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화선(花仙) (4/32)

3. 화선(花仙) 

조삼은 지금 비참했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원단(元旦)의  기분에 모두가 들떠 있는  시기에 자신은 주루

(酒樓)의 초라한 점소이 신세라니…… 

하지만 마음속이야 어떠하건 조삼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실 줄을 몰랐다. 술과 여

자를 파는 곳, 청루(靑樓)의 점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 아니겠는가!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이 대인."

형식적인 인사와 웃음을 흘리던 조삼의 목이  처음으로 마음껏 굽어졌다. 이 대인

(大人)이라 불린 사람! 

코 아래 기른 수염이 단아해 보이는  사십대 초반의 사내로서, 옷차림새는 영락없

는 상인이었다. 

조삼의 목이 유달리 많이 굽어지는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늘 수고가 많구나. 자, 나중에 요기라도 하거라."

늘상 빌리는 이층의 끝 방으로 이 대인을  안내해 준 조삼에게, 이 대인이 요기나 

하라며 던진 은자는 줄잡아도 열 냥 이상은 되어 보인다. 

조삼의 한 달 수입에 해당하는 돈! 

돈 앞에서는 허리가 더욱 유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조삼이었다.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조금만 앉아 계시면 제가 곧 화선 낭자를 모셔 오겠습니다

요."

화선(花仙)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꽃의 요정(妖精)처럼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그녀를 보고 참을 수  없는 욕정(欲情)을 느끼게 되리라.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 화선을 보고 있는 이  대인의 눈빛은 어두웠으므로. 말을  먼저 시작한 것은 

화선이었다.

"이번엔 오시지 않을 줄 알았는데……"

"……"

"응낙하신 건가요?"

"……조건이 둘 있소."

"말씀하시지요."

"첫째, 모든 금액을 선불로 해달라는 것이오."

흠칫하던 화선의 얼굴이 아래로 숙여졌다. 

생각에 잠긴 듯하지만 기실은 얼굴을 숙인 채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고 있음을 이 

대인, 아니, 엽혼은 느낄 수 있었다. 

잠깐 귀가 움직이는 것 같더니, 이윽고 화선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이십만 냥, 전액 선불로 하겠어요."

이십만 냥!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그러나 천자급 고수에 대한 청부금으로는 많은 것도 아

니었다. 게다가 청부업에서는 전액을 선불(先拂)로 주지  않는다. 돈을 받은 뒤 달

아나 버릴 수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선불을 주는 입장에서는 그 누구라도  안전 장치를 원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이 돈을 먼저 받은 뒤 달아나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장하지

요?"

물론 보장이 없었다. 엽혼이 지금 필요한 것은 돈이지, 목숨이 아니므로.

이때까지 적지 않은 일을 같이했던 엽혼과 화선이지만, 돈  문제만은 달랐다. 돈이 

화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까닭이었다.

화선이 말을 마치며 품에서 꺼낸 것은 검은빛이 감도는 환약(丸藥)이었다. "백일소

혼단(百日消魂丹)은 복용 후 석 달간은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석 달 열

흘이 지나 일단 약효가 발휘되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죠."

백일소혼단. 검은색의 환약 하나! 

엽혼은 소혼단을 보며 동생 엽평을  떠올렸다. 동생이 매일 먹던 그  많은 환약들. 

그리고 떠오른 것은 동생을 진맥했던 노의원의 주름 잡힌 얼굴이었다.

─`동생을 치유한다는 것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가능함을 말하던 노의원. 동생의 절맥(絶脈)을 치유하는 

것과 이 소혼단의 해약을 만드는 것 중 어느것이 더 쉬울까? 또한 이번의 청부(請

負)를 성공하는 것과는? 

어차피 모두가 어려운 일, 특히  청부의 완수는 더 어려웠다. 운이  좋아 성공한다 

하더라도, 살아서 그곳을 빠져 나오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차피 돈과, 아니, 자신의  목숨과 엽평의 목숨을 바꾸기로  한 청부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이 먹지 않는다면 돈도 받지 못할 것이다. 돈을 받지 못한다면 동생의 생명은 

어떻게 구할 것인가? 

생각은 길었으되, 동작은 간단했다.

엽혼은 소혼단을 삼켰다. 

"좋아요. 청부금은 은하전장에 이엽의 이름으로 예치시키겠어요."

이엽(李葉)은 바로 엽혼이 분한 이 대인의 이름이다. 이로써 청부는 정식으로 접수

된 것이다. 

엽혼은 품에서 하나의 서찰을 꺼내어 화선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을 조사해 주시오."

화선은 서찰을 펴보았다. 

"열흘 후에 다시 들르세요."

그러나 엽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닷새 후. 더 이상의 시간은 안 되오."

"이것 봐요. 닷새는 너무……"

"이게 바로 두 번째 조건이오. 불가능하다면 청부는 받아들일 수가 없소."

화선의 말이 옳았다. 닷새란 기간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엽혼에게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은 상황을 이끌어 내야만  했던 것이

다.

화선이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아요. 닷새 후."

"안녕히 가십시오, 대인. 또 들르십시오."

조삼의 환송(歡送)을 뒤로한 채 소하루( `霞樓)를 나오는 엽혼의 마음은 무거웠다. 

엽혼이 살수업을 시작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동생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엽혼에게, 어떻게 알았는지 소하루의 

화선이 손을 뻗었다.

화선(花仙)!

이 아름다운 여인의 또 다른  얼굴은 바로 살인 청부의 중개인(仲介人)이었다.  삼 

년간 엽혼은 서른아홉 차례의 청부를  완벽히 수행했다. 언제나 절차는  동일했다. 

화선이 서찰을 보내 청부 대상을 알려 주면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의사(意思)

를 물어 오면, 엽혼은 이엽의 신분으로 소하루에 나타나 화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면 청부는 받아들여진 것이 되고 대금은 언제나 은하전장에 맡겨졌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선불이란 조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큰 금액인 탓이었을까? 화선이 다른 사

람의 지시를 받다니! 

화선이 하고 있는 살인 청부 중개업에는 배후가  있는 것일까? 또한, 이런 거액의 

청부를 한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엽

혼으로서는 어느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엽혼은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많은 

의문은 살수업에 있어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남은 며칠의 기간 동안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청부의 배후

에 관해서는 앞으로 생각할 시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금 이십만 냥은 매

우 큰 돈이었다.

엽평의 절맥을 고치는 데 십만 냥이  든다 해도 남은 십만 냥이면  엽평이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문제는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고뇌하던 엽혼은 문득 옛 친구 

하나를 생각해 내고는 미소(微笑)를 지었다.  어린 시절, 아직은 행복했었던  무렵, 

수업(修業)을 같이했던 친구!

'그라면 평아도 믿고 따를 것이다.'

엽혼은 서둘러 그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 1 장 보보만재(步步萬財) 

1

낙양은 큰 도시이다. 사람들도 많다. 

따라서 다툼도 많았다. 

다툼의 결과는 항상 약자들이 손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

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있었다. 

북문 밖에 있는 관운장의 사당! 

죽어 복마대제(伏魔大帝)란 신위(神位)에 오른 관공(關公)의 영험함을 빌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당 옆에는 조그만 숲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서 걷다  보면, 나무로 엉성하게 지어진 정자  하나가 나온다. 

이름하여 '선유정(仙遊亭)'. 

신선(神仙)이 노는 정자란 뜻을 가진 이 정자에는 신선이 노닐지 않았다.  신선 대

신 거지 꼴의 청년이 항상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이 청년이었

다.

진소백(鎭小栢)!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

"정말 전 억울합니다."

말하고 있는 자(者)는 갓 이십을 넘긴 듯한, 순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었다. 하지

만 어딘가에서 몹시 맞은 듯, 얼굴 곳곳에 시퍼런 멍 자국이  있었다. 청년이 말하

는 억울함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청년은 삼 년 전, 삼 년이 지나면 은자 백 냥을 받기로 하고 장흥(張興)의 집에 하

인으로 들어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오늘 돈을 요구했는데……

장흥은 약속한 돈을 주기는커녕, 삼 년간 먹고  잔 돈이 백 냥을 넘어선다며 빚을 

갚으라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나섰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따지고 들었다가, 매만 맞고 쫓겨난 청년은 진소백

을 찾아온 것이었다.

"거, 듣고 보니…… 정말  억울하겠구려. 좋소! 그 일,  접수하겠소. 하지만 규칙은 

알고 있겠지요?"

진소백의 직업은 일종의 해결사였다.

남의 일을 대신 해결해 주고서, 약간의 돈을 대가로 받았다. 그가  받는 액수는 항

상 정해져 있었다.

의뢰인의 전재산의 반. 그리고 이런 일은 성격상 외상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하, 하지만 제가 지금 가진 돈이 없어서……"

"이런! 그럼 곤란한데…… 만일 외상이라면 값이 두 배로 뛰는 게 규칙이라서……

"

진소백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 제가 만일 백 냥을 받게 되면  그 돈 모두를 드리겠으니…… 제발 제 억울한 

마음이라도 풀어 주십시오."

청년의 말에 진소백의 눈이 번쩍 커졌다. 

두 곱 장사가 아닌가!

"정말이오? 그럼, 볼 것 없지. 당장 갑시다."

돈 문제가 해결되자, 힘이 난 듯  휘적휘적 걸어가는 진소백의 뒤를 청년 안복(雁

福)은 힘없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장흥은 낙양에서 제법 알아주는 부자였다. 

가까운 친척이 꽤 괜찮은 벼슬 자리에 앉아  있는 데다가, 무림과도 끈이 닿아 있

어 제법 많은 무인들이 식객(食客)으로 머물고 있었다. 

목숨보다 돈을 아낀다는 장흥이 무림인들에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이유는  단 하

나. 그들은 만에 하나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면 보호해 줄 힘을 갖고 있는 자

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장흥은 자신이 그토록 믿어 오던 무림인 식객들이  얼마나 약한 자들

인지를 알게 되었다.

폐의청년! 누더기 옷을 걸친 청년 하나가 장흥의 장원(莊園) 앞에 서 있던 것은 아

침 나절부터였다. 

문제는 청년이 든 깃발에 써 있는 글이었다. 

탐재귀(貪財鬼) 장흥(張興)! 

깃발에 쓰인, 장흥이 재물을 탐하는 귀신이란  글귀는 누가 보아도 시비를 걸자는 

뜻이 확연했다. 

장흥은 노발대발했고, 당연스레  식객당의 무사들이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당연하게도 장흥은 시비를 건 젊은 놈이 박살이 나는 모습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

인데…… 

그런데 웬걸. 도진천(一刀震天) 도방(途防), 번천장(飜天掌)  구일소(邱一疎),  마조

참혼(魔釣斬魂) 육사독(陸射禿)…… 

가히 공포스런 별호를 주워섬기며 자신의 피땀 어린 돈을 축내 왔던 그 식충이 무

사들이 글쎄, 자신의 장원을 막고 선 폐의청년의  단 일 초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

동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청년은 단 한 걸음도 떼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식충이 같은 놈들!' 

