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정도현과 루체의 싸움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
왕궁 지하에선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 내지 괴롭힘이었다.
“컥, 허윽…….”
전신이 피로 흠뻑 물든 메시아, 이윤정.
그녀는 홀로 두 대천사와 수십의 상위 천사들에게 무모히 맞섰고, 그 대가로 처참한 꼴이 되었다.
그녀 혼자였다면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신호영과 조예령. 그 둘을 지켜야 했기에 도망치지 않고 싸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 사람은 아직 무사하단 점이었다.
그녀가 펼쳐 둔 결계 덕이었다.
푹.
이윤정이 빛의 창을 땅에 꽂고 힘없이 몸을 기댔다.
천사들이 결계를 건들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싸우며 버텼으나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허억, 헉…….”
이윤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자신이 기절하면 결계도 사라질 터.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처연한 모습을 보며 천사들의 탈을 쓴 악마왕이 웃었다.
“어머니 손에 죽는 기분이 어때?”
악마왕이 미엘라의 입을 빌려 뱀처럼 간사하게 속삭였다.
악마왕은 메시아인 그녀가 절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꼭 보고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숨통을 끊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
더 갖고 놀았다간 완전히 망가질 터.
이윤정이 죽기 전에 소감을 들어야 한다.
과연 어떤 말을 할까.
그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천천히 고갤 들었다.
“…당신 계획은 실패할 거예요.”
“뭐?”
어머니가 인간들에게 붙잡혀 죽도록 뒤에서 판을 짰고.
그것도 모자라 죽은 어머니를 꼭두각시 인형처럼 부렸다.
죽기 전에 원망이나 분노를 쏟아 낼 줄 알았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현실 부정이라니.
참으로 시시한 결말이었다.
악마왕이 실망스럽단 눈초리로 바라보자, 이윤정은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분명 오빠가 이길 거니까…….”
“아, 그 정도현이란 녀석? 확실히 인간치고 대단하긴 했지.”
드래곤 하트를 받아들이고도 폭주하지 않았다니. 그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마왕의 혼이 완전히 눈 뜨면 녀석도 어쩔 도리가 없을 터.
“그 녀석이 열심히 싸우면 싸울수록 마왕의 부활을 앞당길 뿐이야.”
마왕의 혼은 수백 년 전 육신을 잃고 분리되어 깊이 잠들어 버렸다.
사람 기준으론 뇌사 상태나 다름없었다.
강인한 자의 육신을 그릇 삼아 마왕의 혼을 집어넣어도 본래의 의식은 되돌아오지 않았었다.
“실험 끝에 해결법을 찾아냈지.”
마왕의 그릇이 또 다른 강자와 격전을 벌이면, 마왕의 혼이 거기에 자극받아 깨어날 수 있단 걸.
하지만 그런 강자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지. 초대 성녀가 예언했던 이클립스의 힘을 지닌 인간, 그 녀석을 각성제로 이용하자고.”
최초의 플레이어 중 예언 스킬을 지닌 초대 성녀가 말했다.
이클립스의 힘을 얻은 인간이 언젠가 루체를 죽이러 나타날 거라고.
두 존재가 싸우는 건 필연.
악마왕은 루체를 마왕의 그릇으로 삼고자 물밑 작업을 했다.
그리고 예언이 실현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래했다, 마왕이 완전히 부활할 순간이.
“그게 마음대로 될 거 같나?”
자신의 계획을 처음으로 떠벌리며 기분이 고양됐던 악마왕.
그런 그에게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결계 안에 있던 신호영이었다.
그를 보며 악마왕이 입꼬릴 올렸다.
“결계에 숨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버러지가.”
“그래, 난 버러지다. 하지만 정도현 앞에선 너도 버러지지.”
“…뭐?”
“녀석은 뭔 짓을 해서라도 이길 거다.”
마왕의 그릇인 루체는 물론이고 네놈마저 죽여 버릴 거라고. 신호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왕은 슬슬 불쾌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니. 게다가 현실 도피도 아니었다.
정도현이 해내리라 믿으며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희 같은 놈들을 보면 속이 다 울렁거려.”
이제 됐다. 질렸다.
여길 정리하고 곧 부활할 마왕을 맞이하러 가야지.
악마왕이 마무리를 지으려던 순간.
“……!”
달려들려던 천사들의 행동이 일시에 멎었다.
