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순찰조는 멀리 갔어요. 이제 나오셔도 돼요.”
쌍둥이 여사제 중 언니가 신호영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호영은 그대로 도망칠지 말지 고민했다. 하지만 당장 이 자릴 벗어난들 별 의미 없었다.
‘그럼 윗선에 보고하겠지.’
모습을 감추는 아이템을 써서 새벽에 멋대로 돌아다녔다고.
그럼 이 시간에 뭘 하고 다녔는지 빡빡하게 조사할 터.
그럼 십여 명의 여사제들이 그와 몸을 섞고 지낸 걸 들키리라.
‘들키면 탈출 계획도 끝이야.’
신호영은 심호흡한 뒤 투명 망토를 벗었다.
스르륵.
텅 빈 허공에서 귀신처럼 사람이 나타나자 쌍둥이 여사제는 흠칫했다.
언니 쪽은 호기심, 동생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왜 날 숨겨 줬지?”
“당신이 누군지 모르니까요.”
“딱 봐도 수상쩍잖아.”
“나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거기다 다짜고짜 주문을 날린 것도 미안했고요.”
“언니…….”
언니의 당돌한 대답에 동생이 달달 떨며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신호영은 여사제의 눈빛을 바라봤다.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전 ‘민하랑’이에요.”
“저, 저는… ‘민하은’이라고 합니다…….”
동생, 민하은이 꾸벅 고개 숙이며 언니 민하랑을 따라 자기소개를 했다.
신호영은 투명 망토를 다시 뒤집어썼다. 그러자 민하랑이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그래서 당신은 누구죠?”
“…신호영이다.”
“이름은 머리 위에도 뜨잖아요. 정체가 뭐냐고요. 그 황금안은 또 뭐고요?”
그녀의 호기심은 왕성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까진 안 보내 줄 기세였다.
신호영은 별수 없이 자신의 신분을 얘기해 줬다.
“영광의 일족…….”
“그, 낙원에 사시는 분들이요?”
“그래.”
수업 시간에서나 들어 본 위대한 존재와 마주한 쌍둥이 자매는 얼떨떨했다.
당당했던 민하랑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신의 자식들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니 예를 갖춰야만 했다.
민하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고갤 숙였다. 민하은도 엉거주춤 언니를 따라 했다.
그러자 신호영이 고갤 저었다.
“됐어. 어차피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으니까.”
“…죄요?”
“그래, 이제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말에 민하랑과 민하은은 천천히 일어섰다.
신호영은 이제 됐냐는 시선으로 그녀들을 쳐다봤다.
민하랑은 궁금한 게 더 있는 눈치였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걸 써서 밤 산책이라도 나온 건가요?”
“…맘대로 생각해.”
신호영은 뭘 하고 다니는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떠났다.
“언니, 우리도 돌아가자.”
“…그래.”
민하랑은 아쉽단 표정으로 그가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 * *
다음 날 아침. 신호영은 기도실에 있는 단골 고객을 찾아가 황금색 리본에 대해 물어봤다.
“황금색 리본? 그분들은 성녀 후보생들이야.”
“성녀 후보생?”
“응. 재능 있는 여사제들만 따로 추려 낸 거지.”
가슴팍에 황금색 리본을 단 여사제는 예비 성녀로 특별히 선별된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대성당 안쪽 별채에 따로 생활한다.
“가끔 여기로 나오거나 외출도 하는데 부러워 죽겠다니까?”
여사제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등을 손톱으로 살살 간질였다. 오늘 밤에 자신의 침소로 와 달란 뜻이다.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신호영과 여사제는 소란스러운 바깥을 쳐다봤다. 그리곤 눈을 크게 떴다.
두 여자가 사제와 여사제들 사이를 지나 기도실 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새벽에 만났던 쌍둥이 자매였다.
“이분과 따로 얘길 하고 싶은데 잠시 나가 줄 수 있을까?”
“아, 네!”
“고마워.”
민하랑이 웃으며 자릴 비켜 달라고 하자, 여사제는 도망치듯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신호영은 그녀와의 재만남이 썩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니까.
“…왜 찾아왔지?”
“당신에 대해 궁금해서요.”
“죄, 죄송해요. 전 그저 언니가 걱정돼서…….”
“난 더 나눌 얘기 없어.”
그녀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말 섞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성녀 후보생들과 엮였단 이야기가 윗선 귀에 들어가면 귀찮아진다.
그나마 누리고 있는 이 잠깐의 자유 시간마저 뺏길지 모른다.
“돈 드릴게요.”
“…….”
밖으로 나가려던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돈. 그놈의 돈.
신호영이 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민하랑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얄밉게.
“…돈을 준다고?”
“네, 하은이랑 친분 있는 여사제한테 얘기 들었어요. 돈 필요하시죠? 오늘 밤 저희 방으로 오세요. 돈은 두 배로 드릴 테니까.”
