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77화 (277/430)

# 277화

우형은 나를 그냥 쳐다본 게 아니라 할 말이 있었는지, 표정을 정돈한 후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처음에요.”

“처음에?”

“이사님 처음 오셨을 때요.”

작년 1월을 얘기하는 거니까, 벌써 1년하고도 몇 개월이 지난 일이다.

갑자기 우형이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면접처럼…… 회사에 불만이나 요구 사항이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아보시려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거든요.”

처음 본 날, 멤버들은 내 앞에서 아무 의견도 꺼내지 못했다.

우형은 다시 이사실로 불려와서야 자작곡을 내고 싶다는 얘기를 겨우겨우 꺼냈었지.

‘내가 윗사람이라 어려웠을 거라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어려운 걸 넘어서서 자신들을 시험해보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을 줄은.

그 당시엔 회사 신뢰도가 바닥을 쳤을 테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얘기하면 진지하게 들어주시고 최대한 반영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았어요. 얘기를 들어주시는 분이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게 더 많이 생기더라고요.”

꽤나 예전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형은 생생하게 기억이 남은 듯이 말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천장을 쳐다보던 우형은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마 지금 후배들한테도 그게 필요할 것 같아서요.”

우형은 비슷한 불안함을 겪었던 선배 관점에서, 불안할 때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려는 것이었다.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그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

“고마워. 잘 새겨들을게.”

“이사님이 바쁘실 때는 제가 애들 기강 잘 잡아두고 있을게요.”

“멤버들은 안 잡아도 알아서 잘 있지 않을까……?”

“혹시 모르니까요. 이사님 자리에 안 계시다고 말썽부리면 안 되니까.”

“으음. 그래. 리더가 알아서 잘해 봐.”

멤버들이 말썽을 부릴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바쁜 사이를 틈타서 권력 행사를 해 보고 싶은 걸까?

‘우형이한테 리더의 카리스마가 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네.’

모노크롬이 자립하면 리더가 책임질 일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니까 이 기회에 체험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형이 자신을 믿으라는 얼굴로 웃었다.

책임자가 다른 일을 병행하느라 바빠진다는 게 사실 좋은 일은 아닌데 다들 아무 말 없이 이해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제대로 해야지.’

그나마 익숙해진 뉴마가 아니라 다른 환경.

거기에 조만간 정체불명이었던 대표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되었지만 이렇게 양해까지 구해놓은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

완벽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착실히 담겨 있는 기획안을 가지고 나는 뉴레인으로 향했다.

오늘은 레드가 비서처럼 내 옆을 따라왔다.

리더인 그녀가 뉴레인과 대화하는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녹음 파일 지금도 가지고 있지?”

“네.”

뉴레인의 기획실이 프로듀서를 데려오면 음반을 내주겠다고 한 말을, 기특하게도 레드가 증거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사기당하지 않고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지나가듯이 말했겠지만 녹음까지 되어 있으면 그냥 빈말이었다면서 넘길 수는 없지.

회사와 아티스트 간 계약에 걸리는 문제니까.

“가자마자 이걸 틀면서, 그래서 제가 이사님을 데려왔다고 말할까요?”

“아냐. 녹음해 놨다는 걸 알면 앞으로는 대화가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꺼내자.”

“그래도 갑자기 이사님이 저희를 도와주러 오신다는 게……. 이사님이 괜히 책임을 뒤집어쓰시게 되면 어떡해요?”

“괜찮아. 내가 생각해 온 게 있거든.”

거기에 내게는 강력한 대표 딸 실드까지 있다.

레드를 통해 미리 잡아놓은 약속 시각에 우리가 나타나자, 진명희 기획팀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내게는 뭐라 하지 못하겠는지 내 옆에 있는 레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우리가 잘 진행해 볼 텐데 일을 크게 만드니.”

최근에도 데뷔 서바이벌 때문에 뉴레인의 기획실 사람을 따로 만나고는 했지만, 이렇게 뉴레인 소속 아티스트와 함께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

그런데 그녀의 태도는 마치 아랫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예전엔 모노크롬한테도 이런 식으로 대했으려나.’

말을 잘 들어야 활동을 시켜주겠다고, 활동을 못 하는 건 너희 책임이라고.

소속사가 아이돌 그룹에게 갑처럼 행동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연차가 차거나 좋은 성과를 낼수록 점점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에 가까워지기 마련인데, 잘나가던 아이리스에게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 뉴레인은 예외인 모양이다.

“프로듀서님도 다음 앨범은 못 맡겠다고 하시는데 저희가 어떻게 해요, 그럼…….”

“그러니까 팬들은 다른 걸 더 원할 거라느니 하는 얘기를 왜 꺼내서는. 그런 얘기는 예전에 계시던 송 피디님이나 받아주시지.”

진명희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흘끗 시선을 보냈다.

송 피디를 뉴마로 다시 데려간 걸 은근히 탓하는 건가.

‘그런데 우리만 사람 빼간 것도 아니고.’

난 양심에 찔릴 것이 없었기에 웃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산적이지 못한 이야기는 길게 이어져봤자 시간이 낭비될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됐는데 지금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고요. 그 송 피디님도 이 기획에 참여할 예정이니까 일단 얘기를 들어보세요.”

내가 말을 끊자 진명희 팀장은 레드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선을 보내고는 준비된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번안곡 얘기를 꺼냈다더니, 진행된 게 없어 보이는 걸 보니까 대표한테서 별다른 지시는 못 받았나 보네.’

