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윤정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났고. 서아린과 권하율이 번갈아 가며 거의 매일 같이 그의 집을 들렀으며 거기에 익숙해졌을 때쯤.
B구역에서 웬 불청객이 찾아왔다.
[팽윤도] [LV.127]
“정말로 120레벨이군.”
그를 찾아온 건 하북팽가의 기사였다.
저번에 상대했던 팽도철과 맞먹는 거구. 구릿빛 피부에 크고 작은 근육들이 꽉 들어찬 사내였다.
레벨로 보아하니 정예급 기사 같았다.
“어쩐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자네, 이번에 관리국에 레벨 갱신을 했더군. 그것도 비공개로.”
“예. 남들 관심을 받는 건 좀 거북해서요.”
플레이어들은 분기마다 관리국을 찾아가 자신의 레벨을 갱신한다.
그중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레벨이 올라간 경우엔 다른 플레이어를 살해했는지를 알아본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카인의 목걸이로 킬 카운트만 확인해 보면 되니까.
물론 정도현은 킬 카운트를 초기화시켜 주는 소모성 아이템, 면죄부가 있기에 레드 플레이어로 몰리는 불상사는 없었다.
다만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다른 의심은 받았지만.
‘B구역 상부에 보고했나 보군. 내가 개인 특성을 지녔을지 모른다고.’
관리국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다. 단지 B구역 가문에서 사람을 보낼 줄은 몰랐을 뿐.
“길게 말하지 않겠네. 난 하북팽가의 고위 기사, 팽윤도일세. 그대를 우리 가문의 정식 기사로 영입하고자 왔네.”
“…저를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유승권이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신이 투랑으로 활동하던 시절, 어느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견습 기사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하지만 당시 유승권을 찾아온 건 평범한 기사였다. 그런데 고위 기사가 내려오다니.
이유는 대충 예상이 갔다.
“실례지만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네를 조사해 봤네. F구역에서 여기까지 올라왔다지? 각성한 지 1년이 채 안 됐고.”
“그렇습니다.”
“성장 속도가 말도 안 되더군.”
팽윤도는 그렇게 말하곤 은근한 눈길로 바라봤다.
“갖고 있겠지.”
“뭘 말입니까?”
“개인 특성 말이네.”
그게 아니고선 절대 불가능한 성장이라고. 팽윤도는 그렇게 주장했다.
F구역 출신이라도 개인 특성이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도현은 그렇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팽윤도는 이미 단정 짓고 제 할 말만 줄줄 늘어놨다.
“어떤 능력인진 몰라도 정식 기사 자릴 내주는 거네. F구역 출신이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된다는 건 엄청난 특례지.”
보아하니 남의 이야기를 잘 안 듣는 타입 같았다.
“게다가 가문의 비전 심법과 무공도 알려 주겠네. 가주님께서 특별히 허가하셨으니 영광으로…….”
“기사님, 죄송하지만 그 제안 거절하겠습니다.”
“…뭐?”
거절당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는지 그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정도현은 그 틈에 속사포처럼 할 말을 했다.
“전 어디에도 몸담고 싶지 않습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소속이 없는 건 뒷조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여태껏 왜 길드에 가입하지 않았나 했더니 그냥 싫어서였다니.
말 같지도 않은 이유였다. 그에겐 어린애의 투정처럼 들렸다.
“자네는 5대 가문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가 본데, 5대 가문은 교단과 함께 B구역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실세일세! 관리국과 대형 길드들 전부 우리 눈치를 살피지.”
팽윤도가 침까지 튀겨 가며 열변했다.
마치 즐겁게 뛰어놀다 실수로 물건을 망가뜨린 아이를 꾸짖듯이.
“견습도 아니고 정식 기사일세! 게다가 자네 능력 여하에 따라선 더 위로 올라갈지도 몰라. 이 좋은 기회를 왜 마다하려는 건가?”
너는 천운과 기적이 겹치고 겹쳐 인생을 역전했다.
다시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싫으면 우리가 내려 주는 동아줄을 꽉 붙잡아라.
팽윤도는 위협인지 당부인지 모를 말을 늘어놨다.
정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대답했다.
“즉, 제안을 거절하면 절 추락시키실 겁니까?”
“글쎄, 잘 생각해서 판단하게.”
팽윤도는 음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주방에서 사과를 깎는 백승아를 발견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저 여잔 누군가? 성이 다른 걸 보면 자네 가족은 아닌 듯한데.”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지인입니다. 가족이나 다름없죠.”
정도현은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팽윤도는 관심을 보였다.
“호오? F구역에서 한 명도 아니고 둘이나 올라왔나.”
백승아는 102레벨. 정도현보단 부족해도 마의 벽이라 불리는 100레벨을 넘어섰다.
F구역 출신이, 그것도 둘이나 고레벨 플레이어가 됐다니.
