 무명을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서인이 190cm에 가까운 거구라 한들 그보다 더 묵직한 무명을 번쩍 안기는 버거웠다. 어쩔 수 없이 던지듯 놓아버린 그는 일어날 기미도 없이 자는 무명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이불을 폭 뒤집어 씌워놓아도 몸을 떨며 힘들어하는 게 한심해 보였다.
“이렇게 약해서 얻다 써먹어. 지랄만 할 줄 알고.”
서인은 모질게 말하면서도 괴로워하는 게 가엽긴 해서 눈두덩을 살살 문지르고 뺨을 쓰다듬으며 제 방식대로 달래주었다.
말랑말랑한 볼을 주무르자 무명이 몸을 뒤척였다. 더 움직였다가는 떨어질 기세라 서인은 하는 수 없이 옆에 누워 그를 벽 쪽으로 밀어놓았다.
벨트에 맞아 흉터 진 무명의 손등을 매만지던 서인은 다른 한 손에 구명줄처럼 쥐고 있는 휴대전화를 발견했다. 손가락을 떼어 강제로 빼앗아 들자 문자창이 떴다.
[보고 싶어요.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형 저 슬퍼요. 아파요]
화면에는 미처 전송하지 못한 애원 섞인 메시지들이 자동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수신자는 모두 서인이었고 보고 싶다, 잘못했다 등등 그를 그리워하며 반성하는 내용이었다. 연락에 그토록 집착해놓고서 정작 해도 될 때는 망설이고 앉았다.
“어휴….”
그동안 삽질만 한 격이었다. 서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 쉬며 무명을 껴안아 주었다. 몸을 가까이하자 그의 숨결이 뺨을 간지럽혔다. 패악질을 부리지 않고 잘 때는 천사 같았다.
“으음, 형….”
무명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자는 와중에도 서인을 찾았다. 서인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굳게 감긴 그의 눈두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무명에게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심장이 느릿느릿 뛰고 약간 울렁이는 이상한 느낌이 들면 괜스레 그에게 짜증 내기도 했다. 거슬리는 짓을 해도 눈감아주고 싶으면서 징징거리고 집착하는 건 또 싫었다.
그렇다고 아예 외면하는 게 좋지도 않으니 깔끔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하….”
좆 집 같은 천박한 단어로 떠들어봐도 무명을 위하느라 아직 삽입도 안 한 상태라 성욕 풀이로 데리고 있음도 구실이 되지 못했다. 볼 건 반반한 면상 하나뿐이었는데, 고작 그 하나로 무례를 참는 건 성격에 맞지도 않았다.
분명 오래간만에 같이 자 주려고 했는데, 머리가 복잡해지자 잠이 달아났다. 서인은 잠결에도 제 부재가 싫은지 옷자락을 붙잡은 무명의 손을 떼어내고 조용히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오전 6시, 퉁퉁 부은 채로 일어난 무명은 별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할 일이 없어도 서인이 시킨 일이니,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며 일지를 작성해두었다.
소파에 앉아 이 비서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서재 문이 열리자 잔뜩 긴장했다.
“아, 일어났어? 부었네.”
대욱이나 경호원이라고 예상했지, 서인이 직접 나올 줄 몰랐던 무명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방치된 지도 오래 지나서 그가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아예 놓아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질겁한 무명은 딸꾹질하며 몸을 일으켰다.
“…….”
일어났냐는 서인의 인사를 끝으로 넓은 집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평소 무명이었더라면 바로 달려가 안겼을 텐데, 고개 숙인 채 눈치 살피기 바빴다. 서인이 하도 방치하고 받아주질 않으니 먼저 다가가는 데에 거부감까지 생겼다. 그렇다고 서인이 먼저 반기지도 않으니 어색한 분위기만 지속되었다.
“대답 안 해?”
두려워할지언정 보고 싶었다고 들러붙을 줄 알았던 서인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기분이 상했다. 화내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네…, 일어났고 부었어요….”
고압적인 태도에 무명이 긴장한 채로 딱 질문에만 대답했다. 반항한다기보다는 서인이 무서워서 눈을 보고 대화하지 못했다. 평생 맞다시피 하고 살았음에도 반항심 꺾는 교육에 가까웠지, 이렇게 맞는 건 거의 처음이라 저절로 기가 죽었다.
“그게 다야?”
“…….”
서인은 살해할 수준으로 때린 가해자인 주제에 피해자가 반겨주기를 바랐다. 무명이 저를 반기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서 본인이 이기적인 건 전혀 몰랐다. 되려 무명이 거부했던 그 날로 돌아온 착각에 점점 열이 올랐다.
