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음악계에서 프로듀서라 하면 많이들 작곡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프로듀서를 직역해보자면 말 그대로 제작자. 실은 더 많은 역할이 있다.
음악과 관련된 부분이야 멤버들과 프로듀스팀에 맡기고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는 나도 프로듀서로 음반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내가 호기롭게 프로듀서를 맡겠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뉴레인이 아이리스에게 작곡가를 구해오라고 한 건 아니니까.’
작곡가를 구해올 수 있는 사람이면 됐지.
지금 아이리스는 음반을 기획 총괄할 사람이 필요한 거지, 나 혼자서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다른 회사도 아니고 뉴레인. 지금 상황에선 대표 딸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억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내가 가장 제격일지도 모른다.
“이사님이 저희를 맡아주신다고요?”
“음악 하던 사람이 아니라 못 미더울 수 있겠지만 이번 음반만은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해.”
“아, 아뇨! 못 미덥다니요. 저야 너무 좋은데…….”
뉴레인 이야기를 할 때는 지쳐 보이기만 했던 레드의 표정이 살아났다.
“그런데 멤버들 의견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전에 <아이돌 대운동회>에서 마주쳤을 때 말이야. 나를 좀 경계하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그건 애들이 이사님을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
레드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열심히 해명했다.
“그게, 그때쯤부터 저희끼리 회사 문제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이사님은 이사님이시니까…….”
“으음. 그럴 수 있지…….”
하긴 아이리스는 나를 별로 마주친 적도 없으니 그냥 회사와 연관된 사람으로만 보였겠지.
그래도 레드와 옐로가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던지라 다른 멤버들이 내게 보인 차가운 반응이 더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잠시지만 같이 일하게 된다면 딱딱한 관계보다는 편한 사이가 나을 것 같은데.
‘그래야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줄 테고.’
아이리스도 ‘그 뉴마’를 거쳐온 그룹이다. 회사에 요구 사항을 말하는 게 익숙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레드는 내가 걱정하느라 말이 없는 줄 알고 또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사님은 다르시잖아요. 다들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만일 누가 뭐라고 하면 제가 리더 자리를 걸고 어떻게든……!”
“아, 아니, 리더 자리는 안 걸어도 되고.”
날 도와주겠다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비장했다.
내가 작게 손을 들어 진정시키자 레드는 어깨와 미간에 힘을 뺐다.
여전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난다니까.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멤버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상관없어. 직원들이 더 걱정이지.”
“아……. 이사님도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저희가 이래서…….”
“아니, 너한테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대표님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하겠다고 한 거야. 내가 뉴레인에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거든.”
“혹시…… 회사 물려받으세요?”
“아니. 그건 절대 아냐.”
뉴마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뉴레인은 별개라고 생각했나.
“대표님한테 좀 갚아줄 게 있어. 그러려면 오히려 내가 너희 도움을 받아야 하거든.”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레드는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일단은…… 회사에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낱낱이 알려줄래?”
우선은 뉴레인 내부 상황을 파악하는 것부터.
그걸 알면 새롭게 나타난 퀘스트도 어느 정도 길이 보일 듯했다.
***
이른 시일 내에 음원을 내려면, 역시 디지털 싱글이 가장 적절하다.
‘실물 앨범 내 달라는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만…….’
지금도 아이리스의 팬덤인 무지개는 구성 빵빵한 국내 실물 앨범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앨범을 내기는 어렵다.
이번 퀘스트에 기한은 표시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기한인 것은 아니다.
내게 시간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리스는 지금도 위태로운 상태.
아이리스가 더 지치기 전에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활동이 필요하다.
‘다음 앨범 계획이 바로 나와준다면 이번 곡을 선공개 곡처럼 소개해서 팬들의 불만을 좀 잠재울 수 있을 텐데…….’
뉴레인은 국내 앨범 계획에는 소극적이고, 나는 다음 앨범까지는 담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레드가 한 말이 있어서 이런 아쉬움은 달랠 수 있었다.
[이번에 국내 활동에서 좀 반응을 얻으면 회사도 다음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당장은 그 계기가 필요해요.]
그 역할이라면 디지털 싱글도 나쁘지 않았다.
디지털 싱글은 음악 방송 등의 활동을 안 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아이리스의 음반 프로듀싱을 맡겠다고 손들고 나서기 전에, 일단은 계획부터 상세히 짜놔야 했다.
무턱대고 뉴레인에 가서 ‘프로듀서 제가 맡을게요. 준비는 아무것도 안 돼 있지만요.’라고 하면 ‘뭐 하는 사람이지?’라고 생각할 거 아냐.
호기롭게 나섰다가 진행이 지지부진해지면 나뿐만 아니라 아이리스도 더 우습게 볼 테고.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주요 인력부터 찾아봐야 해.’
일단 기본은 갖추고 제안을 해야 대화할 자리라도 만들 수 있다. 그래야 권력이든 뭐든 활용하지.
음반 기획이 진행되면 뉴레인의 스태프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뉴레인도 외부에서 충당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중요한 건 곡을 써 줄 사람인데…….’
모노크롬도 우형의 곡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작곡가의 곡을 받기 때문에 작곡가 섭외 과정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대성공을 노려야 한단 말이지.
좋은 곡은 물론이고, 아이리스에게 잘 맞는 곡을 써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리스를 가장 잘 아는 작곡가는…… 송 피디님이지만.’
그에게는 편곡 단계에서 참여해 줄 수 있을지 물어볼 예정이었다.
그는 회사 소속 프로듀서로 일하고부터는 작곡보다는 편곡, 기획 등을 주로 맡았다고 했다.
