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네가 민하랑이라고?”
『네, 동명이인이 아니라 이 사람 여자친구요.』
민하랑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신호영 품에 매달렸다. 하지만 몸을 쑥 관통했다. 당연하다. 유령이니까.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민하랑. 정도현은 이해가 안 돼서 다시 확인했다.
“그럼 넌 이미 죽었던 거지?”
『네.』
“언제 죽었는데?”
『호영이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날 밤이요.』
민하랑이 애잔한 눈빛으로 신호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신호영은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도 없었다.
“정도현, 그게 무슨 소리야. 하랑이가 죽었다고?”
“그래, 뭔 미친 개소린가 싶겠지만 진짜야. 귀신이 네 옆에 붙어 있어.”
“…귀신? 그럼 그때도 설마?”
당연히 안 믿을 줄 알았는데 신호영이 의미심장한 소릴 뱉었다.
그때도라니. 그럼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얘길 들었단 건데.
“순백교 교주가 비슷한 소릴 했었다. 내 옆에 웬 여자의 영혼이 보인다고.”
“아.”
공주은. 그 여자는 영혼을 다루고 흡수하는 개인 특성이 있었다. 그러니 영체 상태였던 민하랑도 보였을 터.
“난 당연히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사실을 말한 거였네.”
“좀 미안해지는군, 어차피 그 여자와는 싸웠겠지만.”
신호영과 공주은의 사상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니까.
플레이어 우월주의에 찌든 순백교는 해방 활동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앞뒤가 안 맞아. 하랑이가 죽었다면 지금 성녀는 누구란 거냐?”
“그건 당사자한테 물어봐야지.”
정도현은 민하랑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녀는… 하은이에요.』
“네 쌍둥이 동생?”
“성녀가 민하은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날, 신호영은 민하랑을 찾아갔었다.
그녀 머리 위에 적혀 있던 이름 석 자는 틀림없는 민하랑.
물론 플레이어는 이름을 감추고 외형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특정 아이템이나 주문을 써야 했다.
“쌍둥이라 헷갈린 거 아냐?”
“아무리 쌍둥이여도 사람마다 마력의 파장은 조금씩 달라. 너도 잘 알 텐데?”
“아, 하긴. 변장일 린 없겠네.”
무공과 심법을 익힌 이는 일정 경지에 도달하면 상대의 마력 파장을 상세히 감지할 수 있다.
즉,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변장한들 고유한 마력 파장만은 숨길 수 없다.
그 당시 신호영이 아무리 어렸어도 그 정돈 가능했을 터.
“이름과 마력 파장. 전부 하랑이었어.”
“그럼 진짜 본인이란 소린데.”
『아뇨. 그건 민하은이었어요.』
정도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민하랑은 숨겨진 내막을 설명했다.
『하은이한텐 개인 특성이 있어요. 저도 몰랐었죠.』
“…개인 특성?”
『네. 「동경의 거울」이란 거예요.』
민하은은 누구한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바로 「동경의 거울」이란 개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자신이 가장 동경하는 플레이어의 능력치와 재능까지 고스란히 복사할 수 있어요.』
“뭐?”
어릴 적 민하은이 동경했던 사람은 언니였던 민하랑.
그래서 민하은도 언니처럼 신성력을 잘 다룰 수 있었다.
물론 죽은 이마저 되살릴 수 있는 개인 특성, 「생명의 불씨」까진 따라 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동경의 거울」에는 한 가지 효과가 더 있었어요.』
“뭔데?”
『동경하는 대상을 죽이면… 그 사람 자체가 될 수 있어요.』
정도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 말이 사실이면 동생은 민하랑을 살해하고, 지금껏 언니 행세를 해 왔단 소리니까.
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성녀 자리가 그렇게 탐났던 건가?”
『그런 마음도 어느 정도는 있었겠지만…….』
민하랑이 말끝을 흐리며 신호영을 흘끔 쳐다봤다. 정도현은 설마 싶은 눈으로 물었다.
“…치정 싸움이었어?”
『맞아요. 그게 가장 주요했죠.』
민하은은 신호영이 언니와 며칠 뒤에 야반도주한다는 걸 우연히 엿들었다.
그게 사건의 방아쇠가 되었다.
『하은이가 흉기로 찌르며 그랬어요, 자기가 먼저 사랑했다고.』
“…….”