장흥은 눈이 뒤집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청년, 정말 대단한 무공이 아닌가? 

'만일 이 청년을 우리 장원에 살게 한다면……!'

볼 것도 없었다. 

어중이떠중이 먹이느라 돈을 쓰느니, 이런 고수 한 명만 장원에 둔다면……

'누가 감히 나, 장흥을 업신여길 것인가?' 

마음을 굳힌 장흥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하, 저…… 대협(大俠). 이거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자, 이러시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드셔서 얘길 하십시다."

폐의청년`─`

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소백이다

그는 흘끗 장흥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로 내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좋소. 내, 들어가겠소. 하지만 명심할 것은 당신의 부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오."

"예, 예! 어서 들어가시지요."

장흥은 자신이 있었다. 일단 장원에 들어가면 자신의 부를 자랑한 뒤, 잘 구슬러서 

장원을 지키는 호위무사(護衛武士)로 쓰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겁나겠는가?

이때, 막 들어가려던 진소백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봐라, 너도 어서 따라오거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청년이 나타나 진소백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 청년이 안복임을 안 장흥의 얼굴은 구겨졌다. 실내는 넓었다. 

장흥이 주로 손님을 접대하는 이곳, 영웅청(英雄廳)에는 지금 진소백이  앉아 있었

다. 진소백의 옆에는 안복이 깃발을  하나 잡은 채로 서 있었고,  장흥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득했는데, 그윽한 

향기(香氣)를 풍기는 술마저 곁들여져 풍미(風味)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이미 많은 양을 먹고 마신 듯 여기저기  빈 그릇이 보였고, 탁자 주위에는 시중을 

드는 시녀도 여럿 서 있었다.

"자 한잔 더 드십시오."

장흥의 손짓에 따라 진소백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진소백의 잔에 술을  다시 채웠

다. 진소백은 몽롱한 눈으로 장흥을 바라보았다.

"당신 말이오. 내가 이걸 마시길 원하는 게요?"

또 이런 질문이었다. 장원에 들어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이렇게 물

었던 것이다.

'이거, 어디가 이상한 놈 아니야?' 

마음속에는 욕설이 넘치지만, 어디 밖으로 드러낼 수야 있겠는가? 다만 어조를 더

욱 공손히 하며 웃을 뿐이다. 

이미 진소백의 무공을 보았으므로.

"네. 대협께서는 마음껏 드십시오."

"좋소. 그럼, 내 마시지!"

한 잔을 더 비운 진소백의 눈이 점점 더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점잖게 앉아 있

더니, 차츰 자세가 풀어지며 주위의 시녀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던 것이다.

"아하, 너는 이름이 무어냐? 참 예쁘게 생겼구나."

술 시중을 들던 초록색 옷을 입은 시녀! 

수줍게 녹아(綠兒)라고 말하는 소녀는 나이가 열서넛인 듯 아직 어린 티가 역력했

다.

진소백이 시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자, 장흥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슨 내용이건 남자끼리의 이야기는 여자 얘기로 말을 꺼내는 것이 최고 아니겠는

가?

"대협,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원하신다면……"

진소백이 흐려진 눈으로 장흥을 돌아보았다.

"원한다면……?"

"오늘밤 대협을 시중들게 해드릴 수도……"

원래 장흥은 여자 얘기로 물꼬를  터서 진소백이 장원의 호위무사로  있는 문제를 

꺼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진소백으로 인해 잘리고  말았다. 진소백이 장흥의 말을 손을 

흔들어 자르며 녹아에게 물었던 것이다.

"녹아(綠兒), 네 나이가 지금 몇이냐?"

"열넷이옵니다."

'올커니! 나이 좋고. 물이 파릇파릇 오른 나이에다가 깨물면 톡 터질 것 같은 피부

니……'

장흥은 진소백이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서, 점잔을  빼며 녹아 얘기를 꺼내리라 생

각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윽고 진소백은 다시 장흥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장주에게는 딸이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올해 몇이오?"

"열다섯이 됩니다만."

'아니, 이 미친놈이 내 딸애한테 관심이 있는 거 아냐?'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가던 장흥의 머리는 진소백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폭갈!

갑자기 진소백이 폭갈한 것이다.

"에라, 이놈아! 그럼 네놈은 네 딸년도 딴 남자와 재우느냐?"

장흥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흥이 지금 진소백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나, 그 자신  엄연한 일장(一莊)의 

주인이었다.

언제 욕을 먹고 모욕을 받아 보았겠는가? 

갑작스런 욕설에 당황하고 모욕감(侮辱感)으로 얼굴마저 굳어진 장흥, 그런 장흥을 

보며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에이, 기분 잡쳤으니 이제 그만 돈이나 받고 일어나야겠다. 어서 내놓아라."

장흥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돈 말인가? 

오늘 처음 보는 놈이 잘 얻어먹고 나서 돈을 달라니.

장흥은 속이 끓어올라 당장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의 이성(理性)이 남아 있

었다.

호위무사도 믿을 수 없는 지금, 이런 불한당 놈에게 잘못 소리쳤다가 자신의 목숨

은 어찌 보장한단 말인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가며 공손히 말하는 장흥.

"무슨 돈 말씀이신지……?"

"어라! 네놈이 내게 빚진 게 있지 않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오늘 대협을 처음 보는데……"

진소백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여봐라, 안복. 내가 오늘 이 장원에 들어오며 걸은 걸음이 몇 보(步)더냐?"

그때까지 조용히 서 있던 안복이 즉시 대답했다. 

이미 정확한 계산을 끝내 놓은 듯. 

"정확히 삼백이십사 보입니다."

"귀찮으니 우수리는 빼고 삼백 보로 하여라."

"주인님은 역시 통이 크십니다."

안복의 칭찬에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인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술은 모두 몇 잔을 마셨는가?"

"모두 마흔세 잔입니다만, 이 역시 우수리를 빼고 사십으로 할까요?"

"너도 나를 닮아 점점 통이  커지는구나. 좋다, 내 오늘은 인심을  많이 쓰도록 하

지. 그러면 내가 받을 돈이 모두 얼마냐?"

잠시 손을 짚어 가던 안복이 말했다.

"사십만 냥에 다시 삼십만 냥을 더하니 모두 칠십만 냥입니다."

장흥은 기가 막혔다. 

이게 모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상대방에게 겁을 먹고 있더라도, 이쯤 되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

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지금?"

도리어 어이없다는 눈으로 장흥을 바라보는 진소백! 진소백이 눈짓을 하자 안복이 

나섰다. 

설명을 위해 나선 것인데……이 가슴에 품고 있던 기를 펼치자  '일(一) 보(步) 천 

냥, 일(一) 배(盃) 만 냥'이란  글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복의  친절한 설

명!

"지금부터 우리 주인님의 집안 내력을 말할 테니 잘 들으시오. 주인님의 선친께서

는 너무 부지런하신 데다가 또한 친구가 너무  많으셨소. 해서 너무 많이 걷고 또 

술을 많이 마신 나머지 병을 얻어 돌아가셨소.  임종 시에 남기신 말은 부디 적게 

걷고 술을 마시지 말란 것이었소. 하지만 세상사란 것이 어찌 자신의 뜻대로만 되

겠소. 살다 보면 부득이하게 걷고 술을 마시기도 해야 하지 않겠소. 해서 주인님께

서는 자신을 부득이하게 걷게 하고  술을 마시게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갉아먹는 

대가로 약간씩의 돈을 거두기로 하셨으니, 장 대인도 협조하시기 바라오."

─`장 대인도 협조하시기 바라오!

장 대인, 장흥은 협조는커녕 기가  막혀 죽을 노릇이었다. 이 안복이란  놈은 며칠 

전 자신이 쫓아 낸 하인 놈이 틀림없는데, 언제 저런 미친놈의 종이 됐단 말인가. 

또 술을 많이 마셔 죽었다는 건 그렇다  치고, 많이 걸어 죽었다니…… 말이 되는

가? 게다가 한걸음 걷는 데 천 냥! 

술 한 잔 마시는 데는 만 냥이라니! 

장흥이 기가 막혀 하건 말건 진소백의 독촉은 계속되었다.

"자, 이제 알았으면 어서 칠십만 냥 내놓으시오. 나 또한 바쁜 몸이니."

진소백의 이 말은 장흥이 그나마 마지막 잡고 있던 이성 한 가닥마저 완전히 끊어 

버렸다.

"이 미친놈아! 칠십만 냥이라니. 때려 죽여도 못 내놓는다`─`아."

죽어도 무어무어라는 말을 장흥은 되도록 쓰지 말았어야 했다. 진소백의 호기심은 

너무나 왕성(旺盛)해서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었다. 

장흥이 정말 맞아 죽어도 돈을 내놓지 않을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결과는 너무

도 실망스러웠다.

"장주는 신용이 없는 편이구려."

그렇다. 장흥은 정말 신용이 없었다. 

채 반(半)도 죽지 않아서 돈이며 패물(貝物)을 꺼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장흥의 얼굴은 이미 많이 망가져서, 원래의 기름기 흐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

었다.

"모두 칠십만 냥입니다. 어서 가지고……"

떠나란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말을 맺는 장흥이었다. 그러나 진소백의 말은 더

욱 장흥의 기를 막히게 했다.

"아니, 왜 이것뿐이야? 이봐, 안복! 이 계산이 맞는 것이냐?"

안복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요. 그러니까 아까 패실  때 주먹이 이십여  회 발길질이 십여 회였으니 

도합 이십만 냥의 빚이 더 있습니다요."

장흥은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아니, 그럼……?"

"당연하지. 안복, 또 설명해 주거라."

또다시 안복이 나서서 깃발에 씌어진 다른 글귀를 보여 주었다. '일(一) 권(拳) 오

천, 일(一) 퇴(腿) 일만.'

"주인님의 선모께서는 일찍이 남을 너무  많이 때리시다 몸살을 얻어 돌아가셨소. 

해서 임종 시에 남기신 말씀이……"

장흥은 경악했다. 

"그, 그만!"

듣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저 미친놈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한 주먹에 오천 

냥, 한 번 발길질에 만 냥의 돈을 받기로 했을 게고. 

정말 특이한 집안 내력! 

장흥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발…… 이제 더 이상은 없소."

그러나 장흥의 애원에도 진소백은 담담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기를 받을 돈은  그때 그때 받으라 

하셨으니, 난 부득이……"

진소백이 다시 멱살을 잡으며 때릴 자세를  취하자, 장흥은 눈앞이 노래짐을 느꼈

다. 아까 맞았던 고통(苦痛)이 아직도 생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지. 내가 때리면 때릴수록 받을 돈이 늘어나잖아. 이거 곤란한걸."

