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이사님…….”
준해가 개인적으로 이사실에 찾아올 일은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찾아왔다.
활동과 시험 준비가 겹쳤을 때 봤던 것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
그는 조금 머뭇거리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그 취업계, 가능할까요?”
“무슨 일 있어?”
“수강 신청이 망했어요…….”
너무나 학생다운 발언에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찾아왔을 텐데 내가 앞에서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거야 가능하지. 2학기가 언제까지지?”
“아마 기말고사가 12월 셋째 주일 테니까. 12월 말이요.”
“그럼 대충 올해까진 인턴으로 재직 상태라고 해 두면 되겠네.”
이전에 준해와 대화를 나눈 후, 혹시 몰라서 이런 경우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미리 알아봐 둔 게 있었다.
‘물론 내가 알아본 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정도고 자세한 건 최 비서가 준비하겠지만.’
회사엔 각 회사만의 규칙이 있으니, 그런 부분은 이곳에서 오래 일해 온 최 비서에게 맡기는 게 빨랐다.
나는 내선 전화로 최 비서에게 일전에 말했던 근로계약서 준비가 가능한지 물었고, 바로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자세한 대화나 나눠 보자고 그와 같이 접객용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저 인턴으로 넣어주시는 거면 어느 팀으로 들어가요?”
“음. 매니지먼트 팀?”
준해는 내 대답을 듣고 조금 생각하더니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이것저것 요구할 상황은 아니지만…… 매니지먼트 팀 말고 프로듀스 팀에 넣어 주시면 안 될까요?”
“왜?”
“매니지먼트 팀이면 모노크롬 팀에 넣어주시는 거잖아요.”
“당연하지.”
회사에 연예인이라곤 모노크롬 아니면 배우인데, 모노크롬 멤버를 배우 팀 인턴 매니저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당연한 것을 왜 묻는지 알 수가 없어서 대답을 기다렸다.
“형들이 심하게 부려먹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건…….”
참 재밌겠는걸.
멤버들은 원래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고 매니저의 손을 많이 타지 않는다.
‘그래서 몇 년이나 현장 매니저 한 명만 두고 버텼지…….’
그러나 막내가 매니저로 들어온다면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았다.
준해는 매니저로 들어간 자신의 미래 모습을 떠올렸는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이미 자체 컨텐츠 계획이 하나 완성되어갔다.
흡족해하는 내 표정을 본 걸까. 준해는 자신이 매니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를 서둘러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24시간 붙어 있는데 하루 내내 부려 먹히면 그건 그냥 노예…….”
“괜찮아. 근로 시간은 정해져 있거든. 다른 직원들이랑 똑같이 하루 8시간. 평일 9시부터 6시까지.”
마침 서류 준비가 완료됐는지 이사실로 들어온 최 비서가 테이블에 근로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서류에는 내 말대로 적혀있었다. 9시부터 18시까지로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날에 멤버들이 회사에 나와 있는 것도 대개 이 시간이었다.
원래 매니저는 담당 연예인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기에 이렇게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종일 멤버들 수발을 들게 하면 업무가 과다할 테니 이렇게라도 정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프로듀스 팀은…… 제가 못 들어갈까요?”
준해는 웬만하면 다른 쪽이 좋은지 열심히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네가 프로듀스 팀에 들어가면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사 쓰게 하고 일주일에 하나씩 앨범 기획서 만들어 오게 할 건데.”
“…….”
프로듀스 팀도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준해는 이번에도 앨범 설정을 짜는 데 도움이 많이 되지 않았는가. 앨범 기획, 그리고 작사 쪽으로 밀어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주 40시간 앉아서 아이디어를 쥐어짜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는지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목표를 돌렸다.
“혹시 비서 팀은……. 저 학교에서 마케팅도 배우는…….”
비서 팀과 마케팅은 딱히 관계없지만, 아마도 내 직속으로는 사람이 필요 없냐는 뜻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던 준해는 내 옆에 시선을 두더니 말을 점점 흐렸다.
그리고 나를 한번 보더니.
