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정도현과 신성한이 충돌하기 몇 분 전.
C구역 아파트엔 정도현의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린은 베란다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바깥 풍경만 바라봤고.
권하율은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고전 영화를 봤다.
정도현 한 명 떠났을 뿐인데 집안이 적막했다.
던전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그였기에 평소에도 자주 집을 비웠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고작 두 명 데리고 A구역에 올라갔지 않은가.
“…정도현 씨 괜찮겠죠?”
“멀쩡히 돌아올걸요. 위험한 짓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권하율이 TV 전원을 끄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서아린은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도 내심 불안한 거다.
물론 그런 반응을 살필 필요 없이 「독심술」로도 충분히 감정이 전해졌지만.
“올라간 지 벌써 며칠이나 됐는데 소식이 없네요.”
“천사들이 깔아 둔 결계 때문에 통신용 아이템이 안 써진다잖아.”
좌표를 모르고, 거리까지 너무 멀어서 진규현의 「공간 도약」도 쓸 수 없다.
지금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가 무사하길 빌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
그런 줄 알았다.
달칵.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소녀, 이윤정이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모습이 이상했다.
집에 있든, 뭉치랑 산책하러 나갈 때든.
폴리모프 반지로 어린애 모습을 하고 있던 이윤정이 어째선지 본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변화가 딱 거기까지였으면 그녀들도 크게 놀라진 않았으리라.
“이윤정, 너 머리 위에 그거 뭐야?”
“그보다 날개도 늘었어요.”
이윤정의 머리 위에 천사의 상징 중 하나인 광륜, 헤일로가 떠 있었다.
게다가 한 쌍밖에 없던 백익이 무려 네 쌍으로 늘었고, 황금안에는 오망성(五芒星)이 그려져 반짝였다.
급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서아린은 생각했다.
혹시 하프 천사한테도 성장기 같은 게 있는 걸까.
이윤정은 둘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해요.”
“뭐?”
“오빠가 위험해요.”
“……!”
그녀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두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정도현이 위험하다니. 그걸 이윤정이 어찌 알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서아린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범죄자를 심문하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현 씨가 왜 위험해?”
“…시스템이 알려 줬어요. 빨리 막지 못하면 오빠는 영영 괴물이 되어 버려요.”
“괴물이 된다니. 그게 무슨…….”
“우린 뭘 하면 되죠?”
상황 파악이 안 돼서 혼란에 빠진 서아린의 말을 권하율이 끊었다.
정도현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단 말에 이윤정은 방법을 설명했다.
“오빠의 심상 세계로 들어가서 마음을 진정 시켜야 해요. 하지만 저 혼자선 안 돼요. 언니들이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A구역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여기서 너무 멀잖아.”
낙원의 도시로 가려면 B구역 수도에 있는 탑의 엘리베이터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여긴 C구역 동부.
비행기를 타면 몇 시간, 진규현의 「공간 도약」으로도 수십 분은 족히 걸릴 거다.
옮길 인원이 많을수록 이동 거리도 짧아지니까.
“제가 날아갈 거예요.”
“뭐?”
이윤정이 공작새처럼 여덟 개의 날개를 쫙 펼쳤다. 거기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둘은 겉모습의 변화에 정신이 팔려 이제야 눈치챘다. 이윤정의 레벨이 133에서 145로 확 올라갔다는 걸.
던전 공략은커녕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간 적 없는 그녀가 레벨이 오르다니.
서아린의 상식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기현상이었다.
“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스템이 말했어요. 제가 메시아고, 때가 됐으니 각성했다면서요.”
“…메시아? 네가?”
상상도 못 한 정체에 서아린이 입을 쩍 벌렸다. 권하율도 눈을 부릅떴다.
메시아가 실존했다니.
“하긴,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수십 년간 지하 독방에 갇혀 있었는데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마력과 레벨.
그녀의 성장이 오죽 두려웠으면 교단이 날개와 눈까지 뽑으며 경계했겠는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인류의 구원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인류에게 핍박받으며 메시아로 각성하지 못했었다니.
