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完]
[1원 상점에 새로운 품목이 추가됩니다.]
150레벨을 달성했단 알림과 함께 표시된 시스템 문구.
정도현은 새로 추가된 아이템이 뭘까 싶어 상점창을 열어 봤다. 그리곤 제 눈을 의심했다.
‘「태양합일신공」?’
상점 목록 최상단에 뜬 새로운 아이템.
그건 스킬북이었다. 그것도 천사들이 사용하던 심법, 「태양합일신공」.
열화판이었던 「태양신공」도 5대 가문의 신공들에 꿀리지 않았었는데, 원본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저걸 익힌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리라.
하지만 정도현은 그런 이유로 놀란 게 아니었다.
[태양합일신공] [데우스]
- 사용 조건: LV.150 이상, 「1원 상점」 보유자
- 자격을 지닌 자만이 태양과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
‘데우스 등급?’
데우스 등급이라니, 처음 본다.
설마 레전드리보다 상위 등급인 건가?
게다가 스킬 효과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고, 거창하면서도 아리송한 문구만 적혀 있었다.
‘사용 조건이 150레벨 이상에……. 「1원 상점」 보유자?’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누가 봐도 정도현을 뜻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에게 이걸 남기려 했단 느낌마저 들었다. 정도현은 곧장 스킬북을 구매했다.
파아앗-!
인벤토리에서 스킬북을 꺼내자 황금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데우스 등급이라더니 확실히 여타 스킬북들과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주변에서도 술렁였다.
“정도현, 그건 뭐지?”
“상점창에 새로 추가된 아이템.”
“「태양합일신공」? 이거 천사들이 쓰는 심법이잖아?”
“아이템 설명을 읽어 봐 봐.”
그 말에 모두 스킬북을 살펴봤고 사용 조건에 눈을 크게 떴다. 조예령과 악마왕만 빼고.
조예령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해서 고갤 갸우뚱했다.
“「1원 상점」? 이건 또 뭐야? 처음 듣는데.”
“내 개인 특성.”
“뭐? 잠깐. 그럼 너……. 이거 익힐 수 있는 거야?”
조예령의 깔끔한 정리에 정도현은 고갤 끄덕이며 스킬북을 사용했다.
스스스.
스킬북은 빛의 알갱이로 변해 그의 몸으로 고스란히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 담긴 방대한 지식이 정도현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정도현은 탄식에 가까운 소릴 내뱉었다. 이 스킬북을 누가 남겼고, 목적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태양신, 그의 후계를 만들려는 거였어.’
방주를 세우고 끝내 시스템과 한 몸이 된 태양신.
그는 자신의 유지를 이을 자가 없음에 아쉬움과 불안함을 느꼈고 이것저것 안배해 뒀다.
‘「태양합일신공」을 대성할 자질이 있는 자가 태어나면 「1원 상점」을 얻도록 해 둔 거야.’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태양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계해 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뭐, 「1원 상점」이 없었으면 각성하자마자 죽었겠지.”
정도현은 시스템창을 쳐다보며 그렇게 중얼댔다. 그리곤 숨을 들이켜 「태양합일신공」을 발동했다.
화아아아-!
전신에서 스킬북이 내뿜었던 것과 같은 황금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신이 지상에 강림하면 혹 저런 모습일까.
더없이 신성하고도 찬란한 자태에 모두 홀린 듯 그를 쳐다봤다.
단 한 명만 빼고.
“허억! 태, 태양신……?!”
정도현이 내뿜는 힘에 악마왕은 태양신을 떠올리곤 몸서리쳤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가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듯 그는 떠올렸다.
태양신의 손짓에 수십, 수백의 마족과 악마들이 죽어 나가던 광경을.
순도는 옅지만 저 마력. 틀림없이 태양신과 똑같았다.
정도현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악마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윤정아, 이 녀석이랑 거래 안 하고 어머니 구할 수 있는데 어쩔래?”
“네? 오빠, 그게 무슨…….”
