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쿨럭, 큭…….”
한편, 신성한과 교전하다 「시간 정지」에 당해 쓰러진 신호영은 힘겹게 눈을 떴다.
‘내가 얼마나 기절했던 거지?’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가서 정도현을 도와야 한다.
급한 마음에 몸을 움직였더니 상처가 크게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태양신공」의 끈덕진 재생력이 아니었으면 죽어도 이상치 않을 중상이었다.
“제길…….”
신호영은 별수 없이 회복부터 하기로 했다.
다행히 정도현이 챙겨 준 최상급 회복 포션이 있었다.
치익, 치이익!
대여섯 병을 연거푸 마셔 대니 그제야 「태양신공」에 당한 상처도 조금씩 아물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아버진 어디로 사라진 거지?’
왜 자신을 마무리 짓지 않고 황급히 떠났을까.
그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파괴되어 무너진 성벽들, 여기저기 불이 나서 치솟는 시커먼 연기.
딱 전쟁터다운 풍경이었지만 정작 싸우는 사람들이 안 보였다.
“…전부 성 밖으로 빠져나갔나?”
그 말은 류씨 일가가 연합군을 몰아냈다는 건데. 아무래도 정도현이 아버지를 쓰러트린 듯싶었다.
그럼 다른 의문점이 생긴다.
강새벽이 꿨었던 예지몽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래가 바뀌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바꾸려 하지 않았었다. 그럼 정해진 대로 일어나야 할 텐데.
신호영은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러 성 밖으로 나갔다.
“……!”
무너진 성벽 근처에 익숙한 이가 쓰러져 있었다.
“남궁제!”
서둘러 달려가 확인해 봤지만 이미 숨이 끊어졌다.
부활 아이템은 갖고 있지만 그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정도현이 저번에 살렸으니까.
부활 아이템으로 되살아난 사람은 다신 부활할 수 없게 된다.
“…편히 쉬십시오.”
신호영은 짧게나마 명복을 빌어 줬다.
안타깝지만 주저앉아 추모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신호영은 파괴된 성벽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건…….”
또 다른 시신이 눈에 띄었다.
조씨 일가의 가주, 조예령.
그녀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숨을 거뒀다. 범인이야 뻔했다.
‘정도현이 죽였겠지.’
그 녀석이 아니고서야 죽일 만한 이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정도현은 가주 둘을 연달아 상대하고 있단 말인가.
‘진짜 괴물보다 더한 녀석이라니까.’
신호영은 인벤토리에서 부활 아이템을 꺼내 사용했다.
급하긴 해도 조예령은 살릴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음 관문을 지나려면 그녀가 지닌 가보도 필요하니까.
“으음…….”
상처가 빠르게 아물더니 조예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다 신호영을 발견하곤 흠칫했다.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신호영은 혹여나 그녀가 허튼짓 못 하도록 소원부터 빌었다.
“앞으로 저한테 전적으로 협조하시죠.”
“뭐, 뭐야 이거?”
시스템 문구가 떴는지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허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신호영 외엔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한 그녀는 그의 어깰 붙잡아 흔들며 질문을 퍼부었다.
“서, 성한이는?! 네 아빠 어딨어? 걔 무사한 거야? 무사한 거 맞지? 빨리 무사하다고 말해!”
“…모릅니다. 저도 기절했다 방금 깼으니까요.”
“아…….”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자 조예령은 불안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르면 내가 직접 확인하면 된다 생각했는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딘가에 처박혔던 도끼가 날아왔다.
그녀는 신호영한테 도끼를 겨누며 말했다.
“치료해 준 건 고맙지만 난 가 봐야겠어. 방해하면 죽일 거야.”
“그 몸으로 싸울 겁니까?”
조예령이 부활하면서 내, 외상은 전부 나았으나 남은 체력은 빈사 상태.
싸우긴커녕 움직이기도 버거울 터였다.
그러니 신호영한테 덤비는 건 자살 행위.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싸우려 했다.
신성한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관두세요. 절 공격하려 들면 죽습니다.”