내가 왔는데, 반기지를 않느냐고 따지려 하니 무명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미쳤어? 형이 언제 이렇게….”
사과를 바란 게 아니었던 서인은 무명이 새하얗게 질려 싹싹 빌자 말문이 막혔다. 최대한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 하자 무명이 변명했다.
“식탁, 흐, 거실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배가 고파서, 배가, 배가….”
깨끗해진 부엌을 본 무명은 지난 밤 배가 고파 밥을 먹다가 엉망으로 해두었던 걸 떠올리고는 안절부절못했다.
대욱이 있을 땐 그나마 안정을 지켰어도 그가 서인을 보필하느라 바빠 집에 오지 않았기에 식사 예절이 엉망이었다. 서인에게 맞고 미움받을 테니 빌어서라도 꾸지람을 듣지 않으려 했다.
“괜찮으니까 그만해. 곽 실장이 치우고 갔어. 양호한 편이었지, 뭐.”
무명은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서인 나름의 달램이고 사과였다. 그가 혼내지 않자 무명은 무릎을 꿇은 채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당연히 맞을 줄 알았는데 맞질 않으니,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아침 먹었어?”
“아니요….”
식탁이 깨끗하니 당연히 먹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서인은 같이 먹자는 말을 하지 못해 뱅뱅 돌렸다. 무명을 일으켜 제 옆에 앉힌 뒤 퉁퉁 부은 눈가를 문지르려 손을 올리자 그가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읏!”
손대려던 의도가 전혀 없었던 서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부은 눈가를 매만져주었다. 무명이 저를 두려워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좆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걸 겨우 삼켰다.
“울었어?”
“네에….”
겁에 질린 무명은 얌전했다. 서인이 다정하게 대하자 어리둥절하던 그도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서인의 손등을 매만지며 귀를 붉히기도 했다.
“형이랑 밥 먹고 출근해.”
“네….”
꼬박꼬박 대답하고 벌떡 일어난 무명이 식탁에 수저 한 벌과 반찬들을 꺼내 놓고 의자에 웅크려 앉았다. 속이 쓰리고 배가 고파도 한 입 먹자마자 주변을 더럽힐 테니 수저를 들지 못했다.
“네 몫은 없어?”
무명을 따라 의자에 앉은 서인은 웅크려 앉은 그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같이 먹으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건만 무명은 울상을 짓고만 있었다.
“…저는 배가 안 고파요.”
무명은 서인의 눈을 피하며 티 나는 거짓말을 했다. 서인이 이렇게 다정한 건 손에 꼽을 정돈데 더럽게 먹으면 다시 나갈지도 모르니 처음부터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그냥, 형 먹는 거 볼래요.”
“안 돼. 먹어.”
“배가 안 고프다니까요….”
“무슨 맨날 배가 안 고프대.”
서인은 볼살이 빠진 무명을 훑어보더니 그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었다. 먹으라고 고개를 까딱이자 무명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대욱에게 교육을 받아 어찌어찌 세 번은 먹어도 그 이상은 무리였다.
“먹어.”
벌써 세 번째 수저질을 한 무명은 다른 한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 애썼다.
“이제는 더 못 먹어요. 배불러요.”
트라우마 탓에 음식만 보면 눈이 도니 무명은 아예 서인을 멀리하고 싶었다.
“밥 다 먹으면 소원 들어줄게.”
“…소원이요?”
“그래.”
먹지 않으면 사랑해주겠다는 무서운 으름장이 아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무명의 눈이 반짝 빛났다. 몇 개를 들어줄진 몰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소원인데요?”
“네가 정해야지.”
“우와아….”
선택권을 쥘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무명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알고 망설임 끝에 밥 한술을 떴다.
말 한마디로 그를 꿰어 낸 서인은 숟가락을 들고 울상을 지은 무명을 응시했다. 뜨긴 떴지만, 입에 넣어 삼키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먹어. 먹으면 죽어? 입에 처넣고 씹으란…. 하, 아니야. 그래, 해보자.”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거친 말을 내뱉던 서인은 트라우마가 예상된다는 대욱의 말과 함께 귀가한 목적을 되뇌며 억눌렀다.
“무서워서 그래?”
“…네.”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하는 무명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끄덕였다. 트라우마가 있다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불안에 떨고 있었다.
“누가 누굴 보고 연약하다고 하는지 원.”