“자세한 건 묻지 말고. 네 선택을 존중할게.”
정도현의 질문에 이윤정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악마왕과 거래하지 않고도 어머니를 되찾을 수 있다고?
그럴 수 있다면 당연히 살리고 싶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모든 생명은 태어나 언젠가 죽는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절대자였던 태양신마저 죽지 않았던가.
아무리 억울하게 죽었다곤 해도, 이미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게 정녕 용납되는 짓일까?
다른 누구도 아닌 메시아인 자신이 당연한 이치를 거슬러도 되는가?
어머니를 살리고 싶단 마음과 메시아로서의 사명감이 충돌했다.
이윤정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정도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윤정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정말, 정말로……. 흐윽, 그래도 돼요?”
“그래, 넌 그럴 자격 있어.”
이윤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탁했다. 어머니를 구해 달라고.
“젠장!”
위기를 느낀 악마왕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정도현은 하늘로 날아오른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작은 먼지처럼 악마왕이 질질 끌려와 손아귀에 붙잡혔다.
파아앗-!
눈부신 광채가 악마왕을 휘감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끄어억……!?]
끔찍한 비명과 함께 미엘라의 몸에서 시커먼 마력이 뽑혀 나왔다.
기생충처럼 숨어 있던 악마왕이 떨어져 나온 것이다.
[어, 어떻게!]
어떻게 했는지, 무슨 원리인지는 정도현 본인도 모른다.
「태양합일신공」을 습득하고 자연스레 할 수 있게 됐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맘껏 팔다리를 움직이고 숨을 내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물론 이 힘의 원리를 이해하고 통달한다면, 이보다 더한 기적들도 해낼 수 있게 되겠지.
꽈악-!
정도현은 악마왕의 마력을 힘껏 움켜쥐며 말했다.
“야, 남의 몸 갖고 노니까 재밌었냐?”
[아, 안 돼…….]
악마왕은 제발 살려 달라고 빌려 했으나, 정도현에겐 그를 살려 둘 이유도 그럴 가치도 없었다.
파스스-!
정도현의 손아귀로 마력이 모이더니 악마왕은 가루로 변했다.
“너도 이리 와.”
정도현은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마왕의 혼도 끌어당겨 단단히 움켜쥐었다.
콰지지지직-!
마왕의 혼은 빛의 마력에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악마왕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후우…….”
악마왕과 달리 저항이 만만찮았기에 정도현은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의 압도적인 힘에 신호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정도현, 너 설마… 태양신이 된 거냐?”
“아니. 아직은.”
「태양합일신공」을 익혔으나, 그의 깨달음이 부족해 태양신과 같은 경지에 오르진 못했다.
태양신이 될 자질이 있는 거지, 곧바로 태양신이 되는 건 아니란 소리다.
“그럼 언젠간 될 수 있단 거군.”
“아마도. 뭐, 평생 못 할 수도 있고.”
확답은 못 한다. 그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경지에 오르지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으음…….”
악마왕과 분리되며 의식을 잃었던 미엘라가 눈을 떴다.
이윤정이 울먹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라 말 걸어야 좋을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그런데 미엘라가 그녀를 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우리 딸. 미안해, 많이 아팠지?”
미엘라가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자 이윤정의 눈동자가 커졌다.
몸과 영혼을 빼앗겼지만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미엘라가 그리 말하며 이윤정을 꼭 끌어안았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재회한 모녀는 펑펑 울었다.
그 광경을 보며 신호영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잘 풀려서.”
“부럽냐?”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신호영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럼 너도 풀어야지.”
“뭐?”
“네 아버지 묻힌 곳으로 가자.”
정도현의 뜬금없는 제안에 신호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께 못다 한 말이 있으면 무덤 앞에서 마저 털어놓으란 걸까.
아니면 시신을 챙겨 하계의 양지바른 곳에 다시 묻어 주자는 건가.
그러나 정도현이 말한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살릴 수 있어.”
“…뭐?”