장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살았구나.' 

노랗게 되었던 하늘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흥의 이런 기대는 진소백의 다음 말로 여지없이 깨어졌다.

"이봐 안복, 자네는 집안에 나와 같은 별난 조상들이 없겠지. 자네가 때리도록!"

장흥은 다시 하늘이 노래지고 있음을 느꼈다.

2

은화 팔십만 냥이라면 금화로는 팔천 냥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장흥은 안복의 주

먹 세례에 다시 한 번 절반쯤 죽고 난  뒤에 어디선가 십만 냥 어치의 보화(寶貨)

를 더 만들어 내었다. 이런 큰돈에 해당하는 재물(財物)을 등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안복은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속시원히 풀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은 또 얼마나 통쾌

했던가? 그는 앞서가는 진소백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아까 말입니다. 그 장흥네 무사들을 모두  일초식에…… 정말 대단하십니

다."

진소백이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공자님의 무공은 당할 자가 없겠습니다."

진소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결코! 그자들이 약했을 뿐이지. 만일  진정한 고수를 만났다면 아마 결과

는…… 달랐겠지."

"하지만 그들의 별호는……"

진소백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일도(一刀)로 하늘을 가른다든지, 혼(魂)을 빼놓는다든지 하는  별호는 남들

이 지어 준 것일 때만 비로소 의미가 있을 뿐. 스스로가 높인다고 고수가 되는 건 

아냐."

안복은 뭔가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둘의 신형은 어느새 낙양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를 지나고 있었다.

* * *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것이 진리이다. 

낙양은 번화(繁華)한 곳이었지만,  이곳에도 빈민가(貧民街)는 어김없이  존재했다. 

빈민가의 한쪽 구석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거적 위에 앉아 졸고  있는 거지 노인이 

있었다. 오십은 족히 되어 보였지만, 얼굴에 낀 때로 인해 정확한  나이는 알 수가 

없었다. 항상 웃음을 달고 다니는 거지 노인!

뼈대가 없다 하여 사람들이 모두 무골개(無骨 )라 부르는 거지였다.

진소백이 안복에게 보화가 든 포대를 내려놓도록 한 곳은, 다름 아닌 무골개의 앞

이었다.

"사람들에게 보내는 새해의 선물이니, 알아서 골고루 나눠 주십시오."

진소백의 말투는 장흥에게 하던 것에 비해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

매우 공손했다.

말없이 앉아 있던 무골개의 눈빛이 잠깐  반짝이더니, 다시 원래의 흐릿한 빛으로 

돌아갔다.

"히히, 공자께서 이 거지에게 선물을 다  주시다니. 간밤의 꿈에 소똥을 밟았는데, 

그게 횡재할 꿈일 줄이야."

무골개가 뭐라고 하건 진소백은 공손히 인사하며,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안복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할말이 없었다.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소백이

었다.

"자네는 내가 왜 그에게 재물을 모두 주었는지 궁금한가?"

"그렇습니다요."

"혹시 자네 무공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왜 없겠는가.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난 후, 안복은  빌어서라도 무공을 익

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네가 무공을 익히고 싶다면 아까 그분께 가서 사흘만 빌어 보게."

"그 거지, 아니, 그…… 분이 무림인이란 말씀입니까?"

진소백은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는 이미 나이가 들어 근골(筋骨)이 굳었으니 상승의 무공에는 적합하지 않으

나, 열심히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을 걸세. 하하!"

말을 마친 진소백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특별히 다르게 걷는 것이 아닌데도, 안복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속도가 되어 버

렸던 것이다. 

이윽고 진소백의 신형이 멀찍이 사라지더니, 홀연 은자 꾸러미 하나가 날아왔다.

툭!

안복의 발 아래 떨어진 은자! 

안복이 대충 세어 보니 백 냥 정도였다. 

그리고 안복의 귀에 들려 오는,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진소백의 말소

리!

"아까 다 주고 남은 건 그거뿐이네. 내가  자네에게 받기로 한 백 냥은 이미 장흥

에게서 초과하여 받았으니…… 하하!"

안복은 비로소 진소백이 청부자의 재산의 반을 요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

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한 것!

많이 가진 이들은 자신의 재산이 아까워서라도 진소백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할 것 

아니겠는가.

* * * 

정월 초사흗날, 낙양의 빈민가(貧民街) 주민들은 개방(  幇)의 이름으로 된 은자를 

몇 냥씩 나누어 받았다. 

그들의 상원(上元) 명절이 조금은 풍요로워졌으리라. 하지만, 그 일을 주도한 것이 

개방의 장로, 무골개 송인임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또한 그 뒤에 진소백이란 

청년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더 더욱 없었다.

사람들은 다만 명절에 따뜻한 고기 국물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그저 

고맙게 여겼을 뿐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다만 눈앞에 놓인 은자 몇 냥씩이 그지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바로 이날!

집으로 돌아온 진소백은 인편을 통해 전달되어 온 하나의 서찰을 받았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 온, 친우(親友)의 서찰! 

또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는, 엽혼이 화선에게 부탁했던 자료를 건네 받고 있

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담(餘談)이지만,  장흥은 그 후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집안 

내력을 물은 후에 비로소 말을 시작했다고 한다.

─`혹시 조상님들 중에…… 

또 모르지 않는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죽은 조상이 있다면…… 말 한마디 할 때

마다 돈을 달라고 하면……? 

♡ 제 2 장 미소희망(微小希望) 

밀실(密室) 안!

바닥은 펼쳐 놓은 문서(文書)들로 어지러웠다. 엽혼이 화선에게 부탁했던 정보들이

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된, 모두 십칠 장에 달하는 문서들을 엽혼은 벌써 세 번째 

읽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철저한 사전 준비(準備)와 조사(調査)는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을 높여 주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처음에 엽혼은 이 일이 성공할 확률이 오 푼 이하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한 장의 문서가 성공의  확률(確率)을 단숨에 이 할 이

상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비응방(飛鷹幇) 정규 출입자의 명단, 금사진(金査震)의 하루 일과, 비응방의 설립

(設立) 내력(來歷), 비응방주 호위무사들의 신상 일람(一覽).>

문서의 표제(表題)는 모두 비응방주 금사진에 관한 것이어서, 이번 청부 대상이 누

구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비응방주, 비응혈조 금사진! 

그라면 천자급의 고수로 분류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적들에 대한 철저한 섬멸(殲

滅)과 치밀한 잔인함으로 오늘날의 비응방을 있게 한  금사진을 향한 원한의 열매

가 마침내 익었다는 말인가? 

문서들 중에서 지금 엽혼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비응방의 설립 내력에 관한 것

이었다. 특히 비응방의 건축물(建築物)에 대한 설명이, 엽혼으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은 살수행(殺手行)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곳이 

엄폐(掩蔽)지로서 적당하고, 어느 곳을 피해야 할  것인지, 어느 곳의 매복이 취약

하고 어느 곳의 매복이 삼엄한지…… 살수행에  실제로 나서기 전에, 엽혼은 이런 

모든 것들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할 때까지 연습해야만 했다.

연습을 한 번이라도 더 하면 그만큼 자신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므로. 하

나 지금 엽혼이 읽고 있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전체적인 구도는 양쪽으로 전각(殿閣)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고, 뒤편에는 

천험 절벽이 호응하며 가운데의 천응각을 품고 있는 형태. 원래 전대의 지방 호족

(豪族)이었던 호암군(湖巖君)의 장원이었으나, 오 년 전  비응방 정비 시에 몰락한 

호암군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임.

그 뒤 문상(文相) 천기수사(天機秀士) 심화절(深化絶)의 주도하에 기관장치를 설치

하고 경비에 적절하게 건축을 재배치하여 지금의 비응방을 형성하게 됨. 

밝혀 낸 기관장치의 위치와 목록은 아래와 같음……>

'전국 시대 호암군의 장원을 개조한 것이라……'

새로이 설립한 장원이 아니라 기존의 장원을  개축(改築)한 것이라면 엽혼에게 유

리한 점이 있었다.

바로 중심 건물들의 위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건축에 살을 더 붙인다 해도, 중심  건물의 위치는 바뀔 리가 없는 법이었

다. 세월이 흘러 몇 가지의 풍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났다 하여도  최상(最上)의 풍

수적 위치란 변할 수가 없는 법! 

그렇다면…… 

호암군에 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전국 시대를 마감하며 진(秦)의 군대가 지방 호족들을 쓸어 버리고  있을 무렵, 호

암군의 장원도 진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절명(絶命)의 순간, 호암군은 화살에 서찰을  달아 쏘고는 장원 안으로  숨어 버렸

다.

─`신(神)의 힘을 빌려 하늘에 오르니, 인간으로서는 나를 범하지 못하리라.

코웃음을 치며 군사를 몰아 장원에  들어간 군대가 발견한 것은  호암군의 가족과 

종복들뿐이었다.

호암군은 자신의 말대로 하늘에 올랐는지 정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붓을 들어 암호로 된 글을 촘촘히 써 나간 엽혼은 전서구(傳書鷗)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아침 나절에 조삼이 서찰과 함께 가져 온 것이다. 

원래는 엽혼이 자료를 가지러 소하루( 霞樓)에 갈 예정이었으나, 화선 측에서 먼저 

조삼을 시켜 자료와 전서구를 보내 왔던 것이다.

엽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점소이로 알았던 조삼이 강호의 인물인  것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

신의 집을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집에 들어올 때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일부러 먼 거리를 우회했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엽혼의 행동이 그들의 감시(監視) 선상에 있다는 것! 그리고 엽평 또한 그들의  감

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라면 하나의 실수도 용납(容納)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나갈 것이다.

엽혼은 옆 방에 있는 동생을 생각했다. 자신이 실패한다면 그들, 이러한 청부를 한 

자들이 엽평을 그냥 둘 것인가? 

비밀 유지를 위해서,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면……?

아니, 설혹 엽혼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들이 평아를 노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

었다. 

원래 살수가 청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금기(禁忌)였다. 하나 지금은……

"평아(枰兒)의 안전이 달린 일이다. 그들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청부자가 정한 암살 시한은 상원(上元)절. 이제  십이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다만 

살업(殺業)에 집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 아닌 자신의  일을 누군가에게 미루는 것

을 엽혼은 정말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일을 부탁하는 수밖에.' 

생각을 돌린 엽혼은 마침내 암호 편지를 전서구(傳書鷗)에 묶어 날렸다. 청부를 받

고 돈을 받은 이상, 금사진의 암살 역시 중요한 일!

화선(花仙)은 전서구를 받으면 곧 조사해서 엽혼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여 주리

라. 