번안곡도 대표가 시킨 일이었으면 아이리스가 싫어하더라도 그냥 진행했을 것이다. 거부하면 앨범을 안 내준다고 이렇게 뻗대는 게 아니라.

대표가 아이리스에 대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나 멀티가 잘 안 되니까…….’

아이리스를 데뷔시킨 후 모노크롬에게서 관심이 사라졌던 것처럼 한쪽에만 집중하여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다.

대표도 아이리스는 해외 활동만 쭉 시키고 그사이에 신인 보이그룹에 집중하려고 했던 거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표는 아직 플레이어에 가까운 것 같아.’

직원들이나 아티스트와 직접 마주하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회사에 지시를 내리는 방식은 마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조작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아티스트의 거부로 스케줄이 중단되는 것은 게임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

아이리스가 회사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대표에게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었던 탓에 아이리스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로 어영부영 시간만 지난 것일지도 모른다.

회의실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진명희 팀장이 허용석 기획실장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이사님이 아이리스 프로듀싱을 맡으신다니요. 저희 기획실이 있는데 말입니다.”

“얼마 전에 대표님이 찾아오셨더라고요.”

“예?”

허 실장에게는 대표 이야기가 가장 잘 먹혔다.

나는 그가 말할 새도 없이 바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 준비했던 멘트를 줄줄 읊었다.

“예상이랑 상황이 달라져서 마음이 급해지셨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아이리스를 맡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죠.”

대표가 내 핸드폰을 찾으러 온 것도 사실. 아이리스 맡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도 레드한테 듣긴 들었으니까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을 그냥 붙여서 말하면 대표가 내게 직접 한탄한 것처럼 들리겠지.

사실도 묘하게 이상한 뉘앙스로 들리게 말하는 보현을 보고 한번 따라 해봤다.

허 실장은 크게 당황했는지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대표님은 저희에게는 아무 말씀도…….”

“대표님이 작년쯤부터 많이 바뀌셨잖아요. 그쵸? 별말씀이 없으셨던 게 사실은 직원들이 좀 더 주체적으로 나서주길 기다리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 비서가 대표에 관해서 말해준 덕분에 이제는 이렇게 슬쩍 아는 척도 가능했다.

물론 대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대표의 딸이 직원들을 탓하러 온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뉴레인의 일에 억지로 끼어들면서 이들과 척질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윗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 그래서 전 이걸 기획실이랑 같이 짠 기획으로 밀고 싶어요.”

내내 불편한 표정이던 허 실장도 이 말에는 솔깃했는지 미간의 주름이 펴졌다.

나는 그저 아이리스만 살리면 된다. 뉴레인에서 성과를 내봤자 아무 의미가 없으니 공로는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리스가 뉴레인 소속인 이상 제작비는 뉴레인이 내야 하니까.’

기획실이 숟가락을 얹고 싶다면 지원은 할 수밖에 없다.

이익을 우선하는 듯한 대표가 설마 이대로 아이리스를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수납하려는 건 아닐 테고.

어차피 언젠가 음반을 낼 생각이었다면 이참에 진행하는 것도 뉴레인에겐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나는 내가 끌어올 수 있는 인력들과 대략적인 기획을 설명했다.

“저한테도 직접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신 건 아니에요. 아직 대표님은 모르시는데 생각이 있으시다면 기획실이 잘 취합해서 보고 부탁드려요.”

실은 내가 직접 대표에게 연락할 수단이 없어서 대신 부탁하는 거지만 눈도장 찍을 기회를 양보한다는 듯이 말했다.

“아예 저희한테 맡기신다면 뉴마 아티스트팀에게 프로듀싱 비용을 지급하시는 방법도 있고요. 대표님께는 제가 직접…….”

“아, 아뇨. 최대한 빠르게 검토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다른 선택지도 꺼내 들자 허 실장은 마음이 급해졌는지 미끼를 확 물어 버렸다.

‘적어도 기획실 마음은 기운 것 같고. 다음은 대표인데…….’

대표 몰래 음반을 낼 수는 없다.

내가 개입하는 것을 대표가 반가워할 리는 없지만 이것도 생각이 있다.

‘기획실에서 올라온 서류에 내 이름이 떡하니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아마 가만히는 못 있겠지?’

내가 끼어 있다고 무작정 거절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게 상당히 많을 거야.

회사 상황도 고려해야 하고, 내가 뉴레인에 영향력을 보이는 것도 뜻밖일 테고, 내 의도도 궁금할 테고.

우리 둘 다 이 세계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하던 탓에 서로를 제대로 인식한 지 얼마 안 됐다.

대표는 이 기획을 수락해서 나를 뉴레인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이번엔 뉴레인을 방해하는 일이 아니잖아?’

나는 아이리스를 돕겠다고 나선 거니까 뉴레인이 손해 볼 일은 없지.

게다가 아이리스가 회사의 뜻을 거부해서 문제가 생긴 상황. 아이리스 리더의 지지를 얻은 내가 있어야 뭐라도 하기가 수월할 테고.

이전에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대표가 나와 같은 사람…… 아니, 그냥 나라고 생각하니 최소한의 예측이 가능해서 그나마 나았다.

‘나도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 이판사판이야.’

그리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대표가 대답하길 기다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이 세계로 들어온 후 비활성화되었던 마이 엔터의 아이리스 멤버 관리창이, 다시 활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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