정도현은 만악의 근원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쓸데없이 잘생겨서 이 사달이 났단 건가. 안타깝다기보단 황당했다.
‘어쨌든 여동생은 정상이 아니군.’
정도현은 신호영한테 모든 진상을 알려 줬다. 그는 충격이 컸는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닥을 쳐다봤다.
“…정도현, 그럼 지금 내 옆에 하랑이가 있는 거지?”
“어, 뭐 할 말 있으면 말해. 대답은 내가 대신 전해 주면 되니까.”
신호영은 영안경을 직접 구매해 쓰고 싶었지만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투기장 도박으로 돈을 꽤 벌었는데도 부족했다.
“혹시 그동안 내 곁에 쭉 있었나?”
『언제나요.』
“…그럼 못 볼 것도 많이 봤겠네.”
『네. 나쁜 짓도 정말 많이 했죠.』
정도현은 둘의 징검다리가 되어 줬다.
그렇게 민하랑과 신호영은 오랜만에 이야길 나눴다.
“미안해. 난 네가 배신한 줄 알고 줄곧 원망했어. 내가 뭐라 말했는지도 다 들었을 거 아냐.”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정도현의 입을 통해 나온 그녀의 대답에 신호영은 마음속 응어리가 싹 풀렸다.
전부 오해였단 걸 알게 되자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정도현이 선의의 거짓말을 해 준 걸지도 모른다.
그의 눈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어쩌면 화났을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신호영은 속이 다 후련했다.
“돈 모아서 영안경부터 빨리 사야겠군.”
“그러든가. 나도 일일이 전달하기 귀찮아.”
두 사람은 장장 수십 분 둘의 구구절절 대화를 나눴다. 그마저도 너무 짧아서 아쉬워하는 듯했다.
“정도현, 고맙다.”
“아, 됐어. 징그러워.”
정도현이 방에서 나가려 하자 신호영의 목소리가 어깰 붙잡았다. 그는 닭살 돋는단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도 신호영은 빙긋 웃었다.
그의 영안 덕분에 늦게나마 인생의 회한이 싹 풀렸으니까.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아니다. 널 보기 전까지 죽으면 안 되지.”
신호영은 허공에 대고 그리 말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정신에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겠다.
하지만 민하랑은 분명 그의 옆에 있었고 행복하단 듯이 미소 지었다.
* * *
성녀 민하랑, 아니 민하은은 5대 가문이 임무에 실패했단 보고를 접했다.
쨍그랑-!
그녀는 찻잔을 벽에 집어 던진 뒤 씩씩댔다.
“그 무능한 것들…….”
평소 그렇게 돈을 받아 처먹고선 공간 이동 능력자가 사실 살아 있었단 변명이나 해 대고.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에 던져 넣으면 주둥이만 둥둥 뜰 놈들 같으니라고.
“이제 됐어.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겠어.”
지금껏 먹여 뒀던 뇌물이 아깝고,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서 나서지 않았건만.
그녀는 이단심문관 부대를 호출했다.
곧 열 명의 남녀가 그녀 앞에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성녀님.”
“5대 가문이 실패했어요.”
“역시 입만 산 작자들이었군요.”
이단심문관의 대장이 조소를 머금으며 흉을 봤다. 민하은은 그들을 쭉 둘러보곤 넌지시 말했다.
“여러분들은 절 실망시키지 않겠죠?”
“물론입니다.”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의 눈동자가 맹목적인 충심으로 번들댔다.
이건 언니를 살해하고 갈취한 개인 특성의 부가 효과였다.
이들은 전부 한번 죽고 「생명의 불씨」로 되살아난 자들이다.
「생명의 불씨」를 받은 자는 그녀에게 무한한 호감을 느끼게 된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죽으라 명령해도 기꺼이 수행할 만큼.
‘대신 불씨를 피우려면 내 수명이 줄지만.’
「생명의 불씨」의 대가는 수명이었다.
한두 번은 괜찮지만, 그녀는 배신하지 않을 부하들을 얻고자 마구 남발했다.
그 탓에 그녀의 몸은 아주 허약해졌다.
아마 수명도 족히 수십 년은 줄었으리라.
그래도 괜찮았다. 그 덕에 이젠 교황마저 감히 그녀에게 뭐라 못할 만큼 탄탄한 세력을 구축했으니까.
