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92화
제292화
헤스페리데스, 구름의 신전 뒤에 자리한 정원.
오색찬란한 꽃들이 다양하게 피어있는 이곳.
이름하여 '구름의 정원'이라 명명된 이곳은 헤스페리데스 세 자매들의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다.
정원은 황금 사과가 있는 곳과도 무척이나 가까웠기에,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생기면 조치를 취하기도 알맞았고, 그렇기에 이곳은 세 자매들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쉼터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강해지기 위해 훈련을 하는 훈련장이 되기도 했다.
"하아압-!"
짧은 기합과 함께 내지른 라레투사의 구름 검이 백무열을 아슬아슬하게 찔러 들어갔다.
백무열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라레투사의 공격을 받아치고는 곧바로 내질렀다.
"흡!"
백무열의 새하얀 목검과 새하얀 구름의 검이 만나며 커다란 파공음을 만들어냈다.
파아앙!
어마어마한 힘의 격돌에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렸고, 정원에 자리한 꽃들이 갖가지 꽃잎을 휘날렸다.
어느덧 봄이 만개한 이곳은 한창 진행 중인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후우. 잠깐만 쉬었다 하지."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말하는 백무열의 제안에 라레투사는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또 도망가려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사실 아까 백무열이 몰래 도망쳤었는데, 다시 붙잡았던 라레투사였다.
"쉬는 시간은 10분이다."
"쯧. 야박하기는. 10분만 더 줘."
"그대는 내가 만만한가? 또 도망칠 궁리를 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헤라클레스의 후인 따위가 감히…."
"쯧쯧. 꽃들이 다 떨어졌구만. 아깝게 시리. 에잉. 정원이 왜 이 모양인 게야."
하지만 백무열이라는 인간은 도저히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레투사는 멀어지는 백무열의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군. 그러고 보니 그도 꽃을 좋아했었지….'
젊은 시절 헤라클레스는 꽃을 자주 선물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 마음이 가짜라는 걸 알지만 그 당시 라레투사는 정말 헤라클레스를 좋아했었다.
세상에 이런 사랑꾼이 있을까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저 인간도 꽃을 좋아한다고? 정말이지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네. 다음번엔 좀 더 거세게 몰아붙여야겠어.'
라레투사가 이렇게 백무열에게 집착하는 이유야 뻔했다.
배신한 헤라클레스에 대한 복수 같은 것이랄까.
어쨌든 백무열은 인간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 한다.
고작 70년도 살지 못한 인간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손녀뻘 되는 여자가 심보가 고약하다며 악을 써댔다.
그 탓에 아까부터 라레투사는 정말 죽일 듯한 기세로 백무열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왜일까.
죽일 기세로 덤비고 있음에도 정작 백무열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가르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싸움을 거듭하면 할수록 그의 기술은 물론이고, 힘까지 점점 세지고 있다는 것이 라레투사의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음, 이젠 봐주는 것도 슬슬 힘에 부치는데.'
백무열은 꽃들이 떨어져 버린 정원의 한구석을 향해 걸어가며 고개를 저었다.
기실 백무열은 라레투사와의 싸움을 거듭하며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모두 헤라클레스가 가진 힘의 특징이었고 강한 상대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이른바 '투지'라 명명된 능력치가 가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투지 능력치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자, 성장이 가속화되며 비약적으로 강해진 것이었다.
'목검의 내구도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백무열은 손에 쥔 하얀 목검에 어린 옅은 실금을 보았다.
새로 마련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지금 가진 목검이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구도가 감소하고 있었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머지않아 이 목검은 저번처럼 부서지고 말리라.
"마력 발아."
우우웅.
땅을 짚은 백무열이 최춘택에게서 전수 받은 마력 발아를 사용해 정원에 다시 봄을 찾았다.
마침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치기를 한다며 다녀온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들의 품에 나뭇가지가 한가득 들려있다.
"와아-! 얼굴에 구름이 덕지덕지 붙은 인간아. 너 인간이 아니라 엘프였구나!"
커다란 몸집의 아이글레가 성큼 다가오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다가온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백무열은 "음."하며 살짝 떨어졌다.
엘프라면 대충 알고 있다.
춘택이가 얻은 이 마력 발아를 준 것이 '플로라'라는 이름의 하이 엘프였었지.
"아니, 난 인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연 에너지를 다룰 수 있지?"
에리테리아가 의문 섞인 질문을 던지자, 백무열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배웠다."
"배워?"
"와-! 구름 인간은 엘프랑 친구였구나?! 그렇지? 신기해!"
에리테리아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이글레는 멋대로 오해를 하며 박수를 짝짝거렸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대답하기도 지친 백무열은 나무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지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당장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살 떨리는 대결을 하며 검을 한 바탕 섞은 뒤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몽둥이성, 헤라클레스가 아이글레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나뭇가지?'
헤라클레스의 메시지가 난데없이 나타났고, 백무열은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백무열은 다시금 눈을 좁혔다.
아까 두 자매는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러 간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저 나뭇가지는 [황금 사과나무의 가지]라는 얘기.
무려 신화 등급의 황금 사과를 만들어내는 나무의 가지다.
그렇다면 저것으로 목검으로 만든다면…?
"아이글레."
"왜 부르니, 구름 수염아?"
어느새 자신의 이름은 구름 수염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백무열은 탐욕 어린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거 필요 없으면 나 좀 다오."
* * *
아크 대륙의 정세는 빠른 속도로 변했다.
