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갑자기 나타난 천사에 조예령은 입을 쩍 벌렸다.
승천자도 아닌 진짜 천사가 강림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상황을 살피려던 중. 그녀 옆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이윤정? 네가 왜?”
“아는 애야?”
신호영이 잘 아는 듯한 말투로 천사의 이름을 부르자 조예령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계로 추방됐던 그가 어찌 천사와 친분이 있단 말인가.
가주인 조예령조차 두 쌍의 날개를 지닌 천사 몇 명 본 게 전부인데.
그런데 저 천사의 날개는 무려 네 쌍이었다.
‘145레벨에 날개가 잔뜩 달린 거 보면 평범한 천사는 아닌데.’
어쩌면 저 여자가 천사들이 왕처럼 따르는 대천사란 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이윤정이 이쪽으로 고갤 돌려 바라봤다.
조예령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다행히 그녀의 입에선 다른 천사들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호영 오빠. 미안해요, 늦어서.”
“정말 너였군.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냐?”
“오, 오빠라니?”
둘의 대화에 조예령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뭘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걸 상기시켜 준 건 정도현의 포효였다.
“크워어어어!”
고작 소릴 질렀을 뿐인데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대기가 요동쳤다.
조예령이 귀를 틀어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저 괴물 녀석이 성한이의 목을 분질렀지.
으득-!
조예령이 이를 갈며 말했다.
“뭔진 몰라도 저 천사 우리 편이지?”
꽈르릉-!
조예령은 전용 무기를 해방해 도끼날에 뇌기를 담았다.
저 천사가 우릴 도와준다면 승산이 있었다.
그렇게 판단한 조예령이 달려들었지만 이윤정이 가로막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무길 거두세요.”
“뭐?”
“싸우면 안 돼요. 아직 안 늦었어요.”
“…안 늦었다니? 뭘 하려는지는 몰라도 저건 끔찍한 괴물이야! 안 죽이면 우리가 죽어!”
조예령이 그렇게 소리쳤지만 신호영도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분한 심정은 알겠지만 일단 물러나죠.”
“뭐?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네 아버지가 죽었잖아!”
“살릴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냉정해지세요.”
“…큭!”
그래, 부활 아이템이 있으니 살릴 수 있는 건 안다.
하지만 눈앞에서 소중한 친구가 죽었는데. 감정이 어떻게 바로 가라앉겠는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조예령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저 괴물한테 한 방 먹여 주고 싶었으나 신호영의 지시를 어기면 죽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도끼를 거두고 물러섰다.
이윤정은 둘에게 고맙단 눈빛을 보내곤 몸을 돌려 정도현을 바라봤다.
“크르르!”
그는 사냥을 방해한 그녀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동시에 경계심도 보였다.
메시아로 각성한 이윤정의 마력이 그 못지않게 방대해서만은 아니었다.
드래곤 하트로 그의 육신이 점차 용에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같은 태양신의 자손으로서 본능이 반응한 것이다.
저건 사냥감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포식자. 즉, 동등한 경쟁자란 것을.
“오빠, 정신 차려요. 그 힘에 잡아먹히면 안 돼요.”
당장이라도 그가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이윤정은 양손을 옆으로 벌린 채 우는 아이를 타이르는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도현의 적대감이 서서히 옅어졌다.
이게 바로 상위 천사들이 지닌 능력, 정신 감응의 힘이었다.
서로의 정신을 잠시 엮어 기억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
그렇기에 말이 안 통하는 몬스터와도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넌 누구냐?’
정신 감응에 성공하자 정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감정은 평소보다 난폭하고 분노가 물씬 느껴졌다.
게다가 이윤정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드래곤 하트에 본래의 의식이 밀려난 모양이다.
‘오빠, 진정해요. 전 적이 아니에요.’
‘싸울 의사가 없는 건 알았다. 네 정체를 밝혀라.’
적의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경계심은 느껴진다.