기가 막혔다. 성녀 후보생이 이런 짓을 한다고?
그는 거절했다. 미쳤다고 훗날 성녀가 될지도 모를 여자를 건드리겠는가.
그가 다시 나가려 걸음을 떼자 민하랑이 말했다.
“세 배를 드릴게요.”
“…1시까지 찾아가겠다.”
싫다고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다.
* * *
잠자코 얘길 듣던 정도현이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
“이제부터 중요한 부분인데, 왜?”
“아니, 그럼 성녀가 먼저 널 유혹한 거야?”
중요한 순간에 몰입이 깨지자 신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정도현은 이야기의 진위가 의심됐다.
일반 여사제도 아니고 성녀 후보생이면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조심해야 할 팔자인데.
“뭐, 그녀는 후보생 중에서도 아주 특별했으니까.”
“아, 부활 능력 때문에?”
“그래. 윗선에선 그녀를 다음 성녀로 내정해 뒀어.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민하랑은 교황과 그를 보좌하는 추기경들에게 총애받았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녀를 감히 건들지 못했다.
게다가 민하랑은 착하되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다루는 데 능했다.
“그래서, 그날 성녀랑 잔 거냐?”
“아니. 아까도 말했잖아. 그녀는 돈 주고 그런 일 안 시켰다고.”
“뭐야, 그럼 침소엔 왜 불렀는데?”
그것도 요금을 세 배나 챙겨 주면서.
정도현의 질문에 신호영은 재미난 개그라도 들은 듯이 쿡쿡 웃었다.
“나에 대해 알려 준 여사제가 성녀 후보생들한테 대놓고 말해 주긴 좀 그랬었나 봐. 빙 돌려서 말했더라고.”
“그럼…….”
“그냥 심심한 여사제 방에 찾아와서 잡담하고 어울려 주는 건 줄 알았대.”
쌍둥이 자매는 그런 쪽으론 너무도 순수했다.
즉, 민하랑은 그에게 안기고자 불러낸 게 아니었다. 그저 그와 대화할 시간을 산 거였다.
“대성당에 갇힌 뒤론 처음이었어. 누군가와 맘 편히 대화해 본 건.”
그 뒤로 신호영은 종종 쌍둥이 방에 불려 갔다.
처음엔 재수 없게 느껴졌던 그녀는 단지 외로움과 호기심 왕성한 소녀였다, 부활 능력 때문에 억지로 부모님과 떨어져 교단에 귀의해야만 했던.
사정을 알고 나니 신호영은 죽은 여동생이 그녀와 겹쳐 보였다.
그렇게 차츰 마음을 열었고 부쩍 가까워졌다. 그러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반했다는 걸.
그는 용기를 냈고 민하랑은 웃으며 고백을 받아 줬다.
“사귄 지 1년쯤 됐을 때 탈출 자금이 다 모였지. 난 그녀한테 내 계획을 말했어.”
지금껏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이유는 여길 빠져나가기 위한 거였다고.
“난 같이 도망가자고 말했어. 그녀는 고민조차 안 하고 고갤 끄덕였고.”
“근데?”
“…그녀에게 배신당했어.”
그로부터 며칠 뒤. 신호영이 땅속에 숨겨 뒀던 돈이 몽땅 사라졌다. 누가 파헤쳐 가져간 것이다.
돈의 위치를 알고 있던 건 민하랑뿐.
그는 그녀를 찾아가 물어봤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 있냐고.
“그녀가 뭐라 했는지 알아?”
민하랑은 자신이 윗선에 고발했다고 말했다. 신호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악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민하랑은 불과 며칠 만에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 앞에서 착한 척 연기했던 걸지도 모른다.
“며칠 고민하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더군.”
자신은 이곳에 남아 성녀가 될 거라고.
그렇지만 신호영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진짜라 했다.
그러니 둘 다 거머쥐겠다고.
민하랑은 자신이 성녀가 되면 곧장 꺼내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돈을 빼돌렸다?”
“그래. 나와 몸을 섞었던 십여 명의 여사제들은 전부 파면당해 쫓겨났어, 난 대성당 지하 감옥에 갇혔고.”
“잘생기면 뭐 하냐? 사람 보는 눈이 없는데. 어떻게 사귀어도 그런 못된 년이랑 사귀냐.”
“…….”
정도현이 반쯤 농담조로 타박을 줬지만, 신호영은 반응이 없었다. 그만큼 배신당한 충격이 큰 거겠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그런 낌새는 못 느꼈는데.”
신호영은 민하랑한테 동생을 죽게 만든 일을 고해 성사 하고 조금은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그녀 덕분에 잃어버렸던 웃음과 여유를 되찾았다.
그랬는데 그녀가 배신할 줄이야.
그는 차디찬 지하 감옥 속에서 몸서리쳤다. 이런 운명에 자신을 내던진 신을 증오했다.