가장 먼저 눈치채고 움직인 각국의 유저들이 너도나도 스타 프루츠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과 공성전을 벌였고, 오르카 왕국 부근에 성을 가진 유저들은 빛이 치솟았던 성을 차지하기 위해 밤낮으로 치열하게 싸움과 약탈을 벌였다.
그 방법은 무척이나 치졸하였고, 또는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솟았던 빛은 다시 꺼졌고, 조금은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정세는 다시금 발칵 뒤집어졌다.
각 나라 별 신전에 신탁이 내려진 것이었다.
신탁은 오르카 왕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르카 왕국, 유피테르 신전]
"나는 빛과 하늘의 신 유피테르. 불사의 인간들이여, 아크 대륙에 널리 퍼져있는 스타 프루츠를 찾아라. 성좌들과 힘을 합쳐 재앙이라 불리우는 판도라의 조각을 모아 세상을 구원하라. 그대들의 손에 아크 대륙의 운명이 결정되리라."
신탁을 받은 신관 사제의 말은 널리 널리 퍼져나가며 오르카 왕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마법도시 오즈, 헤카티아나 신전]
"마법사들이여, 마녀들이여, 헤카티아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스타 프루츠의 힘으로 칠흑의 재앙이라 불리는 판도라를 막으라. 그대들의 마법이 세상을 수호하리라."
[메테우스, 후에라 신전]
"바람의 아이들아. 스타 프루츠를 모아야 한단다. 그리고 그것으로 판도라라고 불리는 재앙을 막지 않으면 세상에 큰일이 닥치게 될 거란다."
[오르카 왕국, 루페온 신전]
"나는 성좌들의 왕 루페온. 불사의 인간들이여, 스타 프루츠로 성좌들의 힘을 쟁취하라. 그리고 다가올 재앙에 맞서 싸우라. 그것의 이름은 판도라. 이 세상을 어둠과 죽음으로 물들일 사악한 구슬이다."
[북극 툰드라, 카디아 신전]
"차디찬 눈으로 이어진 형제자매들아. 눈과 시련의 여신 카디아가 말한다. 혹한의 시련과도 같은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 그대들은 이것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남쪽 사막 어느 부근, 마야 신전]
"들어라! 비와 풍요의 여신께서 말하시길…!"
인디언 같은 복장의 제사장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듯 소리쳤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절을 하며 마야의 말을 새겨들었다.
* * *
한편, 그쯤의 나는 영혼의 미궁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제길. 도대체 얼마나 걸어야 하는 거야?"
이곳에 들어온 지도 어언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는 무척이나 자신만만했었다.
내게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아주 우수한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높던 콧대는 금방 꺾이고 말았다.
"프로메테우스. 아직도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는 거냐?"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낮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영혼의 미궁.
영혼이 머물기 위해선 뜨거운 태양보다 차가운 달의 음기가 영혼이 머물기엔 더 적합했다.
따라서 이곳은 항상 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엔 온통 구름이 가득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에이."
저번에도 그랬었지만 참 불편하다.
프로메테우스는 낮엔 더 강한 힘을 내지만 밤엔 거의 힘을 못 썼다.
특히 미래를 보는 예지 능력이 거의 상실되는 수준이랄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습니다.]
"쯧. 됐다. 괜히 그런 거로 삐지지 마라. 내가 미안하다."
"구루우욱-."
어깨에 내려앉은 춘자가 프로메테우스를 위로하듯 낮게 울었다.
지금은 밤이었기에 솔라보다는 춘자를 불러내기에 적합했다.
마침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도 할 겸.
"춘자야. 저기 또 몬스터."
"구루룩!"
춘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재빠르게 날아가더니, 영혼의 미궁에 자리한 낫을 든 몬스터를 무척이나 수월하게 사냥했다.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는 긴 낫을 휘두르는 꽤 까다롭다고 할 만한 유령 몬스터였다.
하지만 춘자는 타고난 달의 마력을 이용해 솔라에게 배운 각종 태양 마법과 풍희에게 배운 각종 바람 마법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레이스를 상대했다.
그아아아-!
망자의 원혼과도 같은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몬스터가 쓰러졌다.
무려 레벨이 300에 가까운 몬스터였는데, 춘자가 잡아내고야 만 것이다.
이제는 사냥에 노련해진 것이 무척이나 늠름한 모습이었다.
"구루룩."
"허허허. 고 녀석 참. 물건이로세."
나는 춘자의 콧잔등을 가볍게 쓸었다.
이제 춘자는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곧 구름의 정령을 얻으면 또 춘자를 가르치라고 해야겠지.
그럼 춘자는 또 한 번 강해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슬슬 라레투사가 말한 사흘이 되어 가는데 출구는 언제쯤…."
그렇게 한탄을 하며 골목을 도는 순간.
"아…!"
낮은 탄성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곳은 바로 출구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거대한 원숭이.
아니, 고릴라?
어쩌면 영화에서나 보았던 킹콩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야, 문지기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원숭이가 냄새를 킁킁 맡더니 눈을 빛냈다.
[들어와서는 안 되는 자가 들어왔구나…. 이곳은 영혼의 미궁. 오로지 영혼만이 이곳을 통과할 수 있느니라….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다….]
갑자기 원숭이가 그렇게 말하더니, 거대한 발을 들어 올리며 이곳을 향해 내리찍으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딸랑-!
라레투사가 주었던 종이 울렸다.
"……?"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