모노크롬의 앨범을 같이 준비 중인데 갑자기 작곡을 부탁하기도 어렵고, 아이리스를 잘 아는 편곡가 또한 필요하니까.
그리고 모노크롬 팀 외의 작곡가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안 될 수도 있지만…… 일단 물어나 보자.’
내가 지금 뭘 가리고 따질 때가 아니지.
나는 먼저 라솔에게 연락해 운을 띄웠고, 그녀는 바로 성운에게 연결해줬다.
우형이 모노크롬 앨범 준비에 집중하느라 작곡팀 활동을 쉬는 사이, 혹시나 그도 개인적인 작업이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통화로 내 용건을 전해 들은 성운은 바로 수락을……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했다.
[조건이 하나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조건?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형과도 팀을 이루기 전에 먼저 작업을 해봐야 알겠다던 성운이었다. 나도 뭔가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건가?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성운은 내게 요구가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다른 회사에 뉴마랑 작업 중이라고 둘러대도 될까요?]
“네?”
[요즘 몇몇 아이돌 기획사에서 협업하자고 연락이 오는데 자꾸 부담을 줘서 안 하고 싶어서요. 같은 아이돌 곡 작업한다고 하면 더 연락 안 할 것 같아서.]
“……마음껏! 변명으로 사용하세요.”
그렇게 협상은 생각보다 쉽게 타결되었다.
‘성운 씨가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타입이라서 살았다…….’
뉴마를 편히 여기는 것도 다행이었다. 우형과 친해진 덕분에 허들이 많이 낮아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연락할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팀 미로의 단장 중 한 명인 로아.
‘로아 씨는 자기가 걸그룹 전문이라고 했으니까 놓칠 수 없어.’
그녀에게 연락해 같은 내용을 전하자 그녀는 “와! 재밌겠다.”라는 한마디로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해주었다.
순간 재민에게 친누나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주인. 인생 헛살아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인맥을 활용해서 사람을 모을 줄이야.
최근 들어 사람에게 고마운 일이 많아지는 기분이다.
이 두 사람만 있어도 뉴레인이 쉽게 무시하지 못할 라인업이다.
가장 먼저 구해놔야 할 뉴마 외부 인력은 이 정도면 됐고, 그다음으로 나는 모노크롬 전담팀을 모았다.
“뉴레인도 수락하면 제가 당분간 두 회사를 오가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이사실에 없을 때 필요한 게 있으면 최 비서한테 전달해 주시면 돼요.”
순화해서 얘기했지만 내가 현재 아이리스의 사정을 설명하자 윤희는 뉴레인의 태도가 예상 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정에서 ‘잘 좀 하지.’라는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야.
“그리고…… 송 피디님. 바쁘시겠지만 도움을 구하고 싶은데, 편곡 과정에 참여해주셨으면 해서요. 뉴마로 다시 오시기 전까지 계속 아이리스의 프로듀서를 맡아주셨으니까.”
“그거야 뭐. 필요하다면야 해야죠.”
송 피디는 당연히 자기가 할 일이라는 듯이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뉴레인과 방향성이 맞지 않아 뉴마로 돌아온 송 피디지만 이번 일은 그가 지향하는 방향과 같았다.
“윤희 씨는 멤버들 옆에서 그대로 기존 업무 부탁드리고요.”
“네. 이사님께도 도움 될 만한 정보가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민형 씨는…….”
내가 다음으로 민형을 호명하자 그는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무지개 역할을 부탁해요.”
“……무지개 역할이 뭐죠?”
“아이리스 팬에게 의견을 구해야 할 일이 생기면 협조를 부탁드리는 것 정도……?”
그러니까…… 딱히 할 일은 없다는 소리였다.
민형은 본인도 팬심 때문에 거리를 둔다고 했으면서 어쩐지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컬러즈 기준 종신 계약 대상인걸. 일선에서 모노크롬을 케어해 줄 사람인데 시간을 많이 빼앗을 순 없다.
전담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같은 내용을 멤버들에게도 전했다.
“주인 님 또 쓰러지는 거 아니에요?”
재민의 말에 멤버들의 고개가 전부 내게로 향했다.
“회사도 바로 옆이고, 내가 관여할 건 딱 제작 과정까지만이거든. 이번에 좀 급하게 진행할 예정이라 너희랑 컴백 일정도 안 겹칠 거고.”
“그래도…… 홍삼 드세요.”
“으응…….”
현대의 평범한 사회인이 으레 그렇듯 운동을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고 결국 안 한다는 걸 들켰나.
내게 운동을 몇 번 권하던 재민은 이제 홍삼을 권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당분간 좀 어수선해질 것 같은데 양해 부탁해.”
“에이. 어수선한 건 저희 멤버들이 제일 어수선한데.”
“……그게 네가 할 말이야?”
한이의 대답에 해랑이 황당하단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뭐, 한이도 멤버니까 본인이 어수선한 것도 멤버가 어수선한 건 맞지.
‘그나저나 준해가 말했던 게 이번에는 정말 맞는 소리네.’
내가 해체를 막기 위해 온 것 같다는 말. 이번 일에는 정말로 한 그룹의 해체가 달렸다.
그게 생각나서 준해를 바라보자 그는 내 시선을 ‘말 잘 듣고 있어라.’로 해석한 건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멤버들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아이리스의 일에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별말을 하지 않았다.
멤버들도 얘기를 듣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리스가 모노크롬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걸.
할 말을 다 전하고 각자의 자리로 해산시킨 후 나도 이사실로 복귀하려는데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우형이 있었다. 특유의 그 시무룩해진 얼굴로.
“너희랑 일하기 싫은 거 아니고, 너희 두고 뉴레인으로 가는 거 아니야.”
“아, 앗. 네…….”
우형은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 걸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