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70화
제270화
팬 사인회가 끝나기까지는 정확히 1시간하고도 17분이 걸렸다.
정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처럼 나풀거리는 백발이 부스스 거릴 뿐.
"호호홋. 오라버니들 이따가 봐욧-!"
"……."
탁!
그렇게 마지막 팬이 호들갑을 떨며 문 뒤로 사라졌을 땐, 대기실에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저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옮겨 백무열과 눈이 마주쳤다.
"……."
"너 이 자식을 그냥!"
갑작스레 시작된 술래잡기.
나는 백무열의 엉덩이를 걷어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드잡이질을 시작했다.
우당탕탕!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
"……."
5분 뒤.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코에 휴지를 말아 넣었다.
백무열은 손으로 엉덩이를 문질렀고, 나는 안승현의 어머님이 싸주셨다는 삶은 계란을 빌려서 광대뼈를 문지르고 있었다.
짝! 짝!
"크읏."
"허읏."
"으이그. 왜 이렇게 싸워요! 애도 아니고!"
등짝 스매시를 후려친 미도가 다부진 눈매와 입술을 늘어트리며 나와 백무열을 혼냈다.
우리 손녀가 참으로 손이 맵다.
사실 이렇게 혼내도 할 말이 없었다.
중간에 미도가 말려주지 않았으면, 코피로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괜히 심술궂은 눈으로 백무열을 째려봤다.
백무열이 눈알을 굴리며 내 눈을 피했다.
그러게 왜 시작부터 머리채를 잡냐고. 이 썩을 놈이.
"그만하고 이제 화해하세요."
"크흠."
"커험."
나와 백무열이 동시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외면했다.
미도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평생 안 볼 거예요? 자꾸 그러면 나도 할아버지들 안 봐요?"
그건 안 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손녀를 안 볼 순 없는 거다.
내 인생에 유일한 낙인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백무열의 앞으로 걸어갔다.
미도가 그런 우리를 보며 말했다.
"악수."
"흠."
"흐흠."
내 손과 백무열의 손이 겹쳐지며 위아래로 조심스럽게 흔들렸다.
"이제 싸우지 마요. 알았죠?"
그제야 만족스러워진 표정의 미도가 우리를 대기실 안쪽에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전부 TV를 보고 있었다.
"오셨어요."
"고생하셨어요."
"첫 팬 사인회 축하드려요."
임창용을 비롯한 일행들이 일어나 우리를 맞아주었다.
분명 밖에서 있었던 소란을 들었을 텐데도, 눈앞의 일행들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거야 원 민망해 죽겠군.
하여튼 무열이 자식을 확!
"큼. 난 화장실 좀 다녀오마."
백무열이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나는 화가 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참을 인(忍)을 세 번 되새겨보자.
- 선수분들 고생하셨습니다. 16강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잠시 후. 8강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때마침 TV에선 PVP 16강전의 종료를 알리고 있었다.
* * *
8강전에 진출한 건 모두 걸출한 인재를 가진 나라들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 브라질, 러시아, 스페인, 아랍, 프랑스, 중국이 8강에 올랐고.
의외인 것은 브라질과 아랍.
그리고 프랑스가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스타 프루츠 능력자가 없음에도 그들 개개인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8강전 첫 번째 경기.
프랑스와 중국의 대결.
[유저 '주양천'이 패배하였습니다.]
[1분 안에 다음 주자를 결정해주십시오.]
당랑권의 고수인 주양천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상대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얼굴인 네크로맨서 루이 카셀이었고, 그와 주양천 사이에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있었다.
프랑스는 초반부터 강한 기선제압을 시도하기 위해 그를 내보낸 것이었다.
"…으음."
"강하군."
"언데드 수가 너무 많은데."
견소룡이 그런 팀원들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기선제압을 당해버렸어.'
팀원들은 각각 동물들을 본따 만든 권법을 사용했다.
호랑이의 발톱을 닮은 날카로운 권법도 있었고, 토끼나 원숭이, 심지어 뱀이나 쥐를 닮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루이 카셀에게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어떻게 한다.'
이대로라면 누가 나가도 질 것은 뻔했다.
당장에 루이 카셀이 이끄는 네크로맨서의 군대만 해도 끝없이 살아나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그가 단독으로 소환한 임모탈 나이트의 강력함이 정말이지 엄청났다.
'형님은 대체 저걸 어떻게 상대하신 걸까.'
견소룡은 그리운 최춘택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왠지 지금 자신의 모습을 형님이 보고 있다면, 혀를 끌끌 차면서 "한심한 놈." 이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긴 이 정도에 겁을 먹는다면 권왕이라는 별호의 무게는 감당을 할 수 없다.
"다음은 제가 나가겠습니다."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일곱 번 휘둘러 그 안에 적을 죽이는 일격필살의 위력을 지닌 칠호권(七虎拳)의 고수, 양범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겠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맡겨주시겠습니까?"
"권왕의 뜻을 어찌 말리겠소."
"감사합니다."
팀 내 서열 3위인 양범이 자연스레 포권을 취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자신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5초를 남기고 견소룡이 다음 주자로 나섰다.
슈우욱.
흩어진 몸이 나타난 곳은 가운데 위치한 널따란 무대.
그 크기가 축구 경기장만 했다.
견소룡은 건너편에 있는 루이 카셀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비친 조각 같은 외모가 그가 입고 있는 칙칙한 로브와 대조되어 빛나 보였다.
