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83화
제83화
내 기억이 맞다면 선과는 곧 스타 프루츠였다.
만약 레무스가 그것으로 구슬 조각의 기운을 중화해왔다면, 희망이 있을 지도 몰랐다.
하늘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안타깝게도 자신에게는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는 없다라.
그렇다면 누구에게 있는지는 뻔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레무스가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역시 그랬나."
김수정이 물었다.
"로믈라나가 스타 프루츠를 갖고 있다구요? 정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녀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직 별자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그녀는 소외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로믈라나가 아니라 레무스가 가지고 있다는구나."
"와, 정말요? 그럼 우리 스타 프루츠 얻으러가요!"
"음, 그게…."
사실 조금 복잡했다.
스타 프루츠가 판도라의 기운을 중화하고 있는 중이라면, 스타 프루츠가 사라지는 순간 판도라의 기운이 레무스를 잠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왜요. 그걸 얻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 설명하긴 복잡하지만, 결론은 그렇다."
"흐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아깝다. 나도 스타 프루츠 먹고 싶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내가 도와주마."
"정말요…?"
"그래. 남아일언 중천금이라지 않냐. 난 내뱉은 말은 지키는 편이다."
내 말에 뾰로통했던 김수정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내심 기분이 좋은 듯했다.
순간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도한테 스타 프루츠를 선물하면 좋을 것 같군.
선물을 받고 고맙다며 품에 안길 손녀를 떠올리니, 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김수정이 내 표정을 보며 어리둥절해한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다. 이제 출발하자."
"알겠어요. 가자. 케르야."
"콸."
잠에서 깬 케르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또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또 감기 걸리려고….
솔라의 보호구역에서 벗어나자 깨갱거리며 돌아오는 케르가 보였다.
우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차디찬 북극의 벌판 속에서 우리들은 따뜻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어느새 이틀이 흘렀다.
흑야가 가득한 설원은 어둠만 있지 않았다.
고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하늘은 고요히 '오로라'라는 자연현상을 내비쳤다.
우리들은 그것을 나침반 삼아 걸었고, 마침내 밤의 마을 누체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기 불빛이 보여요!"
김수정이 가리키는 곳엔 역시나 거대한 이글루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디야와는 다르게 창문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보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누체의 야경을 감상했다.
힘겹게 온 만큼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누체의 야경에 감탄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신비로운 마을이라며 놀랍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수줍어합니다.]
프로메테우스도, 레이트라도, 처음 보는 광경인 듯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때, 로믈라나의 첫째 아들이 입을 열었다.
"저곳은 아버지께서 있는 곳이다. 주로 야행성 일족들이 살아가는 곳이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떤 일족들이 있지?"
"주로 일족 셋이 모여 산다. '서리 올빼미'들이 그중 하나지. 그들은 밤을 지새우며 주로 정찰을 담당한다. 그리고 하얀 털이 매혹적인 눈꽃 여우도 있지.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그들은 누체의 경비를 책임지는 일족이니까. 꽤 강하다고."
"나머지 하나는…?"
"방랑 순록들이다."
"…방랑 순록이라."
프로메테우스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하니 그들이 여기 있었을 줄이야.
대대로 방랑 순록들은 12월의 침략자를 따르는 일족이었다.
하긴, 그 녀석을 따라다니려면 야행성이 될 수밖에 없긴 하다.
나는 또 한 번 물었다.
"이곳엔 서리 오크들도 있지 않나?"
"음? 생각보다 이곳에 대해 잘 아는군. 여긴 없고 남쪽에 있다."
"그렇구만."
대강 이곳의 지도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500년 전의 기억이라서 새로운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가자."
그 말과 동시에 우리를 태운 웰시 울프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구우우욱'하며 우는 '서리 올빼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타고 있는 웰시 울프들을 보고는 얼음 깃털로 공격하려던 것을 멈추었다.
나는 내가 타고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공격을 하려다가 안 하는 걸?"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인 걸 아니까."
많은 설명은 필요 없었다.
쉽게 말하면 이거였다.
…부모를 잘 둔 탓이라 이건가.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지? 그동안 이름도 못 물어봤군."
"펜릴. 그게 내 이름이다."
속도를 낸 우리들은 손쉽게 누체로 들어올 수 있었다.
펜릴의 등에서 내리자 많은 수인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무장을 한 하얀 여우들도 보였고, 커다란 하얀 올빼미도 보였다.
빨간 코를 가진 순록들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들 모두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한 늙은 여우가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레무스 님의 자녀들이 모두 오셨군요. 늘 펜릴 님이 혼자 오시더니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님을 뵈러 왔다. 여기 인간들과 함께."
"예…?"
그의 말에 늙은 여우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펜릴이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그 말과 동시에 주변의 수인들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늙은 여우가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건방지구나. 우리가 아버님을 만나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노기 서린 펜릴의 말에 늙은 여우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왠지 우리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마침 김수정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내게 조용히 물어왔다.