“뭐? 그게 무슨… 어, 어? 이건 또 뭐야?”
“경고창에 적힌 내용 그대롭니다. 저한테 협조하지 않으면 시스템 페널티로 사망합니다.”
처음 겪어 본 일에 조예령은 반쯤 얼이 빠졌다.
그녀 손에 들린 도끼도 어쩔 줄 몰라서 이리저리 방황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세요. 안 그럼 페널티가 발동할 겁니다.”
“자, 잠깐만! 말해 줘도 어차피 난 죽어!”
조예령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침입자들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는 건 명백한 반역 행위.
그럼 천사들과 맺었던 피의 맹약이 발동할 거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피의 맹약은 이미 풀렸으니까요.”
“뭐?”
“당신은 한 번 죽고 살아났습니다. 죽으면 피의 맹약도 사라집니다.”
“…뭔 개소리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난단 말인가.
그녀가 안 믿어 주자 그는 부활 아이템을 꺼내 보여 줬다.
그녀도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럼… 이제 그 자식들 말 들을 필요 없는 거네?”
그녀는 앓던 이를 뽑아낸 듯 해맑게 웃었다.
피의 맹약만 없으면 더는 천사들한테 머리 안 숙여도 되니까.
그녀는 신호영이 내어 준 포션을 받아 마시곤 묻는 말에 술술 대답했다.
“정도현이랑 싸웠는데 내가 졌어. 젊은 놈이 더럽게 세더라고.”
“아버지는 봤습니까?”
“응. 당하기 직전에 끼어들어서 날 구해 줬어. 그리고 정도현도 순식간에 쓰러트렸고.”
“…정도현이 당했다고요?”
녀석이 당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당할 놈이 아닌데.
“아버지의 개인 특성, 뭡니까?”
“…어?”
“아버지한테 개인 특성이 있단 건 눈치챘습니다. 무슨 능력인진 모르겠지만요.”
“그, 글쎄? 난 모르겠는데.”
“알고 있는 거 다 말하세요.”
“…윽!”
조예령은 머릴 긁적이며 모른 체하려다 딱 걸렸다.
사람은 거짓말로 속여도 시스템을 속이진 못하니까.
조예령은 울상을 지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는데.
“그게, 시간을 잠깐 멈추는 거야. 추억을 대가로 바쳐서.”
“…그런 거였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성벽의 결계가 한순간에 깨진 것도.
자신과 남궁제를 상대하던 중 돌연 사라지더니, 그들의 급소가 몇 번이나 베였던 것도.
전부 시간을 멈췄기에 가능한 거였다.
아무리 정도현이라도 시간을 멈춰 버리면 손쓸 도리가 없었을 터.
그런 능력을 여태 숨기고 있었다니. 낭패였다.
“그 둘. 여기서 싸웠습니까?”
“응? 싸웠다고 해야 하나……. 정도현이 피 흘리며 쓰러진 건 봤어. 분명 죽었을걸?”
“그런데 시체는 없군요.”
“…어? 진짜네? 성한이가 들고 갔나?”
아버지가 흑마법사도 아니고 전쟁 중에 시체를 챙겼을 린 없다.
정황상 정도현은 안 죽고 이곳을 벗어난 거겠지.
“그보다 병사들도 안 보이는데?”
“성안에도 없었습니다.”
“뭐야. 이것들 다 어디로 튀었어?”
둘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예상이 안 가 잠시 침묵하던 바로 그때.
쿠우웅-!
멀리서 무지막지한 마력이 느껴졌다.
신호영과 조예령은 저도 모르게 어깰 움츠렸다.
“바, 방금 뭐야? 누구 마력이지?”
“…모르겠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을 만큼 흉흉하고 거대한 마력. 보스 몬스터가 내뿜는 기운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차원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는 낙원에 보스 몬스터가 있을 리 만무할 터.
‘설마?’
당장 저만한 마력을 내뿜을 존재를 떠올린다면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정도현, 너 또 뭔 짓을 한 거냐?’
신호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급히 달렸다. 조예령이 같이 가자며 따라갔다.
