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71화
제271화
정신이 아득하다.
갑자기 하늘이 번쩍하더니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고, 견소룡이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어쩌면 이곳이 천국이라는 곳일까.
신을 믿진 않지만, 만약 이곳이 천국이라면 신을 한번 믿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신께 매달리며 빌 것이었다.
돌아가신 스승님을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뵐 수 있게 해달라고.
- 소룡아.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것은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항상 엇나갈 뻔했던 자신을 다 잡아주며 이끌어주셨던 분.
그것은 스승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 스승님.
견소룡은 스승인 '양문'을 보았다.
그러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양문은 그저 자신을 보며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무엇이 그리도 좋으십니까.
무엇이 그리도 만족스러워서 웃고 계십니까.
그곳은 어떠하신지요.
지낼만하십니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도통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스승인 양문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정말 죄송합니다.'
견소룡은 양문을 향해 사죄의 큰절을 올렸다.
가슴 깊숙이 담아두었던 죄책감이 털어지는 느낌.
폐관 수련을 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못난 제자의 한풀이였다.
견소룡은 한참을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했고, 그저 한없이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등 뒤로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것은 한없이 자상했던 스승 양문의 손.
거칠고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자신에겐 아버지와 같았던 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
괜찮으니 이제 훌훌 털어버리거라.
너를 용서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뜨겁게 차오르는 목울대 위로 삼켜진 '보고 싶습니다'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양문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라는 걸 견소룡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는 양문의 목소리는 너무나 인자하고 자애로웠다.
- 조심히 가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치지지지직!
[주먹성, 레이트라가 일어나라고 소리칩니다!]
레이트라의 부름과 동시에 수천 마리의 새가 지저귀는 듯한 굉음에 눈을 번쩍 떴다.
견소룡은 그제야 자신이 잠깐 정신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전신은 화상을 입었는지 피부가 까져 있었고, 통증은 없었다.
어쩌면 이미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콰릉! 콰르릉!
푸른 것이 아닌 백색의 벼락은 재앙의 위력을 뽐내며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되지 않는 힘은 온전한 힘이 아니다.
그것을 잘 아는 견소룡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주변에 내리치는 백색의 벼락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직조하고 다듬었다.
[당신은 해당 성좌가 예상한 잠재력을 뛰어넘었습니다.]
[새로운 성좌 스킬을 창조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형상을 빚어냈다.
중국의 팀원들이 사용했던 권법의 모태가 된 동물들이었다.
쥐, 뱀, 용, 호랑이, 닭, 말, 양, 돼지 기타 등등.
츠츠츠츳!
등 뒤로 거대한 원숭이의 형상이 백색의 뇌전으로 빚어지며 4개의 팔이 견소룡의 등 뒤로 생성되었다.
언젠가 보았던 레이트라의 모습.
그 모습이 마치 뇌신 아수라와 같아서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스킬의 이름은….
[새로운 성좌 스킬, '십이지천 아수라'가 생성되었습니다.]
백색의 뇌전으로 이루어진 십이지 동물들이 견소룡의 뒤편에서 날아올랐다.
* * *
죽음을 통한 강제적인 리치화의 각성으로 더욱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루이 카셀.
형용할 수 없이 차오르는 죽음의 기운을 느끼며 루이 카셀은 끝없이 언데드를 일으켰다.
[스켈레톤들이 뼈의 충성을 다짐합니다.]
[구울들이 죽음의 메아리를 부릅니다.]
스켈레톤과 구울.
[듀라한이 자신의 머리를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어둠에서 피어난 데스 나이트가 기사의 맹세를 합니다.]
[벤시의 비명이 죽음을 일깨웁니다.]
듀라한과 데스 나이트를 비롯한 기사계열 언데드와 유령 벤시까지.
언데드들은 온통 주변의 땅을 죽음으로 뒤덮어 버렸다.
마치 자신이 죽음의 신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아아아-!
거대한 임모탈 나이트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고, 견소룡을 궁지로 몰았다.
이윽고, 그의 필살기라고 불리우는 뇌룡 강림을 사용하게 만들었을 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루이 카셀은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견소룡의 뇌룡 조차도 리치화로 인해 더욱 강력해진 임모탈 나이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자신에겐 끝없이 살아나는 죽음이 군대들이 있지 않은가.
시간을 끌며 장기전으로 간다면 유리한 건 자신이었다.
콰아아앙-!
견소룡이 이변을 일으키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무슨…!"
쿠르릉-!
갑작스레 시작된 마른하늘의 날벼락.
눈앞이 한 번 번쩍하면 스켈레톤의 뼈와 구울의 살점이 튀었고, 또 한 번 번쩍였을 땐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이 쓰러졌다.
주변 일대가 백색의 뇌전에 휘감기며 전방에서 달리던 죽음의 군대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깜짝 놀란 루이 카셀이 소환한 리치에게 견소룡을 타겟으로 죽음의 마법을 일점사할 것을 명했다.
다양한 죽음의 소용돌이들이 맹렬하게 날아가 견소룡에게 폭발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제기랄. 또 뭐냐. 도대체 뭐냐고!"
마이클도, 최춘택도, 제임스도 싸울 때마다 한 단계씩 성장했다.