"우리가 불편해 보이지 않아요?"
"…그런 것 같구나."
그때, 로믈라나가 말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그들이 야행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야행성? 그게 무슨 말이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츠츠츳.
[늑대성, 로믈라나가 당신에게 '기억전이'를 사용합니다.]
머릿속으로 눈보라 같은 기억이 몰아쳤다.
나는 눈을 감으며 그것들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말주변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기억을 전하는 것으로 내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영성(靈星)의 부담이 꽤 심할 텐데….
영성(靈星)이란 성좌가 되면 얻을 수 있는 타고난 별의 힘이다.
이것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자신의 기억을 전달할 수도 있고, 간접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신들의 힘은 신격(神格)이라고 부른다.
"야행성, 흑야, 이곳에 모인 자들. 그랬군…."
이제야 사정을 좀 알 것 같다.
이곳 누체는 야행성 수인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레무스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왕이었고, 그들은 흑야가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믈라나는 흑야가 강해질 때마다 펜릴을 이곳에 보내 저 늙은 여우에게 흑야를 줄여달라는 말을 레무스에게 전해달라고 했었으니, 안 좋게 보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투덜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런 말은 직접 만나서 전하지. 왜 저 늙은 여우를 통해서 전해?"
[늑대성, 로믈라나가 레무스의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펜릴이 으르렁거리며 늙은 여우를 쏘아보았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에 늙은 여우가 꼬리를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절 따라오시길."
수인들의 인파가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향한 곳은 엄청나게 높은 설산이 있는 곳이었다.
늙은 여우가 말했다.
"레무스 님은 이 산의 꼭대기에 계십니다."
…젠장. 더럽게 높네.
"아버님이 이런 곳에 홀로…."
펜릴의 말에 다른 웰시 울프들도 제각기 그리운 눈빛을 하며 울음소리를 냈다.
그들은 100년 만에 아버지를 볼 생각에 감격에 젖은 듯 보였다.
우리들은 다시 그들의 등에 올라탔고, 퍽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설산을 올랐다.
[늑대성, 로믈라나의 심장이 빠르게 뜁니다.]
…긴장한 건 로믈라나도 마찬가지겠군.
어쩌면 당연했다.
100년 만에 상봉이라니.
이산가족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참이나 지나도 레무스는 찾을 수 없었다.
펜릴이 으르렁거렸다.
"어째서 동굴이 안 보이지? 정말 아버지가 이곳에 있는 게 맞나?"
"그, 그렇습니다. 100년 전 기억으론 그렇습니다."
"…100년 전? 설마 그 뒤로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건가?"
순간 말실수를 했다고 깨달은 늙은 여우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 알만했다.
그동안 흑야가 강해진 것은 이 늙은 여우가 거짓말을 한 탓이었던 것이다.
펜릴이 이를 갈았다.
"네 이놈! 감히…!"
[늑대성, 로믈라나가 진정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이 자는 그동안 저희를 속였습니다! 어찌…!"
[늑대성, 로믈라나가 그는 누체를 지키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크윽."
펜릴이 하늘을 보며 분한 표정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이해심과 현명함을 보며 짐짓 감탄했다.
…현모양처가 따로 없구만.
자고로 결혼은 이런 여자랑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여자라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내도 그런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 그녀는 정말로 현명한 여인이었다.
나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로믈라나를 칭찬합니다.]
[늑대성, 로믈라나의 볼이 빨개집니다.]
나는 늙은 여우에게 물었다.
"어쨌든 동굴이 어디 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말이지?"
"그, 그렇소."
"그렇다면 직접 찾는 수밖에 없겠군."
옆에 있던 김수정이 물었다.
"어쩌시려구요?"
"음, 이게 될지 모르겠는데…."
나는 판도라의 조각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그러자 곧장 빛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구슬 조각이 떨리고 있어요!"
"형님 설마…."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견소룡도 자신이 가진 판도라의 조각을 내밀었다.
역시, 이 녀석도 하나 가지고 있었구만.
"어디서 얻은 거냐."
"스타 프루츠가 있는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3개 이상 갖고 있지 마라. 몸에 안 좋으니까."
"형님은 3개가 넘는데요?"
"난 프로메테우스 때문에 괜찮아."
이것은 격의 차이 때문이었다.
신과 성좌간의 차이라고 할까.
그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구슬 조각을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판도라의 조각이 더욱 크게 공명하며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아아앗-!
뻗어 나온 짙은 보랏빛이 어딘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우-!"
세상이 짙은 어둠에 잠겼다.
땅이 흔들리고 정경이 휘몰아쳤다.
피부에 닿는 눈은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인데….
지금 보이는 현상은 '그 녀석'의 공격성이 짙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나는 김수정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깨워서 화가 난 모양이다."
"누, 누가요?"
"흑야의 나그네."
그 순간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2등성, 흑야의 나그네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는 당신들을 적대할 것입니다.]
"…무슨 손님맞이가 이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