“「태양합일신공」으로 네 아버지 살릴 수 있다고. 부활에 삼 일 걸리긴 하지만.”
“뭐? 하, 하지만…….”
이미 부활 아이템을 썼으니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냐고.
신호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하자, 정도현은 자신 있게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태양신의 권능이라 가능해.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사람은 안 되지만.”
“그, 그럼…….”
신호영의 표정에 화색이 맴돌다 금새 어두워졌다.
그럼 뭐 하는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기억 못 할 텐데.
주화입마에 빠져 살인귀가 되어 버리겠지.
“잃어버린 기억도, 주화입마도 내가 고칠 수 있어.”
“저, 정말이냐?”
정도현은 신호영이 걱정하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줬다.
그제야 신호영도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영감님도 살려 드려야지.”
정도현은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준 남궁제를 떠올렸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해내지 못했으리라.
* * *
천사들이 몰락하고 몇 개월이 지났다.
부패했던 관리국과 교단은 완전히 개혁됐다.
메시아 이윤정과 대천사 미엘라 그리고 생존한 영광의 일족들이 전면에 나서서 A구역의 실태를 널리 알린 덕이었다.
시민 등급이 사라졌다.
각 구역을 나누던 높다란 장벽들도 하나씩 허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던 악법들도 빠르게 개정되었다.
물론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는 시민들도 대거 발생했다.
그중 일부는 무력을 통해 반란을 획책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단체들은 새로 설립된 정부, ‘방주’의 임시 대표 신호영이 직접 나서서 발 빠르게 처리했다.
몇 달 전까지 F구역이라 불렸던 방주의 외곽 지대로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었다.
누군가의 소망대로 최소한 굶어 죽는 아이들이 더는 없도록.
누구도 차별 없이 의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하고.
몸이 아프면 곧바로 병원 관련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상위 구역에선 당연하게 여겼던 복지와 권리를 외곽 시민들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허허,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구먼.”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던 노인, 남궁제가 껄껄 웃으며 옆자리의 중년 사내에게 말했다.
중년의 사내는 신호영의 아버지, 신성한이었다.
아들 칭찬에 신성한은 고갤 저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아드님이 이룬 업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에잉. 몇 달째 얼굴도 안 비치는 아들놈이 뭐 그리 훌륭하다고.”
남궁제는 몇 달째 소식 없는 아들 얼굴을 떠올리며 투덜댔다.
정도현은 천공의 섬에서 내려오자마자 용의 무덤인지 뭔지를 찾겠다면서 방주 밖으로 훌쩍 떠났다.
“용화가 안 풀리는 거랑 몸이 번쩍번쩍 빛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더니. 기다리다 내가 먼저 늙어 죽게 생겼소.”
정도현이 서둘러 이클립스와의 약속을 이행하러 떠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로 용인화가 상시 유지됐고, 거기다 「태양합일신공」까지 익혀 몸에서 후광이 흘러넘쳤다.
문제는 그걸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
너무도 강대한 마력에 폴리모프 반지마저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나 버릴 지경이었다.
괴물 같은 모습에 휘황찬란한 후광을 내뿜으며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마력을 제어하는 수련도 할 겸, 용의 무덤을 찾으러 떠난 것이다.
방주 바깥에 적어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여간. 누굴 닮았는지, 원…….”
정도현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남궁제만이 아니다.
F구역에 버려진 그를 친자식처럼 키워 준 최진영도 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며 고백한 두 여인도 있었고.
‘그 녀석, 바로 대답하기 곤란해서 튄 건 아니겠지?’
폐관 수련을 위한 장소야 얼마든지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정도현은 달랑 편지 한 장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 * *
며칠 뒤, 서아린은 모처럼 잘 차려입고 집 밖을 나섰다.
오늘은 박성원의 결혼식 날이었다.
부패의 마녀, 유가인의 적극적인 공세에 못 이겨 결국 그가 함락된 것이다.
‘아이를 가졌다지.’