상처 입은 맹수가 사람과 마주친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전 오빠가 구해 줬던 혼혈 천사예요.’
‘구해 줬다고? 내가 널?’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에 그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윤정의 정신 감응으론 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그와 오래 알고 지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럴 줄 알고 그녀는 그들을 데려왔다.
‘오빠, 절 따라오세요. 기억나게 해 드릴게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서아린과 권하율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윤정이 왔던 방향으로 앞장서서 날아가자, 정도현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뒤따랐다.
* * *
쿵-!
정도현이 육중한 소릴 내며 착지하자 흙먼지가 확 일었다.
괴물로 변해 버린 그의 자태에 서아린과 권하율은 흠칫했다.
그래도 여기로 오면서 이윤정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기에 놀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서아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윤정,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지?”
“네. 오빠의 의식을 되돌리려면 언니들의 힘이 필요해요.”
“뭘 하면 되죠?”
권하율은 심장을 꺼내 달라고 하면 기꺼이 내어 줄 기세였다.
서아린도 이런 거론 지기 싫었는지 결연한 눈으로 이윤정을 쳐다봤다.
두 여자의 무거운 사랑에 이윤정은 바로 그거라면서 손뼉을 쳤다.
“정신 감응으로 언니들의 기억과 감정들을 오빠한테 흘려 넣을 거예요. 제 손을 붙잡고 오빠랑 행복했던 순간들을 강하게 떠올려 봐요. 아니면 미래에 오빠랑 뭘 같이 할지 상상해도 좋고요. 언니들의 사랑처럼 뜨겁고 강한 감정과 염원일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지니까…….”
“잠깐. 뭐, 뭘 한다고?”
서아린이 당황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권하율도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윤정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들에게 말했다.
“부끄러운 건 알겠지만 오빠를 구하기 위해서예요.”
“뭐, 뭐가?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
“…….”
서아린과 권하율이 손을 안 잡고 머뭇대자 이윤정은 쐐기를 박았다.
“빨리 안 하면 오빠의 의식이 용의 힘에 잠식당해 완전히 사라지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인간이 아닌 용으로 살아가야 할 터.
그 말에 두 여인도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고갤 끄덕였다.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 그러니 이깟 쪽팔림쯤 아무것도 아니다.
덥석.
그녀들이 이윤정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이윤정은 반대쪽 손으로 정도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서아린과 권하율의 마음 깊은 곳에 쌓인 기억과 애틋한 감정들이 이윤정을 거쳐, 거친 급류처럼 정도현의 머릿속으로 휘몰아쳤다.
“……!”
정도현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인상을 팍 썼다. 그러다 동공이 커졌다.
정신 감응이 극에 달하자, 그의 뇌리로 스며든 그녀들의 기억과 감정들을 토대로 심상 세계가 구축되었다.
* * *
‘여긴 어디지?’
정도현은 불현듯 눈을 떴다.
분명 전투하고 있었는데 언제 기절한 걸까.
그는 흐릿한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조예령과 싸웠고, 이겼었어.’
그가 마무리를 지으려던 순간. 갑자기 신성한이 끼어들어 실패했다.
그 직후, 언제 베였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쓰러졌다.
‘단순히 공격이 빨랐던 게 아니야.’
분명 개인 특성을 쓴 거겠지.
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반응은커녕 인지조차 못 하고 당했을까.
그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중 위화감을 느꼈다.
“…상처가 없어?”
정도현은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분명 급소란 급소는 다 찔렸는데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기절한 사이에 저절로 재생됐나? 아니면 누군가가 치료해 준 걸까.
‘나 말곤 신성한을 상대할 사람이 없는데.’
신호영과 남궁제. 그 둘이 협공했어도 이기긴 힘들 거다.
정도현도 그 남자의 개인 특성에 속절없이 당했으니까.
“근데 여긴 어디야?”