“제 손 잡으세요.”
이윤정은 서아린과 권하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붙잡자 이윤정의 날개가 두 사람을 포근히 감쌌다.
파앗-!
밝은 섬광이 번쩍이더니 세 사람은 거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해방되어라, 「암월」.”
신성한은 정도현에게 달려들며 전용 무기의 진명을 외쳤다.
「암월」. 칼로 벤 대상의 오감을 잠시 비틀어 현혹하는 능력.
다른 가주들처럼 상대에게 큰 데미지를 주는 능력은 아니지만, 잘 활용하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도 능히 제압할 수 있었다.
카각-!
암월의 칼날이 정도현의 비늘을 긁자 그의 시야가 암전됐다. 찰나였지만 시력을 빼앗겼다.
“…크륵?”
샤악-!
신성한은 눈먼 공격을 가뿐히 피하고 상대 주변을 빙빙 돌았다.
선제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길 생각으로 덤벼든 게 아니다.
사람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지.
‘놈의 지성이 떨어져서 천만다행이야.’
정도현이 주먹을 내지르고 발과 꼬릴 휘두를 때 발생하는 풍압.
거기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예리한 면도칼에 베인 듯 피부가 찢어졌다.
저 무지막지한 힘을 영리하게 다뤘다면 지금처럼 치고 빠지는 식의 꼼수는 못 썼을 터.
“크르르!”
감각 교란으로 공격이 자꾸 빗나가자, 정도현은 열 받았는지 늑대처럼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리곤 입을 쩍 벌려 마력을 모았다.
‘아까 쐈던 브레스 공격인가.’
신성한은 거릴 벌리며 내심 안도했다.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은 분명 재앙에 가깝지만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그러니 놈의 시선과 입의 방향만 파악하면 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위력이니 쓸 때마다 마력을 대량으로 소모하겠지.’
놈도 생명체인 이상 싸우면 싸울수록 지칠 터.
마력 고갈로 지치면 혹 숨통을 끊을 기회가 올지 모른다. 최소한 몸을 뺄 순 있겠지.
전투 양상은 내게 유리하다.
신성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도현의 다음 행동을 보기 전까지는.
“캬아아아!”
“……!?”
정도현이 고갤 젖혀 하늘로 브레스를 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괴이한 행동에 신성한의 머릿속이 잠시 얼어붙었다.
그것도 잠시.
정도현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리자, 상공으로 쏘아졌던 흑색 광선이 수백, 수천 갈래로 찢어져 빗방울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이 미친!”
신성한의 눈엔 마치 종말이 빗발치는 듯했다.
여러 갈래로 쪼개졌으니 본래의 브레스보다 분명 약해졌을 터.
문제는 그 약해진 파편조차도 신성한에겐 위험했다.
‘맞으면 치명상이다.’
신성한은 정도현을 너무 얕봤다.
놈은 지성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한다고.
녀석은 압도적인 힘을 지녔으니 잔머릴 굴릴 필요가 없던 것뿐이다.
무작위로 저리 마구 쏟아지는 공격을 일일이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막거나 버텨 낼 수도 없다.
한 대라도 맞으면 그는 죽는다.
“아…….”
신성한은 처음으로 느꼈다.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하지만 그는 떠올렸다.
자신을 믿고 관문으로 달려가고 있을 이들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1분 1초라도 더 버텨야 한다.
그러니 생각하고 생각했다.
피할 곳은 없다. 막아 낼 방도도 없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뭘까.
“…바친다.”
그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강한 두통이 머릿속을 헤집고, 시커먼 빗방울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우뚝 멎었다.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저 경이로운 괴물의 간격 안으로.
‘검강으로 찔러도 비늘엔 흠집밖에 안 났다.’
그렇게 새겨 넣은 생채기마저 수 초 안에 회복된다. 그렇다면 비늘로 덮여 있지 않은 곳을 찔러 주마.
놈의 눈동자. 그곳은 훤히 드러나 있다.