* * *
“으, 으아악! 살려 줘!”
뒤처졌던 연합군 병사가 넘어지며 괴물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그걸로 그의 운명은 끝이었다.
우득, 콰지직-!
폭주한 정도현이 병사를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절단되며 피와 내장이 마구 쏟아졌다.
정도현. 아니, 이제 정도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괴물은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몇 명이나 찢어 죽였는데도 만족 못 한 듯했다.
‘덩치가 더 커졌다.’
충성스러운 수호자를 둔 덕에 선두에서 달아나던 신성한은 정도현의 변화를 쭉 지켜봤다.
몸집이 두어 배 커졌다.
그나마 인간으로 보였던 얼굴과 체형이 점점 날개 달린 리자드맨에 가까워져 갔다.
더 무서운 건 지금도 조금씩 커져 가고 있단 거다.
“캬아아아!”
정도현은 술래잡기에 싫증이 났는지 멈춰 서선 아가릴 쩍 벌리고 마력을 모았다.
놈이 저러는 이유를 눈치챈 신성한이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옆으로 엎드려!”
그의 외침에 대부분 몸을 힘껏 내던졌다.
다만 몇몇은 의문을 품었고 동작이 조금 늦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콰아아아-!
정도현 입에서 쏘아진 시커먼 광선.
굼뜬 병사들은 거기에 닿았고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광선은 그대로 선두를 제치고 쭉 뻗어가 산맥과 충돌했다.
꽈아앙-!
짧고 굵은 폭발음.
세상의 색이란 색은 모조리 빨아들인 듯이 새까만 버섯구름이 피었다.
험준한 산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분화구처럼 구덩이가 자리 잡았다.
산맥 뒤에 숨어 있던 관문과 장벽이 이젠 훤히 보였다.
“미, 미친!”
“으, 으아아…….”
연합군과 류씨 일가.
너 나 할 것 없이 정도현의 힘 앞에 공포로 물들었다.
류중현은 아예 엉덩방아까지 찧고 오들오들 떨었다.
정도현은 죽음의 공포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자신은 발악조차 할 수 없단 무력감.
야속하게도 하늘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 강요했다.
그래, 저건 살아 움직이는 자연자해였다. 인간이 어찌 자연을 거스르겠는가.
마음이 뚝 부러진 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류중현. 회복 포션이 있다면 넘겨라.”
“뭐, 뭐라고?”
신성한의 뻔뻔한 요구에 류중현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정도현이 챙겨 준 포션은 남았으나 적한테 건넬 포션은 한 병도 없다.
그 속내를 읽었는지 신성한이 한심하단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 녀석한테 전부 죽고 싶나?”
“…….”
“나 말곤 싸울 사람도 없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었다.
류중현과 수호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가주 중 명실상부 최강자인 신성한이라면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성한이 이겨도 문제였다.
“…누가 이기든 어차피 우린 죽어.”
사냥감으로 죽든, 배신자로서 죽든.
그들에게 닥칠 결과는 같았다.
그 말에 신성한은 두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
“그럼 날 따라온 이들은 다 죽어 마땅하단 거냐? 저들이 너희한테 뭐 그리 잘못했지?”
“그, 그건…….”
“난 가주로서 저 괴물을 막을 거다. 내겐 저들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으니까.”
류중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성한과 조예령을 따라 전쟁터로 끌려온 이들.
아무리 적이라도 죽어 마땅한 존재인가 묻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류중현은 인벤토리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냈다.
“…하, 알았어. 알았다고! 죽을 때까지 찌질하게 굴지 말라 이거지?”
“이해해 줘서 고맙다.”
과연 최상급 포션답게 텅 빈 체내에 활력이 샘솟았다. 신성한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너흰 관문을 넘어가라.”
“…뭐?”
“서둘러.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
신성한은 그리 말하곤 괴물에게 걸어갔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우렁차게 포효하던 정도현은 사냥감이 제 발로 다가오자 고갤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망가뜨릴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악동처럼 섬뜩하게 웃었다.
“캬아아아!”
정도현과 신성한이 동시에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