지금도 종종 그 시절을 악몽으로 꾸곤 한다.
“그런데 돈도 뺏기고 감옥에 갇혔는데 어떻게 탈출했냐?”
“계좌의 금액은 어떤 이유로 빠져나가 버리면 못 쓰지만, 실제 화폐는 달라. 내가 정당하게 벌었다면 어디에 보관되어 있든 내 소유물로 시스템이 인정해 주지.”
민하랑이 빼돌린 현금을 싹 불태웠다면 모를까. 그가 모르는 어딘가에 고이 보관되어 있으니 언제든 쓸 수 있었다.
그녀도 거기까진 몰랐으리라.
그는 돈을 써서 지하 감옥을 빠져나와 혼자 대성당을 탈출했다.
떠나기 전에 민하랑을 죽일지 말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위험 부담도 크고, 연기였어도 그녀는 그를 한 번 구원해 줬다.
제 손으로 죽이긴 싫었다. 그래서 조용히 떠났다.
“이렇게 질긴 악연으로 엮일 줄 알았으면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어.”
신호영은 그리 말하며 한동안 손도 안 댔던 담배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담배 안 피우기로 약속했잖아요.”
“…안 자고 있었냐?”
그렇게 말한 건 분홍색 토끼 잠옷 차림의 강새벽. 그녀가 방문을 빼꼼 열고 문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애들은 곤히 자야 할 시각인데 용케 깨 있었다.
강새벽이 성큼성큼 다가와 신호영의 입에 물린 담배를 뺏었다.
그녀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모습에 정도현이 피식 웃었다.
“새벽이한테 꽉 잡혀 사네.”
“…….”
신호영은 머쓱한지 시선을 돌렸다.
강새벽은 정도현과 신호영 사이에 앉으며 씩씩댔다.
“성녀란 여자, 되게 씨발년이네요.”
“어허, 여자애가 그런 험한 말 쓰면 못 써.”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정도현이 깜짝 놀라 말렸지만, 강새벽은 뜻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제 일처럼 분통을 터트렸다. 다람쥐처럼 쪼그만 게 의리는 넘쳤다. 신호영이 픽 웃으며 동의했다.
“그래. 나쁜 여자였지, 난 너무 멍청했고.”
“아저씨도 좋은 여자 만나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면 되죠.”
“그래. 억울해서라도 그래야겠어.”
신호영은 그렇게 장단을 맞춰 주곤 소파에서 일어섰다. 오늘 굵직한 전투를 치렀으니 피곤하겠지.
“고생했으니 푹 쉬어.”
신호영은 하품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도현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움찔했다.
“……?”
신호영의 등 뒤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보였다. 아주 찰나였다.
눈 한 번 깜빡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금 뭐였지?’
그도 피곤해서 헛것이라도 본 걸까?
아니, 던전 강행군으로 지친 적은 종종 있었어도 저런 환영은 본 적 없었다.
‘그 안경 쓴 기사 녀석이 뭔 짓거리 한 거 아냐?’
정도현은 제갈성을 의심했다.
신호영을 생포했을 때 어떤 수작을 부린 걸지도 모른다.
예컨대 추적 주문을 걸어 뒀다든지.
“혹시 모르니까…….”
정도현은 상점창에서 「디스펠」 매직 스크롤을 구매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마법이 걸려 있으면 이걸로 해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호영 옆에 아까 본 희미한 무언가가 있었다. 동시에 알림이 들렸다.
[영안(靈眼)을 완전히 개안했습니다.]
[영체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영체? 그건 오늘 그가 낮에 상대한 역귀 녀석이지 않은가.
신호영 옆에 딱 붙어 있던 희미한 형체가 서서히 뚜렷해졌다.
그건 사람이었다. 그것도 여자였다.
“너… 누구야?”
“뭐?”
침대에 드러누워 자려 했던 신호영은 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정도현은 그가 아니라 그 옆의 반투명한 여자를 노려봤다.
신호영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본다는 걸 눈치채곤 입을 다물었다.
반투명한 여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당신… 제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 아깐 보이다 말았는데 이젠 잘 보여.”
저주 아이템인 영안경을 써서 영안이 완전히 트인 모양이다.
즉, 저 여잔 귀신이었다.
『아, 아아……!』
여자 유령은 놀람과 동시에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정도현은 그녀가 달갑지 않았다.
이 집에 머문 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귀신이 들어선단 말인가.
저 여자가 할아버지나 다윤이, 새벽이한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정도현이 부적을 꺼내 들며 경고했다.
“뒤지기 싫으면 우리 집에서 꺼져, 잡귀 녀석.”
『자, 잠깐만요! 전 민하랑이에요!』
“…민하랑?”
민하랑은 아까 신호영이 말해 준 성녀의 이름이었다. 그런 그녀가 영체 상태로 여기에 있다는 건.
‘성녀가 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