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1원 상점-180화 (180/240)

180화

빙정. 북해빙궁의 직계만이 섭취하는 영약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재료로 만드는지는 기밀이었다.

설윤정도 여태껏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빙정은 「빙백신공」을 익힌 이들의 심장이었어.’

그녀처럼 F구역에서 사들여 온 견습 기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문에서 추방당하던데,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빙궁주와 직계들의 무공 성취를 높이고자 심장을 앗아간 것이다.

“으…….”

설윤정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무공을 익혀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 덕에 심장을 잃고도 즉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죽는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 시야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심해 속처럼 어두컴컴했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심한 가위에 눌린 듯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겠다.

“윤정아.”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며 손을 꼭 붙잡았다. F구역에 내려와 그녀를 데려간 3장로였다.

지금은 호적상 그녀의 아버지기도 했다.

“왜 가문을 배신한 거냐, 이 멍청한 것아…….”

그의 목소리에서 작게나마 동요와 슬픔이 느껴졌다.

그녀보다 「빙백신공」의 성취가 고강한 그였다. 그러니 훨씬 냉혈한일 터.

그런데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고된 훈련이나 임무에서 그녀가 다치거나 쓰러졌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되게 낯설었다.

“…….”

설윤정은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정말 염치없지만 내가 죽어도 부모님은 잘 부탁한다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생의 끝이 다가왔다.

‘그래도 다행이야.’

죽기 전에 단 하나뿐인 친구를 만나서.

그녀의 맥박이 멎었다. 손을 맞잡고 있던 3장로는 천천히 일어섰다.

빙궁주가 그에게 말했다.

“3장로, 설마 소모품한테 정이라도 붙은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재능이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하긴. 비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치곤 제법 재능은 있었지.”

그래 봤자 빙정을 만들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지만.

조만간 배를 가를 생각이었는데 마침 가문을 배신했단 좋은 명분이 생겼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잘 무르익었어.”

빙궁주는 설윤정의 새하얀 심장을 바라봤다.

이토록 정순한 냉기를 간직한 건 난생처음이다. 당장 빙정으로 만든 뒤 흡수하고 싶었다.

‘한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겠군.’

빙궁주는 최측근에게 심장을 건넸다.

저걸 흡수하면 「빙백신공」을 대성하여 무공서에 기록된 빙제(氷帝)의 영역에 닿으리라.

그럼 제왕이라 거들먹대는 남궁세가의 가주한테도 밀리지 않겠지.

아니, 그자를 뛰어넘는다.

북해빙궁이 5대 가문의 대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걸 내 손으로 이뤄 낸다.’

빙궁주는 고양감에 취해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오랜 세월 감정이 무뎌졌는데도 이렇게 흥분하다니.

하긴. 평생의 숙원을 이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옆에 있던 1장로가 질문했다.

“궁주님, 설윤정을 사살한 건 어떻게 공표하면 되겠습니까?”

“임무를 실패한 주제에 뻔뻔히 혼자만 살아 돌아왔으니 사죄의 의미로 처분했다. 그렇게 알려라.”

“알겠습니다.”

그녀의 보고 내용 대부분이 거짓이었음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북해빙궁은 손해 본 게 없었으니까.

애간장이 타는 건 다른 가문들과 태양교의 성녀니까.

“4장로는 저걸 빙강시로 개조해라. 요긴할 거다.”

“예.”

강시 제조의 일인자인 4장로가 킬킬대며 설윤정의 시신을 바라봤다.

*

정도현은 구출한 신호영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다.

“신호영. 기사들 목적이 널 잡아 가는 건데, 뭐 짚이는 거 없어?”

“…….”

이유는 알아야 대비도 하지.

정도현의 질문에 신호영은 잠시 침묵했다. 표정이 어두운 걸 봐선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했다.

“성녀의 지시 같다.”

“성녀?”

성녀는 명성이 자자한 고레벨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오죽하면 정도현이 F구역에 머물 때도 소문을 들어 봤겠는가.

온갖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까지 살린다나 뭐라나.

“성녀가 널 노린다고?”

“그래. 날 잡아 오라고 가문에 의뢰했겠지. 그림자가 죽은 걸 알아챈 거야.”

“원한이라도 샀냐?”

“…원한이라면 원한이겠지.”

신호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사연을 말했다.

“내가 대성당에 갇혔을 때 어떻게 돈을 모았는진 말했었지.”

“아, 여사제들한테 몸을…….”

정도현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설마 하는 눈으로 신호영을 쳐다봤다.

“네가 생각한 그거 맞다. 성녀와도 관계를 가졌다, 1년 넘게.”

“…….”

그 성녀랑 몸을 섞었다니.

정도현이 무식해도 성녀가 교단에 있어 얼마나 고귀한 인물인지는 안다.

