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124화 (124/430)

# 124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을 정도면 완전히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요.”

이입해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떤 상황인지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애초에 라솔과 그 작곡가가 만난 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기에 라솔도 그가 가수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한 거고.

“그렇죠. 아예 생각이 없어 보였으면 제가 이렇게 매달리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가수는 꼭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요? 음악방송에 나갈 게 아니라면.”

아이돌이야 항상 비주얼을 강조하며 뮤직비디오도 찍고 음악방송에 나가지만, 일반 가수라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가수란 일단 목소리만 있으면 곡도 앨범도 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요즘은 온라인 플랫폼이 강세라 더더욱 TV에 출연하지 않아도 선보일 경로는 얼마든지 있었다.

뮤직비디오 또한 가수 본인이 출연하지 않는 방법은 있다. 가사 위주로 제작하는 리릭 비디오도 있고, 연기자를 섭외하는 경우도 있고.

혹여나 내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로 들릴까 봐 걱정이었는데 라솔은 진지하게 답변했다.

“물론 가수가 꼭 TV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기엔 한계가 있더라고요.”

오랫동안 활동하며 많은 가수 동료들을 봐왔을 그녀가 하는 말이니 그 무엇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이건가.’

아티스트마다 지향하는 방향이야 전부 다르겠지만 그녀의 회사가 지향하는 건 좀 더 외부에 나서는 연예인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실제로도 개인 온라인 음원을 몇 번 내 봤는데 생각보다 홍보 효과가 미미했다고.

“정 안 되겠으면 존중은 하겠지만, 마냥 물밑에서 활동하게 두기에는 재능이 아까워서요.”

“확실히 실력이 있으면 포기하긴 아깝죠.”

재능을 썩히는 게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알기에 격하게 동의했다.

국가 대표급 실력을 지닌 학생이 있는데 선수가 아니라 코치로 나가겠다고 하면 나라도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설득하지.

생각보다 대화가 수월하게 통해서일까. 그녀도 공감해주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표정이 좀 풀어졌다.

엔터 업계인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해도 그냥 얘기 들어주는 거라도 잘하니까 다행이었다.

“회사로서도 걱정이 많아요. 저를 주축으로 꾸린 회사다 보니 제가 프로듀서 겸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거든요. 이번 섭외도 절 통해서 들어온 건데.”

음악대상과 함께 일하는 작곡가. 방송에서 원할 만한 타이틀이었다.

꼭 그를 원해서라기보단 간접적으로 라솔과 연을 만들어 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테고.

라솔은 한숨을 푹 쉬었다.

“PD님도 계속 자리 비워두고 기다리셨는데 좀 곤란하게 됐네요. 저 개인이야 그렇다 쳐도, 회사도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거절하고 뒷일은 나 몰라라 하기가…….”

“회사까지 엮이면…… 어렵죠.”

어느 업계가 안 그러겠냐마는, 연예계는 특히 사람을 내세우는 업계라 그런지 이미지와 관계가 중요한 편이었다.

방송국과 소속사 간 관계가 틀어져서 소속 연예인들이 특정 방송에 못 나간다느니 하는 소문도 돌지 않던가.

일단 머리로는 알기에 맞장구쳤는데 회사 운영 얘기로 돌아가니 갑자기 다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좀 책임을 지면서 일했던가?’

너무 거침없이 지르기만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전까지 아티스트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연예 매니지먼트 쪽은 아직 서툴러서요. 혹시 비슷한 경험 있으세요? 억지로라도 내보내야 할지,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계속 이어지는 얘기에 ‘그렇구나.’ 하면서 듣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으로 발언권이 넘어왔다.

“어음, 그러니까…….”

우리? 우리야 섭외가 들어오면 기쁘게 받아들이니 그런 경험이 있을 리 있나.

딱 한 번. 전에 해랑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섭외를 거절하긴 했는데 딱히 노하우랄 게 없었다. 정말 상투적인 거절 문구를 보낸 게 끝이었으니.

그쪽에서도 꼭 우리를 원한 건 아니었는지 그리 미련을 보이진 않아서 깔끔하게 마무리됐고.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우형이 자꾸 눈을 굴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으, 으음.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라솔은 아무래도 섭외를 거절하게 될 것 같고, PD가 오래 기다렸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마음 쓰이는 거고.

……이거 혹시?

“그…… 싱어송라이터로 섭외가 들어왔다고 하셨나요?”

“네. 다른 분들도 같이 나오니 부담 없을 거라 생각해서 추천했던 건데, 토크쇼는 아무래도 더 부담스러운가 봐요.”

“혹시 대신 대타를 구해드리면 어떨까요? ……저희 그룹에도 싱어송라이터가 있는데.”

***

“형 방송 나갈지도 모른다고?”

“응. 이사님이 아까 말씀해 주셔서.”

저녁이 되어 멤버들이 다 같이 퇴근하려는데 주인이 우형만 잠시 불러 세웠다.

잠시 대화를 나누느라 뒤늦게 숙소로 돌아온 우형은 멤버들에게 갑자기 들어온 방송 섭외 이야기를 전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긍정적으로 이야기 중이라고 하니 며칠 내로 확실해질 것 같았다.

원래 주인은 확실히 들어온 섭외 건만 멤버들에게 알려주곤 했는데, 혹시 우형이 엔피버 소속사와 약속된 후 작업 일정이 있을까 봐 미리 물어봤다고.

최근 들어 모노크롬도 여러 방송에 나가긴 했지만 섭외라는 게 그리 흔하게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이가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갑자기? 아니, 갑자기는 아니지. 나가면 언제 촬영하는데?”