서아린은 유가인의 과감한 행동력이 부러웠다.
자신도 정도현의 아이를 가졌었으면 이리 노심초사 기다리진 않았으려나.
서아린은 머릴 흔들며 잡념을 지웠다.
결혼식장에 들어오자 하객들이 제법 붐볐다.
당연했다. 그는 신호영의 측근으로서 방주의 요직을 꿰찬 상태였으니까.
박성원의 지인들도 있었지만, 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자 얼굴을 비추러 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박성원은 그런 쪽으론 거리가 먼 남자였기에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적어도 유가인은 이 상황이 기꺼워 보였다.
“결혼 축하해요, 성원 씨.”
“아, 서아린 씨.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던 박성원이 반색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둘은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아, 그러고 보니 권하율 씨도 왔더라고요.”
“…그 여자가요?”
“예. 저도 좀 놀랐습니다. 청첩장을 보내긴 했는데 진짜 와줄 줄 몰랐거든요.”
뜻밖이었다. 박성원과 아는 사이긴 해도 그리 친하진 않을 터인데.
게다가 권하율은 「독심술」 때문에 사람 북적이는 곳을 극도로 싫어했다.
‘도현 씨 지인이라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가?’
하여간, 영악하기는. 방심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래도 모처럼 왔다니 인사 정도는 해야 예의겠지.
서아린은 하객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가 권하율을 찾았다.
그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널찍한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으니까.
“오셨어요?”
권하율은 서아린의 상념을 감지했는지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고갤 돌려 먼저 인사했다.
“힘들어 보이는데 굳이 왜 왔어.”
“정도현 씨의 친구잖아요.”
서아린은 권하율의 옆자리에 앉으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해 줬다.
표정에서 머리 아파 죽겠단 티가 팍팍 났다.
“그래서, 제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요?”
“…넌 자존심도 없어?”
권하율은 몇 달 전 서아린에게 고백했다.
자신은 정도현에게 선택받지 못할까 두렵다고. 그러니 최악보단 차라리 차악을 택하겠다면서 말이다.
“자존심보다 그 사람이 더 좋은걸요?”
“하, 그래…….”
“서아린 씨도 저랑 똑같잖아요.”
“…그래서 더 짜증 나.”
서아린은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를 공유하자는 권하율의 제안에 그녀는 몇 달간 고민해 보았다.
질투심 많은 자신이 정말 그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정도현이 자신뿐만 아니라 권하율과 얘기하고, 웃고, 껴안고,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권하율이 말한 최악의 상황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만약 그가 권하율 혹은 아예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자신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거다.
“너랑 사이좋게 지내긴 할 거야. 단, 최소한의 선은 지키자고.”
“고마워요, 양보해 줘서.”
“하……. 근데 당사자가 안 돌아오잖아.”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났는데 그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용의 둥지인지 뭔지 잘 모르겠으나, 목소리라도 좀 들려줬으면 좋겠다.
서아린과 권하율이 그렇게 생각할 때.
툭.
두 여자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하다니.
서아린과 권하율은 화들짝 놀라 누군지 확인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
“저, 정도현 씨?”
틀림없는 정도현이었다.
서아린은 다시 만나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겠단 결심도 까맣게 잊고,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정도현은 좀 놀랐지만 피하진 않았다.
선수를 빼앗긴 권하율은 뚱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도현은 웬일인지 그녀도 잊지 않고 챙겨 줬다.
권하율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녹아내리듯 풀렸고, 그와 정열적인 입맞춤을 나눴다.
“뭐 하다 이제 왔어요?”
집에 밤늦게 들어온 남편 바가지를 긁듯 서아린이 추궁했다.
정도현은 두 여자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인간 모습 유지하는 연습을 했지.”
“그런 건 여기 남아서 해도 됐잖아요.”
“미안해. 용의 무덤 찾는 거랑 바깥의 엘프들 문제도 빨리 해결해야 했거든.”
“엘프들이요?”
