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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269화 (269/375)

나 빼고 다 젊은이 269화

제269화

말 그대로 초전박살이었다.

일본은 그대로 침몰했다.

- 경기 끝났습니다! 단 한방에 끝을 내버린 최춘택 선수입니다!

- 정말 엄청난 노익장입니다. 그는 마이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선수입니다!

- 백무열 선수는 또 어떻습니까. 두 선수가 정말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푸쉬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을 빠져나오자, 관객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나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며 시야를 가리는 백발을 뒤로 묶기 위해 고무줄을 입에 물었다.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끊이질 않았다.

제기랄.

머리도 마음 놓고 못 묶겠군.

"끙."

그렇게 머리를 묶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무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옆에서 난데없는 "오빠."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춘택 오빠!"

"여기 한 번만 봐줘요-!"

"손 한 번만 잡아줘요!"

그곳엔 웬 중장년 아줌마들이 떼로 모여선 하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오빠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곳에 적힌 글을 읽었다.

[최춘택님, 백무열님 사랑합니다. - 꽃보다 할배 일동]

"……."

이런 미친.

"뭐해?"

마침 뒤에서 걸어오던 백무열도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번엔 "무열이 오빠!"라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하하하! 우리가 유명해지긴 했나 보다."

백무열이 고개를 젖히며 웃어댔지만, 난 전혀 웃기지 않았다.

설마하니 저런 모임이 있을 줄은….

한국어로 적힌 걸 보면 분명 한국 사람인데, 이거 또 늑대의 유혹인가 그거처럼 귀찮은 거 아닌….

"야, 어디 가냐!"

"춘택아. 그래도 우리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인데 팬서비스는 해줘야지 않겠냐."

그렇게 말한 백무열은 객석 가까이 다가가더니,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호호호! 깔깔깔!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어이구. 좋아 죽네. 좋아죽어.

저러다 새 장가 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대로 올라왔다.

"무열이 할아버지는요?"

먼저 무대에 올라와 무대 인사를 준비하고 있던 미도의 물음에 나는 뒤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민망함에 관자놀이가 아려왔다.

"푸하하! 저게 뭐야. 완전 인기 스타시네."

미도가 백무열을 보며 폭소를 터트렸다.

다른 팀원들도 미도의 웃음 소리에 그곳을 보곤 한 명씩 풀썩 웃기 시작했다.

옅은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녀석이 있는 곳을 봤다.

백무열은 사진을 다 찍어줬는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왜 안 왔어? 팬들이 아쉬워하던데."

백무열이 내게 속삭였다.

"너나 많이 해라. 난 관심 없다."

"쯧. 하여간 최씨는 고집불통밖에 없다니까. 최불룡이나 네놈이나."

이걸 확!

살쾡이 같은 눈을 부라리자 백무열이 껄껄 웃었다.

"춘택아. 주지 말고 받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 나이 이제 칠순이야. 언제 이런 사랑을 받아보겠냐. 살 날 얼마 안 남았다. 최대한 즐기다가 가자."

나는 괜스레 백무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가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들어간 양 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친 피부가 가뭄이 일어난 논밭 같았다.

젊은이 백무열은 이토록 늙은이가 되었다.

"…하여간 네놈은 노망난 거야."

"다음번엔 팬 서비스 같이하는 거지?"

나는 눈을 흘기며 백무열을 힐끔 쳐다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력해볼게."

마침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이제 곧 무대인사가 시작될 모양이다.

백무열이 소곤거린 것은 그때였다.

"…그럴 줄 알고 이따가 팬 사인회 하기로 했다."

"뭐라고?"

"대기실로 오라고 했어. 이미 가고 있을 거야."

나는 뒤로 고개를 홱 돌려서, 아까 그 아줌마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미 대부분이 빠져나가 텅 빈 객석.

다시 고개를 홱 돌려 백무열을 바라봤을 때는 반달 눈웃음이 나를 반기며 껄껄 웃고 있었다.

순간 욱하는 것 같았다.

"이런 미친놈이!"

* * *

유니온 스퀘어, 브라질팀 대기실.

안쪽에 마련된 방에서 브라질의 주장 카를로스가 비밀스럽게 통화를 했다.

- 이겨라. 진다면 우리가 널 타겟으로 삼을지 몰라.

"…물론입니다. 보스.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 지난 경기는 너무 실망스러웠지. 카를로스. 부디 이번엔 그러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너에게 그것을 준 것이니까. 브라질의 자존심을 세워라.

"Obrigado.(고맙습니다.)"

- 파르타 공국에서 볼 수 있길 바라지.

뚝.

카를로스가 긴장감 어린 눈빛으로 받은 전화를 마쳤다.

동시에 깊은 한숨이 몰려왔다.

"후우우."

온몸에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빈민촌의 갱 출신이었던 자신에게 이 정도 위압감을 선사할 수 있는 인물은 드물다.

전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조국인 브라질에서 가장 거대한 마피아 조직인 PCC의 보스.

PCC는 본래 브라질 형무소의 축구팀으로 결성된 마피아 조직이었다.

전체 구성원은 6천 명 정도이고, 간접적인 조직원들을 모두 합하면 총 14만 명이 된다.

브라질 경찰이 빈민촌의 순찰을 하기 위해선 PCC의 허락이 있어야 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마 아크스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줄은….'

얼마 전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도 긴가민가했었다.

설마 진짜 PCC일까?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초대를 받았고, 스타피스를 주겠다는 말에 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카를로스는 얼마 전 파르타 공국에서 그들과 접선을 했다.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인가?'

카를로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은 진짜 PCC가 맞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파르타 공국에서 가지고 있는 입지와 기술력.