그녀는 교황과 맞먹는 존재.

한번 생각해 보라. 교황이 대성당 안에 여인을 숨겨 두고 1년 넘게 탐했었다고.

“…외부에 알려지면 난리 나겠네. 너 간도 크다? 어떻게 성녀를 유혹할 생각을 다 하냐.”

자칫 교황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영광의 일족이라도 죄인으로서 추방된 몸이니 분명 심한 형벌을 가했으리라.

“당시엔 성녀가 아니라 후보생이었어.”

“…후보생?”

“그래. 성녀는 신이 점지해 주는 게 아니다. 가장 우수한 여사제한테 부여되는 칭호지.”

그녀에겐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는 개인 특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성녀에 걸맞은 능력.

게다가 용모마저 아름다웠으니 사람들 앞에 내세우기에도 좋았다.

교황은 기존의 성녀를 경질시키고 그녀를 새로운 성녀로 삼았다.

“그럼 성녀가 널 찾는 이유는…….”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날 못 잊은 거겠지.”

“아, 씨. 재수 없네.”

외모가 워낙 출중해 자신감이 넘쳐서일까. 신호영은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정도현이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자 신호영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너도 주변 여자들한테 인기 많잖아.”

“이 새끼가 진짜. 저번처럼 처맞고 싶냐?”

정도현이 주먹을 들고 위협하자 신호영은 고갤 저었다.

“네 동료 서아린. 그리고 동부 관리국의 권하율 팀장. 둘 다 너한테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뭐?”

“…설마 몰랐던 건 아니겠지?”

신호영은 지금껏 정도현이 레벨 업에 몰두하느라 일부러 여자를 멀리한다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그가 보여 준 얼빠진 표정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설윤정, 그 여기사도 네게 호감이 있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관계로 발전해 갈 수 있겠지.”

그 말에 진지했던 정도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책망하는 것 같았다.

“잘생겼다고 사람 놀려 먹으면 재밌냐? 엉? 재밌어?”

퍽, 퍽!

정도현이 로우킥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발길질에 침투경을 담자 망치에 맞는 기분이었다. 다리뼈가 다 시큰거렸다.

신호영은 다릴 부여잡으며 억울해 죽겠단 말투로 말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너보다 여자 마음은 더 잘 안다. 놀리는 게 아니야.”

“어이구, 그러십니까, 선생님?”

정도현은 안 믿는 눈치였다.

장장 십여 년 전에 헤어졌던 동네 친구가 무슨 호감을 품고 있어. 너무 진부해서 소설에도 안 나오겠다.

정도현은 헛소리 그만하고 성녀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나 말해 보라고 했다.

“당장은 시간을 벌었다. 그녀도 「공간 도약」 능력자가 있는 걸 알았을 테니까.”

설윤정의 보고가 성녀한테도 올라갔겠지.

신호영 옆에 제2의 그림자가 붙어 있다고 생각할 터.

그러니 신호영을 포획하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터.

“그럼 이번에 깔끔하게 물러날 수도 있겠네?”

“아니. 그럴 여자였으면 진즉 포기했겠지.”

“아, 예, 예. 잘나셨어요.”

정도현이 아니꼽단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1년간 관계를 맺었어도 수십 년 동안 쫓다니. 성녀 걔 정신병이라도 있는 거야?”

“단순히 관계만 맺은 건 아니다.”

“……?”

“성녀랑 사귀었었다. 같이 도망치기로 약속했었지.”

그의 폭탄 발언에 정도현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그냥 잔 것도 아니고 연애까지 했다니.

“그럼… 성녀랑 사귀면서 다른 여사제들이랑도 뒹굴었다고?”

“그래.”

“야, 이 쓰레기 새끼야.”

“…탈출 자금을 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건 그녀뿐이었어.”

“아주 지랄을 하세요.”

신호영은 다른 여사제들에게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그저 성욕을 채울 도구로만 바라봤으니까.

간혹 좋아한다며 고백해 오는 여사제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의 외적 요소에 현혹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어. 내가 누군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물어봐 줬지.”

“그건 그냥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잖아?”

“그녀는 돈을 내고 하룻밤을 샀지만,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어. 대화만 나눴지. 그 덕에 나도 지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고.”

신호영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정도현은 남의 연애담은 듣기 싫었지만 꾹 참았다.

혹시라도 성녀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후…….”

신호영은 침대에 누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초를 태우기엔 다소 어린 나이지만, 이것마저 없으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뻥 터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 괴로웠다. 마음에도 없는 여인들과 살을 맞대는 삶은.

‘버텨야 해.’

대성당의 촘촘한 감시망을 물리적으로 뚫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서 나가려면 텔레포트 스크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걸 사려면 거액이 든다.

