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활동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다른 스케줄. 해랑의 피처링 작업도 <이리> 활동 종료를 맞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우형이 엔피버의 소속사인 온세계 엔터테인먼트로 직접 찾아갔던 것과 달리, 라솔은 뉴마에서 작업실과 녹음실도 제공하겠다고 하니 이쪽으로 찾아왔다.
‘회사가 그나마 공간은 여유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리스와 담당 인력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휑해졌단 표현이 더 맞으려나.
지금은 연습생들도 배우 쪽으로 몰려 있어서 지금 우리만 사용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었다.
배우들은 연습실만 사용하지, 작업실과 녹음실을 사용하진 않으니까.
‘그래서 가끔 배우 소속사에 꼽사리 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배우 팀과 아티스트 팀이 경쟁 중인 건 아니지만, 회사 내에서 모노크롬 팀이 그리 힘이 있는 건 아니라 괜히 그런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라솔이 가끔 뉴마에 와 있으니 직원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쁜 종류의 수군거림이 아니라 음악대상이 몸소 행차하셨다는 게 신기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직원들 눈에도 우리가 우리 영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게 보이겠지.’
게다가 멤버들이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며 꾸벅꾸벅 인사하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좀 아티스트 소속사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라솔이 우리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소속 아티스트가 많은 회사에서 일하면 이런 느낌이겠거니 하고 간접 체험한 기분.
그렇다고 그녀가 매일 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와 다르게 바쁜 사람이었으니까.
‘역시 음악대상은 뭔가 좀 다른가 봐.’
방송국 등에서 계속 러브콜을 받으며 바쁘게 여기저기 오가는 걸 보면 역시 음악대상다웠다.
혹시 그녀도 대상을 받아 인지도가 10000이 넘은 상태 아닐까? 그녀가 뉴마와 계약하지 않는 이상 내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라솔을 볼 때마다 저런 모습이 모노크롬의 미래의 모습일까 상상하곤 했다.
지금의 모노크롬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톱스타라서, 과연 이 격차를 1년 반 만에 줄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톱스타의 삶이란 과연 어떤 걸까. 내겐 너무나도 미지의 세계라 환상을 부풀리고 있었는데 내가 목격한 건 의외로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하면. 하아. 내가 다시 얘기해 볼게.”
라솔과 해랑은 시간을 미리 정하고 작업했기에, 그녀가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서 배웅이라도 하려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런데 라솔은 복도에 나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통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 내려와 놓고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기에도 민망해서 나는 슬쩍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이사님. 그냥 회사에 일이 좀.”
처음엔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도 조금 어려웠는데, 요즘은 몇 번 봤다고 약간 친근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온 것을 보자 라솔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그러나 표정을 보니 뭔가 아직도 안 풀린 상태인 듯했다.
“제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을까요?”
“이사님이요?”
“실무는 담당자가 맡고, 전 원래 회사 돌아다니면서 오지랖 부리는 게 일이라.”
라솔은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어깨에 힘을 빼고 풋 웃었지만 내 말은 사실이었다.
앨범을 세 번이나 내는 동안 직원들도 정상화된 업무에 적응했고 다들 알아서 잘하니까 지금은 내가 크게 나설 일이 없었다. 위치를 이용해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 빼면.
그래서 요즘은 그냥 회사를 돌아다니며 고민 상담 역을 맡는 게 주 업무처럼 느껴졌다.
상담이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자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라솔은 말할지 말지 조금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가수가 아니라 엔터 업계인으로서 조금 조언을 구할 수 있을까요?”
***
‘……그저 이야기만 들어주려 했을 뿐인데.’
난 라솔과 회의실에 단둘이 앉았다.
설마 엔터 업계 종사자로서 대화를 요청해올 줄 몰랐던지라 긴장했다.
그녀는 나를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소속사의 이사로 보고 있겠지만 업계인으로선 그냥 초짜일 뿐이어서.
그래도 내가 갑자기 여기서 ‘전 반년 전만 해도 게임이나 하던 백수였고 그냥 낙하산으로 들어온 거라 업계 사정은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모든 사정을 밝힐 순 없었다.
믿고 피처링도 제안해 줬을 텐데 내가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뉴마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깨지겠는가.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대충 얼버무릴 수 있을까 걱정하며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희가 규모가 작은 회사라 저 포함해서 가수가 세 명이 있거든요.”
“네.”
조언은 모르겠고 듣기라도 잘하자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들었다.
이건 아는 이야기였으니 잘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한 명은 오랫동안 교류했던 후배고, 한 명은 제가 스카우트해 온 애인데. 후자가 주로 제 앨범에 작곡가로 참여하고 있어요.”
이건 모르는 얘기였기에 눈만 끔뻑였다.
그나저나 라솔의 보컬 실력이 뛰어나니까 대상까지 받은 거지만, 이것도 ‘좋은 노래’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이야기.
그런 곡들을 만들어낸 사람이면 굉장한 능력자 아닐까?
라솔, 친한 후배, 그리고 뛰어난 작곡가.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 될 만한 내용이 없어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얘를 싱어송라이터로 키우고 싶은데 외부 활동엔 영 의욕을 안 보이네요. 오늘 통화하면서 입씨름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싱어송라이터로 방송 섭외가 들어왔는데 갑자기 나가기 힘들 것 같다고 해서.”
들어오는 섭외를 거부하다니 그런 안타까운 일이.