방주 바깥엔 엘프와 악마들이 살아간다고 했다.
엘프는 A구역에 있는 세계수를 탈환하는 게 목표였고, 악마들은 방주의 인간들이 목표였다.
“그래서 그 둘이 연합하고 방주를 침공할 계획을 꾸미더라고.”
“설마……. 다 죽였어요?”
서아린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정도현의 힘이면 능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시선에 정도현은 서운하단 표정을 지었다.
“나라고 뭐, 매번 힘으로 해결하는 줄 알아? 이번엔 협상했어.”
엘프들은 인간들에게 딱히 관심 없었다. 그들이 원한 건 천사들이 훔쳐 간 세계수였으니까.
“그래서 세계수를 돌려주고 왔어.”
“돌려주다니, 어떻게요?”
“천공의 섬을 통째로 옮겨다 바깥의 지상에 내려 줬지.”
세계수가 넘어왔던 지역의 땅을 마공학의 힘으로 들어 올려 부유섬으로 만든 천사들처럼.
“여튼, 엘프들은 세계수를 돌려받은 대신 방주에 얼씬도 안 하기로 했어.”
“그럼 악마들은…….”
“나도 설득하려곤 했다? 근데 걔네가 말을 안 듣더라고.”
악마들이 어찌 됐을지 상상이 갔다.
권하율은 기대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할 일 다 끝내고 돌아온 건가요?”
“뭐, 급한 불은 다 끄고 왔죠. 할 일은 남았지만.”
그는 방주를 확장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넉넉하지만 언젠가 방주의 수용 인구도 한계에 달할 테니까.
그의 목적을 들은 권하율이 끄덕였다.
“바깥을 개척하겠단 거군요.”
“예. 엘프들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요.”
“그러다 결국 나중엔 충돌하는 거 아녜요?”
서아린은 먼 미래를 걱정했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땅은 더 필요할 거다. 그럼 결국 엘프들이 사는 곳마저 넘보게 될 테고.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다.
정도현은 어깰 으쓱했다.
“그건 후손들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죠. 싸우든 공존하든 아니면 또 다른 해결책을 찾든.”
무책임한 발언에 서아린과 권하율은 실소를 터트렸다.
하긴. 수천, 수만 년 뒤에나 벌어질 일을 지금 걱정한들 의미는 없겠지.
“그래서, 그때 저희 고백의 대답은요?”
“아, 그게…….”
정도현이 머릴 긁적이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서아린은 그럴 줄 알았단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곤란해하자 권하율이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그 문제는 나중에 차차 풀어 가죠. 시간은 많으니까. 그보다 용의 무덤은 찾았어요?”
“찾았죠. 장관이더라고요.”
정도현은 이클립스가 알려 준 장소로 날아가 용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곳엔 이클립스뿐만 아니라 다섯 용의 거대한 사체들도 함께 묻혀 있었다.
이클립스가 따로 말하길.
이 세상으로 넘어와 자신의 조물주인 태양신이 죽었단 걸 알아챈 이클립스.
당시 그는 주화입마에 빠져서 폭주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던 다섯 용은 맞서 싸웠고 끝내 패배했다.
물론 이클립스도 멀쩡하진 못했다.
큰 상처를 입고 내리 잠들었으니까.
그때 당한 상처만 없었으면 최초의 플레이어들한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 드래곤 하트 갖고 있으면 위험한 거 아녜요?”
“괜찮아요. 그 녀석은 이미 성불했으니까.”
인간들 손에 죽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렸던 이클립스.
그는 정도현의 도움으로 뒤늦게 자신과 동족들이 파묻힌 무덤을 찾아가 사죄했다.
그런 뒤 드래곤 하트에 남아 있던 이클립스의 사념은 사라졌다.
“아, 시작하네요.”
그의 얘기가 막 끝났을 때.
신랑, 박성원이 하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결혼식장에 입장했다.
정도현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박성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서아린과 권하율 사이에 앉아 있는 걸 보더니, 박성원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힘내라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