당연히 그의 은행 계좌엔 돈이 한 푼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여사제들을 유혹했다.

처음에야 힘들었지 몇 번 반복되자 죄책감도 빠르게 옅어졌다.

새벽이 되었다. 그는 방에서 나와 돈을 낸 여사제의 침실로 몰래 찾아갔다.

순찰조의 눈을 피하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이전에 구매한 투명 망토가 있었으니까.

그는 여사제가 머무는 침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순찰조에 들키지 않게 하급 주문 스크롤, 「사일런스」까지 사용한 뒤 일을 시작했다.

“하윽, 하아!”

그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 밑에 깔린 여사제는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교성이 극에 달하며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여사제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태양신공」의 효과였지.’

그는 어릴 적 가문의 어른들에게 무공을 배웠다. 그런데 어떤 장로가 그에게 알려 줬었다.

「태양신공」을 익힌 자는 극양의 기운을 얻기에, 태생적으로 음기를 지닌 여자들과 궁합이 잘 맞아서 밤일로 크게 만족시킬 수 있다나 뭐라나. 덤으로 정력도 좋아지고.

그때는 별 쓸모없는 부가 효과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오빠, 한 번만 더…….”

“그럼 추가 요금.”

“…치사해.”

여사제가 샐쭉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더니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신호영은 익숙하게 받아 챙긴 뒤 다시 허릴 움직였다.

이윽고 또 한 번 절정에 도달한 여사제는 행복한 얼굴로 씻으러 갔다.

일을 끝마친 신호영은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뒤 방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그간 모아 온 돈을 몰래 보관해 두는 비밀 장소가 있었다.

방 안에 돈을 숨겨 뒀다간 언제 들켜서 압수당할지 모르니까.

‘……?’

그는 큼직한 나무와 꽃들이 심어진 대성당의 화원에 들어왔다.

그런데 선객이 와 있었다.

그보다 몇 살 어린, 죽은 여동생 또래의 여자애였다.

여기 온 지 반년이나 됐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새로 들어온 여사제인가?’

레벨이 낮은 걸 봐선 최근에 각성해 교단에 들어왔나 보군.

그나저나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인데 침소를 나와 돌아다니다니.

저러다 걸리면 단순 훈계로는 안 끝날 거다. 분명 징계를 받겠지.

‘간도 크군.’

잠이 안 와서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걸까. 신호영은 그녀가 침소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였다. 그의 등 뒤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어, 언니…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니까…….”

“……!”

신호영은 고갤 돌려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곤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대경실색했다.

여사제와 똑같이 생긴 여자애가 있었다.

바스락.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나뭇잎을 밟았다.

그러자 여사제들이 움찔하며 그가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누구야?”

파아앗-!

화원에 먼저 와 있었던 여사제가 곧장 빛의 화살을 쏘았다.

피하기엔 너무 가깝다. 신호영은 급히 장법으로 빛의 화살을 쳐 냈다.

공격을 행한 탓에 투명 망토가 일시적으로 힘을 잃었다.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여사제들이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당신은?”

신호영은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유혹하지 못한 쌍둥이 여사제들에게 들켜 버렸다.

그때였다. 화원 밖에서 몇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찰조다.’

화원 근처를 지나다 빛이 반짝이는 걸 봤나 보다. 이거 야단났다.

그는 투명 망토를 급히 뒤집어썼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순찰조가 들이닥쳤다.

그는 급히 숨을 참고 멈춰 섰다. 숨소릴 냈다간 바로 들킬 테니까.

팟.

순찰조가 마력 랜턴을 쌍둥이 여사제들에게 비추더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흰 뭐야?”

“이 시간에 멋대로 돌아다니다니.”

“…잠깐만. 저 둘, 황금 리본 달고 있는데?”

순찰대원이 동료들에게 그리 속삭이며 쌍둥이 여사제를 가리켰다.

정말이었다. 그녀들의 가슴팍에는 황금색 리본이 매여 있었다.

‘황금색은 뭐지?’

견습은 흰색, 정식 사제는 초록색, 정예는 빨간색. 이렇게 세 종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황금색은 처음 봤다.

순찰조들은 그녀에게 고갤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후보님들이신 줄 몰랐습니다. 저희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잠시 갑갑해서 바람을 좀 쐬고 있었어요.”

“저, 송구하오나 방금 여기서 신성 주문이 번쩍였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어떤 순찰대원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이고 있던 신호영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사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치?”

“어, 어? 으응!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저흰 돌아가겠습니다.”

언니가 그렇게 말하자 동생 쪽도 말을 맞췄다. 그러자 순찰조는 머릴 긁적이며 되돌아갔다.

신호영은 자신을 감싸 준 게 이해가 안 돼서 그녀들을 쳐다봤다.

1