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권하율은 여자의 일생을 쭉 살펴보았다.
긴 세월을 살아와 기억의 양은 방대했지만, 그에 비하면 이렇다 할 추억이나 사건은 없었다.
그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어머니의 품을 떠나 대성당으로 끌려갔으니까.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조그만 독방에 수십 년을 갇혔다.
그래도 혈통은 속일 수가 없었는지 해가 갈수록 마력은 늘었고, 그녀의 레벨도 덩달아 올라갔다.
교단은 훗날을 우려해 마력의 근원인 황금안을 뽑고, 날개마저 뜯어 버렸다.
거기다 마력을 봉쇄하는 쇠사슬로 칭칭 묶어 십자가에 매달았다.
“…….”
교단의 잔혹한 대우에 권하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더 안타까운 건 그런 짓을 당했는데도 여자는 교단과 인간들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았단 점이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그랬던 이유는 단 하나.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이 있으니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일을 겪고도 원망 안 한다고?’
권하율은 여자의 속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봤지만, 어디에도 인간을 혐오하는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따스한 호감마저 느껴진다.
마치 강아지가 인간을 맹목적으로 좋아하고 따르도록 유전자에 각인된 듯이.
그럴 수 있는 건 그녀의 몸속에 천사의 피가 흘러서일까.
사람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권 팀장님, 어떻습니까?”
“…연기나 거짓말은 아닙니다. 순수하네요.”
권하율이 눈을 뜨며 그리 말했다.
간접적으로나마 여자의 일생을 경험했기에 경계 어린 눈빛도 한층 유해졌다.
여자가 당한 걸 생각해 보면 복수하겠답시고 날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정도현이 서아린을 쳐다보자 그녀도 별수 없이 포기했다.
“…알겠어요. 대신 들키지 않게 확실히 변장시켜야 해요.”
“그래,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색은 바꿔 둘게.”
“그걸로는 부족해요.”
“뭐가?”
“생긴 건 어른스러워도 내용물은 어린애잖아요. 분명 괴리감이 들걸요.”
“아, 그건 방법이 있어.”
서아린의 우려에 정도현은 문제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잠자코 듣던 신호영이 의문을 제기했다.
“눈동자나 머리카락은 염색 아이템으로 어찌한다 쳐도, 몸을 어리게 만들 수도 있나?”
“어, 가능해.”
정도현은 상점창에서 어떤 목걸이를 구매해 꺼냈다.
이번에 120레벨이 되면서 살 수 있게 된 아티팩트였다.
“「폴리모프」를 쓸 수 있게 해 주는 목걸이야.”
“「폴리모프」라면…….”
보통의 변신 주문들은 정해진 외형으로만 바뀌거나 무작위로 뒤섞인다.
하지만 「폴리모프」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하는 최상급 주문. 그렇기에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도 어려웠다.
거기다 「폴리모프」는 단순히 얼굴만 좀 바뀌고 끝이 아니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체격과 성별마저 바꿀 수 있었다.
신호영은 폴리모프 목걸이를 상점창에 검색해 가격을 확인해 보곤 혀를 내둘렀다.
원체 귀한 아이템이라 그런지 수백억씩이나 했다.
‘이렇게 비싼 걸 선뜻 구매하다니.’
그러고 보니 정도현은 개인 특성의 대가를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았었다.
분명 그의 상점창에선 아이템 가격이 저렴하거나 돈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 할 터.
‘수명을 지불하는 건 아니라 했었는데. 그럼 대체 뭐지?’
수명 말고는 짚이는 게 없었다.
신호영은 정도현이 치르는 대가가 뭘지 궁금했지만, 물어본다고 순순히 답해 줄 녀석도 아니었다.
“앞이 안 보이는 거 불편하지? 이거 마셔.”
정도현은 그녀에게 엘릭서를 내밀었다.
새벽엔 교단도 정리해야 하고 아이들 상태도 확인하느라 챙겨 줄 경황이 없어 좀 늦었다.
그리고 그녀가 인간에게 정말로 우호적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권하율이 확인했으니 안전한 거겠지.
꼴깍, 꼴깍.
