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가주들이 먹잇감이라고?”
팽철연은 정도현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남은 가주는 제갈성과 남궁제.
제갈성의 진법은 까다롭긴 해도 전체적인 무력 면에선 팽철연보다 뒤떨어졌다.
그러니 정도현 입장에선 그리 무서운 대상은 아닐 터.
하지만 남궁제는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팽철연은 젊은이 특유의 치기라 생각하고 정도현을 설득했다.
“자네가 강한 건 잘 아네. 하지만 남궁제와 혼자 싸우는 건 너무 무모해. 기사단의 힘이 필요할 걸세.”
“괜찮다니까. 오히려 그쪽 입장에선 나 혼자 싸우는 편이 낫잖아?”
기사단을 동원해 남궁제와 전면전을 치르면 필시 사상자가 발생할 테니까.
가문 사람들을 애지중지 여기는 팽철연 입장에서 그런 그림은 원치 않을 터.
게다가 정도현 혼자 무리해서 싸우다 죽기라도 하면 팽철연은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럴 터인데.
“…….”
팽철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정도현이 남궁제 손에 죽으면 가문과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걸리는 점도 있었다.
정도현한테 가문을 송두리째 뺏긴 걸 남궁제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그럼 하북팽가의 명예와 위신이 떨어진다. 남궁제가 그걸 약점 삼아서 뭘 요구할지도 모르고.
“이 상황에서 그런 걸 걱정한다고?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겠지. 자네와 우린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뭐, 알겠는데. 내가 너희 사정을 일일이 배려해 줄 필요 없잖아?”
정도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다른 가주들 불러낼 수 있어, 없어?”
* * *
남궁제와 제갈성은 팽철연한테서 긴급 연락을 받았다.
남궁제는 최측근들을 불러 모아 얘기했다.
“팽철연이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나와 제갈성을 불러냈네. 거기에 호위도 최소한으로 데리고 오라더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상당히 수상쩍군요.”
“설마 가주님을 노리는 걸까요?”
최측근들이 너도나도 우려를 표하자 남궁제는 피식 웃었다.
“팽철연이 내 목을 노린다라…….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재밌겠군. 「금강불괴」를 완성한 그는 얼마나 강할까.”
“가주님, 쉬이 정할 일은 아닙니다.”
평소 같았으면 가주들끼리 논할 기밀 사항이 있겠거니 하고 넘겼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북해빙궁과 사천당가. 두 곳 다 언노운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궤멸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게 뭐 어쨌단 거지?”
“어쩌면 하북팽가의 가주가……. 그자와 내통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남궁세가를 몰아내고 자신이 패권을 차지할 생각으로.
기사단장의 추측에 최측근들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저 말이 사실이면 팽철연이 남궁제의 목숨을 노린다는 뜻이니까.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잖나. 그러니 다들 너무 열 올리지 말게.”
남궁제의 한마디에 최측근들의 소란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불안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역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함정이라기엔 너무 뻔하다고. 날 노릴 거면 이리 허술하게 함정을 팠겠나?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남궁제를 그리 우습게 본다고?”
“그,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남궁제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설사 팽철연이 기사단을 이끌고 기다린들 남궁제라면 능히 포위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는 B구역을 다스리는 제왕이니까.
교황과 성녀, 5대 가주들, 팔라딘과 대형 길드장들까지.
전부 그의 검 아래에 있었다.
나이를 먹고 전성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감히 대적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괴물. 그게 바로 남궁제니까.
“그럼 저와 정예 기사들 몇이라도 대동하시지요.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흠. 내가 자릴 비웠을 때 빈집을 노리는 걸지도 모른다만. 자네들이라도 여길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가문보다 가주님의 안위가 훨씬 중요합니다.”
충직하기 그지없는 기사단장의 대답에 남궁제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알겠네.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건 제왕의 방식이 아니지.”
남궁제가 기어코 팽철연을 만나러 가겠다 하자, 가문에 남겨질 최측근들은 애써 불안감을 삼켰다.
기사단장의 말대로 상대의 노림수가 빈집털이일지 모르니까.
이러다 북해빙궁과 같은 꼴이 나진 않을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가주가 내린 결정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순 없었다.
“아. 만약 적습이 와서 가문이 위험해지면 기사단은 그걸 써도 좋다.”
남궁제가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그렇게 말하자, 최측근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가 허용한 건 남궁세가의 숨겨진 비기였다.
