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팽철연은 사태 파악이 잘 안 돼서 팽윤도를 쳐다봤다.
하지만 팽윤도는 뭐라 할 말이 없는지 고갤 푹 숙였다.
팽철연은 그 옆의 정도현을 바라봤다.
위장 아이템으로 이름은 가려졌지만 정체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팽윤도가 어디서 누굴 만났는지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자넨… 정도현인가?”
“정답.”
정도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팽철연과 싸울 생각으로 왔으니까.
“보아하니 대화나 하러 온 것 같진 않군. 자네 목적이 뭔가? 팽윤도는 어쩌다 자네한테 붙었고?”
“가주님께서 궁금한 게 많으시단다. 뭐 해? 설명해 드려야지.”
정도현은 팽윤도의 등을 툭 치며 앞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팽윤도가 쭈뼛거리며 무슨 일을 겪었는지 털어놨다.
“가, 가주님! 저는 이 남자한테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예! 그런데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기다 피의 맹약처럼 웬 이상한 제약이 붙어서 이놈 명령엔 무조건 따라야만 합니다…….”
“…흐음.”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 상당히 놀랍지만 못 믿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성녀도 부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개인 특성인가.’
정도현은 역시 개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성장 속도가 빠르길래 당연히 전투와 연관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판이었던 모양이다.
‘사령술사처럼 죽은 자를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인가.’
불완전한 언데드가 아닌 진짜로 살려 내는 게 말도 안 되지만, 개인 특성이니 가능할 법도 했다.
제약이나 한계는 모르겠지만 활용 여하에 따라선 정말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만약, 어느 조직의 수괴를 죽인다면 그 조직을 통째로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날 죽이면 하북팽가를 차지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거군.’
팽철연은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정도현도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가볍게 말아 쥐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팽철연은 무기를 뽑기 전에 질문했다.
“셋이서 덤비면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셋은 무슨, 나 혼자면 충분한데.”
정도현이 여유를 부리자 팽철연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제대로 무시당했다. 팽철연은 꾹 참고 질문했다.
정도현의 개인 특성은 손에 넣을 가치가 있으니까.
“정도현, 가문의 일원이 될 생각은 없는가?”
“응. 없어.”
“그래, 날 죽인 뒤 이 가문을 집어삼키고 싶겠지.”
정도현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걸로도 의미 전달은 충분했다. 협상은 끝이다.
팽철연은 고갤 선선히 끄덕이며 말했다.
“장소를 옮기지. 내 손으로 본가를 불태우긴 싫거든.”
“마음대로 해.”
“자신만만하군. 따라와라.”
* * *
팽철연은 가문의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몇몇 기사들이 훈련 중이었으나, 팽철연은 그들에게 돌아가라 명했다.
가주의 명령이었기에 기사들은 군소리 없이 떠났다.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연무장.
정도현과 팽철연은 적당히 거릴 벌린 채 서로를 쳐다봤다.
“혼자 싸우게? 기사들이랑 같이 덤벼도 난 상관없는데.”
“꽤 신중하다 생각했다만 결국 F구역 출신이구나. 분수와 정도를 몰라.”
120레벨이 가문의 정예 기사인 팽윤도를 쓰러트린 건 인정한다. 박수갈채를 받아야 할 업적이겠지.
하지만 거기에 취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덤벼드는 꼴이라니.
그의 무모함에 팽철연은 혀를 끌끌 찼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로다.
“그거 아는가? 팽윤도는 정예 기사지만 가문의 두 가지 비기 중 하나밖에 못 익혔다네.”
도를 잘 다루고 육체도 튼튼했으나, 가문의 비기 중 하나인 염화도(炎火刀)는 익히지 못했다.
팽윤도의 신체와 불의 마력의 궁합이 잘 맞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다른 정예 기사들과 비교하면 반쪽짜리였다.
“기사 중에서 몸은 가장 튼튼하나, 염화도를 다루질 못하니 결정타를 날릴 힘은 부족하지.”
“그래서?”
“팽윤도를 이겼다 해서 우리 가문을 얕보지 말아 달란 걸세.”
“아, 저 녀석은 우리 중에서 최약체다. 뭐, 그런 뜻이야?”
정도현이 비꼬듯 되묻자 팽철연은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칼날에서 장미잎처럼 새빨간 불꽃이 치솟았다. 맹렬히 타오르는 태도(太刀).