“저 그냥 매니지먼트 팀으로 갈게요.”
뭐야?
준해의 시선이 닿았던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의 최 비서가 있었다.
‘나 몰래 ‘도망쳐’ 사인 보내고 시치미 떼는 건 아니겠지.’
수상한 기미가 없는지 흘긋거리자 눈을 마주친 최 비서가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
뭔가 속는 느낌인데……. 아무튼.
어차피 일손이 부족해서 충원하는 게 아니라 인턴 신분이니 업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일하는지 안 하는지 매시간 체크할 것도 아니고, 보여주기식 취업엔 멤버들과 항상 붙어있는 매니저 위치가 딱이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모르겠지만 준해도 매니지먼트 팀에 들어가는 것으로 납득했다면 이야기는 빨랐다.
“자. 여기 사인해.”
“계, 계약서는 여러 번 읽어봐야 하지 않나요?!”
“물론 그렇지. 그런데 봐. 문제 될 만한 거 하나도 없다니까.”
이미 내 마음은 새로운 자체 컨텐츠로 가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 놓치고 싶지 않아.
그가 차라리 앨범 기획을 하겠다며 마음을 바꾸기 전에 사인을 종용했다.
내가 대충 손으로 훑으며 확인시켜주자 그는 제대로 확인했는지는 몰라도 등 떠밀리듯이 근로계약서에 사인했다.
조금 날치기 계약 같지만 준해도 필요해서 요구한 거고. 상부상조한 거지.
“한 부는 회사가 갖고, 한 부는 줄 테니까 학교에 가서 제출해.”
“네. 감사합니다.”
준해는 조금 찝찝한 얼굴이었으나 회사에서 협조해준 거니 감사 인사는 빼놓지 않았다.
“그럼 멤버들한테 인사하러 가자.”
“인사요?! 인사를 왜요?”
“왜긴. 새로운 매니저잖아.”
“으…….”
이제는 알았겠지. 나도 따지자면 멤버들과 한통속이라는 걸.
준해를 데리고 멤버들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이거 재민이 데려왔을 때랑 비슷한 장면 같은데.’
다른 점은 재민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걸어왔고 준해는 끌려오는 것 같다는 점?
조금 죄책감도 드는 것 같았지만 좋아할 컬러즈의 반응을 상상하며 상쾌하게 연습실 문을 열었다.
“다들 주목! 여긴 매니지먼트 팀 인턴 현준해 군. 기간제 모노크롬 매니저로 일할 거야.”
“예?”
“매니저요? 갑자기요?”
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깜짝 놀란 멤버들이 동시에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사님이 마지막 학기 취업계 내게 도와주신다고 해서…….”
제 발로 이 인턴 자리에 걸어 들어온 준해가 나 대신 설명에 나섰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대충 파악한 멤버들이 박장대소했다.
“아하핰! 그럼 언제까지 매니저예요?”
“준해 2학기 끝날 때? 대충 연말까지.”
“와. 잘됐다. 나 지금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우리 인턴이 사다주라.”
“나 일하는 건 다음 주부터거든?!”
준해의 말 그대로였다. 곧바로 부려먹을 생각부터 하는 멤버들.
갑자기 거만하게 앉아서 심부름을 시키는 한이에게 준해는 버럭 성을 냈다.
“아. 아쉽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예요?”
“응. 기간은 준해 2학기랑 똑같다고 보면 돼.”
“으으. 저 그냥 프로듀스 팀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안 돼. 이미 사인했잖아.”
내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자 준해는 울상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줘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을.
예의상 딱하다는 표정으로 준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멤버들이 내 표정을 봤는지 작게 수군거렸다.
“주인 님이 꾸미신 건가 봐.”
“우리도 조심하자.”
……안쓰러워하는 시선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은 웃고 있었나.
내가 멤버들을 새우잡이 배에 넘길 것도 아닌데 왜 팔려가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거야.
“아무튼 준해가 매니저로 활약하는 동안 비하인드처럼 촬영을 진행하려고 하거든.”