그걸 사용하면 남궁제가 자릴 비우더라도 능히 하북팽가의 무인들을 상대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숨겨진 비기는 양날의 검.
여태 사용하질 못하고 꽁꽁 감춰 뒀던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 알려지면 가문은 끝이다.’
뭐라 변명할 여지도 없이 교단의 공적으로 낙인찍힐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남궁세가가 지금껏 누려 온 영예와 권력 전부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사라져 버리겠지.
* * *
남궁제와 제갈성은 팽철연이 불러낸 장소에 도착했다.
하북팽가의 사유지 변방에 숨겨진 별장이었다.
“너흰 여기서 대기해라.”
“예.”
남궁제의 명령에 기사단장과 정예 기사들은 군소리 없이 별장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제갈성도 자신의 호위들에게 대기하라 명한 뒤, 남궁제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남궁제 옆에서 발맞춰 걷던 제갈성은 가문의 신기인 은빛 깃털 부채를 팔랑대며 말했다.
“가주님, 아무래도 함정이지 않겠습니까?”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팽철연이 가문을 비우면서까지 저흴 이런 곳으로 불러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최근 벌어진 사건들로 불안에 빠져 가문을 지키겠다고 말한 양반이다.
그런데 이런 외진 곳에서 자신들을 불러낸다? 며칠 전 언동과 앞뒤가 안 맞았다.
며칠 사이에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니면 말이다.
“그래, 분명 함정이겠지. 팽철연 그 친구가 언노운과 손잡았다고 생각하네.”
“그럼 가주님은 함정인 걸 알면서도 오신 겁니까? 저야 가주님께서 가신다니 응했지만…….”
팽철연의 속내를 몰랐다면 모를까. 굳이 알면서 걸려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갈성의 질문에 남궁제가 씩 웃으며 이유를 털어놨다.
“자넨 궁금하지 않은가? 북해빙궁을 멸문시킨 괴물이 얼마나 강할지.”
“…….”
그의 답변에 제갈성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어색하게 웃었다.
남궁제는 이런 남자였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위험한 불구덩이로 불쑥 뛰어든다.
그리고 그걸 헤쳐 나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만끽한다.
위기 속에서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한계를 넘나드는 그였기에.
가주 중에서도 레벨이 가장 높았다.
무려 138레벨. 영광의 일족들을 제외하면 인류의 정점이나 다름없었다.
“말년에 재미난 상대가 나타났어.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구먼.”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남궁제는 그리 중얼대며 당당히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확신했다. 오랜만에 피 튀기는 전투를 치를 수 있겠다고. 남궁제가 입맛을 다셨다.
끼이익-!
정문이 저절로 열렸다.
변방에 숨겨 둔 별장이었지만 어지간한 대저택 못지않게 넓었다.
남궁제는 내부를 둘러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팽철연, 그 친구가 왜 이런데 별장을 세웠나 했더니. 대련장으로 쓰고 있었군.”
바닥 군데군데 미세한 칼자국과 마력의 잔흔이 느껴진다.
하북팽가의 무인들은 분쟁이나 문제가 생기면 저들끼리 결투해 승자의 말에 따른다더니.
여기가 소문의 결투장인 모양.
“애간장 그만 태우고 나오게.”
남궁제가 천공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확성 마법이라도 쓴 듯 건물 전체가 울렸다.
잠시 뒤, 위층 계단에서 팽철연이 내려왔다. 옆에 웬 남자를 데리고서.
“호오…….”
팽철연의 일행을 본 남궁제는 짧게 감탄했다.
상당히 젊지만 고수다. 지금껏 그가 상대해 본 자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저 남자가 설유천과 북해빙궁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가주님, 팽철연의 레벨이 떨어졌습니다.”
“음?”
정말이었다. 팽철연의 레벨이 3이나 줄어들어 132가 되어 있었다.
옆의 남자에게 정신이 팔렸던 남궁제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레벨이 줄어들다니……. 혹 본인이 아닌 걸까요?”
“아니. 본인인 건 맞아. 변장 아이템도 본래의 마력만큼은 감출 수 없으니.”
남궁제는 팽철연과 몇 번이고 비무를 치러 봤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그의 레벨이 왜 줄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남았다.
남궁제가 반갑게 웃으며 질문했다.
“팽철연. 자네 옆의 젊은 친구가 최근 사건들의 범인, 언노운인가?”