열기가 번져 나가며 연무장 전체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남김없이 잿더미로 만들어 주겠네.”
팽철연이 그렇게 통보하곤 힘껏 땅을 내리찍었다. 칼날이 바닥에 박히자 땅이 쩍쩍 갈라지면서 작열했다.
치이익-!
땡볕 아래 사막보다 더한 뜨거움이 전해졌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던 진규현과 팽윤도마저 무사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발바닥이 따갑고 땀이 뻘뻘 났다.
“미친…….”
진규현은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헉헉댔다. 여파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아이스크림처럼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도현은 이 열기 속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경이로웠다.
팽철연도 믿기지 않는지 정도현을 빤히 쳐다봤다.
“…대단하군. 어지간한 정예 기사들도 호흡은 흐트러지는데.”
“뜨뜻하네. 누워서 낮잠 자고 싶을 정도로.”
정도현이 검을 뽑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한서불침」이 있는 그에게 이 정도 열기쯤은 버틸 만했다.
정도현과 팽철연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콰앙-!
서로의 칼이 맞부딪히며 시끄러운 폭발이 일었다.
활활 치솟는 불길 속에서 둘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방을 주고받는다.
충격파에 떠밀려 사방으로 열풍이 불어닥쳤다.
‘이럴 수가?’
팽철연은 정도현의 걸음과 움직임에서 잘 정돈된 형(形)을 느꼈다.
이건 틀림없는 무공이다.
녀석이 무공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하지만 F구역 출신이 어떻게?
“네놈, 어떻게 심법과 보법을 다루는 거냐!?”
“놀랐어? 더 재밌는 거 보여 줄까?”
정도현이 호흡의 흐름을 확 바꿨다.
그러자 평범한 검강이 들끓으며 푸른 불꽃으로 변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팽철연의 칼날에 담긴 화염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마치 하나로 합쳐지듯.
“무슨!”
자신의 마력을 빼앗긴 팽철연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서로의 칼날이 멀어지자 마력 흡수도 중단됐다.
화르륵-!
그래도 그사이에 제법 힘을 먹어 치웠는지 창백한 화염은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화염의 검강이라니, 그런 건 본 적 없다!”
게다가 어중간한 수준이 아니다.
그도 화염의 기운을 다루는 심법을 익혔기에 알 수 있었다.
정도현이 사용하는 심법의 완성도는 하북팽가의 「염화신공」과 맞먹는다.
“본 적 없으면 오늘 실컷 봐 둬.”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팽철연은 다급히 상대의 검로를 끊거나 비틀어 공격을 버텨 냈다.
확실히 노련했다. 하지만 정도현도 그 못지않게 검을 능숙히 다뤘다.
카각-!
상대의 움직임을 역으로 읽어 내 조금씩 우위를 점한다.
바둑에서 상대가 지은 집의 약점을 차근차근 공략해 무너뜨리며 유리한 형세를 취하듯이.
“…큭!”
칼날, 불꽃, 열기. 그것들을 적절히 이용하며 압박했다.
정도현의 현란한 칼 솜씨는 제왕검이라 불리는 남궁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저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이루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남궁제가 정도현의 탈을 쓰고 있다고 얘기해도 믿어 버릴 것만 같았다.
카앙, 쾅-!
정도현은 검의 경로를 부드럽게 비틀고 꺾으며 팽철연의 허를 찔렀다. 아슬아슬하게 막아 냈지만 폭발에 떠밀리며 휘청댔다.
정도현은 노인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몰아쳤다.
힘차면서도 유연하고 또한 빈틈없는 공세에 팽철연은 점차 궁지로 몰렸다.
“…컥!”
정도현의 칼날이 상대의 도를 짓눌러 땅바닥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훤히 드러난 가슴팍에 철권이 꽂혔다.
팽철연이 핏물을 뿜으며 뒤로 밀려났다.
카가각-!
바닥에 칼을 쑤셔서 겨우 멈춰 선 그.
정도현은 여유롭게 검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가문의 비기가 뭐 어쨌다고?”
뿌득-!
완전히 무시당했다. 화력만 따지면 남궁세가의 천뢰제왕검마저 뛰어넘는 가문 제일의 절기가 F구역 출신 떨거지한테 말이다.