과연 그녀는 얼마나 짧은 시간에 엽혼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엽혼은 다시 한 번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방대한 자료(資料)를 그 짧은 시간에 모으다니……'

엽혼은 다시 한 번 화선의 정보 수집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그녀는 어디에서 이

런 정보를 수집한 것일까? 

자신의 능력일까…… 아니면……? 

화선(花仙)!

2

금사진(金査震)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다만 전 부인에게서 태어난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금사진의 유일한 딸, 금청청(金靑靑)!

그녀가 화산(華山)에서 무예를 닦고  있음은 모든 비응방도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금사진의 현재의 부인인 적염(狄艶)과 사이가 좋지 않아 멀리 떠나  있으며, 일 년

에 한 번 친모의 기일에만 비응방에 돌아올 뿐이라는 것도 대다수의 비응방도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금청청의 친모 방응향의 기일은 정월 십사일이었다.

관도(官道)라곤 하지만 모두 흙을 다져 놓은 길이니, 급히 말을 달린다면 흙먼지가 

자욱이 날리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두두두……

말 한 필이 급히 지나가며  피워올린 흙먼지를 진소백은 고스란히  덮어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먼지를 털어 내며 툴툴거리는 진소백에게 있어서 그나마 유일한 위로 거리는 말을 

달리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여인인가?' 

날렵한 홍의경장(紅衣輕裝) 차림의 뒷모습. 

실룩거리는 말의 궁둥이와 그 위에 앉은 여인을 연관(聯關)시켜 잠시 이상한 생각

을 떠올리며 킥킥거리던 진소백은 하늘을 보았다.

낙양을 떠나온 지 이제 사흘, 내일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진소백은 다음에 나타나는 객잔(客棧)에서 잠시 쉬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소백이 객잔을 찾았을 때는 이미 미시가  다되어 있었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

며 들어가던 진소백의 눈에 낯익은 말 한 마리가 들어왔다. 

조금 전 자신에게 흙먼지를 단단히 씌우고 간 놈!

'이것 봐라?' 

아니나다를까, 객잔(客棧) 안을 훑어보던 진소백은 객잔의 한구석에 앉아  홀로 술

잔을 기울이고 있는 홍의소녀를 찾을 수 있었다. 

'여인 혼자서 대낮부터 술이라니……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걸까?'

얼굴에 얼음이라도 씌운 듯, 너무 차가운  것이 흠이었지만 정말 빼어난 미인이었

다.

'아까의 일, 먼지 뒤집어쓴 일을 가지고 말을 한번 걸어 봐?'

하지만 장내를 한번 둘러본 진소백은 잠시 그 생각을 보류(保留)하기로 했다. 홍의

소녀의 뒤쪽, 두 털보장한이 자꾸만 홍의녀를 돌아보며 실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군.' 

진소백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자고로 술집에서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항

상 이런 놈들이 있으므로.

"소저, 무슨 괴로운 일이라도 있나 본데, 어디 털어 놔 보시오. 우리 파산이호(巴山

二虎)가 도와 드리겠소."

파산이호, 아니, 파산이흉(巴山二凶)은 근처에서 알아주는 불량배들이었다. 말을 걸

면서 은근 슬쩍 홍의소녀의 옆에 앉는 놈이 손위뻘인  대흉(大凶)이었고, 음침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는 놈은 소흉(小凶)이었다. 

하는 짓거리나, 은근히 홍의소녀의 어깨로 올라가는 손이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여

자를 대하는 품인데…… 

하지만 강호(江湖)에서는 혼자 있는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

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였으므로.

"케엑!"

그나마 비명이라도 지르며 쓰러진 것은 홍의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흉(小凶)

이었다. 옆에 앉았던 대흉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즉사(卽死)했다. 그리고 보

라! 

소흉의 이마와 대흉의 목에 박힌 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홍의

녀가 음식을 집을 때 사용했던 젓가락이었고,  바닥에 떨어져 퍼덕이고 있는 것은 

홍의녀의 어깨에 올리려 했던 대흉의 오른손이었다. 

잔인(殘忍)한 손속! 

그러나 홍의녀는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젓가락을 다시 가져 오너라."

아름다운 미모(美貌)에 믿기지 않는  독심(毒心)이었다. 진소백은 말을  거는 것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던 조금 전의 결정에 대해 진심으로 하늘에 감사해했다.

이흉의 일이 있기 전까진 홍의녀를 힐끔거리던  주루 내의 사내들이, 이젠 홍의녀

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세라 감히 눈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술잔만을 죽어라고  바라볼 뿐. 하지만 진소백만은 홍의

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미모(美貌)와 독심(毒心), 게다가 무공을  겸비한 

여인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흉의 시신을 보라.

계속해서 뿜어지고 있는 피가, 한 점도 홍의녀에게 닿지 않고 있지 않은가! 쓰러지

는 각도(角度)와 피가 뿜어질 방향(方向)을 계산해 정확히 힘을 안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산이흉이 비록 하류배에 불과하다 하나 어찌 쉬운 일이겠는

가?

주루 안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주루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가슴에 새겨진, 

금세라도 튀어나올 듯 선명한 비응(飛鷹)은 그들이 비응방의 무사임을 알 수 있게 

했고, 검끝의 청색 수실은 숭무당(崇武堂) 소속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들어온 무

사들은 지체없이 홍의녀에게로 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두머리

로 보이는, 도를 찬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숭무당 제삼당주 조관(曹串)이 소방주를 뵈오. 영접(迎接)이 늦었음을 용서하십시

오."

비응방도들이 소방주라고 부를  여인은 하나뿐이었다. 날수냉심(  手冷心) 금청청, 

그녀가 친모(親母) 방응향의 기일에 맞추어 비응방에 돌아온 것이었다.

"방주가 보낸 것이냐?"

비응방의 방주라면 금사진을 말함인데, 아버지를 일러 방주라 부르다니……

말투가 기이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방주님의 뜻을 받아 고(暠) 당주께서 제게 분부하셨습니다."

고 당주라 하면 숭무당주 고숭무(暠崇武)를 말하는 것! 비응방의 이인자로  일컬어

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금청청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冷冷)했다.

"가서 전하라. 제사를 모시기 전에는 들어갈 것이지만, 그 전엔 찾지 말라고."

조관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고 당주님의 명이 지엄한지라…… 목숨을 걸고라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금청청의 아미가 역 팔 자로 곤두섰다.

"네놈이 감히……! 내 말은 우습다는 것이냐?"

'냐'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관의  얼굴이 움찔했다. 조관의 뒤편 벽에는  어느새 

나무젓가락 하나가 반쯤 박힌 채 흔들리고 있었다.

쌔액`─`! 

그러나 중인들이 파공음(破空音)을 들은 것은 그  이후였다. 가공할 쾌(快)가 아닐 

수 없는데……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조관의 뺨에 흘러내리는 핏줄기 하나! 그는 급히 무릎을 꿇

었다.

"속하가 어찌……"

"돌아가거라."

금청청은 냉랭히 말하고 일어나, 주루를 나가 버렸다.

그러나 조관과 그 수하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석상처럼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조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너무 굳게  쥔 탓이었을까? 손톱이 파고 들

어가 피가 흘러나와도 조관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꽉 다문 그의 입술이 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정월의 넷째날 금사진의 유일한 딸, 금청청이 비응방에서 백 리 떨어진 한 주루에 

나타났다.

그리고 금사진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며, 숭무당주의 접응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젓가락을 날려, 수하들 앞에서 모욕을 준 조관! 그리고 그의 떨리는 손!

총총히 사라지는 금청청.

이러한 것들은 장차 어떤 의미(意味)를 가질 것인가?

3

<금 방주의 운이 다했나 봅니다. 부탁하신  대로 수소문은 했으나 가능성(可能性)

은 없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선에게서 연락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 

엽혼 역시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을 뿐, 그다지 기대하진 않았던 일이었는데, 이렇

게 쉽게 되다니!

<호암군의 장원을 처음 지은 이는  귀곡자(鬼谷子)의 진전을 이은 지대명(志大明)

이란 자입니다.

한데 우연히도 그의 후손(後孫) 하나가 집안에 전해지던 도해집(圖解集)을 팔러 내

놓은 것이 우리에게 입수(入手)되었습니다.  지대명은 자신이 지은 장원마다  비밀 

통로를 설치하고는 그것을 도해집에 암호로 남겨 놓았습니다. 전문가(專門家)의 힘

을 빌려 풀어 본  바에 따르면 지대명의 도해집에  있는 기록(記錄)에는 호암군의 

장원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서찰에 쓰여진 글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암살(暗殺)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응방에 숨어들어야 했다. 금사진의 무공이 비록 무서웠으나, 엽혼은 숨어서 암격

하는 것이라면 금사진의 목숨을 끊는 것에 반반(半半)의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금사진을 호위하는 자들이 있다면 일초에  금사진을 노리는 것도 힘들  뿐만 아니

라, 그 이후에 빠져 나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금사진을 암격(暗擊)할 장소는 반드시 그가 혼자 있는 곳이라야 했다. 엽혼

은 금사진에 대한 자료를 수십 번 되풀이해 읽은 끝에 마침내 한  장소를 정할 수

가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 장소에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호암군의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면, 엽혼은 길을 찾은 것이었다.

천기수사 심화절(深化絶)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장원(莊園)의 개조(改造)를 

지휘했다면, 어쩌면 비밀 통로를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없애거나, 다시 개

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심화절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가능성이 있는 가정이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엽혼은 어쩌면 이번 살행(殺行)을 성공시킬 수도 있을 것이

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도와 주고 있다고 엽혼은 생각했다. 과연, 하늘이 

있다면 자신을 도와 줄 것인가? 

엽혼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아버지의 치욕스런 죽음과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그들  형제를 냉정히 쫓아 냈던 

아버지 사문의 사람들. 

뒤이어 찾아왔던 어린 날의 그 힘들었던 고난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기억은 어린 날의 유일한 따스함의 추억이었다.

'사부님……!' 

그들 형제에게 인간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자신에게는 무공의 새로운 

오의(奧意)를 깨우쳐 주었던 자신의 사부!

그의 온화한 얼굴이 생각나자, 엽혼은 가슴이 저려 왔다. 그런 사부를 배신하고 살

수의 길에 접어든 것이 이미 삼 년. 만일 사부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자신을 용서

하실까?

엽혼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하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착한 동생 평아는……' 

그는 자격이 있었다. 

항상 착하기만 했던 소년! 이번 일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만일 하늘이 자신을  도

울 뜻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엽평을 위해서일 것이다. 호암군의 비밀 통로에 대한 

지도(地圖)가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일! 엽혼은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통로를 숙지하는 것뿐! 

만일 천운(天運)이 닿아, 호암군의 통로가 발견이 되지 않고 있었다면 엽혼은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다.

* * * 

머릿속으로 수십 번 연습(練習)하여, 휘어지는 구비 사이의 거리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엽혼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은 연습(練習)과는 같지 않았다. 

