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82화
제82화
그 시각.
윈디아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책상 위에 올라온 결제서류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케레노스에게 물었다.
"대체 불사의 인간들이 미노타에 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코볼트 광산에 가겠다는 길드들의 레이드 신청이 끊이지 않아."
현재 '코볼트 광산'은 잭슨의 요청에 의해 입장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그가 말하길, 그곳에 바람의 신전으로 향하는 비밀통로가 있어서 사람들이 위험할 수 있으니 막아 놓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건 나와 잭슨, 그리고 케레노스 밖에 모르는 극비사항일 텐데….'
케레노스가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는 거 맞아…?"
"제가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긴 케레노스는 입이 무거운 편이다.
그는 명령이 없이는 절대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멀뚱히 서있던 케레노스가 물었다.
"어차피 미노타를 잡을 생각 아니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잭슨이랑 약속했잖아. 기다리기로."
"…제가 알기론 불사의 인간들 중에서도 강자들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저희들 입장에서는 누가 잡더라도 상관 없는 거 아닙니까? 승낙해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다가 우리가 사주했다는 걸 미노타가 알아차리면 어떡해?"
"바람의 신전 정문이 아니라 코볼트 광산으로 들어가면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윈디아의 복장도 아니라서 모를 거구요."
"흠."
에드워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우리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없어. 죽지 않는 그들이 나서준다면 윈디아의 피해도 없을 테고 말이야.'
조그마한 손으로 커다란 도장을 든 에드워드가 눈앞에 있는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쾅! 쾅! 쾅!
-메시아 길드 '코볼트 광산' 출입
[허가]
-카시오페아 길드 '코볼트 광산' 출입
[허가]
-가디언즈 길드 '코볼트 광산' 출입
[허가]
…
* * *
한편, 나와 일행들은 어느새 흑야가 드리워진 설원 속을 거닐고 있었다.
온 세상이 밝았던 백야와는 또 다른 세상에 나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흑야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군."
"아버님, 흑야라는 게 백야 현상의 반대말 맞죠?"
"그래. 맞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해가 뜨지 않는 흑야 현상.
로믈라나와 레무스가 가진 힘은 정반대였지만, 둘은 이곳 북극의 낮과 밤을 책임지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최근 흑야가 더 강해졌다고 말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의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쉽지 않을 것 같다며 팔짱을 낍니다.]
…제기랄. 진짜 답 없네.
무려 1등성에 가까운 성좌를 제압하는 일이다.
레이트라가 있고, 로믈라나가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더 쉬울 정도.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데.
나는 잠깐 휴식을 가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라가 주변의 눈을 녹이며, 일행들이 앉을 만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5분만 쉬기로 했다.
김수정이 말했다.
"휴우, 예전에 북극에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괜한 꿈을 꾸고 있었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북극엔 왜 가고 싶었는데?"
"뭔가 신비롭잖아요. 온통 새하얀 세상은 어떤 느낌일까. 그런 생각도 들고, 한번 느껴보고 싶기도 하구요."
"그래서 소감이 어떠냐."
"다시 오기 싫어요. 눈 속을 걷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그 말과 동시에 나와 견소룡은 피식 웃었다.
김수정은 두손으로 다리를 두들겼고, 나는 견소룡에게 물었다.
"너도 그러냐?"
"전 좋습니다. 수련도 되구요."
"그놈의 수련. 쯧."
아무래도 이 녀석은 수련에 미친 녀석이 틀림없는 것 같다.
나도 몸을 단련하는 건 좋아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진짜 타고난 무인이라니까.
…근데 보통 현실에서 단련하지 가상현실에서는 잘 안 하지 않나?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견소룡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습관입니다. 그런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혹시 제 어렸을 때 꿈이 뭔지 아십니까?"
갑자기 뚱딴지같은 말에 나는 입이 튀어나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이놈아."
"하하, 어렸을 때 수련관 앞에 번개가 내리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400년 된 당산나무 하나가 쩍 갈라졌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넘어가는 나무를 보며 감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네 꿈이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습니다. 그때 전 한창 스승님 밑에서 영춘권을 수련하는 제자였지요. 그날 스승님이 해주신 말씀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뭐라셨는데."
"두려워하지 마라. 번개는 살갗만 태울 뿐. 너는 언젠가 천둥과 같은 주먹을 내지르게 될 것이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어리둥절합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하늘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나도 함께 물음표를 띄웠다.
번개나 천둥이나 같은 것 아닌가…?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견소룡이 웃었다.
"하하, 아마 그때의 저랑 같은 생각을 하신 것 같군요. 번개랑 천둥은 같은 말 아니냐며 이상하게 생각하셨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뜨끔했다.
"그, 그래. 같은 말 아니냐?"