서인은 툭 치면 후드득 떨어질 듯한 무명의 눈 밑을 문지르며 떨림이 가시기까지 기다려주었다. 순간, 처음 납치되었을 때 형은 연약하니까 지켜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게 떠올라 웃음이 났다.
“먹어볼게요….”
서인의 웃음을 본 무명은 먹기로 다짐하고 주먹을 꾹 쥐었다. 그가 지켜보고 있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울어서 촉촉해진 눈을 응시하던 서인은 다짐하고서도 망설이는 그의 입에 밥을 넣어주었다. 무명은 반찬도 없는 맨밥을 우물우물 씹으며 서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감사해요.”
그가 이상한 말을 내뱉자 서인도 적잖이 당황했다. 안 먹으면 치워버리면 그만이지 먹여줄 명목이 없는데,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이에 맞게 굴라고 해놓고서 아기 취급을 해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킥킥 웃으니 뭣도 모르는 무명이 덩달아 웃어 보였다.
“맛있어요….”
맨밥인데 뭐가 그리 좋은지 무명은 서인의 손을 붙잡고 방긋 웃었다. 그 미소에 몸이 후끈 달아오른 서인은 티 내지 않으려 괜히 욕을 했다.
“맛있으면 알아서 처먹어.”
더 보고 있으면 미모에 홀려 도로 밥을 먹여줄지도 몰랐다. 강제로 다시 수저를 들게 된 무명은 언제 웃었냐는 듯 금방 울상이 되었다.
“형 배고픈데 안 먹을 거야?”
“못 먹겠어요….”
“그럼 뭘 어떡하라고 평생 안 먹고살래? 잘 먹더니만.”
음식을 먹는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더럽게 먹어서 서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게 두려운 건데 사연을 모르는 그는 투덜대기 바빴다. 서인은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이렇게 말을 안 들으니 귀찮은 감정만큼은 지워버릴 수 없었다.
“형이 먹여주면 안 돼요? 아까처럼….”
밥을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던 무명은 서인에게 먹여달라고 부탁했다. 먹여주어도 음식이 사라질까 봐 신경이 곤두서긴 했지만, 맛도 느낄 수 있고 서인을 마주 보고 있어서 훨씬 나았다.
“안 돼.”
“으응….”
무명은 아쉬워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깨를 흔들었다. 정말 서운해서 나온 몸짓이라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다 큰 새끼가 어디서 앙탈이야? 징그러우니까 때려치워.”
“…앙탈이 뭐예요?”
징그럽다고는 해도 서인은 앙탈 부리는 무명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뻔한 걸 힘겹게 견뎠다. 저 외모로 애교 섞인 몸짓을 하는데 안 넘어가고 배길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먹여주는 건 안 돼.”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서인은 먹여달라는 조름을 단호하게 잘라내며 무명의 손에 다시 수저를 쥐여주었다.
“그럼 못 먹는데요….”
“너, 혼날래?”
연구소에서 무명의 문제를 깨닫고 난 이후로 서인의 태도가 유해지자 무명도 더는 심하게 떨지 않았다. 서인의 말을 듣고 우물쭈물하던 무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혼내면서 먹여주세요….”
“뭐?”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고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무명은 오해할만한 말을 해놓고서는 순진하게 눈만 깜빡였다.
“형이 먹여주면, 좀 덜 무섭단 말이에요…. 혼나도 괜찮으니까 먹여주세요.”
“안 돼.”
무명은 앙탈도 모자라 유혹까지 하며 서인을 졸랐다. 한 대 맞으면 조용해지겠냐는 협박에 조용해졌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참고 들어주던 서인은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먹여주면 형 소원도 들어줘.”
“네!”
“좋아.”
“형 소원은 뭔…. 읍!”
서인은 제 소원을 묻지 못하게 무명의 입에 밥을 쑤셔 넣었다. 먹여준다고 한들 트라우마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음식을 씹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 음식이 모두 사라질까 봐 중간중간 삼키려 하자 서인이 두 뺨을 감싸 쥐고 눈을 마주 보게 했다.
“식탁보지 말고 형 눈 봐.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입술을 보든지.”
“네에….”
서인을 보며 우물거리자 아랫도리가 간질간질했다. 마주 보면서 밥을 먹는 게 이리 흥분될 일인가 생각해보던 무명은 그동안 성욕 해결을 못 한 게 크다고 정의했다.
서인도 반질거리는 입술을 보고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관계를 악화하러 온 게 아니었기에 건드리지 않았다.
무명은 그렇게 처음으로 말썽 일으키지 않고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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