금발의 여자가 엘릭서를 쭉 들이켰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흔적만 남았던 순백의 날개가 서서히 재생했다.
“저게 천사…….”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던 신호영은 손이 떨렸다. 누가 봐도 영락없이 성서에 묘사된 천사였다.
스르륵.
정도현은 갑갑해 보이는 붕대를 풀어 줬다.
오래전에 뽑혀 빛을 잃었던 황금안이 다시 반짝인다.
시력을 되찾은 그녀는 앞이 환히 보이는 게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러다 정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헤 웃었다.
기분도 좋아졌는지 아기새처럼 날개를 몇 번 파닥거렸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서아린은 눈썹을 꿈틀했다. 몸을 고쳐 주고 살 곳까지 마련해 줬는데 뭘 또 바라다니.
아무리 애 같아도 양심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그녀가 뭐라 잔소릴 하려 할 때.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
맞다. 그녀에겐 이름이 없었다.
정확히 따져 보면 원래는 있었겠지만, 너무 어릴 때 부모와 떨어지면서 까맣게 잊어버린 거겠지.
강새벽처럼 자신조차 본명을 잊어버리면 시스템도 표시해 주지 못하니까.
정도현은 뭐 좋은 이름이 없냐고 물어보듯 주변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름이라…….”
“갑자기 지으라 하니 잘 떠오르지 않는데.”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사람한테 붙여 줄 이름이니까 대충 짓긴 좀 그랬다.
성심성의껏 정하고자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서아린까지 머릴 싸매고 고뇌할 때.
정도현은 뭔가에 홀린 듯이 중얼댔다.
“윤정.”
“…응?”
“도현아, 그 이름은…….”
할아버지는 그가 언급한 이름의 출처를 알아챘다.
정도현의 소꿉친구. 손주와 사이좋게 지내 준 착한 아이라 기억에 남았다.
알아챈 건 할아버지만이 아니다.
서아린과 권하율도 누굴 말한 건지 알아챘다.
‘저번에 봤던 그 여기사 이름이잖아?’
‘정도현 씨의 소꿉친구라던…….’
설윤정은 보름 전쯤에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정도현은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한 것일까.
하다 하다 고인에게 질투심을 품다니.
너무도 추하고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또 그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딱히 생각나는 이름 없으면 이윤정으로 할게요. 넌 어때?”
“이윤정… 좋아요!”
여자도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고갤 힘차게 끄덕였다. 머리 위의 이름 칸에도 ‘이윤정’이라 적혔다.
서아린과 권하율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당사자가 저리 좋아하는데, 뭐라 반대할 순 없는 노릇. 그렇게 물러서려 할 때.
“고마워요, 도현 오빠.”
“…오빠?”
그와 비슷한, 아니 어떻게 보면 그보다 몇 살 연상으로까지 보일 법한 어른스러운 여인이 오빠라 운운하자 기분이 묘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녀가 연상이다.
80세는 족히 됐을 테니까.
물론 천사와 인간의 혼혈이라 불로장생하는 그녀이니, 인간의 관점으로 나이를 따져선 안 되겠지만.
“…….”
서아린과 권하율은 둘 다 침묵했다.
하지만 생각하는 바는 비슷했다.
저 여자는 위험하다.
정도현과 같은 집에서 살며,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여인의 이름을 물려받은 데다.
그들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호칭인 오빠를 서슴없이 부르며 헤실헤실 웃을 테니까. 게다가 미모마저 빼어나니.
고자가 아닌 이상 마음이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저 둘의 사이가 좋아지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두 여인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5대 가주들이 은밀히 한 곳에 모여 회의했다.
교단 내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단 소식이 들려서였다.
교황이 며칠 전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최측근 사제들도.
누가 봐도 수상쩍었다.
“만약 교황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거라면…….”
“곧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겠군.”
장요한도 이젠 나이를 많이 먹어서 건강이 예전 같지가 않다고 했다.
몇 년 안에 제위에서 물러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슬슬 다음 교황을 누구로 올릴지도 정해 둬야겠군.”
그렇게 말한 건 노란 머리칼의 노년기에 접어든 사내.