항상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나타나서는, 그때마다 임기응변을 강요하는 것이 현

실! 당연히 엽혼은 조심해야만 했다. 

지금 침투해 가고 있는 이 길, 호암군의 비밀  통로! 비록 엽혼이 도해(圖解)를 손

에 넣었다고는 하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지는 아

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대명(志大明)이 만들어 놓은 비밀 지하도(地下道)는 비응방의 지하  곳곳을 누비

며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지은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터라  허물어져 막힌 곳도 많았지만, 다행히 엽혼이 

가고자 하는 통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비록 군데군데 허물어진 흔적이  보였지만, 엽혼의 진로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렇듯 세월이 흘렀음에도 막히지 않은 통로.

그것은 통로를 처음 만들었던 자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이 통로. 

그것은 엽혼이 두 번째의 천행(天幸)을  맞이함을 의미했다. 첫 번째 난관은  목표 

지점을 이백여 장 남겨 둔 곳에서 느닷없이 나타났다.

쇠창살!

어른 팔뚝만한 쇠창살이 통로를 가로막으며  나타났던 것이다. 언제, 누가  장치한 

것일까? 

엽혼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일 내공을 돋운 채 검을 사용하여 수십 번 내리친다면 끓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이곳은 지하(地下)였다.

밀폐(密閉)된 곳에서 발생한  소리는 응집(凝集)되어 지상(地上)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지상에서는 소리가 허공으로 퍼져 나가므로, 조심만 한다면 감시자들에

게까지는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하는 달랐다. 이런 밀폐된 곳에서의 울림은 지상에서 바로 감지될 수 있

었던 것이다.

지하에서 기이한 울림이 들려  온다면, 비응방에서 지하를 주목하게  되고, 어쩌면 

이 통로가 발견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통로가 발견된다는 것은 엽혼의 계획이  모두 무산(霧散)되어 버림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에 와서 다른 계획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엽혼은 계속 생각에 잠겨 있

었다.

통로 안은 어두웠다. 

눈앞에는 마치 괴물의 이빨처럼 늘어선 쇠창살! 

그 쇠창살을 바라보다 엽혼은 눈을 빛냈다. 

어둠 속인지라 쇠창살의 모습이 흐릿하게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설치(設置)한 것일까?'

엽혼은 문득 심화절을 생각했다.

천기수사(天機秀士) 심화절!

그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설치한 것일까? 엽혼은 자신이 여기까지 오면

서 거쳤던 통로 모두가 오랜 기간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었음을  기억해 내었

다. 

만일 천기수사가 쇠창살을 설치한 것이라면, 여기 이곳에만 설치했겠는가? 천기수

사는 세심한 인물로 세간(世間)에 알려져 있었다. 그가 이 통로를 발견하고 새로이 

쇠창살을 설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곳도 손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없었던 쇠창살이  유독 여기에만 있다는 것은……?  엽혼의 

두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두 손에 힘을 모은 채, 그는 서서히 쇠창살 앞으로 다가섰다.

쇠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선 엽혼!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하는 듯, 그의 팔에는 점차 핏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강인한 팔뚝! 

그리고 더욱 강인하게 다물어진 엽혼의 입! 

사람의 힘으로 이러한 두께의 쇠창살을 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했다.  또한 끊

어 버리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손으로 쇠를 끊어 버리는 고수자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이야기 속에 등

장한다. 강호상에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내공이 삼 갑자에 이르게  되면 손으로 

수강(手 )을 뿜어 내어 쇠도 으스러뜨릴 수  있다 하였으나…… 그런 고수의 이야

기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것이었을 뿐, 아직은 한 번도 실제로 강호상에 출연한 적

이 없었다. 

또한 지금 엽혼의 경지로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만일 가는 쇠창살

이라면 엽혼의 힘만으로도 어떻게 해보겠으나, 이것의 굵기는…… 이런 사실을 모

르는 것일까?

엽혼은 두 손으로 쇠창살을 잡고 힘을 주어 고집스럽게 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

도 미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라! 

자세히 본다면, 그가 단순히 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밀

고[推], 당기고[引], 또다시 밀어가는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 엽혼의 동작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두 시진이나 지났을까? 처음엔 천천히 밀고 당기던 엽혼의 손이 점점 빨라지고 있

었다. 그러자 아무 변화도 보일 것 같지 않았던 쇠창살이 '우웅`─`!' 하는 미약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를 또 얼마였을까?

엽혼의 얼굴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얼굴 또한 붉게 달아올라, 지금 그가 얼마나  큰 힘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

고 있었는데…… 

이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팍' 하는 미세음과 함께 쇠창

살의 위쪽 부분이 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일까?

엽혼!

설마 그가 정말로 삼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일까?  강호상에 전설로나 

알려진, 그런 경지의 고수였다는 말일까? 엽혼은 지금 부서져 나간 쇠창살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진 쇠창살의 단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둠 속이라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겉과 속이 다른  빛깔로 되어 있음을 

확인한 엽혼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속의 

쇠는 검은 광택을 띠고 있으나, 밖의 빛깔은 붉은 것이리라. 붉은빛을  띤 쇠는 더 

이상 쇠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녹! 

쇠창살의 겉 부분은 녹이 슬어 있었던 것이다.

심화절(深化絶)이 비밀 통로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평소 심화절의 

능력으로 미루어 볼 때는 이상한 일이었지만,  때때로 똑똑한 사람도 하나쯤은 실

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 

그리고 그 실수가 크나큰 재앙으로  이어지는 사례들도 그다지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심화절이 만일 알았다면 이런  낡은 쇠창살은 진작에 교체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쇠창살은 누가 설치한 것일까? 

아마도 지난날, 호암군이나 지대명에 의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보통 이런 곳의 쇠는 가장 강한 것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강한 쇠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월(歲月)이었다.

강한 쇠는 강한 만큼 녹이 슬기 쉬웠던 것이다. 일단 한번 녹이 슬기 시작한 쇠는 

원래의 강도를 급격히 잃어버리게 된다.

무림인들이 자신이 쓰는 애검을 매일 기름으로 닦으며 애지중지하는  것에는 이렇

게 녹이 스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이 쇠창살도 오랜 세월 방치(放置)되어 녹이 슬었다.

그것도, 쇠가 강한 것이었던 만큼 더욱 많이 녹슬었다.

녹이 슬어 약해진 쇠창살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엽혼이 계속해서 흔들며 충격을 

주자 스스로 깨어져 나갔던 것이다. 

금속은 단순히 누르거나 당기는 힘보다도, 반복되어 주어지는 압력에 오히려 약한 

법이니까. 

그리고 엽혼이 깨뜨린 것은 팔뚝만한  굵기의 쇠창살이 아니라 그  속에 아직까지 

녹이 슬지 않고 남아 있던 가느다란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처음 엽혼이 천천히 쇠창살을 흔든 것은 주변의 녹을 떼어 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엽혼은 통로에서 맞았던 장애(障碍)를 훌륭하게 극복해 내었다.

* * * 

비응방의 곳곳에는 칠층의 거대한 탑들이 서 있었고, 그 위에는 날아오를 듯한 비

응상(飛鷹像)이 있었다. 

이것은 비응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런 탑들은 비응방에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호암군의 시절부터 전해지는 

탑들. 그리고 그 위의 비응상들! 기실 금사진이 이곳에 비응방의  새로운 근거지를 

세운 이유는 바로 이 비응탑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몇 개의 가능성이 있는 위치를 검토(檢討)하던 금사진은 이 탑을  보고 나서, 이곳

을 새로운 비응방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비응방의 이름에 꼭 들어맞는 조형물들! 지세(地勢)의 힘을 최대한  끌

어 내기 위한 조형물이라고, 심화절(深化絶)도 설명한 바가 있는 탑들이었다. 

풍수(風水)의 대가(大家)가 세운 것이라나…… 

많은 석탑들이 방 내 곳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비응각의 후원에 위치

해 있는 석탑은 오늘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석탑 아래에서 지금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작은 막대! 

매우 작은 막대 하나가 석탑 아래에서 서서히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수정을 절묘

히 배치(配置)하여, 앞으로 들어온 빛이  뒤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한 기이한 물건! 

마치 현대의 잠망경과 같은 이 물건은 서서히 올라오더니, 이윽고 머리 부분을 드

러내고 주위의 동정을 살피듯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위를 살피고 있는 것은 막대가 아니었다.

막대의 끝에 위치한 깊은 눈! 

막대를 잡은 굳강한 손! 

엽혼,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엽혼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방주의 거처인 천응각(天鷹閣)이  아니었다. 처음

에는 천응각을 응시하던 막대의 머리가 어느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의 석실이 위치해 있었다. 

천응각 반대쪽에 위치한 절벽의 아래를 파서 만든 인조 동굴! 금사진이 가끔씩 들

러 무공을 연마하는 연무실(練武室)이 위치한 동굴을 엽혼은 지금 보고 있었다. 

별빛을 빌려 바라보는 동굴의 입구는 마치  한껏 벌어진,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와

도 같았다.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괴물의 아가리! 

지금은 그다지 많은 경비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금사진이 연무를 행할 

예정이 생긴다면, 주위는 그야말로 철옹성(鐵瓮城)으로 변하리라.

그리고 엽혼은 침투할 기회를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엽혼은 하늘의 별을 이용하여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이제 삼  각 정도의 시간만 

지나면 교대 시간! 

그때가 기회였다. 교대 시간이 되면…… 

'기회가 생길 것이다.' 

교대자들이 서로 인사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

만 이 세상에 모든 일의 원칙을 정확히 지키며 살아 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까? 항상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는 조금씩 원칙을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이 세상이 아니겠는가? 

금사진의 연무실을 지키는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서로간의 사담(私談)을 방

규(幇規)에서 금하고 있었으나, 어찌 그것이 정확이 지켜지겠는가!

얼굴이 익은 동료끼리 어떻게 한마디의 말도 없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새해의 명절 기간에 말이다.

물론 이런 일은 지금 금사진의 연무 계획이 없기에 가능한 것이기는 했다. 어쨌든

……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짧은 순간, 그들은 야음(夜陰)을 가르며 동굴로 들어가는 

그림자를 놓쳐 버렸다. 

허공을 가르는 그림자! 

두말할 필요 없이 엽혼이었다.

동굴에 들어온 엽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일 금사진이 연무를 결심하고 순찰당(巡察堂)에  통고한 상황이었다면 경계자들

이 십 배 증원되는 것은 물론 일급(一級) 고수들도 수배 더 늘려 배치된다. 