그 질문에 팽철연은 옆의 남자를 슬쩍 쳐다봤다. 마치 상관 눈치를 살피는 하급자처럼.
의문의 남자는 상관없단 듯 고갤 한 번 끄덕인다. 그제야 팽철연도 질문에 답했다.
“범인은 맞다. 하지만 언노운은 아니다.”
“흐음. 언노운이 아니라고? 뭐, 그건 상관없지. 그보다 자네가 범인과 같이 있다는 건, 손을 잡고 날 치겠단 거겠지. 그게 아니면 해명해 보게.”
“손을 잡은 게 아니다.”
“그럼?”
“나는 이 사내에게 졌다. 패자는 승자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조건을 걸었었지. 자네들과 만날 수 있게 자릴 마련해 달라더군.”
제갈성은 고갤 갸웃했다. 팽철연이 저 젊은이한테 패했다니.
아무리 그래도 레벨 차이가 몇인데.
“재밌군. 젊고 레벨도 그리 높지 않은데 자넬 이겼다니. 영광의 일족은 영약을 밥 먹듯이 먹기라도 하나?”
남궁제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놀랍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자연적으로 탄생한 게 아니라 연단술로 만들어 낸 양산형 영약이긴 했지만.
원본보다 효능은 좀 떨어져도 물량으로 극복했다.
물론 그걸 여기 있는 이들이 알 방법은 없었다.
“젊은 친구, 이름은?”
“정도현.”
계단을 내려온 젊은 사내, 정도현이 정체를 밝히며 검을 느긋이 뽑았다.
“당신이 그렇게 강하다면서?”
“…음?”
당연하고도 당돌한 질문에 남궁제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그가 껄껄 웃었다.
파지직-!
몸 곳곳에 노란 뇌전이 일었다.
살벌한 스파크 튀는 소리에 그의 웃음이 파묻혔다.
“재밌는 녀석이로구나. 정도현, 그 이름 내 평생 기억하마.”
남궁제는 「천뢰제왕신공」을 극성으로 펼치며 검을 휘둘렀다.
꽈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벼락 모양의 검강이 광선처럼 쏘아졌다.
정도현도 검강을 끌어 올려 반월참을 날려 응수했다.
콰앙-!
서로의 검강이 부딪혀 반발하다 터졌다.
그 폭발음은 전투 개시의 신호탄이었다.
팟-!
두 사람이 섬광처럼 변해 팽이처럼 이리저리 움직여 대며 충돌했다. 그 여파만으로도 건물이 뒤흔들렸다.
“이, 이건 대체……?”
제갈성은 제 눈을 의심했다.
둘 다 너무 빨라서 또렷이 보이진 않으나, 정도현이 남궁제의 움직임을 따라오고 있었다.
B구역의 제왕과 호각이라니.
저 젊은 나이에, 그것도 122레벨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반응이 제법이구나!”
그러나 남궁제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으니까.
그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상대를 만났다.
“네 모든 걸 내게 보여 봐라!”
남궁제가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혜성의 꼬리처럼 노란 잔상을 남기며 그가 지그재그로 정도현 주위를 돌았다.
채재재쟁, 콰르릉-!
정신없이 파고드는 칼날과 벼락 광선.
칼날을 막으면 뒤에서 벼락이 날아들고, 그걸 피하면 다시 코앞으로 참격이 쇄도해 왔다.
보통의 플레이어였으면 진즉 목이 달아났으리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
채앵, 스스스!
정도현은 상대의 칼날을 가볍게 쳐 내 튕겨 내고, 사방에서 쏘아진 벼락은 모조리 흡수했다.
기세 좋게 몰아붙이던 남궁제도 이번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도현은 방금 흡수한 뇌기를 자신의 검강에 보태며 말했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비장의 수든 뭐든 빨리 꺼내.”
“큭, 큭큭……. 크하하핫!”
남궁제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탁 치며 웃음보를 터트렸다.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제왕검이라 불리는 자신을 상대로 뭐 더 없냐 보채다니.
“좀 더 일찍 태어나지 그랬느냐. 그랬으면 내 인생 최고의 결투가 되었을 터인데.”
“늙어서 자신 없냐?”
“아니! 보여 주겠다. 내 진정한 힘을.”
남궁제가 자신 있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의 변화를 지켜보던 제갈성과 팽철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