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혼자만 남은 체스 킹을 위한 게임으로는 모노크롬 퀴즈 게임이 준비되었다.
코너 기획과 구성보다는 자료를 모으고 사용 허락을 받는 데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 게임이었다.
“체스가 흑백 싸움이니까, 모노크롬의 흑백을 찾는 거예요.”
재민의 설명에 이어서 우형이 시름 섞인 목소리로 이마를 짚었다.
“난 이 코너가 제일 걱정됐어…….”
아직 자세한 코너 내용을 듣지 못한 컬러즈는 “뭔데? 뭔데?” 하며 궁금해했다.
“흑백 퀴즈 게임은 바로…… 멤버들의 흑역사와 백역사 찾기!”
여러 영상 클립이 제시되면, 그중에서 각 멤버의 흑역사 영상과 백역사 영상을 맞히는 퀴즈였다.
정답을 맞히면 체스 말을 얻고, 체스 말을 많이 모으면 재민 왕이 행복해진다는 설정이었다.
물론 가장 정답을 많이 맞힌 사람에겐 재민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장님의 식사권도 함께한다.
“흑역사랑 백역사는 다 본인이 뽑았으니까, 그 멤버의 시점으로 찾아야겠죠?”
흑역사 영상은 주로 과거 영상에 치중되어 있었다. 실제 흑역사라기보다는 시간이 오래 지나서 부끄러운 영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반대로 백역사는 잘 나온 음방 직캠이나 반응이 좋았던 컨텐츠 클립 등이었다.
“나는 흑역사 고르기 진짜 어려웠어.”
“왜?”
“나 유한이에게 흑역사란 없으니까.”
“난 정말 형의 이런 멘탈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모두를 주목시킨 후 결론은 자기 자랑.
한이의 당당한 발언은 준해의 탄식이 아니라 감탄을 자아냈다.
“해랑이는 지금을 흑역사 영상 후보에 넣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한이의 당당함을 그새 본받았는지, 아니면 예능 욕심이 생겼는지.
오프닝 이후로 벗은 선글라스를 목에 걸어 바캉스 온 늑대가 된 해랑은 본인의 모습에 만족했다.
좀 이상할 뿐이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런 해랑을 묘한 눈으로 보던 우형은 전광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일 재미없을 것 같은 해랑이 거 먼저 보자.”
“해랑 형한테 흑역사가 있을까?”
해랑도 신인 땐 지금보다 동글한 인상이긴 했지만, 막내 준해의 눈에는 항상 어른스럽고 잘생긴 형이었다.
그나마 새빨간 머리에 새빨간 눈썹이던 피구왕 시절을 흑역사로 뽑을 수도 있겠으나…… 그때도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 뿐이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재계약 이후 단정 흑해랑이 된 이후부터는 두말할 것도 없었고.
실제로도 흑역사라고 할 만한 영상을 구하기 어려웠는지 샛노랬던 데뷔 초와 새빨갰던 악동 시절이 빠지지 않고 후보 영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총천연색 해랑을 제치고 해랑이 흑역사 영상으로 뽑은 것은…….
“반응 좋았는데 왜 이게 흑역사야?”
“내가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서…….”
<쉰셋돌>에서 원만호에게 이끌려 상황극으로 예능 수련을 하던 영상이었다.
해랑에게는 기억이 새까매졌다는 의미의 흑역사였다.
기만자다, 백씨라서 백역사밖에 없다 하는 멤버들의 야유가 지나간 후.
“저 때 준해는 열여덟이 아니라 여덟 살 아니야?”
“우형이 형 데뷔했을 때 리더라고 힘이 빡 들어가서-.”
“난 눈 가리고 있을래…….”
“저보다 뒤에 있는 멤버들이 눈에 띄는데요?”
추억을 되짚어 보는 시간인지, 항마력 테스트인지.
신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모습을 발굴당한 멤버들은 부끄러워하고 컬러즈는 매우 즐거워했다.
***
저번 팬미팅은 각 멤버의 기획을 1부씩 진행하여 총 6부 구성이었지만, 이번엔 적당히 합치고 추린 2부 구성이었다.
우형의 색, 재민의 체스 키워드로 식사권을 건 퀴즈 게임을 했다면.
해랑의 달, 한이의 그림자라는 키워드는 한 코너로 합쳐졌다.
“달과 그림자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아니, 그 자체발광하는 달 말고요.”
한이가 해랑의 현란한 달 아이템을 손으로 가렸다.
미러볼은 그림자가 진 공간에도 알록달록한 빛이 들어차니 지금 설명에는 걸맞지 않았다.