악마왕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내용의 시스템 문구들이 주르륵 떠올라서였다.
[대천사장 루체가 사망했습니다.]
[「거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대천사장 루체의 육체와 영혼의 소유권을 습득합니다.]
[루체의 육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물품은 습득할 수 없습니다.]
“이, 이게 무슨…….”
루체가 죽어?
게다가 마왕의 혼과 고위 마족들의 영혼마저 받아들인 대천사의 강인한 육체가 파괴되다니.
‘말도 안 된다!’
이런 건 내 계획에 없었어.
시종일관 여유 넘쳤던 악마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본 신호영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추 눈치채곤 비웃었다.
“말했잖아. 상대가 누구여도 그 녀석은 이긴다고.”
“닥쳐!”
콰앙-!
악마왕은 버럭 소릴 지르며 지상으로 날아올랐다. 다른 천사들도 그를 따라 일제히 날개를 펼쳐 비상했다.
천사들의 편대 비행은 거룩하고도 장엄했다.
대성당에 벽화로 남겨도 좋을 만큼 장관이었다.
하지만 천사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잃은 듯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단숨에 지상으로 올라온 악마왕.
그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완전히 뭉개져 한 줌 고깃덩이가 된 루체. 그릇이 망가져 밖으로 빠져나온 마왕의 혼.
그리고 자신이 나타날 걸 예상했는지 검을 쥔 정도현까지.
“네노오오오옴!”
악마왕이 절규하며 정도현에게 돌진했다.
대천사를 포함한 수십의 천사들이 용맹하게 그를 뒤따랐다.
수적 열세에도 정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아직도 이렇게 남았었어? 이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그는 용의 마력을 듬뿍 담아 힘차게 칼을 휘둘렀다.
콰가가각-!
섬광이 번쩍이더니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던 천사들이 죄다 반으로 갈렸다.
“커헉!?”
“끄으…….”
몸이 두 동강 났으나 반신들답게 다들 죽진 않았다. 하지만 숨만 겨우 붙어 있을 뿐이었다.
천사의 질긴 생명력을 믿고 덤볐으나 몸이 재생되다 말았다.
정도현은 바닥에 널브러진 천사들을 마무리 짓고자 뚜벅뚜벅 걸어왔다.
“쿨럭, 어째서……?”
악마왕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수백 년 전, 태양신에게 마왕이 패배하는 걸 지켜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악마왕은 상반신만 남은 미엘라의 몸으로 땅을 기며 도망쳤다.
콰직, 콰드득!
등 뒤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그의 꼭두각시들의 머리통이 하나씩 파괴되었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
그의 몸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태양을 등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도현. 역광이 마치 눈부신 후광처럼 느껴졌다.
“이 녀석이 악마왕이라고?”
정도현이 대뜸 혼잣말을 중얼댔다.
악마왕에겐 이클립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그리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죽어.”
정도현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칼끝이 태양 빛을 머금고 반짝이자 악마왕은 사색이 되었다.
천사들은 자신의 모든 마력을 바쳐 만들어 낸 꼭두각시들. 다 죽으면 그 역시 죽는다.
악마왕은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 인간이여, 나와 거래하자!”
“뭐래.”
정도현은 무시하고 검을 내리쳤다.
아니, 내리치려 했다.
파스스.
용의 기운을 더 견디지 못한 칼날이 바스러지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졸지에 헛손질한 정도현이 혀를 찼다.
“에이, 씨. 또 깨졌네.”
레전드리 등급의 무기가 부서졌건만 아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단지 짜증만 낼 뿐.
그는 또 다른 예비용 무기를 꺼냈다.
이번엔 큼지막한 망치였다. 물론 그 역시 레전드리 등급이었다.
그가 망치를 번쩍 들어 올리자 악마왕이 다급히 말렸다.
“자, 잠깐! 이 여자는 메시아의 어머니다!”
멈칫.
망치로 머릴 깨부수려 했던 정도현이 멈췄다. 그는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곤 고갤 끄덕였다.
“닮긴 했네.”
미엘라는 이윤정의 친모답게 얼굴을 쏙 빼닮았다.
천사들은 일정 이상 육체의 노화도 없기에 이윤정의 친언니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정도현은 망치를 슬쩍 내리곤 악마왕을 쳐다봤다.
“그래서, 무슨 거래를 한다고?”