‘언니, 보고 있어? 이젠 내가 교단의 실세야.’
그녀는 어릴 때부터 언니가 부러웠다.
공부를 비롯해 뭐든 척척 잘했으니까.
그래선지 부모님은 항상 언니를 먼저 챙겼다. 그녀는 뒷전이었다.
이 세상에 주연이 따로 정해져 있다면 언니도 분명 그중 한 명이었으리라.
반면에 그녀는 뭘 해도 어정쩡했다.
재능도 없고 눈치는 느린 데다가 자신감마저 결여됐다.
그나마 얼굴은 빼어났으나 어차피 쌍둥이라 언니랑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즉, 그녀는 언니를 앞선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쌍둥이 자매는 한날한시에 플레이어로 각성한 것이다.
언니는 신성력을 깨우쳤고, 그녀는 개인 특성 덕분에 언니를 완벽히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은 태양교의 간택을 받고 여사제가 되었다.
언니가 정순한 신성력을 타고난 덕에 그녀도 황금색 리본을 수여받았다.
하루아침에 성녀 후보생이 되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민하은은 방방 뛸 듯이 기뻤다.
「동경의 거울」이 언니의 재능마저 베껴 줬기에, 태어나 처음으로 언니처럼 주목받았다.
그래, 난 새롭게 태어난 거야.
자신감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면 언니마저 넘어설 수 있어. 이젠 언니와 동일 선상에 섰으니까.
그런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하지만 신은 잔인했다.
그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개인 특성은 그녀만 갖고 있던 게 아니었다. 언니한테도 있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온전히 되살리는 전무후무한 능력을.
마치 신께서 특별히 하사한 선물 같았다.
이젠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 다음 성녀는 언니가 차지하겠지.
민하은의 희망은 완전히 짓밟혔다.
‘그러다 그를 만났지.’
달밤 아래 화원에서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황금안의 소년을.
그 소년은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영광의 일족이었다.
민하은은 첫눈에 반해 버렸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언니는 단순히 호기심만 보였었다.
하지만 괜스레 불안했다.
그 남자도 다른 이들처럼 언니의 매력에 홀릴까 봐.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도 서서히 언니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환심을 사 보려 노력해도 어림없었다.
모든 걸 가진 언니에게 질투가 났다.
가족이지만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무심코 살심을 품을 정도로.
바로 그때, 「동경의 거울」의 숨겨진 조건이 충족되며 새로운 능력이 해금됐다.
동경하는 자를 죽여라. 그럼 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언니가 나쁜 거야.’
솔직히 핏줄을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참았다.
하지만 언니가 그 남자와 함께 도망치려 한다는 계획을 우연히 엿들었을 때.
이성의 끈이 툭 끊겼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할 성녀의 직책을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 포기하다니.
게다가 나한텐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겠다고?
물론 언니한테도 별다른 악의는 없었으리라. 어쩌면 언니 나름의 호의였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떠나면 자연히 민하은이 다음 성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딴 가짜 승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영영 언니에게 패한 패배자로 남을 것만 같았다.
철저히 무시당한 기분이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언니를 죽였다.
언니의 모든 걸 빼앗았다.
개인 특성과 성녀의 직책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마저.
일단 지하 감옥에 가둬 두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죽이고 되살릴 생각이었다.
그럼 그 남자도 언니가 아니라 나만을 바라봐 주겠지.
그런데 그가 대성당을 탈출했다.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혈육을 버리며 붙잡은 중요한 반쪽을 잃었다.
미칠 것 같았다. 스트레스로 우울증까지 왔다. 그렇다고 남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너무도 외로웠다.
한동안 잠자릴 설치며 끙끙 앓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소모해 제 편을 늘리며 교단을 야금야금 지배해 나갔다.
그렇게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이제 남은 건 그 남자를 되찾는 것뿐.
그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이 공허함도 채워지겠지.
“성녀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누구죠?”
“사천당가의 가주입니다.”
그녀의 미간에 잔주름이 잡혔다.
임무에 실패했던 쓰레기 집단의 수장이 무슨 낯짝으로 자신을 찾아온 걸까.
‘그래도 그 남자를 가장 먼저 찾아내긴 했지.’
얘기는 들어 봐야겠다.
그녀의 이단심문관이라고 언노운 수색에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혹시라도 그를 찾아낼 방도를 들고 왔을지 모른다.
“들어오라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