“그림자…… 월식?”
“그건 지구 그림자잖아. 달에서 그림자가 지는 부분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에 컬러즈도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깨달았다.
컬러즈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단어라 모를 수가 없었다.
“네. 이곳은 달의 뒷면입니다.”
한이의 멘트와 동시에 조명이 한층 어둡게 바뀌었다. 마치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오프닝 같은 분위기.
“조명 뭐야!”
“나 이런 거 재밌어.”
어딘가 음산해진 분위기에 우형과 준해는 당황하고 재민은 눈을 반짝였다.
방금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한이는 어디선가 큐 카드를 챙겨 들더니 순식간에 ‘그런데 말입니다’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걸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달의 뒷면…… 멤버들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뒷면이 있을 텐데요.”
흥미진진한 도입부에 컬러즈도 금방 몰입하여 재민처럼 반짝반짝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저희가 찾아왔습니다. 짜잔!”
전광판엔 [모노크롬, 과연 착하기만 한가. 그들을 고발합니다.]라는 긴 타이틀이 떴다.
컬러즈의 단골 주접 멘트 ‘모노크롬 착한 줄 알았는데’를 의식한 코너명이었다.
“고발이면…… 잡혀가는 거예요?”
“뭐 걸리는 거 있으신가요, 재민 씨?”
“며칠 전에 냉장고에 넛츠라떼 마지막 하나 남은 거 먹고 안 채워놨어…….”
“아! 퇴근하고 냉장고 열어보니까 없다 싶더니!”
갑작스러운 양심 고백에 한이는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재민을 직시했다.
“사실 두 개 남았을 때 하나는 내가 마셨는데.”
“너희 둘 다 벌로 일주일 카페 심부름이야.”
알고 보니 준해도 공범이었다. 자수한 제이제이는 심부름형을 선고받았다.
“아무튼 이렇게 나만 아는 멤버들의 나쁜 짓을 고발하자는 거죠.”
“그러니까 고자질 시간이란 거잖아요.”
제이제이가 한 고해성사도 그렇고, 뭐든 앞글자가 ‘고’로 시작하니까 비슷하긴 했다.
“막내들 음료수 사건은 귀여우니까 넘어간다고 치고, 누가 진짜로 잘못한 일 있으면 어떡해?”
“신고할 준비 해 주세요.”
신고 정신 투철한 해랑이 컬러즈를 보며 전화하는 손 모양을 만들어냈다. 컬러즈는 멤버를 신고하자는 말도 좋은지 알았다며 열성을 다해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해랑은 걸리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이 코너의 첫 제보자는 해랑이었다.
“이건 제보자가 직접 설명해 주세요.”
“내가 분명 빨래 건조대에 옷이 있는 걸 봤는데, 그땐 아직 안 말라서 그냥 뒀거든. 나중에 입으려고 보니까 없는 거야.”
“그렇다는 건 설마?”
“다음 날 보니 그 옷이 빨래통에 들어가 있었어.”
이건 누군가 해랑의 옷을 마음대로 입고 나서 빨래통에 넣었단 소리였다.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에 컬러즈는 “오오~” 하며 제보 내용에 집중했다.
“……그런데 아직 범인을 못 찾았어요.”
해랑의 마지막 멘트에 고발 프로그램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이 안에 범인이 있었다. 용의자 넷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지금 자수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덮어두고 싶다는 소리인데.”
“형도 용의자거든요? 진행하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한이가 우형을 끌어다가 해랑의 맞은편, 용의자석에 세웠다.
“컬러즈는 누구인 것 같아요?”
형사가 된 해랑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의견을 받았다.
컬러즈는 각자 의심 가는 멤버의 이름을 외쳤다. 그 안에 “해랑이!”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의심 가기보다는 외치고 싶어서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저는 범인 아니에요. 해랑이 형 옷은 사이즈가 안 맞잖아.”
준해가 손을 들고 자신이 범인이 아닌 이유를 말했다. 체격이 차이가 나니 해랑의 옷을 입었을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티셔츠였어.”
“으음…….”
연습할 땐 몸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오버핏을 자주 입는 멤버들이라 준해의 주장은 해명이 되지 않았다.
“빨래가 혼자 걸어서 빨래통으로 갔을 확률은?”
“어? 이 멘트 수상한데요?”
재민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멤버들의 의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저 드립을 치고 싶었던 재민은 유력 용의자로 몰리자 눈을 굴리며 입을 닫아버렸다.