난 새로운 컨텐츠에 대해 멤버들에게 설명하고 모노크롬 전담팀 직원들에게도 알려주기 위해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모노크롬 공식 SNS 계정에 사진이 하나 올라왔다.
[저희 새로운 매니저를 소개합니다. #모노크롬 #신입매니저 #현매니저]
방금 그 연습실을 배경으로 멤버들은 기분 좋아 보이고 준해만 뚱하게 찍힌 단체 사진.
다음 떡밥은 언제 뜰까 기다리고 있던 컬러즈는 갑자기 올라온 예고에 들썩였다.
[뭐야?? 뭐 촬영하는거야?]
[신입매니저님 표정이 왜 그래욬ㅋㅋㅋㅋㅋ]
[모노크롬매니저.. 꿈의 직장이다 부럽다]
[준해 취업한거야? 축하해♡ 취업 후기 들려주세요]
[매니저님 왠지 운전은 못하실것같은데.. 본격 가수가 운전하고 매니저가 얻어타는 얼렁뚱땅 매니저 생활 기대해도 되나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해가 취업했다는 소식에 축하하는 컬러즈들.
그들은 컨텐츠가 올라오기 전부터 앞으로 펼쳐질 시추에이션을 상상하며 자급자족하기 시작했다.
***
라솔을 통해 얻어낸 우형의 방송 섭외는 무사히 사전 미팅까지 마치고 확정이 되었다.
마침 최근 모노크롬이 인지도가 조금 오른 덕분에 그쪽에서도 수락했다고 한다.
방송의 메인은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는 학생이다 보니 나이 차가 크지 않는 젊은 게스트가 있는 게 좋았고, 비주얼 괜찮은 아이돌 멤버가 있으면 보기에도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래도 뒤늦게 자리를 채우는 역할로 들어가니 비중이 크지는 않은 듯했다.
방송을 위해 미리 준비할 것은 작업 장비를 소개하는 셀프캠 영상 정도.
‘어차피 뷰이라이브로 몇 번이나 공개된 작업실이어서 거리낄 것도 없고.’
이건 우형이 촬영한 것을 작가에게 보내두면 끝.
촬영 시 각 게스트가 촬영한 영상들을 보며 대화도 나누고 정보도 공유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형의 영상이 본방송에 편집되지 않고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편집되더라도 학생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본분은 다한 거니까.
우리도 TV에 얼굴이나 한 번 더 비치자고 나가는 거지, 이 방송을 통해서 엄청난 효과를 보려는 건 아니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갔던 예능들이 생각보다 영향이 커서 괜히 눈만 높아지려는 것 같아.’
이번 방송은 충격적인 게스트 구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돌이 단체로 출연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큼의 화제를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기회로 얻을 것은 확실히 있었다.
방송에 출연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우형도 다른 싱어송라이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곡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고.
그것뿐만 아니라 라솔과 미리 이야기해 둔 것도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그럼 저희가 너무 죄송해서.]
우형을 대신 내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내 제안에 라솔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라솔은 자신이 바쁘기 때문인지 우리도 비슷하게 바쁘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한테도 손해 될 것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기회였기에 덥석 문 것이었는데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내 쪽이 머쓱해졌다.
그러나 일단 진솔한 대화를 나눈 사이는 사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그렇게 생각하실 것까지야 없는데……. 그러면 혹시 그 작곡가분이랑 작업할 때 저희 멤버가 견학할 수 있을까요?]
나는 방송 기회에 다른 기회까지 얹어 협상을 성사시켰다.
‘뉴마에서 송 피디님한테만 배워왔으니까 좀 다른 작곡 스타일도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직접 도움은 못 줘도 이런 식으로 기회는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이전부터 예정되었던 일과 새로 생기는 일이 겹쳐 동시다발로 일이 진행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다음은 이거.’
나는 책상에 놓인 얇은 책자 몇 권을 눈으로 훑었다.
마치 활동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 활동 마지막 주부터 배우 팀에서 웹드라마 대본 몇 개가 건너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