‘게다가 얼굴도 반반하군.’
여러모로 매력적인 여인이라 팽윤도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백승아가 고갤 슬그머니 돌렸다.
끈적한 시선이 불쾌해서 그런 거였지만, 팽윤도는 그녀가 단순히 부끄러워서 피했다고 착각했다.
팽윤도는 B구역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쭉 엘리트로서 살아왔다.
그의 배경을 보고 접근했던 여자들도 꽤 많았다. 그런 고로 그는 이런 착각 속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은 아주 매력적인 남자구나 하고.
‘부끄러워하는군.’
제법 기가 세 보이는 인상인데 하는 짓은 새끼 고양이처럼 귀엽기 그지없었다.
반전 매력이 신선했다. 그래서 더더욱 갖고 싶어졌다.
깎은 사과를 접시에 가득 담고 거실로 나온 백승아.
탁자 위에 접시를 두고 돌아가려던 그녀의 손목을 팽윤도가 덥석 붙잡았다.
말도 없이 몸에 손을 대자 백승아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멈칫.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길 기세로 손을 치켜들었던 그녀가 우뚝 멈췄다.
가문의 정예급 기사한테 손찌검하면 정도현과 다른 사람들한테도 피해가 갈 테니까.
그녀는 입속까지 올라왔던 욕설을 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놔 주세요.”
“하하.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 버렸지 뭔가.”
뭐래, 미친놈인가.
듣기만 해도 짜증이 확 치솟는다.
속으로 그리 중얼댄 백승아는 정도현을 흘끔 쳐다보곤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고 대답했다.
“죄송한데. 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그러니 작업 걸지 말아 주세요.”
“아, 그런가?”
연인이 있다는 말에도 팽윤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 봤자 C구역 시민 아닌가?”
그러니 나보다 매력적일 리 없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에 백승아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진짜 재수 없는 놈이다.
돌주먹으로 상판대기를 뭉개 버리고 싶을 만큼.
“혹시 마음이 바뀌면 여기로 연락하게. 며칠간 이 근처 호텔에서 머물 예정이니까.”
팽윤도는 그렇게 말하며 백승아한테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건넸다.
인재를 스카우트하러 왔으면서 갑자기 여자한테 작업을 걸다니.
백승아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뭐 이딴 놈이 다 있담.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명함을 받았다.
팽윤도는 정도현한테도 똑같은 명함을 주며 말했다.
“며칠 생각해 보고 신중히 결정하게. 되도록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
팽윤도는 그렇게 할 말을 마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돌아가자 백승아는 꾹 참았던 욕설을 쏟아 냈다.
“뭐, 저딴 병신 새끼가 다 있어?”
“잘 참았어, 누나.”
“집에서 난동 부릴 순 없잖아. 할아버지랑 애들도 있는데.”
백승아는 팽윤도가 손도 안 댄 사과를 야금야금 씹어 먹으며 소파에 기댔다.
정도현도 그녀가 열심히 깎아 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근데 언제 남자 생겼어?”
“어?”
“아까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누군데?”
뭉치 산책이나 장을 보러 마트에 들르는 걸 빼면 외출도 딱히 안 하면서.
남자를 언제 사귄 걸까.
요즘 그가 집을 자주 비웠으니 그사이에 만난 걸지도.
“그, 그야……. 그냥 둘러댄 거지! 동생, 이런 쪽으론 왜 그리 눈치가 없어?”
“…….”
정도현은 백승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와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거짓말이다.
“진짜 남자친구 있구나? 누구야?”
“아, 아직 사귀는 단계는 아니고……. 그냥 썸만 타는 거지…….”
정도현의 눈을 속일 순 없단 걸 깨달았는지 백승아가 시인했다.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쑥스러워하며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신기했다. 석화의 마녀의 마음을 훔친 남자는 대체 누굴까.
정도현은 너무 궁금해서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내가?”
정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그가 아는 남자라고 해 봤자 몇 없었으니까.
“설마… 성원 씨?”
“아니야. 그리고 그쪽은 부패의 마녀인지 뭔지랑 썸타는 것 같던데?”
“뭐? 정말?”
저번 마녀 토벌 때 부패의 마녀가 적극적으로 엉겨 붙더니. 기어이 좋은 관계로 발전했나 보다.
“그럼 신호영?”
“뭐래, 걘 아니야.”
하긴. 신호영은 오로지 민하랑 일편단심이니 다른 여자한텐 눈길도 안 줄 터.
정도현은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도저히 모르겠다고.
“둘 다 아니면 대체 누구야?”
“곧 올 거야.”
“여기로 온다고?”
띵동-!
말 끝나기가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
백승아는 부리나케 달려가 현관문을 열어 줬다.
“……?”
집에 찾아온 건 정도현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진성이와 손잡고 온 송정민.