제임스가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눈앞에 있는 견소룡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루이 카셀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견소룡이 백색의 뇌전을 컨트롤 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동물…?'
백색의 뇌전으로 만들어진 열두 동물들은 하나하나가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래. 마치 전부 뇌룡 강림을 사용한 것 같은….
"……!"
생각과 동시에 눈앞의 십이지들이 날아올랐다.
꽈르릉!
어마어마한 뇌전이 눈앞에서 터지며 순식간에 최전방에 위치한 언데드들이 무너져 내렸다.
깜짝 놀란 루이 카셀은 언데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뭣, 왜 안 되는 거야!"
루이 카셀은 리치의 눈을 발동해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죽었던 언데드들은 분명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보다 빨리 다시 죽고 있다는 것이었다.
열두 동물들이 한 번 때릴 때마다 주변에 있던 언데드들이 동시에 타격을 입고 있었고, 그것은 연쇄작용으로 이미 죽었던 언데드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친 스플래시 데미지…!'
루이 카셀은 그제야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상급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를 비롯한 듀라한들이 순식간에 쓰러질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저 동물들이 임모탈 나이트에게도 덤빈다면….
크허어엉-!
바로 그때.
백색의 뇌전으로 이루어진 호랑이.
일명 뇌호(雷虎)가 임모탈 나이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날카로운 이빨로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이어서 토끼, 뱀, 용이 차례대로 나타나더니, 임모탈 나이트의 팔과 다리. 얼굴을 물어뜯고 할퀴었다.
그오오오-!
분한 듯 소리친 임모탈 나이트는 그대로 넘어지며 일대에 지진을 일으켰다.
쿠구구궁!
그리고 이어진 것은 역시나 백색의 뇌전.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친 것은 6개의 팔을 휘두르며 한줄기 섬광처럼 뻗어 나간 뇌신 아수라.
견소룡이 임모탈 나이트를 주먹으로 분쇄하는 모습이었다.
* * *
- 미쳤습니다! 이건 미쳤습니다!
- 견소룡 선수가 뿜어내는 백색의 뇌기가 루이 카셀의 언데드를 찢어버리고 있습니다!
- 보고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 뇌신이 된 것만 같습니다!
해설자들이 흥분한 목소리를 쏟아냈을 때, 또 한 번 화면 속이 번쩍이며 일대에 벼락이 내리쳤다.
그 한 번에 수백의 언데드가 일어나지 못했고, 방금 전 임모탈 나이트가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한국의 선수들은 그 가공할 위력에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저게 말이… 돼?"
믿을 수 없다는 임사라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일행들은 수심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한계를 뛰어넘었구나. 소룡아.
내 기억 속의 레이트라는 저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백색의 뇌전도 그렇고, 십이지 동물들처럼 보이는 저 뇌수(雷獸)들도 그렇고, 저것은 온전히 견소룡이 만들어내고, 레이트라의 힘이 더해져 만들어진 창조의 결과물이었다.
"소룡이가 원래 저 정도로 강했나?"
백무열의 물음에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
"…흐음. 이거 참 갈수록 난관이구만."
옅은 한숨 소리를 내뱉는 백무열을 흘겨보며, 나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치열했던 경기는 정말 순식간에 끝이 났다.
- 끝났습니다! 견소룡 선수의 압승입니다!
와아아아-!
TV 속 함성이 이곳까지 메아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실제로 경기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은 더욱 짜릿했을 것이다.
그만큼 견소룡이 보여준 무위는 어마 무시했다.
- 견.소.룡! 견.소.룡! 견.소.룡!
그러나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견소룡은 당연히 다음 경기에도 출전했고, 상대는 프랑스의 부주장인 안드레이 셰브첸코.
나도 얼핏 기억나는 녀석이다.
저번에 한 번 싸우고 나서 죽음의 향취 길드에 대해 커뮤니티로 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죽음의 향취 길드에서 부길드장을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 경기 시작됐습니다!
콰릉! 콰릉! 콰르릉!
- …….
- …….
- …….
마치 정지화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설자들이 할 말을 잃었다.
정적은 한국팀의 대기실에도 찾아왔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 끄, 끝났습니다!
- 10, 10초. 아니, 7초입니다!
- 견소룡 선수가 PVP 최단기록을 갱신했습니다!
견소룡이 PVP 신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그저 주먹질 몇 번 했을 뿐인데.
* * *
8강전의 첫 경기는 중국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6연승.
처음에 주양천이 졌던 것은 어느새 잊혀졌다.
경기가 끝나고 뇌리에 남은 것은 오로지 뇌신과도 같았던 견소룡의 모습뿐이었다.
- 위풍당당한 중국의 뇌신 견소룡 선수입니다!
견소룡이 캡슐에서 나오는 순간.
떠내려갈 듯한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 대기실까지 들려오는 것을 보면 그만큼 엄청난 함성이었으리라.
이어진 견소룡의 인터뷰는 약 5분간 짧게 진행되었다.
이제 다음은 우리의 차례.
"가자."
아까 전 견소룡의 무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서 그런지, 팀원들의 눈빛이 아까와는 전혀 상이하게 번들거렸다.
모두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따르르릉-!
전화가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