"흐음. 제가 스승님께 그렇게 물었죠. 그때 스승님은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이어질 말을 궁금해합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빨리 말하라고 재촉합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수줍게 귀를 엽니다.]
"번개는 살갗만 태울 뿐이지만 천둥은 폭풍을 몰고 오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구요. 그러니 너는 천둥같은 주먹을 내지르는 사람이 되라 하셨습니다."
"아…."
꽤 진리가 담긴 듯한 말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번개와 천둥의 차이.
지금껏 알지 못했지만, 이젠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때, 김수정이 뒤에서 다가왔다.
그녀의 품엔 케르가 잠들어 있었다.
"진실게임 시간이에요?"
"그게 뭐냐? 진실… 뭐?"
그녀는 내가 귀엽다고 생각했는지, 쿡쿡 웃었다.
"진실만을 말하는 거예요. 말하지 않거나 말하기 싫으면 벌주를 마시는 그런 게임이죠."
"젊은이들이 하는 게임인가 보구나."
"그럼요. 술 마시면서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아마 미도도 해봤을 걸요?"
"…우리 미도가?"
순간, 머릿속에 '진실게임'이란 것을 하고 있을 손녀가 떠올랐다.
늑대 같은 사내놈들이 득실거리는 사이에 껴서 술을 마시고 진실을 말하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니, 갑자기 뒷골이 땡겨왔다.
염병…!
자고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나는 우선 그 진실게임이란 것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이놈들도 하고 싶어 보였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심심한데 한번 해보자고 말합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재밌을 것 같다며 박수를 칩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수줍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들도 끼워달라는데?"
"와, 그거 재밌겠는데요? 그럼 제가 먼저 할게요! 제게 듣고 싶은 얘기들을 물어 봐주시면 돼요!"
"벌칙은…?"
"음, 뭐가 좋으려나. 아! 여기 눈을 먹는 게 어때요? 으, 생각만 해도 골이 시리네요. 팥빙수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날씨 요리술 중에 '눈'을 이용한 요리술이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눈으로 만드는 요리였는데, 참고로 눈으로 만든 팥빙수가 실제로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12월의 침략자가 있는데, 그 녀석이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다시 와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보마."
…뭘 물어보지.
사실 그녀에게 궁금한 것은 많다.
만나는 남자는 있는지, 없다면 우리 둘째 녀석을 만나볼 생각은 없는지.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지난 1년간 그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궁금했다.
그래. 우선 가볍게 해보자고.
"지난 1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구나."
순간 정적이 흘렀다.
김수정은 울상을 지으며, 갑자기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내가 물어보면 안 되는 것을 물은 건가…?
다음 순간, 김수정의 입이 열렸다.
"실은…."
* * *
이야기는 꽤 오래 이어졌다.
이제야 알게 된 진실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내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숨겨서 죄송해요…."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안타까운 이야기에 눈을 감습니다.]
[주먹성, 레이트라가 어색한 분위기에 볼을 긁적입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힘내라고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하늘을 보며 원망하고 원망했다.
차디찬 북극의 눈보라는 내 마음을 한껏 시리게 만들었고,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혈액 공포증이라니.
어찌 이 아이에게 이런 시련을….
신은 무심하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피를 무서워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요리사에게 불 없이, 칼 없이 요리 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그녀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그날 아내가 죽은 후로 그녀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등을 쓸어주었다.
그렇게 좀 진정되자, 케르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핥는 것이 보였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케르야."
미소 짓는 김수정을 보며,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꽁꽁 숨겨왔는지 참….
나는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어른의 역할은 보여주고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수정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제가 주책이었네요. 그럼 다음 사람 지목할게요. 다음 차례는 로믈라나? 이름이 맞나 모르겠네요."
[늑대성, 로믈라나가 화들짝 놀랍니다.]
[늑대성, 로믈라나가 몰려드는 시선에 얼굴이 빨개집니다.]
내가 저랬나…?
아무래도 로믈라나는 나와 비슷한 체질인 모양이다.
나는 내심 성격을 좀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질문의 포문을 연 것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성단, '별 다방(多房)'에서 '진실게임'을 시작합니다.]
[방장 프로메테우스가 질문을 시작합니다.]
아니, 이런 기능도 있는 거냐….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내면세계라고 했던가? 이상하게 다시 놀러 가고 싶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레무스가 '구슬'의 사기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묻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아무리 성좌라도 그만한 양의 구슬의 힘을 감당하는 것은 어렵다.
한 3조각이라면 몰라도 5조각 이상은 누구의 도움이 있지 않은 이상….
[늑대성, 로믈라나가 '선과'가 있었다고 대답합니다.]
뭐…? 잠깐만.
어쩌면 이 답도 없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하늘을 올려 보며 로믈라나에게 물었다.
"로믈라나. 스타 프루츠를 가지고 있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