“한 2주 뒤에? PD님이랑 좀 더 얘기해봐야 한대.”

재민처럼 펑크 난 자리에 급하게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2주 정도 시간이 있으면 양호한 편이었다.

물론 모노크롬 기준이고 다른 연예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무슨 방송인데?”

“ZBS에서 하는 거 있잖아.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

“아! 그거.”

옆에서 듣던 재민이 방송 타이틀을 듣자마자 아는 체를 하며 반응했다.

“예전에 단장 형도 섭외 받은 적 있었어. 그때 댄서 특집이었거든. 일 있어서 다른 팀에 넘기긴 했는데.”

재민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팀 미로가 댄스계에선 이름이 있다 보니 단장인 민후는 춤과 관련된 프로그램에 초대되곤 했다.

그러나 대개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나 댄스 행사였고 TV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편은 아니었다. 필요한 경우 케이블 채널에 인터뷰로 잠깐 나오는 정도.

후배 육성엔 관심이 있었기에 방송 출연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다른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결국 거절했다고 들었다.

민후나 로아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었고 다른 팀원에게 전해 들은 것이었다.

연예인이었다가 일반인이 되어버린 재민을 생각해서인지 단장 부부는 그의 앞에서 방송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거지? 학생 한 명 나오고, 장래희망 직종에 있는 사람들 나와서 조언해 주는 거.”

한이도 재민의 이야기를 듣자 그게 어떤 프로그램인지 떠올랐다.

일반인 학생이 나와서 장래희망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현재 그 직종에서 활약 중인 사람들이 출연하여 대화를 나누고 조언해주는 직업 토크쇼 프로그램이었다.

예능과 교양 프로그램의 중간쯤 되는 성격의 방송.

보통 아이돌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었기에 언뜻 채널을 돌리다가 본 기억만 남아있었다.

“이번에 아이돌 특집이야?”

“아니. 싱어송라이터 특집이래.”

“오~. 싱어송라이터!”

“나가면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요새 나도 작곡엔 고민이 좀 많아서.”

방송 출연이야 기뻤지만, 우형은 얼마 전에 엔피버와 작업하면서 조금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

엔피버 동생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힘을 주는 곡이라며 너무 좋다고 해 주긴 했지만, 자신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힌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전보다도 더 열심히 작곡 공부를 하는 중인데, 그런 자신이 싱어송라이터의 꿈을 가진 학생에게 올바른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잘하겠지.”

“위로가 되게 성의 없다?”

해랑은 적당히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우형에겐 별로 관심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 핸드폰 어딨어? 어딘가 있겠지. 이런 느낌.

물론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겠지만 자신감이 떨어지는 지금은 좀 더 구체적인 격려가 필요했다.

예전과 다르게 요새는 지나가다가도 한 번씩 칭찬을 받곤 해서 그런지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뷰이라이브할 땐 혼자서 몇십 분이고 말 잘하잖아. 간단한 상담도 해 주고 그러…….”

“악!”

우형의 눈초리에 해랑이 좀 더 긴 대답을 내놓으려는데, 느닷없이 준해의 방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거실에 모여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재민이 먼저 벌떡 일어나 준해의 방 문을 열었다.

“왜 그래? 벌레 나왔어?”

“아니…….”

벌레가 나왔다면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텐데 지금 준해는 가만히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베개에 파묻은 얼굴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강 신청 망했어.”

방학이 끝나가는 지금. 이미 예전에 1차 수강 신청은 끝났고 지금은 2차 수강 신청 기간이었다.

꼭 채워야 할 전공 학점이 있어서 눈에 불을 켜고 임했는데.

“최대한 화, 목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는데!”

평일 음악방송 스케줄은 월, 수, 금이었다.

2학기 중에 활동이 한 번 더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화, 목요일 수업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4학년이다 보니 선택할 만한 전공 강의 수가 적어서, 한두 개만 놓쳐도 2학기 계획이 완전히 엉망이 될 판이었다.

마지막 수강 신청에 온 정신을 집중했으나 맞이한 결과는 처참했다.

‘아, 진짜 그걸 놓치면 어떡하냐!’

노리던 강의에 빈자리가 생기기를 종일 지켜보다가 방금 겨우 한 자리 공석을 발견했다.

서둘러 클릭했으나 화면에 뜨는 것은 ‘정원 초과’ 알림.

겨우 발견한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수강정정 기간도 있지만 정원이 풀린다는 보장도 없고 워낙 선택지가 적어서 잘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재민은 자신이 나선다고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준해가 뭐래?”

“화목하지 못하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거실에서 다른 멤버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남겨진 준해는 침대에 엎어져 파닥거리며 이 답답한 마음을 분출해냈다.

‘교수님한테 사정 말씀드리고 정원에 추가로 넣어달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언젠가 음악방송에 나갈 예정인데 그때를 위해 강의를 몇 주 빠져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다른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때 더 빠져도 괜찮을까요.’라고?

준해는 이전까지 한 번도 그런 사정을 학과 교수님께 설명한 적이 없었다.

공백기가 길게 이어지기도 하는 상태에서 괜히 그룹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가 ‘지금 활동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라는 반응이 돌아오면 기분만 상하고 끝날 것 같아서.

다행히 바로 전 학기까진 무사히 넘어갔기에 이번에도 알아서 잘 해결하려고 했는데, 하필 졸업 학기에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사정을 봐주시는 교수님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파닥거리느라 힘을 뺀 준해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현실과 타협했다.

부모님에게 ‘혼자 힘으로 제대로 졸업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최선이 아니라 차선으로 미뤘던 선택지인데.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할 방법을 주인이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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