그만큼 괜찮은 방송이라 라솔이 적극적으로 출연을 권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항상 방송 섭외를 기다리는 나로서 이건 흥미로운 이야기였기에 자세히 듣고 싶었다.
“방송에 나가기 힘들다는 이유는 뭔가요?”
“하아. 사실 딱히 이유가 없어요. 성격 때문인데. 뭐라고 하지. 은둔형…… 외톨이까진 아닌데.”
“집돌이?”
“귀엽게 말하자면 그것도 맞겠네요.”
내 표현에 라솔은 귀엽다며 웃었지만 그 사람을 떠올리면 귀여운 마음이 사라지는지 이내 표정을 싹 굳혔다.
‘무, 무서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정색할 정도로 꽤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걸까.
16년 차 대선배 가수라는 위치에 올라설 때까지 연예계에서 굴러온 그녀의 포스에 잠시 움츠러들었다.
“원래 이번 작업 할 때도 같이 올 예정이었는데 자꾸 이런저런 변명 대면서 피해서. 골칫거리예요, 요즘.”
“으음…….”
라솔과 협업하는 작곡가가 같이 작업할 예정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간 한 번도 못 보긴 했다.
해외 작곡가의 곡을 사 오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국내 작곡가들은 많이들 직접 찾아와 같이 작업하는 편이었다.
물론 편곡하면서 곡의 분위기가 바뀌기도 하고 전부 작곡가의 의도대로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 곡의 베이스가 되는 부분은 작곡가가 가장 잘 알 테니까.
모노크롬의 작곡가인 우형이 항상 멤버들의 녹음을 지켜보고, 한이의 OST 녹음 때도 작곡가가 직접 디렉팅을 맡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번에 우형도 엔피버와 작업하며 직접 온세계 엔터로 찾아가지 않았던가.
“이 부분은 해랑 후배도 많이 양해해 주는 것 같아서 제가 면목이 없네요.”
“그건……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될 거예요.”
피처링 건은 송 피디에게 맡겨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해랑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배려해서 별말을 안 하는 게 아니었다.
‘낯가림이 심하니까 새로운 사람은 많이 안 만나는 게 편해서 그런 거겠지.’
어쩌다 보니 그 작곡가와 이해관계가 맞았다는 얘기다.
곡 작업에 앞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해랑도 만만찮게 폐쇄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라솔이 모르는 걸 보면, 선배님 앞이라서 많이 티는 안 냈나 보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의 노력이 느껴지는 듯해서 괜히 또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작곡은 하는데 외부에 노출되긴 싫어한다는 얘기인가.’
모노크롬은 계속 아이돌로서 활동하고 싶어 했으니 이런 경우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해랑이 좀 비슷한가 싶지만, 해랑도 모노크롬 멤버로서는 방송에 큰 거리낌이 없지 않은가.
나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분을 작곡가가 아니라 싱어송라이터로 키우시려는 이유는 따로 있으신 건가요……?”
“처음부터 싱어송라이터로 스카우트했거든요. 제가 심사를 맡았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만나서.”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혹시 <스타를 찾다>인가요?”
“맞아요. 아시네요.”
잠시 답답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정색했던 그녀의 얼굴에 상냥한 웃음이 돌아왔다.
내가 이걸 아는 이유는 공부해서가 아니라, 윤환이 뉴마에 연습생으로 들어오기 전에 나왔던 방송이 바로 이 <스타를 찾다>였기 때문이다.
시즌제였으니 그녀가 윤환이 나온 시즌에서도 심사위원을 맡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유일하게 아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거라 궁금해서 물은 건데.’
업계인으로서 당연하게 모니터링해서 아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라솔은 자신이 나온 방송을 내가 잘 시청했단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고. 얻어걸린 반응에 나는 대충 웃어넘겼다.
“예선에서 자작곡을 들고 와서 꽤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본선은 포기하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제작진이 열심히 설득했는데 워낙 완고해서 결국 방송에서도 다 편집되어 버렸죠.”
“저런…….”
심사위원으로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줬는데 본선 진출자 명단에 없어서 알아보니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편집이라는 싸늘한 단어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딱히 다른 소속사와 계약하거나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어떻게 잘 말해서 연락처를 알아냈어요.”
그의 재능을 알아본 라솔이 가수가 될 생각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연락 달라고 했는데 계속 연락이 없었다고.
결국 라솔이 회사를 세웠을 때 직접 연락해서 스카우트까지 했다는 얘기였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작곡가가 어떤 타입인지 대충 감이 왔다.
‘그건가. 회피형 인간.’
라솔은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이 싫은 듯하지만 나는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지금이야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멘탈이 약할 땐 확실히 회피형에 가까우니까.
회피에는 딱히 거창한 이유가 없다. 그냥 모든 일이 무겁게 느껴져서 문득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거란 말이지. 회피형 인간인데 그냥 두기에는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는 거.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하나.’
잘 감이 오지 않아 나는 이 상황을 마이 엔터로 치환해 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은 업계 종사자로 조금 부족해도, 마이 엔터를 플레이할 땐 철저하게 경영자의 위치에 있었으니까.
마이 엔터에서 연습생들의 능력치는 보통 2~3 정도.
그런데 그 사이에 작곡 레벨 7에 예능 레벨이 1, 그것도 경험치가 아예 없는 수준인 극단적인 연습생이 있다면.
난 그를 데뷔조에 넣었을까?
‘……예능 레벨이야 기르고자 하면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포기하기엔 작곡 레벨이 너무 아까웠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라솔의 마음도 이해가 되어 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