송정민이 정도현을 보곤 반갑게 웃었다.
“오, 웬일로 집에 있네? 뭐 「태양신공」인지 뭔지 훈련한다더니.”
“아, 얼추 마무리짓고 왔는데…….”
정도현은 설마 하는 눈으로 백승아와 송정민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도 이제야 알아챘다.
정도현이 송정민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질문했다.
“나 없는 동안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뭐?”
뜬금없는 질문에 송정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도현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백승아랑 언제 사귄 건데?”
“사, 사귀긴 무슨……?!”
송정민은 깜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그냥 저번에 식사 몇 번 하고 마트에서 같이 장을 본 것뿐이야.”
“그러니까 어쩌다?”
“그, 너 저번에 할아버지 납치됐을 때 기억나냐? 백승아 씨 멱살 잡고 흔든 거.”
“아. 기억하지.”
예전에 저질렀던 허물을 들추자 정도현은 머쓱해졌다.
송정민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때 내가 말렸었잖아. 그게 고맙다면서 밥 한 끼 사 준다길래 같이 먹은 것뿐이야.”
“아, 그럼 사귀는 건 아니네?”
“그, 그치. 야, 당사자 앞에 두고 넌 뭐 그런 소릴 하냐. 사람 무안해지게.”
송정민은 백승아의 눈치를 살폈다.
애 딸린 아저씨가 저런 미인한테 치근덕대면 주변에서 분명 흉을 볼 거다.
백승아 본인한테도 굉장한 결례고.
그가 그렇게 말하자.
“전 괜찮은데요?”
“네?”
“전 정말 즐거웠어요. 정민 씨랑 밥 먹고, 대화하면서 장을 같이 봤던 거.”
“아……. 고맙습니다.”
백승아의 말에 송정민은 쑥스럽단 듯 실없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가 도끼눈을 뜨며 추궁하듯 말했다.
“혹시 저만 좋았었나요?”
“예?”
“…정민 씨는 제가 별로였나요?”
“벼, 별로라니, 그럴 리가요.”
“근데 왜 자꾸 선을 긋는 건데요.”
갑자기 아침 드라마 속 상황극처럼 대화가 진행됐다.
정도현과 진성이는 한 발짝 물러나 사태를 관망했다.
“역시 제가 레드 플레이어라 그런 거죠? 말로만 신경 안 쓴다고 하고. 속으론 절 경멸한 거죠?”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그럼 왜 거릴 두는 거예요?”
정도현이 던전이나 「태양신공」의 훈련을 위해 자릴 비웠던 동안, 둘 사이에도 뭔가 많은 일이 진행된 듯했다.
진성이가 정도현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이렇게 속삭였다.
“아빠는 자기가 승아 누나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봐.”
“…안 어울린다니?”
“돈이 많은 것도, 엄청 잘생기지도, 레벨이 높지도 않잖아. 그러니 조금씩 거릴 둔 거야. 호감이 있으면서.”
진성이는 5살이다. 아니, 얼마 전에 해가 바뀌었으니 6살이구나.
근데 말하는 걸 보면 6살이 아니라 16살은 족히 먹어 보였다.
진성이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백승아는 한숨을 짧게 쉬었다.
“남자가 뭐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요? 제가 좋다고 했잖아요.”
“하, 하지만… 왜 절 좋아하시는 겁니까?”
“친절하니까요. 제가 누군지 알면서도 이렇게 잘 챙겨 줬던 남자는 정민 씨가 처음이었다고요.”
백승아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래서, 저 싫어요?”
“아, 아뇨. 좋습니다!”
“그럼 문제없네요.”
백승아가 그렇게 담판 짓고선 진성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진성이가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 그럼 오늘부터 엄마라 불러도 돼요?”
“어, 어?”
“지, 진성아. 너 그게 무슨…….”
너무 앞서간 아들의 질문에 송정민은 당황해서 덩치에 안 맞게 허둥댔고, 백승아는 귀가 새빨개졌다.
정도현은 이 상황이 너무 재밌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팽윤도는 정도현과 백승아 그 둘한테서 연락 한 번을 못 받았다.
자기가 먼저 연락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기다렸는데.
“그 쓰레기들이 감히……. 쌍으로 날 물 먹여?”
그는 참다 참다 분노가 폭발했다.
그놈들, 내 직접 찾아가서 혼쭐을 내 주마.
그가 씩씩대며 정도현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을 때.
“…응?”
아파트 단지를 산책 중인 백승아가 보였다. 그리고 옆엔 웬 곰 같은 사내도 있었고.
남자는 플레이어였지만 고작 23레벨.
그런데 백승아는 그런 남자와 해맑게 웃으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팽윤도는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내가 저딴 것한테 밀렸다고?’
그는 모욕감에 주먹을 부들거리며 화기애애한 둘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