그때는 아무리 엽혼의 잠행술(潛行術)이 훌륭하다 해도 성공할 수  없으리라. 또한 

재배치되는 무사들은 정예일 것이고, 지금의 그 경비들처럼 서로  사담(私談)을 나

누어 적에게 잠입할 틈을 만들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엽혼이 미리 이곳에 들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금사진의 연무 계획이 잡히기 전 이곳에 들어와서 금사진을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적이 방비하고 있지 않을 때 먼저 들어와 적을  기다리는 것!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고도의 병법(兵法)과도 통하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공통점

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 

엽혼은 허리춤의 건량(乾糧)을 만져 보았다. 

열흘치에 해당하는 건량. 시간은 넉넉했다. 

이제 남은 일은 어딘가에 숨어 금사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느 곳에 숨을까?

실내를 둘러본 엽혼의 눈에 마침 적당한 곳이 들어왔다.

하지만, 과연 열흘 안에 금사진은 이곳에 올 것인가.

엽혼은 확신이 있었다. 열흘, 아니, 그 전에 금사진은 꼭 이곳에 올 것이다. 그리고 

온다면 그는…… 

'여기에서 죽는다.'

엽혼은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제 3 장 유유괴사(幽幽怪事)

진소백은 정월 팔일에 엽혼의 집에 도착했다.

엽혼은 집에 없었다. 중간에 들른 곳이 있어 엽혼과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엽혼이 떠난 집에서는 엽평의 창백한 얼굴이 그를 맞이하였다.

"소백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힘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나이답지 않은  의젓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진소백은 엽평의 파리한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기가 힘듦을 깨닫곤 당황

했다.

어린 날의 엽평! 그는 얼마나 활달했던가!

십이 세에 이미 기초의 권장과  검술을 익혔으며, 이후 엽가  가전(家傳)의 무류검

(舞流劍)마저 일부 깨우침으로써 주위의  찬탄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던 기재(奇

才), 엽평!

그러나 지금은 지니고 있던 무공마저 모두 상실해 버린 듯 힘없는 일개 소년에 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절맥(絶脈)의 탓이었다. 

더 이상의 무공 수련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기존(旣存)의 내공 

기초마저도 하루가 다르게 갉아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께서 소백 형님에게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진소백이 잠시 감상(感傷)에 젖어 있는  사이, 엽평은 어느새 하나의  짐 꾸러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봉서(封書) 하나와 특이하게 생긴 명패(名牌) 하나,  진소백이 꾸러미 속에서 발견

한 전부였다. 어디에 쓰일 물건일까? 

"대체 무슨 말이 씌어 있습니까?"

엽평의 물음에 진소백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읽어 보지 않았느냐?"

"형님께서 직접 전하라 하셔서……"

진소백의 눈에 이채(異彩)가 떠올랐다. 

엽평은 이제 갓 스물이 되어 가는 나이였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旺盛)한 때이기도 

했다. 자신의 형이 어디 가는지도  알리지 않고 사라지며 남긴 봉서를,  단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란 이유만으로 뜯어 보지 않을 수 있는 소년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진소

백은 문득 엽평의 눈을 바라보았다. 

비록 병으로 인해 육체적인 힘은  잃었지만 아직 그 눈빛만은  지난 날과 같았다. 

살아 있는 눈! 그리고 살아 있는 마음!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은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이기에.

한참을 말없이 엽평을 보고만 있던 진소백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은 네 절맥이 치유된 후에 설명해 주마."

"제…… 병이 고쳐질 수 있단 말씀입니까?"

엽평의 놀람은 당연했다.

"그렇다."

"그, 그럼, 형은……?"

엽평은 어리석은 소년이 아니었다. 자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형이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는 것일까? 형이 사라진 이유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형이 만약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러 간 것이라면, 

그 일은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지금 엽평의 마음을 

꽉채우고 있었다.

굳은 어조로 진소백이 말하며, 이런 엽평의 혼란한 마음을 깨어 버렸다.

"지금 네 형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네가 지금 해야 

할 일, 형의 뜻을 이어받아 네 절맥을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 

엽혼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엽평의 절맥을 치유하기 위

함이었다. 만일 엽평이 자신의 형을 걱정하여 엽혼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것이야말

로 더없이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런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스스로의 기분

에 취해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망친다. 

자식을 위해 밤늦도록 희생하는 부모들! 

벗의 장래를 걱정하며, 충고(忠告)를 아끼지 않는 친우들!  당신은 이런 고마운 이

들에게 다만 몇 마디 겉치레의 말에 섭섭하여 울컥 화를 낸 적이 없었는가? 

또는 상대방의 진실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기분에 겨워 상대방에게 상처  준 일은 

없었는가? 만일 엽평이 지금  엽혼을 걱정하여 딴 일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정이 많다[多情] 할 것이다. 

하나…… 그의 형 엽혼은? 

그의 희생은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

은 일인가! 

다행히 엽평은 정이 많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자신의 절맥이 치유될 때까지 진소백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진소백(鎭小

栢)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믿고  따랐던 사람! 또한 형이  믿고 모든 일을 부탁한 

형의 붕우(朋友)였던 것이다.

 * * * 

대파산(大巴山)! 

사천과 섬서를 경계 짓는 이 산맥은, 따로이 구룡(九龍) 산맥이라고도 부른다.

아! 험하고도 높구나

촉나라 길 어려움이, 하늘에 오름보다 더하구나 

고대에 잠총과 어부가 나라를 연 것이 어찌 그리 아득한가 

噫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 

蠶叢及魚鳧 

開國何茫然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묘사되어 있듯이, 하늘에 오를  것 같은 높은 사다

리[天梯]와 돌로 엮은 다리[石棧]들이 이어진 잔도(棧道)가 있는 산맥!

그 깊은 곳 어딘가에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계곡이 존재한

다.

유유곡(幽幽谷)! 

사시 사철 안개가 끼어 있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설혹 지리를 잘 아

는 사람도 안개 때문에 접근을 꺼려 거의 인간의 종적(縱的)이 끊긴 곳. 

정월 십일에 진소백이 유유곡의 입구에 나타났다.

엽혼의 봉서를 뜯어 보고는 즉시 말을 한 필 구하여 밤을 새워 달려온 것이다. 진

소백은 엽혼의 글을 다시 기억해 보았다.

<오랜 기간 연락도 없이 지내  온 나의 무정(無情)을 용서하게……中略……  해서 

오랜 기간의 탐문 끝에, 드디어 평아(枰兒)의 절맥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내었다네.

생사의괴(生死醫怪) 종도(鐘塗)! 

내가 알아 낸 정보에 의하면, 그는  대파산(大巴山) 깊숙한 유유곡(幽幽谷)에 숨어 

살고 있다 하네. 

희대(稀代)의 의술을 지니고는 있으되 인물됨이 워낙 괴팍하여 두 가지 조건이 없

으면 결코 환자를 치유해 주지 않는다고 하네. 

의괴의 첫째 조건인 신물(信物)은 내가 어렵사리 구했네만, 둘째 조건이 어떤 것인

지는 알려진 것이 없어, 염치 없으나 자네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네.

평아를 치유할 약재를 살 돈은 은하전장에  이엽(李葉)이란 이름으로 예치되어 있

네. 찾는 방법은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다네……中略…… 평아는 내 모든 것이네. 

이 못난 친구의 유언(遺言)이라 생각하고  부디 그애를 보살펴 주게. 그리고  우리 

엽가 집안의 일에 관해서는  그 아이가 절맥을 치유하고  자신을 호신(護身)할 수 

있는 무공을 다시 되찾은 뒤에 말해 주길 바라네.>

그 외에, 자신이 그간 살인 청부업을 행한 일이며 마지막으로 청부받은 일에 대한 

얘기들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청부의 대상은 금사진! 

비응방주 금사진에 대해서는 진소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착한 인물은 아

니었지만, 또한 악(惡)에 물든 인물도  아니어서 금전을 대가로 살인을  할 대상이 

되기엔 아까운 사람이었다. 

또한 결코 쉬운 상대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특별한 기우(奇遇)가 없다면, 엽혼은 이번의 일에서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

이다. '이 글을 유서(遺書)라 생각하고……'란 엽혼의 말은 자신도 어느 정도 짐작

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친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하려고 한 동생의  생명. 진소백은 무슨 일이 있더

라도 구해 주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유유곡에 선 것이다.

유유곡은 안개로 뒤덮여 그 이름에 걸맞게 유부(幽府)를 보는 듯 괴기스러웠다. 이

런 곳에 평생을 묻혀 사는 인물이라면 자연  그 성정이 범인(凡人)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치 앞 보기를 허용하지 않는 안개를 뚫고 들어가려던 진소백은  문득 괴이한 생

각이 들었다. 

지금 시각은 오시! 

하늘의 기운이 왕성(旺盛)하고, 특히 오늘의 날씨는 더없이 맑아 구름  한 점도 없

는 날이었다. 

무릇 안개란 대지의 음양(陰陽)이 바뀜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 아래에 있어야  할 

대지의 음기(坤陰)가 하늘로 오르고, 하늘에 있어야  할 양기(乾陽)가 땅으로 내려

와서 서로의 위치가 바뀌게 되면 제자리를 이탈한 기운들은 원래의 자리를 찾으려

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이런 기운들이 서로 맞부딪쳐 발생하는 것이  안개인 것이다. 대표적인 양기인 화

(火) 위에 대표적인 음기의 수(水)가 놓이면 수증기가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치(理

致)였다.

밤새 땅의 음기(陰氣)가 성(盛)해져서 하늘의  양기(陽氣)를 침범하게 되어 발생하

는 것이 바로 안개인 것이다. 

때문에 만물의 근원(根源)이며, 양기의 보고(寶庫)인 태양이 떠오르면 음양(陰陽)이 

바로 잡히게 되어 안개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는데……

'해가 중천(中天)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안개의 기세(氣勢)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

는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진소백은 다시  뒤로 물러나, 주위의 지세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모든 산맥이 그렇듯이 산의 등성이를 따라 지기가 용맥(龍脈)을 따라 흐르고, 이는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수맥(水脈)의 음기와 조화되어 음양(陰陽)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유유곡(幽幽谷)에서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운의 흐름을 바꾸었다.' 

의도적으로 우주(宇宙)에 존재하는 기운의 흐름을 바꾸어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

용하는 기술(技術). 

그러한 기술이 물질적인 힘을 빌려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진법(陳法)이라 불렀

다.

제갈량의 팔진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세상의 기인이사와  도학자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법의 진을 연구,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오늘 진소백은 그러한 진법의 정수(精髓) 중 하나를 여기에서 만난 것이다. 

'수화운무진(水火雲霧陳)이라 부르면 적당할까?' 지세를 따라 흘러가는 수기와  화

기의 흐름을 역행(逆行)하여 서로의 위치를 바뀌게  함으로써, 사계(四季) 내내 안

개가 끼어 있도록 만드는 고도의 술법!