“나, 날 살려 주면……. 메시아의 어머니를 돌려주겠다!”
“돌려준다니?”
악마왕은 시간이 없어서 다급히 설명했다.
미엘라의 육신과 영혼의 소유권을 돌려주면 살릴 수 있다고.
그 말에 정도현은 곰곰이 고민했다.
인간과 천사 사이에서 태어난 이윤정과 달리 미엘라는 순혈 천사.
그러니 시스템은 몬스터로 취급할 거다.
‘부활 아이템은 쓸 수 없겠지.’
부활 아이템은 플레이어만 살릴 수 있으니.
이윤정의 어머니를 살릴 방법은 놈과 거래하는 수밖에 없었다.
놈의 제안을 못 들은 체하고 죽여 버릴 수도 있다. 괜히 후환을 남겨 둬서 좋을 건 없으니까.
‘게다가 마왕의 혼도 남았고.’
정도현은 풍선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붉은 구슬, 마왕의 혼을 흘끗 쳐다봤다.
‘저거 없앨 수 있냐?’
『아니. 필멸자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저건 태양신과 동일선에 올라선 절대자의 영혼이니까.』
놈을 살려 보내면 마왕의 혼도 회수해 갈 터. 그럼 언젠가 또 이런 짓을 벌이겠지.
뭘 골라도 찝찝한 상황이었다.
“시, 시간이 없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이 여잔 죽어…….”
악마왕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재촉했다.
아무리 반신이라도 하반신이 날아간 상태론 오래 버티지 못한다.
남은 시간은 끽해야 수십 초.
정도현은 혀를 차며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냈다.
“일단 마셔.”
입속에 엘릭서를 부어 주자 사라졌던 미엘라의 하반신이 서서히 복구됐다.
악마왕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 현명한 선택이야.”
“아직 거래한다곤 안 했어.”
“뭐?”
그녀를 살릴지 말지는 이윤정의 선택에 맡길 생각이다. 그 말에 악마왕의 표정이 굳었다.
메시아라면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지 않고 대의를 택할 확률이 높으니까.
“그러지 말고 나와 거래하자! 그, 그래!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게 해 줄게. 네가 루체의 뒤를 이어 낙원의 왕이 되는 거야.”
“그런 거 할 생각 없어. 그리고 그건 내 힘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큭…….”
잔머릴 굴려 봤자 정도현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악마왕이 전전긍긍할 때.
“오빠!”
“정도현, 괜찮나?”
“난 괜찮아. 너희는?”
지하에서 세 사람이 올라왔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이윤정은 다행히 신호영의 「만물상점」으로 치료했다.
이윤정이 정도현에게 날아와 품에 안겼다.
“다행이다, 오빠가 무사해서…….”
“너도 열심히 싸웠구나. 정말 잘했어.”
“헤헤…….”
정도현의 칭찬에 이윤정이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도현 옆에 멀쩡히 서 있는 악마왕을 보곤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신호영도 이를 갈아 대며 말했다.
“저 녀석은 왜 안 죽였지?”
다른 천사들은 전부 죽었는데 미엘라만 멀쩡했다.
신호영의 질문에 정도현은 상황을 설명했다.
미엘라를, 생이별했던 어머니를 되찾을 수 있단 말에 이윤정의 눈이 커졌다.
이윤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갤 저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아무리 소중한 이라도 죽은 사람이다.
악마와 거래하면서까지 섭리를 거스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윤정이 그렇게 말하자 악마왕은 식은땀을 흘렸다.
도망치고 싶지만 조금이라도 낌새를 보이면 정도현이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수겠지.
“이, 이봐, 메시아! 정말 괜찮아? 이건 흑마법 같은 거랑 달라. 진짜로 소생하는 거라고!”
수십의 천사들에게 수명을 조금씩 떼어 줬지만 그래도 100년은 족히 살 거다.
악마왕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혓바닥을 놀렸다. 그럴수록 이윤정의 눈빛은 더욱더 굳건해졌다.
아, 이건 끝났구나. 악마왕이 그렇게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잠깐만. 기다려 봐.”
정도현이 끼어들었다.
그는 아까 확인하지 못한 시스템 메시지를 살펴보곤 허공에 손가락을 휘적댔다.
아무래도 상점창을 조작하는 듯했다.
그러다 뭔가를 찾았는지 정도현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