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처음은 화려하게 (3)
던전에 진입하는 시기가 내일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오늘 하루를 꽁으로 날려 먹을 이유는 없다.
기왕 비행기 타고 해외까지 날아왔으니까, 좀 더 주변을 둘러보고 다양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박민진 PD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본촬영 못지않은 장비들을 대동하고서 도심 여기저기를 찍고 있었다.
드론까지 띄울 정도로 본격적이었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홍콩 하면 역시 먹을 걸 빼놓을 수 없다.
스태프들이 미리 예약해 둔 가게로 향했다.
역시 홍콩답다고 해야 할까.
웬만한 가게들은 사람들로 전부 북적이고 있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이는 이 공간에서 서빙 직원들은 능숙하다는 듯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나도 저건 못 할 거 같은데.
가만히 보면 헌터들 말고도 일상생활별로 능력자라 불릴 만한 존재들이 많은 것 같다.
일곱 명의 출연자들이 오순도순 앉아 메뉴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주문이 들어가자마자 주방 쪽에서 웍을 다루는 요리사가 불 앞에서 화려하게 요리를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감독이 앵글을 살짝 조정했다.
나빈이가 레이드 시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때는 이렇게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걸 보면 시대가 많이 변한 거 같긴 해요.”
출연자들도 나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나. 게이트가 닫히고, 몬스터가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렇게 생기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게 될 줄.
그때는 이런 미래가 오긴 할까 의심만 했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고 나니까 기분이 새롭다.
던전 탐험대의 메인 소재는 아무래도 던전, 그리고 그 던전에 깃든 레이드 시대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거라고 할 수 있다.
나빈이가 의도한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이런 이야기와 이어질 수 있도록 멘트로 발판을 잘 깔아 뒀다.
이 발판을 이용해서 내가 내일 탐험할 던전에 관해 슬쩍 이야기 궤도를 틀었다.
“광물 던전이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 도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잖아.”
“그랬었죠.”
이건 굳이 헌터들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홍콩에 생겨난 광물 던전은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당시의 신인이었던 난 그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했었다.
이아담이 이런 내게 물었다.
“당시에 전투에 참여했던 헌터는 그럼 여기선 태오 씨뿐인가요?”
“네. 그때는 아이리스나 나빈이나 준서나, 다 각성 전이었을 겁니다.”
세 사람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나도 있었어.”
“네?”
출연자들의 시선이 양성빈에게 향했다.
‘설마 양성빈도 헌터로 활동했었나?’라는 생각은 너무 오버고.
내가 아는 한, 양성빈은 각성한 적도 없었다.
“오빠가 왜 그때 여기에 계셨던 거예요?”
신에리가 우리를 대표해서 물었다.
그러자 양성빈이 쓴 미소를 지었다.
스윽.
자신의 오른팔 쪽 소매를 팔꿈치 위쪽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자 기다란 상처의 흔적이 보였다.
“지인하고 같이 홍콩에 볼일이 있어서 넘어왔었거든. 그때 마침 광물 던전이 나타난 거야. 몬스터들 때문에 죽다가 겨우 살아났지.”
“세상에…… 아프지 않으셨어요?”
지금이야 많이 아물어서 괜찮지만, 당시에는 꽤 큰 부상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 아팠지. 내가 그때 몇 바늘이나 꿰맸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어. 조금만 더 상처가 깊었으면, 아마 팔을 절단했을지도 모를걸.”
극단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신에리와 이아담은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바로바로 출동한 헌터분들 덕분에 간신히 산 거지, 만약에 태오 같은 분들이 아니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그러더니 양성빈이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말했다.
“고맙다, 태오야.”
“아닙니다. 저희는 헌터니까요.”
헌터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해도 사람들은 늘 우리들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직업에 대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 * *
맛있는 음식,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는 늘 행복하고 좋다.
오랜만에 촬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편안한 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숙소로 들어가서 홍콩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우리들은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어제 잠깐 스치듯 지나갔던 광물 던전 입구로 향했다.
어제는 공식 허가가 나지 않은 날이었기 때문에 입장이 불가능했지만, 오늘은 가능하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헌터들이 우리를 위해 길을 터 줬다.
몇몇 헌터들은 나를 향해 예를 표하기까지 했다.
양성빈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내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근데 왜 너한테 저렇게 하는 거야?”
“헌터들 중에 저한테 존경심을 담아서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아마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내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우습기도 했다.
너무 자기 자랑 같아서 그렇다.
그런데 뭐, 안 좋은 일도 아니고. 그리고 내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좋아할 만한 일이지 않은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솔직하게 다 대답해 주는 편이다.