정도현은 너무도 조용한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그를 둘러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고 터널 안처럼 새카만 암흑의 공간.
“설마…….”
나 그때 죽은 거였어?
그럼 여기가 사후 세계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썰렁하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
지끈-!
돌연 머리가 아프더니 어디선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 오빠, 정신 차려요!]
“누구야?”
파아앗!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났다.
정도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잠시 뒤 빛이 꺼지며 정도현 앞으로 뭔가가 다가왔다.
그건 조그맣고 하얀 새였다.
하얀 새가 작은 날개를 파닥대며 그의 손바닥 위에 착지했다.
“너 뭐야?”
[오빠, 저예요. 이윤정.]
“…이윤정?”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 하지만 누구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도현의 석연치 않은 표정과 반응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침식이 거의 다 진행됐었네요. 조금만 늦었으면 돌이킬 수 없었을 거예요.]
“침식?”
[오빠는 드래곤 하트를 흡수했어요. 그것도 암흑룡, ‘이클립스’의 드래곤 하트를요.]
“이클립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었다.
그래, 암흑룡 이클립스. 세상의 멸망을 초래한다던 예언의 용. 분명 들어 봤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진 기억나질 않지만.
[옛 기억을 빨리 되찾지 못하면 오빠는 심상 세계에 영영 갇힐 거예요.]
“심상 세계? 여기가 심상 세계야?”
[네. 오빠의 무의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죠. 지금은 기억이 불완전해서 어둠 말곤 아무것도 없네요.]
내 모습이 조그만 새로 구현된 것도 아마 그 영향일 거다.
이윤정은 그리 말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오빠의 기억을 되찾으려면 강렬한 기억과 감정이 필요해요.]
“강렬한 기억과 감정? 하지만…….”
정도현은 아까부터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자신의 이름과 죽기 직전 뭘 했었는지 정도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정신 감응으로 오빠의 심상 세계에 개입할 거니까. 일단 제가 누군지부터 떠올려 보죠.]
파아앗-!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번쩍이더니, 어둠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여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독방.
그곳에 금발의 여인이 십자가 형태의 구속구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정도현의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서걱!
그의 검이 지나가자 쇠사슬이 엿가락처럼 끊어졌다.
속박에서 풀려나 바닥으로 자빠질 뻔한 그녀를 받아준 정도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제 기억을 토대로 심상 세계를 구현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거예요. 이제 제가 누군지 기억났죠?]
“어, 이제 기억나.”
여긴 교단 본부의 지하 실험실이다.
이윤정은 여기서 80년 가까이 갇혀 살았다. 눈과 날개를 뽑힌 채로.
기억의 일부가 돌아오자 조그만 새였던 이윤정이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사람의 기억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특히 구심점이 되는 핵심 기억을 떠올리면 다른 기억들도 연쇄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죠.]
“음, 그러네. 교단에서 겪은 일도 얼추 떠올랐어.”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스펀지처럼 기억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했다.
[괜찮아요. 오빠한테 보여 줄 기억은 더 있으니까.]
이윤정은 다시 심상 세계를 고쳤다. 이번엔 그녀가 아닌 서아린과 함께했던 추억들을 토대로.
이윤정보다 지낸 시간이 훨씬 길었기에 구축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교단의 지하 실험실이 무너지고 새로운 풍경으로 뒤바뀌었다.
좁고 퀴퀴한 반지하.
방구석에 상처투성이의 여인이 기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서아린?”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정도현의 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기억 복구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윤정은 다행이란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 표정이 경악으로 물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
정도현이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선 갑자기 입을 맞췄다.
정도현 본인도 왜 이러는지 몰라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윤정은 그제야 눈치챘다. 여긴 서아린의 기억과 감정을 빌려 구축한 심상 세계.
즉,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상상하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걸.
“어머…….”
둘의 입맞춤이 연인 못지않게 질척대고 격해져 가자, 이윤정은 보기 낯뜨거운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