그 모멸감에 팽철연의 눈이 홱 돌아갔다.
“망할 애송이가… 시건방 떨지 마라!”
팽철연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런데 체내 마력의 흐름이 달라졌다.
동시에 활활 타오르던 칼날의 불꽃도 연기를 내뿜으며 꺼졌다.
대신 그의 근육이 크게 부풀고 꿈틀댔다. 그러더니 피부가 마치 석탄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그 기묘한 변화에 구경하던 진규현은 옆에 있던 팽윤도의 어깰 흔들며 질문했다.
“야, 저건 또 뭐야?”
“큭큭! 저건 가주님께서 완성하신 「금강불괴」다. 하북팽가의 또 다른 비기지.”
“…「금강불괴」?”
“그래. 병장기는 물론이고 검기마저 역으로 깨부술 정도로 육체가 단단해진다. 검강 정도는 돼야 생채기가 나지.”
팽윤도가 신난 얼굴로 「금강불괴」의 효능을 설명했다.
팽철연이 비장의 패를 꺼낸 이상 절대 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도현이 지금 죽으면 자신도 자유의 몸이 될 터.
휙.
팽철연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금강불괴」를 펼친 상태론 무기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별 상관없다.
「금강불괴」로 단단해진 육신은 부러지지 않는 무기나 다름없으니까.
팽철연은 넘쳐흐르는 힘과 견고함을 만끽하며 말했다.
“날 여기까지 몰아세운 건 네놈이 두 번째다.”
“그래? 첫 번째는 누군데?”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제. 그 사내였지.”
“그 녀석이 너보다 세냐?”
“십수 년 전엔 내가 졌었다. 하지만 다시 싸운다면 이길지도 모르지. 보다시피 난 「금강불괴」를 완성했으니까.”
“흐음.”
정도현은 남궁세가도 정복할 계획이었기에 남궁제의 강함에 관심이 생겼다.
불완전한 「금강불괴」를 뚫고 이겼을 정도면 지금 눈앞의 팽철연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 터.
‘걔도 잡으면 경험치 짭짤하겠네.’
정도현이 한눈파는 걸 알아챘는지 팽철연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이 건방진! 뭉개 주마!”
투웅, 콰앙-!
그가 지면을 박차자 바닥이 갈라지며 돌풍이 휘몰아쳤다.
시커먼 주먹이 얼굴로 뻗어 왔다.
정도현은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그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했으니까.
“…윽!”
이전까지는 팽팽했던 힘겨루기가 이번엔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정도현이 뒤로 쭉 밀려났다. 발치 아래 땅이 푹 파이며 길쭉한 고랑이 두 개 생겼다.
검강을 밀어낸 주먹은 단단했고, 완력도 어마어마하게 상승했다. 받아친 손목이 욱신거렸다.
“크아아아!”
팽철연이 공세를 이어 갔다.
타다다당-!
하북팽가는 도만 잘 다루는 게 아니다.
권각술도 그 못지않게 뛰어났다.
팽철연은 주먹과 발차기를 마구 날리며 정도현을 몰아세웠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도 힘 자체가 엄청났기에 전기에 감전된 듯 손끝이 저릿했다.
“크하하핫!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구나!”
쾅-!
회심의 발차기가 정도현의 칼날을 후려쳤다. 정도현의 검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깨졌다.
검강을 박살 낸 발차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쿠당탕!
정도현은 저 멀리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호숫가 위를 참방참방 뛰노는 물수제비처럼 그가 굴러간다.
팽철연은 씩 웃으며 제 승리를 확신했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
그런데 쓰러진 정도현이 일어났다.
크게 다쳐서 비척대는 게 아니라, 마치 멀쩡한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올곧게.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금강불괴」가 담긴 발차기였다. 내장이 진탕되어야 정상일 터.
“…어떻게?”
“아, 방어구가 망가졌네.”
후두둑.
정도현의 갑옷에 큰 균열이 생기더니 일부가 흘러내렸다.
휑하게 드러난 그의 복부.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너, 너 어떻게……?!”
정도현의 복부가 검은색이었다.
「금강불괴」다. 심지어 팽철연의 피부보다 색채가 훨씬 진했다.
“네, 네놈이 어떻게 「금강불괴」를 다루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