"…견소룡인가. 잘 부탁하지."
과연 루이 카셀은 흑장미라는 별명답게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쳤고, 동양인과 달리 서양인들은 평소에도 몸에 밴 것들이 남다른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서양의 것들이 좋다는 건 아니다.
어쨌든 자신은 동양인.
그것도 중국인이니까.
"잘 부탁드리겠소."
견소룡이 루이 카셀에게 포권을 취했다.
[경기를 시작합니다.]
[10, 9, 8 ….]
그와 동시에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떴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침을 꼴깍 삼킵니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삐이이이-!
"흡."
시작과 동시에 견소룡이 온몸에 푸른 번개를 끌어올렸다.
츠츠츠츳!
루이 카셀은 시작하자마자 수백의 스켈레톤을 일으키고는 리치를 소환하는 주문을 외웠고, 견소룡은 그런 그의 빈틈을 놓치지 않으려 뇌보법을 이용해 루이 카셀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한가득 끌어모은 푸른 번개의 권격을 그의 등 뒤로 내질렀다.
하지만 바로 그때.
루이 카셀의 옆에 리치가 나타났다.
"……!"
빠르다.
그동안 많은 리치 소환을 보았지만, 저토록 빠른 소환은 견소룡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기엔 이미 내질러진 권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면 차라리 푹 젖게 만드는 것이 나으리라.
츠츠츠츳-!
푸른 뇌룡이 한 줄기 벼락처럼 스켈레톤을 바스러트리며 루이 카셀과 소환된 리치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루이 카셀은 죽음의 기운을 풍기며 고고한 손짓 한 번으로 그것을 흩어버렸다.
"……!"
놀람의 연속.
루이 카셀의 지팡이에서 강렬한 죽음의 힘이 뿜어졌다.
이윽고, 땅이 갈라지며 일대의 지옥이 견소룡의 주변으로 펼쳐졌다.
망자들의 손이 견소룡을 올가미처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아아아-!
곧장 뇌보법을 펼치며 울부짖는 망자들의 손을 향해 빠른 속도로 권격을 퍼부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견소룡은 필살기인 뇌룡 강림을 사용하기로 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레이트라의 허락과 동시에.
콰르릉!
하늘에서 한 줄기 푸른 벼락이 내리치며 견소룡의 몸에 깃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몸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견소룡의 주변으로 거대한 용의 얼굴이 나타나며 몸을 허공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견소룡은 한 마리의 뇌룡이 되어 있었다.
"흐음. 그렇다면."
그리고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루이 카셀이 지팡이를 흔들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거대한 뼈의 기사가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임모탈 나이트가 올라서 검을 뽑아들자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들이 죽음의 연기를 위시하며 나타났다.
견소룡은 언데드의 군세를 훑어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왜일까.
갑자기 문득, 돌아가신 스승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룡아. 넌 언젠가 천둥 같은 주먹을 내지르는 사람이 되거라.'
'번개가 아니라 왜 천둥인가요?'
'번개는 살갗만 태우지만, 천둥은 폭풍을 몰고 오며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지. 난 네가 천둥과도 같은 무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허허허. 그럼 내가 천둥의 스승이 되겠구나.'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이었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견소룡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때 하신 말씀은 오늘을 두고 말씀하신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야말로 천둥이 되기에 적합한 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한계를 뛰어넘어야 되겠지.
"레이트라."
[주먹성, 레이트라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난 오늘 천둥이 되겠다. 도와주겠나?"
견소룡은 비로소 진정한 천둥이 되기로 맹세했다.
그의 결기 어린 다짐에 반응하듯, 머리 위로 수십의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쾅-!
[주먹성, 레이트라가 재밌다는 듯 이죽거립니다.]
하늘이 한 번 번쩍이더니, 수십 줄기의 벼락이 견소룡에게 쏟아져 내렸다.
* * *
한편, 대기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기함했다.
…저 미친놈이.
화면 가득 펼쳐진 먹구름에 이은 수십 줄기의 벼락은 TV 화면을 한순간 하얗게 만들 정도로 휘황했다.
치지지지직!
마치 비둘기 수천 마리가 지저귀는 것 같은 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 견소룡 선수의 몸이 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 마치 뇌신이 강림한 것 같은 모습입니다!
- 만약 부동명왕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설자들의 말 그대로 지금 견소룡의 모습은 뇌신이었고, 부동명왕이었다.
그만큼 견소룡은 굉장히 무리한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원래 푸른 번개는 유피테르가 떨어트린 벼락의 조각에서 나온 힘.
그만큼 유피테르의 벼락은 강했고, 레이트라의 번개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견소룡이 하얗게 빛나는 건 유피테르의 벼락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레이트라 또한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앗!
콰아아앙-!
마치 견디기가 힘들다는 것처럼 외친 고함에 견소룡의 주변으로 하얀 폭발이 일어났다.
그의 주변 일대에 지진을 동반한 하얀 벼락이 무분별하게 내리쳤다.
콰릉! 콰르릉! 콰르르릉!
"와, 미쳤다."
"저 아저씨 더 강해진 거 아냐?"
"아니, 스타 프루츠 먹으면 다 저래?"
일행들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4강에 진출한다면 이 대결에서 승리한 나라가 자신들의 상대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헐. 저게 뭐야?"
화면이 또 한 번 번쩍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