그것은 진정 놀라울 정도였다.

'인공적으로 스타피스를 만들어내다니….'

아니. 생각하지 말자.

우선 이기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카를로스가 문을 열고 나와 대기실에 있는 팀원들을 바라볼 때였다.

마침 TV에서는 예상대로 승리를 쟁취한 한국이 무대인사를 비롯한 인터뷰를 쏟아내고 있었다.

- 이번 한국의 승리가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선수들과 따로 특별한 훈련을 하신 건가요?

외신 기자의 질문에 최춘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화면 속 기자들 사이에서 "오오."하는 탄성들이 가득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질문이 던져졌다.

- 다음 경기는 브라질과의 대결인데 어떻게 될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그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클로즈업된 최춘택의 얼굴이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히죽 웃었다.

그의 손이 가리킨 것은 옆에 나란히 선 한국의 선수들이었다.

- 이번엔 이 친구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해주시오. 그럼 이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사이로 최춘택을 비롯한 한국팀이 요란스럽게 사라졌다.

대기실은 폭탄이 떨어지기 직전의 고요함이 느껴졌다.

선수들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의 발언이 자신들을 모욕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크윽."

"두고 보자…."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우리가 쉽게 질 거 같아?"

카를로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지난 경기에서 얻었던 모욕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조식으로 포크가 나올 때면 자동으로 이마를 비롯한 온몸이 욱신거렸다.

'빌어먹을 포크 숟가락!'

카를로스가 불타는 듯한 동공으로 TV를 노려봤다.

이번엔 반드시 포크 숟가락 트라우마를 지우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 * *

나를 비롯한 한국팀 일행은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어안이 벙벙했다.

대기실 앞 열에 아줌마들 수백 명이 줄을 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재앙이었다.

"꺅! 춘택이 오빠!"

"춘택 오라버니!"

"옴마나 세상에 이 팔 근육 좀 봐~ 호호호!"

망했다.

이미 수백 명이 나와 백무열을 둘러싸 버렸다.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으윽. 방금 엉덩이 만진 여자 누구냐.

"커험."

바로 옆에서 눈치를 보던 백무열이 찔렸는지, 주변의 아줌마들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자자, 이러지들 말고 줄을 서자고. 이러면 우리가 사인을 못 해주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사진하고 다 찍어줄 테니까. 줄들 서봐."

정말 신기하게도 백무열의 말 한마디에 아줌마들이 깔깔 웃으며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놈도 난 놈은 난 놈이다.

가끔 새치기도 있었지만, 뭐 그건 개의치 않기로 했다.

"가자."

나는 백무열을 힐끔 보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대기실 문을 열어젖혔다.

곧장 책상과 의자가 설치되었고, 직원에게 말해 펜과 종이를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천하의 최춘택이 살다 살다 팬 사인회를 하게 될 줄이야.

허 참. 기가 막히는군.

"와, 이분들이 다 할아버지를 보려고 오신 분들이에요?"

미도가 바깥에 있는 인파를 보고는 다시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저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누를 뿐이다.

"대에박. 완전 부럽다! 엄청 많은데요? 나도 팬 사인회나 해볼까?"

참고로 미도 또한 내 손녀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 팬카페의 회원 숫자가 엄청 늘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내가 더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둘째 놈이 팬 카페 회원 숫자가 1만 명을 돌파할 때마다 정기보고 하는 형식으로 부럽다는 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최정현은 그럴 시간에 노력이나 좀 더하라고 나한테 욕을 한 바가지로 먹었지만.

아무튼 간에 빨리 사인 해주고 치워야겠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끼익-

문이 열리자 제일 앞에 있던 아줌마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어머머머! 어떡행. 어떡해애앵!"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인이나 받고 가면 되지.

나는 종이에 '최춘택' 이라는 이름 석자를 휘갈겨 쓰고는 퉁명스럽게 내밀었다.

사인을 받은 아줌마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시 사인 종이를 내밀었다.

"저기…."

"……?"

왜 그러지.

또 뭐가 문제지.

"제 이름도 좀 써주세요. 호호호. 박강자예요."

이런 제기랄.

귀찮아 죽겠는데.

퉁명스럽게 행동했지만, 그래도 정성스럽게 '박강자'라는 이름 석 자를 귀퉁이에 써주었다.

무척이나 강해보이는 이름이다.

"여기."

"오호홋! 고마워요! 춘택 오빠!"

"허읏."

순간 갑작스런 포옹에 당황하고 말았다.

옆에서 줄을 세우던 미도가 쿡쿡 웃으며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마 옆구리만 찔러도 폭소가 터질 거다.

제엔자앙!

"갈게요! 다음 경기도 화이팅!"

"어어, 어어어어…."

뭐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 채, 박춘자는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어서 들어온 것은 또 다른 아줌마였다.

한 50대쯤 된 것 같은데, 곱슬거리는 파마를 했다.

"아이고, 춘택 오라버니. 내가 엄청 팬이어유! 내 이름은 김말자! 사진 한 번 찍어도 되쥬?"

김말자는 갑자기 나를 일으키더니, 미리 준비해둔 핸드폰 카메라로 두어번 찰칵거렸다.

나는 그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버버 거리다가 사진을 찍혔다.

그렇게 빠르게 사인을 해주고 나니 김말자가 사라져있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미도야."

"크흠. 네?"

미도가 웃음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밖에 몇 명이나 있냐."

"…글쎄요. 한 100명?"

"허어."

무섭다.

처음으로 나는 무서운 것이 생겼다.

그건 바로 대한민국 아줌마다.

옆에 앉은 백무열이 껄껄거리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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