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살수(殺手) 엽혼(葉魂)
돈을 받고 다른 이의 생명을 끊어 주는 직업이 강호에는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들을 살수(殺手)라고 부른다.
살수에겐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암살 대상(對象)을 죽이는 것이고, 둘째는 암살 현장에서 무사히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살수의 임무는 살인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두 번째가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면 청부금이 아무리 많다 한들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
때문에 모든 살수들은 청부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능력(能力)에 맞는 청부를 잘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수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인 것이다.
엽혼도 물론 청부 대상을 신중히 선택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밖
에서 보면 초라한 오두막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의외로 훈훈함을 느낄 수 있는 집
이었다. 이런 겨울에도 방안에서 훈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잘 지어진 집이
란 뜻이기도 했다.
방안 구석엔 화로가 온기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맞은편 벽에 놓인 침상(寢狀) 위에
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얼굴, 핏기없는 입술. 한눈에 병(病)이 깊음을 알 수 있
으리라. 그러나 이 소년도 활달하게 뛰어 놀며 꿈을 키워 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
리고 그 꿈을 다시 꾸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여기에 있다.
병색(病色)이 완연한 소년의 맞은편 창가에 두 눈 가득 고뇌(苦惱)의 빛을 담고 서
있는 사내!
엽혼(葉魂)이었다.
손에 쥔 푸른색의 서찰과 침상에 누운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던 엽혼은 속으로 동
생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평아(枰兒)!'
어릴 때는 남들보다 훨씬 건강했던 자신의 동생. 그가 지금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는 몸이 되어
여기 누워 있었다.
그의 동생은 영약과 특별한 치료가 없다면, 이제 일 년을 넘길 수가 없었다. 절맥
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영약을 살 수 있는 돈은 황금 십만 냥! 살수업으로는 백년
이 지난다 하여도 만지기가 불가능한 돈이었다. 그러나……
엽혼은 서찰(書札)을 다시 펼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처음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천(天) 자. 그리고 밑으로 가득한
것은 암호(暗號)인 듯 알아볼 수 없는 표식들뿐이었다. 암호를 다시 한 번 해독해
본 엽혼은 나직이 신음했다. 천 자가 뜻하는 것은 암살 대상이 천자급(天字級)의
고수라는 것!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장문인이나, 그에 준하는 거대문파의 주인, 또
는 한 지역을 풍미하는 절대고수에게 붙여지는 등급인 것이다. 이런 고수들은 대
개 살수들의 청부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들을 살해한다는 것도 지난(至難)한 일이
지만, 설령 운이 좋아 살업(殺業)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생명을 유지한 채 현장을
벗어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 방파의 주인 된 자에 대한 청부라면 더욱 그러했다. 천자급(天字級) 고수
에 대한 청부!
다른 살수들이라면, 또한 엽혼이라도 평소였다면 일고(一考)의 가치도 두지 않고
거절해야 할 청부(請負)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러한 청부는 어려운 만큼 돈이 되는 것이다.
황금 십만 냥! 동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돈!
한참 동안을 엽혼은 그렇게 서 있었다.
어제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던 엽평은 약 기운에 취해 새벽이 되도록 깨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엽혼은 어릴 때 너무나 총명하여 항상 자신을 제치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평아의 활달했던 모습을 기억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이 얼굴, 이 약해진 팔뚝 어디에 과거의 기억(記憶)이 남아 있단 말인가!
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엽혼의 눈빛이 점점 강한 빛을 띠어 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몸을 돌리는 엽혼의 눈빛은 굳은 결심으로 충만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하늘에서는 눈이 날리고 있었다.
새벽 눈!
고개를 들어 바라보던 엽혼이 손을 들어올리자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일어나며 푸
른빛 서찰이 한줌의 재로 화했다.
강한 내공(內功)!
엽혼은 단순한 살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청부는……
아마도 엽혼, 그는 이 일로 인해 살아남지 못할지 모른다. 항상 따뜻한 눈으로 자
신을 바라보았던 사부(師父)의 모습이 흐릿한 하늘 가에서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아버지!
지금은 저 먼 하늘에 계신, 자신과 엽평의 아버지여! 만약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
면……
"저희를 보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