이런 진법을 설치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 

만일 그가 생사의괴(生死醫怪)  종도(鐘塗)라면……? 생사의괴는 치료를  부탁하는 

사람에게 항상 두 가지를 요구한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이 천하에 퍼뜨린 십오 개

의 신물 중 하나를 회수해 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물을 가져 온 사람에게 문제를 내어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

받아야만 자신의 의술(醫術)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진법을 설치한 것이 생사의괴(生死醫怪) 본인이라면? 그의 능

력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생사의괴의 부탁 또한  간단한 것이 아닐 것을 의미하는데

…… 진소백은 이번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엽평의 절맥을 고치

는 일은 의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좋아, 한번 부딪쳐 보는 거다."

그렇다. 

난관이 닥칠 때, 때때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정 부딪쳐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특히 지금의 경우처럼 고민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2

"종 선배! 어디 계십니까?"

진소백의 외침은 내공(內功)을 실은 것이라 기운차게 유유곡을 울렸다.  안개를 피

워 내는 진법을, 자신이 지닌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뚫는 데  걸린 시간은 약 반 

시진! 

진소백의 진법에 관한 지식도 일반의 한계(限界)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직은 하늘이 훤할 시간인데도 곡 안은 어두웠다. 진법에 의해 생긴 안개가 양광

(暘光)을 가로막고 있어 생기는 일이었다.

전방으로 목옥 하나가 보였지만,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실례라 

생각한 진소백은 소리쳐 주인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종 선배! 후배 진소백(鎭小栢)이 감히 뵙길 원합니다. 어디 계십니까?"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데야, 그로서도 재간이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목

옥(木屋) 하나뿐! 

들어가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록 예의에 어긋난다 하나, 이미 진소백이 종도(鐘塗)를 부른 지  시간이 꽤 많이 

지났던 것이다.

끼이익! 

흡사 귀신의 호곡성 같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유부(幽府)'란 핏빛 글씨가 입구에 크게 씌어 있던 목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귀

호성(鬼呼聲) 같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문을 열자 나타난 풍경은 '유부'

란 글씨가 장난이 아님을 알려  주려는 듯, 설사 귀신이라  할지라도 줄행랑을 칠 

정도였다.

보라!

목옥의 지붕엔 검은색 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끝에는 저마다 하나씩의 

갈고리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갈고리에 걸린 것은…… 

개, 닭, 돼지, 곰, 소, 표범…… 

갈고리에 걸린 고깃덩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아주 풍부

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진소백의 상상력은 충분히 풍부했고,  그는 갈고리에 매달린 고깃덩이들이 

그 동물들의 시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은 잘려지고, 내장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떨어

지는 피! 그 피 아래 다시 다섯 개의 관이 있었고, 거기에는 다시 다섯  개의 고깃

덩이가 놓여 있었다.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진소백조차도 관에 든 고깃덩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것

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머리 상부(上部)의 반이 잘라져  나가고, 두개골(頭蓋骨)은 떼어져서  뇌수(腦髓)가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 

얼굴 가죽은 벗겨져서 눈알만이 대롱거리고 있었고,  전신의 피부는 모두 잘 발라

져서 흡사 종이를 펴놓은 듯이 바닥에 펴져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채로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장들이었다.

이번의 것은 결코 개나 소가 아니었다.

바로 사람의 것이었다.

각종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은 질퍽거리며 끈적거리고 있어, 진소백은 갑

자기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곳이 정말로 유부(幽府)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피어오르는 피 냄새, 섬뜩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진소백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진

소백은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생각해 내

었다. 

생사의괴를 찾는 일! 

진소백은 다시 한 번 시신들을 돌아보았다.  흘러내리는 피는 아직도 따뜻하고 내

장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시체의 체온은 빨리 식는다. 하지만 이렇게 피에서 김이 올라온다는 것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섯이나 되는 시체에서 김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아, 짧은  동안에 이렇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 일을 행한 사람의  기술(技術)이 이미 신의 경지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진소백의 미간에 은은한 살기가 떠올랐다. 

아무리 높은 의술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이런 잔인한 심보를 가진 사람이 과연 살

아 있을 자격(資格)이 있을까? 

이런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과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진소백은 혼란

스러웠다.

자신에게서 일어났던 살기를 가다듬고 있던 진소백이 눈에 의혹의 빛을 띠고 다시 

시체를 쳐다본 것은 잠시 후였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시체를 다시 살펴보던 진소백은  갑자기 그 중의 한  구(軀)에 다가가더니 뇌수를 

집어 올렸다. 

팍! 

진소백의 손에서 뇌수가 터져 나가는 소리였다. 

끔찍한 모습! 

그러나 진소백은 눈도 찌푸리지 않고, 손에 묻은 뇌수의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 삼

켜 버렸다. 

그가 실성이라도 해버린 것인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두부로 만들어진 뇌수라니!"

그렇다. 진소백이 먹었던 뇌수는 바로 두부로 만들어진 가짜였던 것이다. 진소백이 

처음 인피(人皮)라 생각했던 것은 나무 껍질을 무두질하여 만든 것이었고, 그 위에 

김을 피워올리던 내장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음식인 것이다. 귀기스러운 분위기

에 압도당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당연하게 사람의  시신(屍身)이라 단정한 

것이다. 

물론 가짜 시신의 뒤에 수북이 쌓여진 뼈들도 그런 진소백의  단정에 도움을 주었

지만. 일단 바닥에 놓인 것이 사람의 시체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자 진소백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생사의괴 종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음식물을 이용하여 이런 

광경을 연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시체를 이용하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종도의 능력은 진소백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하지

만 진소백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장난기!

진소백 자신도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의 삶에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종도의 능력보다도, 이런 장면을 연출해 낼 수 있는 여유가 더욱 진소백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런데…… 장난…… 이라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뜻도 

없이 이런 것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무언가 숨은 뜻이 있나 하고 시신, 아니, 음식들을 살피고 있던  진소백은 시신 뒤

에 쌓인 뼈들의 모양이 특이한 것에 주목했다. 

다섯 개의 뼈 무더기를 합해 보면, 하나의 글자 모양과 비슷하지 않은가?

식(食)!

"먹으란 뜻인가?"

아무리 바닥의 시신이 음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임을 알았다 해도,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뒤의 갈고리에 달린 동물들의 시체는  진짜였던 것이다. 또한 아직도 떨어

지고 있는 동물들의 피 또한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의 뇌수와 내장과 눈알을 닮은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

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왕왕 남들이라면 불가능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사

람을 만나기도 한다.

다행히도, 진소백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와득! 쩝! 후르륵!

음식의 모양이 섬뜩해서일까? 

진소백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진소백은 아주 맛있

게 시신(屍身), 아니,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음식은 매우 맛이 있었다. 

의괴(醫怪)는 진법과 의술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일가견을 가진 것 같았다.  특히, 

눈알이 특이한 풍미(風味)가 있음을  안 진소백은 다른 것을  젖혀 두고 눈알부터 

먹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가 막 마지막 시체의 눈알을 입에 넣고 씹으려 할 때였다.

'이게 뭐지?' 

음식을 다 먹어 치우자 바닥엔 인피(人皮) 아닌 인피가 드러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글자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공기와 닿으면 글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듯하였다.

<자네는 이미 두 개의 관문을 돌파했네. 

첫 번째 관문은 밖의 운무진이며, 두 번째 관문은 바로 이 목옥 안의 생사혼관(生

死混關)일세. 

바닥의 피에서 올라오고 있는 냄새에는 미혼향(米魂香)이 포함되어 있어, 해독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면 자네는 이미 쓰러졌을 것이네. 

또한 이 글도 볼 수 없었을 테지. 

이제 목옥 뒤의 동굴로 오게. 

마지막의 지혜관만 통과한다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네.>

* * * 

의괴가 지혜관(智慧關)이라 말한 곳은  단순한 동굴이었다. 당연히 무언가  함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전진(前進)하던 진소백은  갑자기 동굴이 

막히며 벽이 나타나자 당황했다. 

'이게 뭐야?'

아무런 표식도 없이 끝나는 단순한  사 장여 길이의 동굴.  이게 무슨 지혜관이란 

말인가?

'분명 무슨 장치가 있을 것이다.' 

안력(眼力)을 모아 주위를 살피던 진소백은 천장에 둥그런 홈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홈의 크기와 문양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임도 발견했다.

"의괴의 신물(信物)과 크기가 흡사하다."

품안에서 엽혼이 구했다는 신물을 꺼내어 살펴보니,  비단 크기가 비슷할 뿐 아니

라 속에 새겨진 문양(文樣)까지  똑같아서 둘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얼 망설이겠는가? 

찻! 

맑은 음성과 함께 뛰어오른 진소백이 신물을 홈에 끼워 넣자, 우르릉`─ 

굉음과 함께 동굴의 벽이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어서 오게. 통관을 축하하네."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런, 이거 지혜관이라더니, 뭐 이리 쉬워?' 

진소백은 내심 의아해하며 열린 동굴의 벽으로 들어갔다.

3

동굴 안의 벽이 열리며 나타난 석실로 들어간 진소백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서 오게, 환영하네."

눈을 감고 듣고 있자면, 세속을  초탈한 노인이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띠며 환영의 

인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라도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속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진소백은 가슴이 편안하기는커녕 울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괴성을  지를 뻔하였

다.

"선배를 뵙습니다."

노인의 음성에, 당연히 예의를 차리고  고개를 든 진소백의 눈에  보이는 것은 두 

마리의 구관조(九官鳥)였던 것이다. 

"어서 오게, 환영하네."

구관조 중의 한 마리가 뾰족한 입을 열어,  다시 노인의 음성으로 말을 하자 진소

백은 화가 나기에 앞서 신기함을 느꼈다.

두 마리의 구관조는 사람의 말을 할 뿐  아니라 사람처럼 옷도 입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푸른 옷을 입었고 다른 한 마리는 붉은 옷을 입었다. 

"누가 아까 나에게 인사말을 했느냐?"

진소백의 물음에 두 새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청조(靑鳥)가 했네."

청조의 말이었다.

"홍조(紅鳥)가 했네."

홍조의 말이었다.

옷의 색이 그대로 새의 이름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귀여운 모습의 새가 늙은 노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이 신기하고도 재미있어서, 

몇 마디 더 물어 보려던 진소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새들이 앉아 있는 뒤편의 벽에 씌어진 글을 본 것이다.

<생사지간(生死之間).>

그리고 그 밑에 보다 작은 글씨로 적혀져 있는 글을.

<홍조와 청조는 다만 두 번의 질문에 대답할 뿐이네. 자네는 그 둘에게 물어 올바

른 길을 찾아오게. 

둘 중 올바른 길에는 내가 있네만, 다른 길에는 다만 죽음만이 있네. 명심하게!