갑자기 시작된 추리 게임. 우형이 동생들을 한 명씩 훑어봤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가장 키 차이 안 나는 한이가 의심되긴 하는데.”
“맞아. 그리고 저 형 전에도 가끔 해랑이 형 옷 입었어요.”
“에이, 그땐 룸메일 때였잖아. 그러는 우형이 형도 룸메일 때 아무거나 막 주워 입었으면서.”
큰 숙소로 이사한 이후로 멤버들은 개인 방을 얻었다.
게다가 룸메이트 이야기가 나오니 덩달아 우형도 전적이 있다면서 용의자로 몰렸다.
티셔츠 정도는 공유재산인 듯했다. 이 건도 사실은 그리 민감한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사건. 제보자인 해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빨래에서 묻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 미제 사건을 해결할 중요한 힌트 하나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개털 같은 게 붙어 있었어.”
“아, 설마 그 털 하얗고 까만 색이던가요?”
하얗고 까만 강아지와 만나는 멤버. 멤버들과 컬러즈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범인은 결국 범행을 자백했다.
“얼마 전까지 룸메여서 내 옷인지 형 옷인지 구별이 잘 안 됐어.”
“이렇게 말한다는 건 너도 해랑이 옷인 건 알고 있었단 거네.”
“입고 나가서야 알았지. 그런데 입고 나와버렸는데 어째? 밖에서 옷 막 벗어요?”
숨길 것도 없겠다, 한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뻔뻔하게 나왔다.
컬러즈는 어째서인지 환호했다. 그의 당당한 태도를 응원하는 건지, 옷을 벗냐는 소리에 반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긴 아무도 보지 않는 달의 뒷면이니까 우리 다 같이 비밀로 하는 거예요.”
“그거 진행 멘트에 적혀 있긴 한데, 범인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모노크롬과 컬러즈 사이의 비밀은 ‘모노크롬 비밀 리스트’까지 제작되어 공유될 정도로 비밀이 아니었다.
해랑의 티셔츠 사건이 새 비밀로 등재되고, ‘모노크롬 착한 줄 알았는데’ 코너는 계속 이어졌다.
***
준해가 담당한 캐릭터는 우주 기관사.
별과 별 사이를 잇는 Starline, <궤도>에서 따온 설정이었다.
그래서 이번 키워드는 별. 반짝이는 별 배경을 깔고 1부의 마지막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면 1부를 닫으며, 1부의 엔딩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댄스곡이 아니었기에 나란히 늘어선 멤버들은 스탠딩 마이크 앞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어?”
멤버들은 이내 눈이 동그래졌다.
예정되었던 곡이 아니라 다른 곡의 반주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시선만 이리저리 움직여 음향 스태프를 찾던 멤버들은 관객석이 눈에 들어왔는지 어깨의 힘을 빼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 차례가 아니었네.”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너의 별>.
방금까지 어두운 배경의 코너를 진행하느라 응원봉을 잠시 꺼두었던 컬러즈가 일제히 응원봉을 흔들었다.
흑백 세상, 어두운 달의 그림자 안까지 찾아온 색들은 알록달록한 별이 되어 모노크롬을 비췄다.
반짝거리는 관객석을 바라보던 멤버들은 컬러즈의 합창이 시작되자 마이크를 쓰지 않고 따라 불렀다.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기분에 컬러즈도 멤버들도 만족스러운 무대였다.
노래가 끝나고 훈훈함이 가득 찬 분위기 속에 한이가 마이크를 들었다.
“와아.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야?”
관객석 가까이 가 대답을 들은 해랑이 컬러즈를 대변했다.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대.”
“이건 진짜 비밀이었다.”
비밀이라면서 열심히 소문을 퍼뜨리는 컬러즈였지만 보안을 지킬 땐 정말 지키는 컬러즈였다.
“다른 노래가 나와서 사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이게 그 흔들다리 효과인가?”
재민의 말에 준해도 똑같이 심장 위에 손을 대고 무대 시작 전 놀랐던 마음을 토로했다.
“처음에 놀라서 심장이 뛰었는데, 노래 시작하고 다른 의미로 두근거렸어요.”
모노크롬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면 서프라이즈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컬러즈가 별을 보여줬으니, 이제는 모노크롬이 별을 보여줄 차례.
이번에야말로 예정되었던 곡의 반주가 흘러나오고, 천장에선 은색 컨페티가 별처럼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다시 한번, 1부의 엔딩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1부를 닫는 곡은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해진 필름 속의 모노크롬은 현실로, 2부로 나아갔다.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