그가 허리춤에 멘 장검은 남궁세가의 신물인 ‘창공검’이었다.
5대 가문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드높은 남궁세가. 그곳의 가주인 남궁제였다.
그의 말에 다른 가주들은 저마다 어찌할지 궁리했다.
“생각해 두신 후보라도 있으십니까?”
“물론이네.”
“그럼 저희 제갈세가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직설적으로 물어본 건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세가는 남궁제가 밀어 주려 하는 후보에 제 손을 보탤 생각이었다.
“저희 당가도…….”
“당가와 빙궁, 자네 둘은 지금 제 앞가림할 여력도 없지 않나? 가문 수복에 집중해야지.”
“…큭!”
“…….”
사천당가는 가주와 소가주 그리고 추적대와 가문의 신물 무한비도까지 잃었고, 북해빙궁은 가주와 기사단까지 전멸해서 사실상 멸문당한 상태.
내부 사정이 알려지면 대형 길드들이 두 가문의 비급을 돈으로 집어삼키려 하리라.
사천당가의 임시 가주로 회담에 온 장로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뭐라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원래도 남궁세가한테 한발 밀렸는데 당군평마저 전사해 버렸으니. 이젠 남궁제의 독무대였다.
게다가 남궁제를 꾸준히 견제해 왔던 북해빙궁주 설유천마저 최근 괴한의 습격으로 죽었다.
두 가문은 유명무실해져 3대 가문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 팽가는 교황 선출에 별 관심 없다. 끼어들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도록.”
“…개입하지 않겠다고?”
“그렇다.”
“팽철연, 뭔가 이유라도 있나?”
“정말 몰라서 묻나? 5대 가문 중 두 곳이나 당했다. 그것도 정체 모를 놈한테.”
하북팽가 가주, 팽철연은 다음 교황이 누가 되든 별 관심 없었다.
그것보단 자신의 가문과 식솔을 지켜 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사천당가에 이어 북해빙궁까지 저렇게 무너졌다.
만약 범인이 5대 가문을 또 노린다면 다음 제물은 하북팽가 아니면 제갈세가 차례일 터.
“그러니 당분간은 방비에 집중하겠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를 놈 때문에?”
“그렇다.”
“허, 금강불괴의 경지에 도달한 네가 그런 나약한 소릴 할 줄 몰랐군.”
남궁제가 무인의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팽철연은 멋대로 지껄이란 듯이 담담했다.
방심하다 준비도 제대로 못 하고 일이 터지면 설사 막아 내더라도 피해가 막심할 터.
팽철연은 강인한 육체와 힘을 숭상하지만, 이 정도 머리도 쓸 줄 모르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가문의 피를 쏟을 바엔 차라리 겁쟁이라 불리겠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다.”
끼익-!
팽철연이 의자를 뒤로 쭉 밀며 일어나더니 그렇게 통보하곤 떠났다. 가문을 잠시 비워 두는 것조차 걱정되는 모양.
남궁제는 회담장을 빠져나가는 팽철연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저 친구, 못 본 새 겁이 많아졌군.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남궁세가야 가주님이 계시니 안전하겠지요. 하지만 저흰 아니잖습니까.”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성은 황제 옆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은 간신처럼 아부를 떨었다.
남궁제는 검자루를 쓰다듬으며 중얼댔다.
“그래도 설유천 그 양반이 당했을 정도면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뭐, 알아낸 정보 없나?”
남궁제는 사천당가 장로를 보며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마치 그가 자신의 하수인이라도 되듯이.
당가의 장로는 속으로 분했지만, 최강자 앞이다 보니 자존심 다 내려놓고 참았다.
“…아직 명확히 밝혀진 건 없습니다만, 범인의 정체는 언노운으로 추정됩니다.”
“그래, 추방당한 그 영광의 일족 녀석. 놈을 수색하다 실패한 뒤로 사건이 연달아 터졌지.”
연관성은 충분했다. 남궁제는 미소가 절로 나왔다.
“기왕이면 날 먼저 찾아와 주면 좋겠는데.”
영광의 일족을 죽일 기회는 그의 일생에 이번뿐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