홍조(紅鳥)와 청조(靑鳥) 중 한 마리는 오직  거짓말만 하여 진실을 말할 줄  모르

며, 나머지 한 마리는 다만 진실만을 말할 뿐 거짓은 말하지 않네.>

글이 적힌 벽에는 과연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모양이 똑같아 눈으로는 결코 어

느쪽이 옳은 길인지를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 새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는 거짓말만 하고, 하나는 진실을  말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느 새에

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인가? 

게다가 자신은 이미 하나의 질문을 했으니 이젠 한 번의 기회만이 남아 있을 뿐이

었다. 

진소백은 아까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새들의  대답을 되새겨 보았다. 두 새는 서

로 자신이 처음 말을 걸었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어떻게 둘 중 

어느 새가 참만을 말하는 새인지 가려 낼 수 있겠는가?

'만일 처음 인사말을 한 것이 청조(靑鳥)라면  청조가 진실을 말한 것이겠지만 반

대로 처음 인사를 한 것이 홍조(紅鳥)라면 홍조가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문제는 

어느 새가 나에게 인사말을 했냐는 것인데……' 

생각을 이어나가던 진소백은 골치가 아프기 시작함을 느꼈다.

두 새의 음색(音色)은 너무나 같아,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

슨 방법으로 처음 인사를 했던 새를 구별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의괴의 지혜관은 과연 쉽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털이 빠져라 고민하던 진소백은 돌연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새는 두 마리가 있다. 

둘 중 하나의 말은 참이고 나머지 하나의  말은 거짓이다. 어느 새가 참을 말하는

지는 모른다. 하지만…… 

꼭 둘 중 참을 말하는 새와  거짓을 말하는 새를 구별해야 할까? 두  마리의 새를 

한 번에 묶어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만일 두 새의 말을 한 번에 묶어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면……'

그랬다. 

진소백은 머릿속이 훤히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해답은 두 새 중  진실조(眞實鳥)를 

구별해 내는 데 있지 않았다. 

구별하지 않고 두 새를 하나의 틀 속에 두는 질문을 생각해 내는 것! 바로 그것이 

이 관문의 해답이었던 것이다. 

진소백은 청조(靑鳥)에게로 가서 물었다. 

"만일 내가 홍조에게 물으면 어느 문이 옳은 것이라 대답하겠느냐?"

청조는 대답을 했고, 진소백은 청조가 대답한  반대쪽의 문으로 망설이지 않고 들

어갔다. 둘 중 어느 새가 진실을 말하는지의 구분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진소백의 

질문은 교묘해서 두 마리 새의 대답을 모두 담고 있었기에 그 대답은 항상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음과 양의 두 수를  곱하면 항상 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어느 수가 

음이고 어느 수가 양인지는 몰라도 그 결과가 음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였다. 

만일 청조가 진실을 말하는 새였다면 홍조가 답할 거짓된 길을 진소백에게 그대로 

말했을 것이고, 청조가 거짓을 말하는 새였다면  홍조가 말할 진실된 길을 거짓으

로 바꾸어 알려 주었을 것이다. 

비록 결과를 놓고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이런 생각을 처음 생각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짓을 음이라 하고 참을 양이라  한다면, 음과 양의 이기(理氣)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틀 속에 두는 생각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음양 이전에 존재하는 일원(一元)이 아니겠는가? 진리와 도는 거대하

고 추상적이었지만, 현실의 응용은 또한 의외로 간단했다.

청조는 우측을 대답했고, 진소백이 들어온  곳은 좌측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시 이어지는 석조의 통로!

십 장 정도를 걸어가자 다시 문이 나타났다. 

역시 돌로 지어진 거대한 문. 굳게 닫힌 문 위에는 다시 하나의 글이 씌어 있었다.

'무엇이 충분한가?'

그 아래에는 천(天), 지(地), 현(玄), 황(黃)으로 이어지는 천자문(千字文)이 적혀 있

었다.

천자문의 글은 주로 숫자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된다. 천(天) 자는 일(一)에, 지(地) 

자는 이(二)에, 하는 식으로 대응되는 것이었 

진소백은 지체없이 천 자를 눌렀다.

통로를 통과하기 위한 질문은 하나로 충분했던 것이다. 우릉`─` 

문이 열리고 있었다.

사방에는 계절에 맞지 않게 기묘한 형태의 꽃들이 피어나 있었는데, 그 꽃들의 향

기를 누르며 담담히 떠도는 것은 다름 아닌 약향(藥香)이었다.

한 노인, 키가 작은 듯하지만 전신에 피어나는 자연스러운  기도(氣度)가 전체적으

로 작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는다.

진소백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세간(世間)에 괴인으로 알려진 생사의괴가 이런 초탈한 기도의 노인이었다니!

"어서 오게. 내가 종도일세."

진소백은 공손히 답하였다.

"진소백이 종 선배님을 뵙습니다."

종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내가 여기에 관(關)을 설치하고 사람을 기다린 지  벌써 십 년이 지났지만 세 가

지의 관문을 만족스럽게 돌파한 것은 자네가 처음일세."

진소백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종도는 말을 이어나갔

"처음의 진법은 오히려 통과하기가 쉬웠을  것이네. 진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

면, 시간을 두고 연구한다면 통과할 수 있겠지. 보다 어려운 것은  두 번째의 관문

이라네. 바로 유부관이지! 만일 들어온 사람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라면  그는 결코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네."

과연 그렇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불순한 의도, 다시 말해 살의(殺意)를 품고 들어온 사람이라면  유부관의 시신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살기(殺氣)를 품은 자라면 그 살기가 정확한 판단을 방해할 것이

기 때문이었다. 

또한 시신(?)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미혼향을 벗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

다.

"세 번째 관문은 더욱 어렵지. 만약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면 그 즉시 기관이 발동

하여 누구든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일세. 만일 통로 내의 질문에 잘못 대답했을 

때도 마찬가지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 됩니까?"

종도는 진소백의 질문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아까 그 시신을 보지 못했는가?"

진소백은 종도의 장난기 섞인 말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보았습니다. 무척 맛이 있더군요."

"그럼 되었지 않은가?"

"……미혼향에 쓰러진 사람들은 밖으로 보내집니까?"

종도는 문득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노부는 이곳에 은거하며 생사의괴의 소문을 내어 인재를 구해 보고자 했네!"

뜻밖의 말이다. 

생사의괴의 소문이 생사의괴 자신이 퍼뜨린 것이었다니! 종도의 말은 계속 이어진

다.

"모두 십오 개의 신물을 만들어 강호에 퍼뜨렸네. 자네는  열다섯 번째, 즉 마지막

으로 온 사람이고 관문을 통과한 세 번째  인물이네. 하지만 날 본 사람을 자네가 

처음이지."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저 이전에 두 명이나 있었다면…… 그들은 왜 선배님을 만

나지 못했습니까?"

종도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옆에 서 있는 나무의 한 부분을 살짝 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다.

"어서 오게, 환영하네."

누구의 소리인지 진소백은 바로 알아 낼 수가 있었다.

"이 소리는……"

"그렇네. 구관조가 내는 소리지. 사실 아래의 두 통로는  어느쪽이 바른 길인지 정

해져 있지 않네. 만일 지혜관에 도달한 사람이 올바른 질문을 한다면 내가 여기서 

전음통을 통해 듣고서 관문을 조절하지. 그 두 사람은 다만 운(運)으로  길을 택했

을 뿐, 올바른 질문을 하지 못했지."

진소백은 그제서야 왜 자신이 처음으로 종도를 보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 말인가? 당연히 그들은 밖으

로 내보내지지. 물론  이곳의 기억을 하지  못하도록 망신단(忘神丹)을 복용한  채

로."

"망신단을 복용한다면 백치가 되는 것 아닙니까?"

종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의학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군. 물론 망신단에는 그런 폐해가 있네. 하지만 

약효의 정도를 잘 조절한다면 최근의 일만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도 있다네."

진소백은 이 종도란 인물의 능력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음을 절감(切感)할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인물됨이 결코 강호의 소문과 같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정대(正大)

하다는 것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소백이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물었.

"선배께서는 제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고충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

오. 제가 성심(誠心)으로 받들겠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진소백은 엽평의 치료를 부탁하러 여기에 온 것인데 오히려 종도의 부탁을 들어주

겠다니. 종도의 얼굴엔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자네는 이미 알았는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진소백은 엽평의 치료를 위해 여기에 왔고 또 그 부탁을 종도에게 해야 할 입장이

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탁을 들어준다니.

주객이 전도된 말들이 아닌가? 

* * * 

종도의 관문(關門)은 모두 세 가지였지만, 그 속을 흐르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통관자(通關者)의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를 시험(試驗)하는 것! 첫  번째는 그 지

식을 시험했고, 두 번째는 지식과 지혜가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발휘되는지를 

시험했고, 세 번째는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종도 정도의 능력을 지닌 기인(奇人)이 이런 복잡한  일을 꾸며 능력이 있는 인재

를 구하는 이유라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자감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겠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는 

곤란한 일이 있다는 것. 

그러나 분위기로 보아서는`─`종도가 계속  자신에게 반경칭(半敬稱)을 쓰고  있지 

않은가?`─`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아닌 것 같으니……  해서 진소백은 종도에게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지를 정중히 물었던  것이다. 자신 또한 종도에게 엽평

의 일을 부탁해야 하지 않는가? 진소백은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종도(鐘塗)가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면 서로가 돕는 것

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셈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소백이 잊고 있는 것이  있으니…… 자신의 행동 또한  엽혼과의 우정을 

위한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가? 

놀람의 빛을 가라앉힌 종도가 말했다.

"좋군, 정말 좋아. 자네의 환자는 내가 책임지겠네. 자네…… 진소백이라 했나?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 지금부터 일 년 후, 여기에 표시된 곳으로 꼭 와주게. 자네가 

무슨 일을 도와야 할지는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걸세."

말과 함께 종도가 품에서 꺼낸 것은 지도 하나와 작은 금낭(錦囊)이었다. 진소백은 

말없이 지도와 금낭을 받아  품안에 갈무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진소백은 이 

일로 인해, 엽혼과의 우정과 종도와의 인연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큰 격변에 휩

싸이게 될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건 과거(過去)의 조그마한 선택이 

후에 가서는 엄청난 일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 마련이 아닌가?

* * * 

진소백은 다시 엽평에게로 떠났다.

얼마 후면 엽평은 이곳으로 옮겨져서 종도에게  치료를 받게 되리라. 치료에 필요

한 약재(藥材)를 구할 수 있는 돈은 이미 종도에게 주었으니, 종도의 능력(能力)이

라면 엽평이 완쾌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도,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또 그런 능력을 가진 인물이 

부탁(付託)할 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  까? 그러나 이런 것은  아직 밝혀질 일이 

아니었다. 

일 년 후. 그때 가서야 비로소 밝혀질 일인 것이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종도(鐘塗)! 그의 운(運)이 매우 좋다는 것. 

어떤 부탁이든 진소백이 맡는다면 안심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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