그의 검이 정도현의 눈가를 횡으로 베며 지나갔다.
흘러나온 핏방울이 무중력 공간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둥둥 떠다니다 멈췄다.
타앙-!
정도현의 양쪽 눈을 멀게 한 뒤 날개를 펼쳐 힘껏 도약했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날아올라 하늘로 솟구쳤다.
시간이 거의 다 됐는지 검은 광선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는 어떻게든 그 틈새로 피하며 지나갔다. 그렇게 브레스에서 벗어난 직후.
콰과과과광-!
미사일처럼 쏟아진 브레스에 지상이 불바다로 변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신성한은 겨우 숨을 돌렸다.
놈의 양쪽 눈을 베었고, 흑월로 마력을 감지하는 감각도 뒤틀었으니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채진 못할 터.
“크륵, 크아아아!”
성난 포효에 모래 안개가 멀리 떠밀려 사라졌다.
정도현은 자신이 쏜 브레스 폭격에 몸 곳곳이 뚫려 피투성이가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세 아물었다.
신성한은 실망하지 않았다.
‘놈의 호흡이 가빠졌다.’
브레스를 날리고 몸을 재생하느라 한순간에 마력을 대거 소모했겠지. 지치는 게 당연했다.
정도현은 눈가가 쓰라린지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꼬리에 불만을 가득 담아 땅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그것만으로도 살벌한 소리가 울리며 땅이 쩍쩍 갈라졌다.
“허억, 헉…….”
지친 건 정도현만이 아니다. 신성한의 호흡도 몇 배는 빨라졌다.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도 매스꺼웠다.
「시간 정지」를 하루에 몇 번이나 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급해서 무슨 기억을 바쳤는지도 모르겠군.’
바칠 기억을 택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멋대로 결정해 앗아 간다.
누구와의 추억이었는진 몰라도 10초 넘게 시간이 멈췄으니 그에겐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을 터.
“……!”
신성한은 지상을 살펴보다 누군가를 발견했다.
조예령과 신호영. 두 사람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신호영은 그렇다 쳐도 그녀는 분명 숨을 거뒀었는데. 어찌 살아난 걸까.
“안 돼, 오지 마라!”
그들을 본 신성한은 저도 모르게 소릴 내고 말았다.
자신조차도 「암월」로 시간을 조금 끌었던 게 고작이었다.
이제 와 저들이 합세한들 치워야 할 시체만 늘 뿐이다.
“…크륵?”
폭격에 죽었어야 할 신성한의 육성이 하늘에서 들려오자 정도현이 고갤 쳐들었다.
그리곤 말끔히 재생된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안 죽은 게 갸륵하다고 말하듯.
촤악-!
지금껏 가지런히 접혔던 용의 날개가 펼쳐지며 위용을 과시했다.
“설마……!”
놈이 바라보는 건 신성한의 불꽃 날개.
마치 어른이 하는 행동을 어린애가 보고 흉내 내듯. 정도현은 날개의 쓸모를 학습했다.
콰앙!
용의 날갯짓 한 번에 돌풍이 일며 하늘로 치솟았다.
그렇게 정도현과 신성한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
암흑용을 마주한 신성한은 검을 떨궜다. 그게 그의 최후였다.
콰드득-!
정도현의 손아귀에 목이 붙잡혀 그대로 뼈가 으스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단숨에 3레벨이나 올라 133레벨을 달성한 정도현. 친숙한 알림음에 그가 흠칫했다.
이지(理智)가 사라졌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잊고 있던 중요한 뭔가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가 혼란스러워할 때.
발밑에서 뜨거운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고갤 숙이자 불꽃 날개를 펄럭이며 달려드는 신호영과 조예령이 보였다.
그들 덕분에 정도현의 눈동자가 다시 투쟁심으로 사로잡혔다.
“크아아!”
그가 좋다고 소리치며 돌진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신호영 일행은 물론이고 정도현마저 흠칫하며 고갤 돌렸다.
새하얀 날개를 지닌 여인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