이아담이 나를 존경한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태오 씨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헌터들도 저렇게 예를 갖춰서 대우하니까 뭔가 달라 보이시네요.”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대단한 사람 취급당하는 거야 이제는 워낙 익숙해졌으니까.
광물 던전은 지난번에 우리가 탐색했던 던전들에 비하면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아직도 업체들이 드나들면서 주기적으로 광석을 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일 24시간 계속 광석을 채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해진 요일과 시간이 따로 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채굴이 금지된 요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촬영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광물을 캐는 업체들이 던전 곳곳에 전등을 달아 뒀기 때문에 지난번처럼 손전등에 의지해서 안을 누비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밝은 환경 덕분인지, 아니면 파일럿 프로그램 당시처럼 던전 안에서 하루 이틀 묵고 와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져서 그런 건지, 출연자들의 얼굴은 위에 설치되어 있는 전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상당히 밝아 보였다.
오늘은 준서가 앞장서 걸어갔다.
“태오 형! 저기 앞에 저건 뭐예요?”
이곳에 오기 전에 광물 던전에 관해서 미리 공부를 해 뒀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메인 MC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보니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저거는 이타늄이라는 광물이야.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하다고 알려져 있는 물질이지.”
“엄청 비싸겠네요?”
“여기서 나오는 광물들 모두가 다 돈 주고도 못 살 만큼 귀한 물건들이야.”
굳이 가격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에 제이커하고 연관되어 있는 자들도 왔었다, 이거지.’
대체 어떤 연줄을 가지고 있기에 이 비싼 광물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집안이 빵빵한가?’
테러도 자금줄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다.
제이커를 붙잡으려면, 녀석의 자금줄이 되어 줄 만한 곳을 찾아서 쑤시면 될 텐데.
그러면 우리가 굳이 녀석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알아서 꼬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오늘은 촬영의 목적도 있지만.
제이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또한 중요한 목적이었다.
물론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는다.
그냥 온 김에 노력한다는 느낌이지,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까진 아니다.
애초에 제이커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다닐 만한 인물도 아니고.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이철민 소장 일행이 며칠 전에 홍콩에 왔을 때 진작 발견되고도 남았어야 한다.
그러나 어제 잠깐 이철민 소장을 만나서 이야기해 본 결과, 제이커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이 들 만한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여간 용의주도한 놈이야.’
눈은 광물 던전 내부로 고정되어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온통 제이커에 대한 생각뿐이다.
잠시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준서가 또다시 내게 물었다.
“형, 저기 저 보라색 광물은요?”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준서의 호기심이 굉장히 왕성해 보였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을 보면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그만큼 흐뭇한 일도 없다고 하지만.
나는 선생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흐뭇함보다는 귀찮은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준서가 궁금해하는 걸 시청자들 역시 궁금해할지도 모르니까.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이 ‘난 모른다’라는 태도를 보이면 좀 그렇지 않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공부 안 하고 왔으면 어떻게 될 뻔했을까.’
아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 * *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해 왔다고 한들, 광물 던전에 대해 모르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다.
때마침 이아담이 내가 모르는 걸 질문했다.
“이 파란 광물이 뭔지도 아시나요?”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을 여러 차례 끄집어내 봤지만, 대답으로 내놓을 만한 지식이 없었다.
이럴 때에는, 아이리스가 내 구원투수로 나섰다.
“사히드라는 이름의 광물이에요. 물과 성분이 거의 일치해서 실제로 사람이 먹어도 무해하다고 하네요.”
“오, 정말인가요? 신기하네요.”
아이리스는 우리 헌터들 사이에서도 두뇌가 명석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워낙 머리가 똑똑한 덕분에 한번 알려 준 건 절대로 안 잊어버린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아이리스에게 몰래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아이리스는 목소리는 내지 않은 채 입만 뻥긋거리면서 ‘천만에요’라고 내게 답했다.
이런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빈이가 질투라도 하는 모양인지 나를 찌릿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이리스 씨하고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이시네요, 선배님.”
“같은 회사니까 뭐.”
적당히 둘러댈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 가던 도중에, 앞서 걸어가던 준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제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앞에 누가 있는 거 같은데요?”
낯선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준서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설마 또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닌가 싶어서 내가 대신 앞장서기로 했다.
“저쪽 말하는 거지?”
“네, 형.”
준서가 이렇게 보면 감이 참 좋다.
만약에 레이드 시대가 좀 더 길게 연장되었더라면, 준서도 랭크가 많이 올랐을 거 같은데.
미리 챙겨 온 단검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출연진과 제작진에게는 뒤로 물러서라는 말을 한 뒤.
준서가 기척을 느낀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검을 겨눈 순간.
“사, 살려 주세요!”
“저, 저희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정말이에요!”
몬스터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